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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_ 우리와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가 되시는 것이었다. 곧, 인성을 쓰시되,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취하시는 것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사탄의 유혹과 죄를 승리하시고 완전한 생애를 사시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의 공의로움과 사탄의 주장이 허위였음을 증명하시는 것이었다. 같은 조건과 방법과 수단하에서, 같은 경험과 상황을 겪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것은 모본이 될 수 없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는 어떤 것의 표본이 탄생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똑같은 조건에서 이 땅에 사시면서 흠 없는 완전한 생애를 사시므로 우리에게 모본이 되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한 번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쳐보신 적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모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면만을 생각해 보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죄를 속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자청하셨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간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버리고 취하신 것이 있다. 그것이 곧 성육신의 신비요,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라며 그 측량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금고리가 되는 예수님의 인성 문제를 깊이 연구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어떤 육신을 취하셨는가? 무슨 수단을 빌어서 인성의 참여자가 되셨는가?
1) 여자에게서 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간이 되셨다. 모든 인간의 자녀들이 된 것과 똑같은 수단을 빌어서 되신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는 말씀 그대로 되신 것이다(히 2:14 참조). “한 모양으로”라는 말은 “같은 방법으로”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출생하여 혈육에 속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혈육에 속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 9:6)라고 성경은 말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은 인간의 속성이 죄를 지은 바로 그곳까지, 즉 하와가 죄를 지은 그 시작점 밑바닥까지 이르러 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였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 자는 “여자의 후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들어오도록 한 여자에게서 태어났고,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 죄를 지은 남자에게서 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죄 사이에, 그리스도와 세상의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속성 사이에 단 한 치의 틈도 없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은 구원하시려는 자들이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고, 저주가 되신 것은 구원하려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죄가 되신 것은 인간이 “죄 아래 팔린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신이 되시고 “혈육에 함께” 속하신 것은 구원하려는 자들이 혈육이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얼마나 놀라운 겸양이며 사랑인가!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라는 말씀은 이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여기서 잠깐 참고하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다. 육신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지만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용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믿는 데는 진리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과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에게 오실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낮추시고 육신이 되신 영광스러운 진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학설이 인간으로부터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로마 천주교회가 창안한 “무염시태설”(immaculate conception)이다. 이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태어날 때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었다는 학설로서, 동정녀 마리아는 처음 잉태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은총을 받아 원죄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에 의하면 자연히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 마리아’, 즉 우리와 다른 몸을 가진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타고나신 것으로 간주된다. 언뜻 보면 이 교리가 예수님을 더 거룩한 분으로 높이는 듯한 좋은 교리로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과 혈육으로 한 혈통에 속하셔서 우리의 모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변질시키고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계속되는 기사를 공부하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하게 와 닿을 것이다.
2)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시고
히브리 1장과 2장을 심도 있게 연구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모양(본체, 형태)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히브리서 2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일반 성경에는 이 구절의 뜻이 번역상 잘못되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진리가 혼돈되어 있으므로 킹 제임스 역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 개역 한글 성경: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실 때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과 같은 본성, 즉 아브라함과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 아브라함의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을 이 구절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의 본성은 어떤 것이었는가? 아브라함의 본성은 아담의 범죄 후의 본성으로서 아담의 타락한 이후 모든 유전의 법칙을 받는 우리와 같은 본성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시므로 범사에 형제가 되신 것이다. 이것은 대표적인 성경 절 빌립보 2장 5-8절에도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문장, “likeness of men”에서 “likeness”의 원어는 “Homoiomati”로서, “본질과 똑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주제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또 다른 성경 절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서 8장 3절이다. 이 구절 외의 어떤 성경 절도 성육신의 이유와 어떤 종류의 육신으로 성육신이 이루어졌느냐에 관해 더 훌륭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에서 사용된 “likeness”도 “안과 겉이 본질상 똑같은”이라는 원어의 의미가 있다. 또한, 그다음에 나오는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 속에 있는 죄를 멸하셨다”는 뜻인데, “condemned sin in the flesh”에서 “condemn”는 “폐기처분하다”, “멸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 가운데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심으로 실제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멸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빌립보 2장 7절과 마찬가지로 이 성경 절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인간의 모양만 취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죄 있는 육체(Sarkos hamartias)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음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이 성경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우리 인간이다. 이렇게 거룩하신 아들 하나님인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한 혈통이 되시고 한형제가 되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만일 하늘의 휘황찬란한 영광과 능력을 갖추고 그대로 오셨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 놀라운 영광을 가리시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인성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던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와 같이 유전법칙의 영향으로 생기는 결과를 받으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같은 위치를 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신 비천한 분으로 봉사하시며 치욕스러운 죽음을 죽으신 그 희생과 겸손과 사랑을 보라! 그 앞에 우리의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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