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여담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藏經)또는 장경(藏經) 등으로도 불리는데 불교의 가르침인 경(經), 율(律), 논(論)을 한데 모은 큰 경전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즉 부처님의 설법인 경(經)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인 계율(戒律), 그리고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한 논술인 논(論)을 모두 모은 것이다.
경·율·론을 일러서 삼장(三藏)이라 하는데, 이때의 장(藏)은 산스크리트어의 pitaka를 번역한 것으로 광주리라는 뜻이다. 삼장(三藏)은 tripitaka즉 세 개의 광주리를 뜻한다. 경은 sutra의 역어로서 경사(經絲: 날줄)의 뜻이다.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전각인 해인사 수다라장(修多羅藏)의 수다라는 이 sutra를 음역한 것이다.
그러니 대장경은 세 개의 큰 광주리에 담아 놓은, 줄기가 되는 가르침이란 의미다.그러면 팔만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 목판은 8만 1258매로 국보 제32호다.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경판의 숫자가 8만 1352판이라고 밝혔으나 이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37년에 제작, 추가된 경판 서른여섯 개가 포함된 수치이다.
일반적으로 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란 이름은 8만여 매의 판목 수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거기에서 유래한 이름이 아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많은 것을 나타낼 때 8만 4000이란 수를 썼다. 그래서 8만 4000 번뇌, 8만 4000 법문이란 표현을 썼으며, 팔만 사천 법문이 실려 있다고 하여 팔만사천대장경이라 불렀다. 이 팔만사천대장경을 줄여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은 목판 수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또 우리가 통상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해인사 경판은 정확한 이름이 아니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에 이어 두 번째로 새긴 것이므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혹은 고려대장경, 해인사대장경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장경은, 기원후 1세기부터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었다. 이후에 고려초조대장경(高麗初雕大藏經)·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북송(北宋)의 동선사판(東禪寺版)대장경 등 20여 종의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고려대장경은, 현대에 간행되어 내용이 알차다는 일본의 활자본 대장경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모본이 되었다.
이 고려대장경은 뛰어난 기술력과 예술성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인류가 남긴 위대한 보물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대장경은 제작 이후 사라질 뻔한 위기를 세 번이나 겪었다.
첫 번째는 이 대장경이 일본으로 넘어갈 뻔한 일이다. 일본의 다른 다이묘[大名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들은 본인들이 불교 신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일본 사회의 주요 권력의 축이기도 했던 불교와의 관계를 위해 팔만대장경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의 승려들 또한 고려대장경이 불경으로서의 정밀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세기에 처음 목판본이 등장했던 북송이나 거란, 고려와 달리 일본에서는 700년 동안 대장경의 목판을 제작하지 못했다. 고려대장경을 탐내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 인쇄본을 요청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주로 왜구 진압 및 고려(조선) 측 납치자 송환의 대가로 대장경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불교가 여전히 중요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연유로 거절하였다. 이렇듯 공식적으로 수차례 거절해도 일본은 끊임없이 대장경을 요청했고 심지어 쇼군[將軍 일본의 역대 무신정권인 막부(幕府)의 우두머리]이 나서서 팔만대장경을 받아 오라고 명하기도 했다. 카가(加賀)라는 승려가 유출한 보고서에는 “지금 조선에 와서 힘써 대장경판을 청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으니, 병선(兵船) 수천 척을 보내어 약탈하여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하여 저들의 쇼군에게 조선 침략을 제의하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팔만대장경을 합천에 둘 게 아니라 서울로 옮기는 게 어떨지 검토도 했다. 지방에 있으니까 별로 안 중요한 유물처럼 보여서 일본이 계속 요구하는 것이라고 판단, 서울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비용 등 여러 문제가 있어서 결국 취소하였다. 만약 그때 그렇게 옮겼다면 아마도 대장경은 불타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장경의 이전 장소로 거론된 양주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자주 거처했고 무학대사가 머물던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유림들이 방화하는 등 훼손하여 이미 16세기에 소실된 이래 흔적만 남았다. 개경사 역시 1408년(태종 8년) 지금의 구리시 검암산에 태조 이성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세워져 유생들의 출입을 왕명으로 막았던 절이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았기 때문이다.
세종 5년(1423년)에는 일본의 사신이 세종에게 팔만대장경 경판을 요청했는데 이때 세종은 “저네들이 자꾸 와서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하는데 그냥 줘 버릴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나서서 대장경판은 아깝지 않지만 계속 주다 보면 달라는 게 많아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반대했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 나라에서 청구하니,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나, 왜가 청구하는 것을 계속 주다 보면,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화근이 될 수 있다 하여 왜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그토록 현명한 세종도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그처럼 낮았나 싶다. 신하들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고려대장경은 지금 일본의 소유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장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조선 중기 초유의 국난도 버텨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7일에 성주를 점령했는데, 여기는 해인사 코앞이다. 침략군 장수 중의 한 명인 가토 기요마사가 불국사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때 의령에서 창의한 곽재우를 비롯하여 거창에서는 김면이,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각각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섰으며, 해인사에서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승려 소암(昭巖)이 승병들을 모아 해인사로 접근하는 왜구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결국 왜군은 8월부터 9월, 12월의 의병들의 공격에 해인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듬해 1월 선산 방면으로 철수해 해인사는 무사했다. 이때 소암이 승병들을 이끌고 왜군이 절로 들어오는 앞의 큰 산고개를 막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는 고개가 현재도 왜구치(倭寇峙)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대장경은 해인사 화재 때도 번번이 살아남았다. 해인사는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곱 번에 걸쳐 불이 나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다행히도 대장경은 무사했다. 6.25 전쟁 때도 탈없이 살아남았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대대적인 반격 작전으로 발생한 북한군 빨치산들은 산속에 숨어 유격전을 벌였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경을 동원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시작되자, 당시 군경은 첩첩산중에서 빨치산들이 은거지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불교 사찰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는데 합천 해인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복무하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다는 첩보를 듣고 상부에서 폭격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령이던 김영환 장군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이던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에, 해인사를 폭격하는 대신 주변 상공을 선회하며 해인사 주변에 기총 소사를 하는 선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끝냈다. 그 결과 부담감을 느낀 빨치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인사에서 철수했고 덕분에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고려대장경은 여러 번 소실될 뻔한 험난한 과정을 겪었으나 다치지 않고 그대로 우리 옆에 살아남았다. 초조대장경이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었고, 고려대장경은 몽고의 침략을 끝내 막아낸 힘을 발휘하였다. 부처의 힘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일까. 한 글자를 새기고는 세 번씩 절했다는 조상들의 고귀한 정성이 그 속에 배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고려대장경은 오늘 이 나라를 굽어보시고 평화롭고 하나 된 민주 대한민국을 하루빨리 이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