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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묵상글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주님에게는 추종자 누구에게는 선구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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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에게는 추종자 누구에게는 선구자
오늘 축일 감사송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칭송합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니까 6월 24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이 이 감사송 내용 가운데에서
선구자 요한이 태어날 때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라면
오늘 축일은 이 감사송의 내용 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로서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세례자의 죽음은
주님을 증언하다 죽은 것 같이 보이지 않고,
헤로데의 불륜을 고발하다가 헤로디아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는 주님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저 인간적으로 한 인간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듯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러니까 인간적인 사랑으로 충고도 하고
인간적인 정의감으로 질책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바른 소리를 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인간적으로 입바른 소리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늘 축일의 의미이고 감사송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바른 소리인데
그것이 사랑 때문에 하는 것과 정의감 때문에 하는 것의 차이가 있듯이
하느님 생각하며 하는 것과 그저 인간적으로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를 위해서는, 나에 대한 불의가 아닌 한, 반대할 이유가 없고,
불이익과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반대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며 실제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내게 저촉되지 않는 한 침묵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죽음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불의를 고발하다가 박해를 받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구자의 평행 이론과 같습니다.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라면 주님의 운명과 다를 수 없고,
주님보다 앞서 박해와 수난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한이 우리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지내는 것도 불편하며
우리는 요한처럼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니,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강변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처럼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강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주님의 선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라고 발뺌은 할지라도
주님의 추종자인 것에서 발뺌할 수는 없고,
주님의 선구자는 아닐지라도 다른 누구의 선구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이 축일을 지내며 차라리 사랑이 없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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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르 6,25)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인가 봅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폭군이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가로막는다고 가로막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헤로데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듣습니다.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 임금의 무모한 맹세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결국,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1945년,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 당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 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비록 혀가 잘려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제 혀가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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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현명한 바보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봐도 손해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셈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해야 할 말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빛이 되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지만, 지혜도 없었고 헛똑똑이입니다.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멍청한 바보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함부로 맹세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를 안다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창세26,24).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사악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그곳에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결국,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이미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현명한 바보,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고 잘 난 것처럼 보인 사람들은 헛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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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한산’이 미국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저는 전편인 ‘명량’은 한국에서 보았습니다. 명량과 같이 한산은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수군과 전투에서 승리한 영화입니다. 명량은 적은 수의 배로 많은 수의 일본 수군을 이긴다는 내용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 바다의 지형을 잘 이용하였습니다. 회오리 물살이 이는 곳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였고 일본 수군은 회오리 물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조선의 수군에게 공격당하였습니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였고, 우리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한산은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는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학익진’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일본 수군의 배를 포위해서 공격하였고, 압도적인 승리를 하였습니다. 조선의 수군은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임진왜란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적인 전투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의 깃발과 사탄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는 ‘재물, 권력, 성공’입니다. 사탄의 무기는 그 힘이 강력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싸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공격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음에 하지, 남들도 그러는데, 나는 안 돼’와 같은 생각입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남들도 그러는 데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합리와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명량과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북선’입니다. 일본의 수군은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거북선은 갑판에 철갑을 둘렀습니다. 그래서 백병전에 강한 일본 순군은 거북선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거북선은 두꺼운 용머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배와 충돌하면 일본의 배들은 충격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거북선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탄의 세력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떠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따로 한 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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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 나의 행복감을 상승시킬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방법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라면 어떨까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떤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를 행동 과학 교수인 폴 둘런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뺄셈’이었습니다. 즉, 내가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의 아쉬움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아직 갖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게 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미사를 봉헌할 수 있어서 주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위로와 힘을 공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떨까요?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지금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차원만이 아닌, 일상 안에서도 ‘마음의 뺄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 가족, 친구, 직장과 일, 삶의 단편 모두가 나의 행복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덧셈’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만을 떠올렸기 때문에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떵떵거릴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기서 조금만 더 가지면 가졌지, 잃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었지만, 결국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주게 되게 되지요. ‘마음의 뺄셈’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잔칫날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서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한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헛된 맹세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이때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하지요.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 앞에서 한 말 때문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줍니다. 헛된 맹세나 하는 임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을테고, 계속 싫은 말을 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계속 더하고만 싶었기에 후회할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것은 빼고, 하늘 나라의 것은 더하는 데에서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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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신이 받은 사랑은 당신이 베푼 사랑과 같아요(폴 메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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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좌우명座右銘, 묘비명墓碑銘-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매일이 성인 축일이다싶어 참 고맙고 좋습니다. 가톨릭만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삶의 등불’과도 같은 성인을 통해 파스카 예수님을 만납니다. 엊그제는 성녀 모니카, 어제 주일은 성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자 천상 탄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인 천상탄일입니다. 영성체후 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 복된 세례자 요한의 천상탄일을 기리며, 저희가 모신 구원의 성체를 믿고 공경하오니, 그 구원의 열매를 미리 맛보게 하소서.”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니 지난 8월17일, 올해 9주기 기일을 지낸 정요한 수사가 생각이 납니다. 요셉 수도원에 정주중 떠난 첫 번째가 정요한 수사요, 두 번째가 올해 2주기 기일을 지낸 이바오로 수사입니다. 마치 공동체 수도형제들이 죽음을 향해 일열로 줄서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정요한 수사의 죽음을 겪었을 때, 저절로 터져나온 세 마디 탄식이 생각납니다.
“아, 아깝다, 아프다, 불쌍하다!”
마침 정요한 수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아마 선종 전해인 2012년쯤, 수도원 정문에 쇠기둥 십자가를 세워 놓았습니다. 제 졸저 2011년에 출간된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역시 정 요한 수사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쓴 글의 마지막 부분도 생각납니다.
“정요한 수사는 하느님께 참 많은 선물을 받았다. 이런 선물은 질투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대상이다. 하느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공동자산같은 선물이다. 많은 선물을 받은 수사들은 예외없이 자기 자랑을 할 줄 모르는 겸손한 사람들이며, 동료 수사들 역시 이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질투보다는 사랑을 보내며 자랑스러워한다.
어느 선배는 가끔 혼자말을 하곤 한다. ‘정 요한 수사같은 사람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나친 선물은 주지 않으신다. 우리 요셉 수도원은 이미 너무나 부요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으니까.”
이후 2년만에 정요한 수사가 선종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참 알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경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누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 지요?
마치 죽음의 잔치를 연상케 하는 마르코 복음의 장면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는 악인들의 집합소 같습니다. 헤로데는 의롭고 거룩한 성 요한의 진가를 알았지만 우유부단하고 경솔했기에 헤로디아의 사주에 의한 그의 딸 살로메의 유혹에 빠져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성 요한을 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이 또한 우연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역시 성 요한의 순교의 죽음에서 크게 배웁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의롭고 참되고 올곧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복음의 배치도 은혜롭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케 하는 성 요한의 죽음이지만, 예수님은 심기일전, 성 요한의 뒤를 이어 성 요한의 몫까지 사시려는 듯 주어진 사명에 몰두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죽음의 잔치’를 상징한다면 뒤이어 전개되는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생명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이 성 요한의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얼마나 파스카 예수님과 깊은 결속관계에 있는 성 요한인지, 새삼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게합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새삼 성 요한의 순교를 통해, ‘순교는 주님의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성 요한에게 붙는 칭호도 많습니다. 금욕가, 순교자, 은수자들의 아버지, 마지막 예언자, 그리스도의 선구자등입니다. 무엇보다 성요한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영성체송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고백처럼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성요한이 한결같이 항구히 살다가 거룩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기도가 답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성 요한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와 주님과의 깊은 친교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모든 이들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성요한은 물론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이처럼 기도를 통해 주님과 깊은 친교 관계를 누렸습니다. 살아 있는 성인이라 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다음 진솔한 고백을 통해 기도의 사람임이 환히 드러납니다.
“저는 아침마다 성무일도를 합니다. 저는 시편기도를 좋아합니다. 그러고 나서 미사를 거행합니다. 또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저녁 성체조배 시간이 참 좋습니다. 이때 분심도 들고 딴 생각도 하고 사실 기도하면서 졸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녁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동안 성체 앞에 머물며 성체조배를 합니다. 저는 또한 치과에서 기다릴 때나 하루의 어느 때든 속으로 기도합니다. 저에게 기도는 언제나 기억과 추억이 가득한 ‘기억의 기도’입니다. 나는 주님을 잊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한시도, 단 한순간도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전 영정사진에 이어 게시판에 붙어있는 “본인의 선종 상본에 남기고 싶은 성구를 기재해 달라는 알림”이 참 이채로웠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것인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대로 좌우명이자 묘비명으로 여겨 영정사진과 함께 늘 지니고 살면 저절로 파스카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이보다 좋은 죽음 준비도 없겠습니다. 기재되어 있는 몇분의 성구도 참 좋았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그대로 선종 상본에 성구뿐 아니라 좌우명으로, 묘비명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기막힌 성구들입니다. 아마 이용할 수 있는 시편 화답송 후렴들도 무수할 것입니다. 문득 “주님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시편 성구도 생각납니다.
평생준비가 죽음준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파스카의 삶에, 참 좋은 선종을 위해 날마다의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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