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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8 라헬이
본문은 자식을 두지 못한 라헬이 여종 빌하를 통하여 자식을 얻어서 그의 양자로 취한 아들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그 형을 투기하여” 자기 남편을 원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29:31) 에 순종치 않는 반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라헬에게 분노하며 진리의 말씀 경고를 발하기를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곧 자식은 사람의 마음대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시127:3).
라헬은 자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 그것도 못된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죄를 회개치 않으면 이런 방식으로 범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극도로 비루하게 자기 언니와 경쟁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처한 환경이 잘못 되었으면 그 사람 마음도 잘못되기 쉽습니다.
애당초 한 자매가 한 남편을 함께 소유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레18:18). 그런 잘못된 틈바구니에서 이런 어둡고 어리석은 경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내 라헬에게서 충동을 받아 또 다시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미 아내를 둘이나 취한 것도 잘못인데, 또 “빌하를 .... 첩으로” 삼는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그가 바른 신앙으로 행한 것도 있습니다(2절). 반면에 이렇게 나약하여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옛 시대에도 그러했다면 더욱 신약 시대에는 그런 일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마19:4-7).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마침내 자기 여종 빌하를 통해서 라헬도 자식을 얻습니다. 본문에 보면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에서 루터는 이 말씀을 잘못 보고 라헬에게서 나온 찬송으로 보고 자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함은 그의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라헬이 한 이 말을 어리석은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치 않은 반역성과 그녀의 인본주의적 사고와 그의 말, 그리고 여러 방식들의 행위와 연계해서 그렇게 해석하였을 것입니다.
1. 본문 1절은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야곱이 가정적인 분쟁으로 괴로움을 당한다고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이 두 아내 특히 자매와 결혼함으로써 가볍지 않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를 징벌하십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징벌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징벌 아래는 그분의 성품이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비로이 용서하신 것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보통 예사로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것을 보면 그분께서는 어느 정도 자기 손길을 늦추시고 제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즉시 회개하지 않고 이전에 했던 잘못에다 또 새로운 죄를 추가시켰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라헬에 대해 언급해야 되겠습니다. 라헬은 자기 언니가 멸시와 슬픔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레아에게 복을 내리심으로서 라헬이 가진 죄스런 기쁨을 억제하십니다 이것은 양자의 형편을 평준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라헬은 자기 언니가 했던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 표시로 행한 고백을 듣고 그녀의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 가운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당하게 멸시 당한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으며 은총으로 뒷받침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질투심에 불타올라서 족장의 아내로서 위엄과 체면을 다 팽개쳐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심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라헬은 우월감을 추구하기 위해 자기 언니에게조차 인정사정을 두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언니에게 다산의 선물을 주심으로써 존귀하게 해주셨다는 이유로 여호와께 대해서도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그녀의 경쟁심은 자기가 받은 피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용납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하였습니다. 그녀는 동생인데도 자기 동류를 허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그의 언니 되는 레아는 자기 분수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라헬은 그런 언니에 대해 질투심을 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우리는 만일 라헬이 언니로부터 어떤 종류의 도발이라도 받았다면 어떻게 행하려 했을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제 모세는 라헬의 이런 악을 나타냄으로써 그런 악을 모든사람에게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가 그 악을 발본색원하며 방심하지 않고 그 죄에서 자신을 정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시기심을 치료하기 위해 교만과 자기사랑을 늘 제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유일한 분쟁 치료책으로 규정하여 “아무 일에든지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2:3)고 말씀합니다.
2. 본문 2절은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유달리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노엽게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족한 행위는 그를 화를 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라헬이 짜증을 잘 내고 잘난 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헬은 하나님의 은사를 경건하게 거룩하게 그리고 감사히 누리고 있는 자기 언니에게 대해 의기양양해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스스로 높은 체 하였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태의 열매가 그분의 상급이라(시127:3)고 말씀합니다. 야곱은 이런 이유에서 노를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라헬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소치로 돌리지 아니하고 자식을 우연의 산물로 상상하여 인간의 보호와 지배를 하나님께로부터 박탈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미 자기아내의 불임을 슬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라헬의 미련한 짓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촉발하여 더욱 혹심한 형벌을 초래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그는 이로써 자기 아내를 징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귀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까지 아이를 낳지 못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녀의 태를 닫으신 분이 여호와시라는 것을 긍정하고 라헬에게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야곱은 라헬이 자신과 함께 자기 생각을, 또 자기 말과 행실을 보다 많이 늦추고 또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자의 경건 입니다.
3. 본문 3-4절은
“③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④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입니다.
여기에는 주로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바 허영에 찬 기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헬은 여호와께로 또 그분의 성품 안으로 도피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당한 자기 계략을 시행함으로 승리를 획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야곱에게 세 번째 결혼을 급히 주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신 규례가 일단 소홀히 취급되면 범죄가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징벌로도 올바른 마음 상태로 즉시 환원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실로 이 사례에서 자기 아내를 부추기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혼인에 관한 율법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야곱은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또는 그녀가 청해 오는 간곡한 요구에 못 이겨 하나님 명령으로부터 떠나는 것도 서슴치 않습니다. 여기서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둔다” 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양육한다는 말입니다. 빌하는 몸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여주인을 위해 아이를 낳은 셈입니다. 라헬은 여주인이기에 그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주장하면서 어머니의 명예를 획득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설명 형식으로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라는 말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사용하는 단어는(한 아들)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한 집안 지주와 버팀 돌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 가면서 어머니가 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죄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4. 본문 5-7절은
“⑤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⑥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⑦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음에 의한 자손을 명예롭게 하시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와 같이 인자하심으로 인간의 악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참으로 무가치한 자를 그분의 은총으로 추적하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항상 자기백성의 범과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시지는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징계의 때가 성숙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이 그릇된 결합에 의해 태어난 자도 합법적 자녀로 간주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큰 홍수 후에 진흙탕 물길이 지나간 그곳에서도 각종 들꽃들과 과목이 자라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빌하를 처로 주었다고 기술하였지만(한글 개역 : 첩) 그녀는 창기로 불리워야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법규에서는 시초부터 효력이 없던 것은 시간이 경과해도 유효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명령과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신성한 질서를 위반해 가면서 남편과 아내가 맺은 죄스러운 계약은 무효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과 빌하 사이의 결합 자체는 간음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합이 결혼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게 된 것은 특별하신 혜택입니다
드디어 라헬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라헬에게서 나온 이 고백에는 야심이 뒤섞여 있어서 정직이나 성실성이라고는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뽐내는 듯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그녀 자신의 신원 운동을 떠맡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라헬 자신이 자기 언니에게 너무도 억울한 피해를 입어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아 마땅하다는 듯한 질투입니다. 또 그녀는 자기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려고 한 적은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라헬이 하나님을 칭송한다는 미명 아래 오히려 하나님께 잘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보조자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위선자를 흉내내고 있습니다. 역경 중에서는 두 눈을 감고 맹목적으로 하나님께 돌진하며 충동하다가 순풍에 돛을 단 듯한 행운이 돌아오면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 대해 미소를 짓기라도 하는 듯이 헛된 자만에 빠지는 것이 위선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헬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칭송한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모름지기 라헬의 이런 행위를 교훈으로 삼아 하나님의 신성하신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삼가야 할 것입니다.
5. 본문 8절은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 부분을 ‘내가 하나님의 연합하심으로 연합됐도다’ 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상실했던 것을 회복하거나 아니면 자기 언니와 동등한 명예를 누리게 된다 하여 기뻐하는 듯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내가 하나님의 배가로 두 배가 되었다’ 라고 옮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기 두 번역문에 나오는 명사나 동사의 어근은(파탈)로서 이 단어는 원래 비꼬인 실을 뜻합니다. 두 가지 의미 중에 앞에 나온 번역은 이런 뜻입니다. 즉 라헬은 자기 언니와 동등한 상태에 도달했으므로 레아가 그보다 우월함을 주장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온 번역이 뜻하는 것은 보다 자신감에 찬 자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라헬은 자신을 정복자와 배나 우세한 자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보다 간단한 의미를 끌어내어 라헬이 ‘하나님과 경쟁하거나 훌륭한 경쟁을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모든 훌륭한 것을 가리킬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나옵니다. 이는 어떤 것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더 많이 빛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라헬이 자기 언니에게 이겼다고 위기양양하며 기뻐할 때 그녀의 그 자랑은 정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용서를 탄원하고 애걸해야 마땅할 때 자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라헬에게서는 인간 자만심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총을 부여하시면 그 중 대부분은 너무도 의기양양하게 되어서 자기 이웃에게 거만하게 행하며 분노를 폭발합니다. 더욱이 라헬은 자식을 많이 낳는 점에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자기 언니보다 열등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미련하게 자신이 더 많은 출산을 한 것처럼 자기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으로 으스대는 자들에게는 남의 재능을 깎아 내리는 악한 버릇도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신 은사를 자기들이 받은 보다 작은 은사와 비교하여 낮게 평가합니다. 아마 라헬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의무를 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많은 후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경건한 사람들이 으레 하는 것과는 달리 이미 받은 은총을 근거로 소망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육신의 터무니 없는 자신감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꼭 얻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이제까지 경건과 정숙의 표시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현실적으로 불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그녀의 교만심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실 형벌을 늦추어 주신다고 해서 들뜨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또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방자하게 되어 멸망당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더 조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