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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혼인한 교회(시45:1~17) 찬송; 382장.
본 시편은 이스라엘의 왕이 결혼할 때 부르던 축혼시입니다.
그런데 이 축혼시는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결혼 곧 신랑 되신 메시야와 그의 신부된 순결한 교회와의 온전한 연합을 예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메시야 예언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1~8절까지는 결혼식에 임하는 왕의 위엄과 존귀에 대하여,
9~15절까지는 그에 상응하는 왕비 된 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장엄하고 화려한 결혼식은 이 역사가 완성되는 날, 곧 메시야가 재림하시는 날 그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계19:1~10).
신랑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1~8).
시인은 신랑이신 왕(메시야)의 인격과 능력과 통치에 대하여 찬미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라고 말하므로 신랑의 인격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3~5절에 신랑의 능력에 대해서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 신랑은 왕으로서 무능한 왕이 아니라, 불의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왕이십니다. 빛나는 칼과 번쩍이는 방패로 무장한 위풍당당한 모습은 그 어떤 대적도 물리칠 수 있는 장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왕은 온유와 공의를 위해 원수를 찌르니, 거룩한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위풍당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왕이 불의를 막지 못하고, 온유와 공의를 대적들에게 짓밟히게 한다면, 왕은 이상적인 임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능력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신랑의 통치를 찬미하고 있습니다(6~7절).
신랑은 왕이요 메시야이시기에 백성을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6절 말씀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메시야의 통치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신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9~17).
시인은 신부, 곧 그리스도의 신부되는 교회에 대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에 대한 권고와 결혼 의식에 대해 찬미합니다. 9절 말씀에 “오빌의 금”, 곧 가장 귀하고, 가장 순수하다는 오빌의 금으로 신부가 단장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부가 교회를 상징한다고 할 때, 신부되는 교회가 정금으로 단장하듯이 교회를 이루는 성도가 주를 흠모하는 믿음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신부된 자에게 권고하기를, 자기 고향과 자기 집을 잊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왕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만일 신부된 자가 고향과 자기 집을 잊지 못하고 신랑 되신 왕을 섬기는데 소홀하다면 왕의 사랑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성도들은 자기가 속하였던 집과 고향과 옛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복음 체질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적인 사상, 고집과 아집, 모든 옛 성품들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갈2: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때 이를 보고 이방이 예물을 가져오고, 부한 자가 은혜를 구하는 것처럼 불신자가 성도의 본을 따라 신령한 은혜를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나아가 불신자에게 복음의 빛을 발하여 은혜의 빛 안으로 불신자를 초대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이제 옛것을 버리고, 주님의 품안에 안긴 자들이요, 주 안에서만 행복을 찾는 곱게 단정한 주의 신부들입니다.
피난처 되신 하나님(시46:1~11) 찬송; 384장.
본 시편은 남쪽 유다 나라의 선한 왕 히스기야(B.C 728-687)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고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에 하나님의 크신 도움으로 그 위경을 극복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입니다(왕하19장).
본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1~3절까지는 하나님을 피난처와 힘으로 삼는 자의 흔들림 없는 담대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고, 8~11절까지는 이 땅의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고 친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특별히 종교 개혁자 루터가 종교 개혁의 박차를 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작시했던 “내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의 기초시가 되기도 합니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1~3).
히스기야 왕이 당한 위협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험이었습니다. 강원도 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유다 나라에 18만 5천명의 앗수르제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항복할 것을 요구하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위협의 정도가 세계의 기초를 뒤흔드는 듯 바닷물이 뒤집히는 듯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처음에는 당황하여,
첫째, 본능적인 방법으로 대처합니다(왕하18:14).
히스기야 임금이 너무 위급한 일을 당하니까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가지고는 앗수르 장군에게 빕니다. 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침공한 앗수르가 응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히스기야 왕은 무슨 짓이든지 할 테니까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았다가도 믿음이 떨어지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너무 급하니까 그렇게 본능적인 방법으로 빌었습니다만 앗수르 왕은 계속해서 조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둘째, 뇌물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왕하18:15~16).
물질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잘 쓰는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신앙이 떨어지니까 불신자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위급해지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뇌물로서 현재의 위급한 상황을 넘겨보려고 했지만 앗수르 왕은 뇌물만 챙겨먹고는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셋째, 불신자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왕하18:20~21).
애굽에 사람을 급하게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을 받은 히스기야가 급한 나머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기도 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쓰기도 하고, 지혜를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넷째,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왕하19:14).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사람의 방법대로 하다하다 못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제야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얼마나 많이 이러한 시행착오를 합니까?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가보니 18만 5천명이 전부 주검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주신 것입니다.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4~7).
유다가 앗수르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을 때, 앗수르는 유다가 오래 못가서 항복하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식량도 물도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 안에는 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실로암입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평화를 베푸시는 하나님(8~11).
시인은 위기 가운데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요 구원자가 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47:1~9) 찬송 ; 35장.
본 시편은 매년 이스라엘에서 신년절(나팔절)에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찬양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온 땅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밝고 힘찬 찬양이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구속사역을 마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에 대한 찬양이 예표되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에게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1~4).
하나님께서는 억만 가지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늘의 기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로 택하신 것이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의 영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복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존귀한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타락하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불순종과 패역을 일삼았습니다. 사탄의 종으로서 사탄을 섬기는데 생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 가운데서 본질상 저주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아래 안정과 평안과 지극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또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허락하셨습니다. 앞으로 영적인 가나안인 천국으로 인도하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5~9).
하나님께서는 특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우리는 모도가 다 죽은 자 가운데 있었습니다.
불신자가 죽은 자 가운데 있다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① 죄 때문입니다.
롬3:23절 말씀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죄는 무슨 죄일까요?
② 하나님을 떠난 죄입니다(창3:1-6).
윤리적인 죄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죄,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입니다. 범죄한 이간은 모두가 하나님 자체를 떠났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다 지식도 훨씬 많고, 어쩌면은 선한 사업도 우리보다 더 많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그들을 불쌍하다고 합니까? 지식 이전에 선한 일 이전에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③ 사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요8:44).
그러면, 이 같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왜 그리스도라야만 할까요?
① 예수님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②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선자자이기 때문입니다.
③ 예수님만이 사단의 세력을 꺾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1) 과거문제 해결 - 죄와 저주에서 해방됩니다.
엡2:1절 말씀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반드시 받아야 할 보응이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깨끗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2) 현재문제 해결 - 지금 현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게 될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3) 미래문제 해결 -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엡2:6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엡2:7절에서는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고 또 앞으로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일평생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
(시48:1~14) 거룩한 성 시온을 찬양함 찬송 ; 248장.
본 시편의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의 중심지인 시온에 관한 노래입니다. 즉, 본 시편 말씀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1~3절에서 말씀하고, 예루살렘 성의 견고함에 대해서 4~8절에서 말씀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9~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유다 왕 여호사밧 왕이 모압 연합군의 공격(대하 20장)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찬양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무엇을 찬양해야 할까요?
. 시온의 아름다움인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1~3).
시온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입니다. 시인은 본문 2절 말씀에서 “터가 높고 아름다와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산은 세계 어떤 성소보다 뛰어나게 높은 곳입니다. 그러나 이 시온이 아름다운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강성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수강산인 우리나라에 비해서 비가 모자라고 습기가 적은 나라인 이스라엘은 나무나 풀이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돌이 많고 길에는 먼지가 많이 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볼 때는 별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곳이면 그곳이 비록 빈들이나 사막일지라도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온은 오늘날 무엇을 말할까요? 시온은 거룩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이것을 여러분 예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체험하게 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해야 합니다(4~8).
시인은 이웃 나라인 모압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유다를 공격해 왔으나 그것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시니 안개처럼 흩어지고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원수들을 공포로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과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구별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와 역사하심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3. 시온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9~14).
시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고 공의로우심을 찬양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대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대망하면서 시온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데 부바와 가난한 자가 어찌 구분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데 인간의 사소한 분쟁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온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취는 한 즐겁고 기쁜 찬양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성전에서 시온의 영광을 찬양하며 성벽을 도는 순례자의 행렬에서 이 같은 감사와 즐거운 찬송을 되뇌이며 영원한 찬송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인 성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임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즐겁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으로 주시고 가셨습니다. 왕으로 등극하신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로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며 특별히 주의 백성들을 다스려 가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속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가교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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