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두각(見頭角)
見 : 나타날 현(見/0)
頭 : 머리 두(頁/7)
角 : 뿔 각(角/0)
출전 :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두각(頭角)이란 짐승의 머리에 있는 뿔, 머리 끝이라는 뜻으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이 말은 많은 사람 중에서 학업이나 기예 등이 유달리 뛰어나게 나타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서 나온 말이다. 묘지명(墓誌銘)이란 고인(故人)의 덕(德)을 칭찬하여 돌에 새겨서 관(棺)과 함께 묻는 문장(文章)이다.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은 유종원(柳宗元)의 유언에 따라 한유(韓愈)가 쓴 것으로, 조상의 일로부터, 그의 아버지의 공적(功績), 그리고 유종원(柳宗元)에 대한 경력, 성격,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의 일부분이다. ‘자후(子厚)는 젊어서 정민(精敏)하고 통달(通達)하지 않음이 없었다.그의 아버지의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소년이라 할지라도 이미 스스로 성인이 되어, 능히 진사에 합격하고 참신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씨(柳氏) 가문에 아들이 있다고 하였다.’
자후(子厚)는 유종원(柳宗元)의 자(字)이며, 유종원(柳宗元)은 한유(韓愈)와 함께 중당(中唐)에 살던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한유(韓愈)와는 유종원(柳宗元)이 관직에 있을 때 친교를 맺은 사이로 비록 한유(韓愈)가 나이는 다섯 살이나 연장자였지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사이였다.
한유(韓愈)는 이 묘지명(墓誌銘)에서 유종원(柳宗元)이 젊은 나이에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음을 일러 현두각(見頭角)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유종원(柳宗元)은 21세 때 진사(進士)가 되고 26세 때 박사광사과에 합격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랐다. 그러나 혁신적(革新的)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參劃)하였다가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나이 43세 때 호남성(湖南成) 영주(領主)의 사마(司馬)로 좌천된 이후, 중앙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47세 때 다시 광서성의 유주자사로 명해져, 거기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오랜 변경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원숙하게 하였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그의 문장이 내용과 형식에서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열게 된 것도 모두 그의 불우한 정치생활 중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도한 그의 문장은 문장궤범(文章軌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현두각(見頭角)과 절각(折角)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짐승의 뿔을 '자존심'이나 '품위'의 상징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우리 속담에 낙담한 표정을 가리켜 '뿔 뺀 쇠 상'이란 말이 있거니와,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고, 어느 여류 시인은 사슴의 뿔을 가리켜 '관(官)이 아름답다'고 예찬하기도 했다.
물론 돼먹지 않은 사람이 교만한 짓을 할 때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도 했지만 이 역시 뿔이 나야 할 곳이 엉덩이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뿔의 상징적 의미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뿔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살펴보면, 강력한 힘이나 남성의 상징으로 뿔을 귀히 여기는 이러한 문화적 징표가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사람 가운데 기예(技藝)나 소질 등이 유달리 뛰어나서 두드러질 때 '두각(頭角)을 나타낸다'라 하고, 기세를 누르거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때 '절각(折角)'이라 한다. '두각을 나타내다'는 말은 한유(韓愈)가 지은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나오는 고사성어 '현두각(見頭角)'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두각'을 '두각을 나타낸다'라고 국역한 것이다.
[예문1] 물리학, 생물학, 인공지능, 의학, 컴퓨터 사이언스, 수학 등 과학의 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25명의 석학이 참여해 만든 이 미래 예측서는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인류의 미래 모습을 총체적으로 그려 보고 있다. (조선일보: 2002. 10. 18.)
[예문2] 스리차판은 지난해 12월31일 인도 첸나이에서 열린 국제테니스투어(ATP)대회서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2002. 10. 18.)
한유는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를 배격하고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일으킨 문장가이고,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의 자후(子厚)는 유종원(柳宗元)의 자(字)를 가리키는데 그는 풍자문(諷刺文)과 산문(散文)에 능했었다 한다. 이 둘은 당(唐)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들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이해하면서 교유(交遊)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어서부터 필명(筆名)을 드날리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유종원은 말년이 되면서 한직으로 좌천되는 등 불우한 삶을 살다가 47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게 되었다.
한유는 당시 헌종(憲宗)이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을 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조주자사(潮州刺使)로 좌천되어 가던 길에 유종원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유가 비문에 적을 옛 친구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실에 이르러서는 '두각을 나타냈다[見頭角]'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소질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켜서 현두각(見頭角)이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기세나 콧대를 꺾어 버리는 것을 절각(折角)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서(漢書)의 주운전(朱雲傳)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서(漢書)에는 주운(朱雲)을, 전한(前漢) 시대 성제(成帝)에게 간신인 장우(張禹)를 베어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상주(上奏)해서 결국 성제의 마음을 돌렸던 충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나라 때는 유학이 크게 융성하여 논쟁이 성행하였는데 당시 유학의 한 갈래인 양구역(梁丘易)의 대가로, 언변이 좋은 오록충종(五鹿充宗)이라는 사람과 주운은 논쟁하게 되었다. 주운과 오록충종 간의 논쟁은 황제와 많은 학자들이 보는 앞에서 진행되었는데, 결국 주운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 논쟁 이후에 사람들은 오록충종의 이름에 사슴 록(鹿)자가 들어 있으므로 이 논쟁을 빗대어 "주운이 그 뿔을 부러뜨렸다(折角)"라고 했고, 이 고사에 유래하여 사람의 콧대를 꺾는 것을 '절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문관지(古文觀止) 8권 당문(唐文)
유자후(柳子厚)의 묘지명(墓誌銘)
이 편은 고문관지(古文觀止) 제8권 당문(唐文)의 19번째 편으로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이다.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은 한유(韓愈)가 당 헌종 원화(元和) 15년(820년)에 원주자사(袁州刺史)로 부임했을 때 쓴 글이다.
자후(子厚)는 유종원(柳宗元)의 자(字)로 한유와 유종원은 우정이 돈독하였으며 고문운동 당시 정치적인 동지였다. 이 글은 유종원이 당 헌종 원화 14년에 죽자 한유가 유종원의 묘지명(墓誌銘)을 적어와 유종원의 인품과 학문에 대해 칭송한 것이다.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 한유(韓愈)
子厚諱宗元.
자후(子厚)는 이름이 종원(宗元)이다.
七世祖慶, 為拓跋魏侍中, 封濟陰公.
7대 선조 유경(柳慶)은 북위(北魏) 때 시중(侍中)이 되어 제음공(濟陰公)에 봉해졌다.
曾伯祖奭為唐宰相, 與褚遂良韓瑗俱得罪武后, 死高宗朝.
증조부의 형인 유석(柳奭)은 당(唐)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저수량(褚遂良), 한원(韓瑗)과 함께 무후(武后)에게 죄를 얻어 고종(高宗) 때 죽었다.
皇考諱鎮, 以事母棄太常博士, 求為縣令江南, 其後以不能媚權貴, 失御史, 權貴人死, 乃復拜侍御史.
부친 유진(柳鎭)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사퇴하고 강남의 현령이 되기를 청하였다가, 그 후 권세에 아첨하지 않음으로 인해 어사(御史) 직을 잃었다가 권세자가 죽은 뒤에 다시 시어사(侍御史)에 임명되었다.
號為剛直, 所與遊皆當世名人.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강직하고 정직하다고 말하였으며, 함께 교유한 사람들도 모두 당세의 명사들이었다.
子厚少精敏, 無不通達, 逮其父時, 雖少年, 已自成人, 能取進士第, 嶄然見頭角, 眾謂柳氏有子矣.
자후(子厚)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통달하지 못한 학문이 없었으며, 아버지가 생존하셨을 때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이미 스스로 성인처럼 행동하여 진사과에 급제하여 우뚝이 두각을 드러내니, 사람들은 모두 유씨 집안을 빛낼 아들이 있다고 하였다.
其後以博學宏詞, 授集賢殿正字.
그 뒤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하여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에 제수되었다.
俊傑廉悍, 議論證據今古, 出入經史百子, 踔厲風發, 率常屈其座人.
그는 재능이 뛰어나고 청렴결백하고 용맹스러워 의론할 때면 고금의 사례를 끌어다가 증거로 삼고 경서와 사서 및 제자백가서를 널리 섭렵하였으며, 논변이 바람처럼 세차고 힘이 있어 대체로 좌중을 굴복시켰다.
名聲大振, 一時皆慕與之交, 諸公要人, 爭欲令出我門下, 交口薦譽之.
명성을 크게 떨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그와 교류하였으며, 여러 공경과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서로 앞 다투어 자기 문하생으로 삼고자 하여 이구동성으로 추천하고 칭찬하였다.
貞元十九年, 由藍田尉拜監察御史.
정원(貞元) 19년(803년)에 남전현위(藍田縣尉)에서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제수되었다.
順宗即位, 拜禮部員外郎.
순종(順宗)이 즉위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제수되었다.
遇用事者得罪, 例出為刺史, 未至, 又例貶州司馬.
권력자가 죄를 받음으로 인해 규정에 따라 폄직되어 자사(刺史)로 나갔는데, 임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또 규정에 따라 폄직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가 되었다.
居間益自刻苦, 務記覽, 為詞章泛濫停蓄, 為深博無涯涘, 而自肆於山水間.
한가한 곳에 있게 되자 더욱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시문을 지으니 그 문장이 마치 큰물이 넘쳐흐르고 깊이 고인 것 같아서 깊고도 드넓어 끝을 볼 수 없었으며, 그는 산수(山水) 사이에서 유유자적하였다.
元和中, 嘗例召至京師, 又偕出為刺史, 而子厚得柳州.
원화(元和) 연간에 전례대로 부름을 받고 경사(京師)로 왔다가 또 연루되었던 사람들과 함께 자사(刺史)로 나가게 되었는데, 자후는 유주자사(柳州刺史)가 되었다.
既至, 歎曰: 是豈不足為政耶.
자후는 유주(柳州)에 이른 뒤에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곳이 어찌 잘 다스릴 수 없겠는가!”
因其土俗, 為設教禁, 州人順賴.
이에 그 지방 풍속에 따라 금령(禁令)을 제정하고 교화를 실시하니 유주 백성들이 순종하고 신뢰하였다.
其俗以男女質錢, 約不時贖, 子本相侔, 則沒為奴婢.
유주(柳州)의 풍속은 자녀를 저당 잡히고서 돈을 빌리되, 제때에 돈을 갚지 못하여 이자가 본전과 같아지면 채권자가 그 인질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았다.
子厚與設方計, 悉令贖歸, 其尤貧力不能者, 令書其傭, 足相當, 則使歸其質.
자후는 백성들을 위해 방법을 강구하여, 영을 내려 돈을 치르고 잡힌 자녀들을 모두 찾아가게 하고, 그중에 특히 가난해서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채권자와 노동으로 계약하도록 영을 내려 품삯이 빌린 돈과 같아지면 잡힌 인질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觀察使下其法於他州, 比一歲, 免而歸者且千人.
관찰사(觀察使)가 이 법을 다른 주(州)에도 시행하여 1년이 되자 노비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간 자가 대략 천 명에 가까웠다.
衡湘以南為進士者, 皆以子厚為師, 其經承子厚口講指畫為文詞者, 悉有法度可觀.
형산(衡山)과 상수(湘水) 이남 사람으로 진사과에 응시할 자들은 모두 자후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중에 자후의 강의와 지적을 받고 지은 문장은 모두 법도가 있어서 볼만하였다.
其召至京師而復為刺史也, 中山劉夢得禹錫亦在遣中, 當詣播州.
자후가 부름을 받고 경사(京師)로 왔다가 다시 자사가 되어 외지로 나갈 때, 중산 사람 유몽득(劉夢得) 우석(禹錫)도 축출되는 무리에 끼어 파주자사(播州刺史)로 가게 되었다.
子厚泣曰: 播州非人所居, 而夢得親在堂, 吾不忍夢得之窮, 無辭以白其大人, 且萬無母子俱往理.
자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파주(播州)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되고 몽득(夢得)은 노모가 살아계시니, 나는 몽득이 곤경에 빠져서 그 노모께 사정을 아뢸 방법이 없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고, 또 모자(母子)가 함께 귀양 가는 이치는 없다.”
請於朝, 將拜疏, 願以柳易播, 雖重得罪, 死不恨.
이에 조정에 청원하여 ‘유주(柳州)를 파주(播州)와 바꾸어주기를 원하오니, 비록 이로 인해 거듭 죄를 얻어 죽는다 해도 한이 없겠습니다’는 내용의 소(疏)를 올리려고 하였다.
遇有以夢得事白上者, 夢得於是改刺連州.
그런데 이때 마침 몽득의 일을 황제께 아뢴 자가 있어, 몽득이 이에 연주자사(連州刺史)로 바뀌었다.
嗚呼! 士窮乃見節義.
아! 선비는 곤궁하여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드러난다.
今夫平居里巷相慕悅, 酒食遊戲相征逐, 詡詡強笑語以相取下, 握手出肺肝相示, 指天日涕泣, 誓生死不相背負, 真若可信.
지금 사람들은 평소 마을에서 살며 서로 존경하고 기뻐하며, 먹고 마시고 놀며 서로 왕래가 빈번하여,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며 서로 겸손해 하고, 손을 붙잡고 서로 폐와 간이라도 꺼내 보일 것처럼 하며,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눈물까지 흘리면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서하니,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것 같이 행동한다.
一旦臨小利害, 僅如毛發比, 反眼若不相識, 落陷阱不一引手救, 反擠之, 又下石焉者, 皆是也.
그러나 어느 날 작은 이해관계를 얽히게 되면 겨우 머리카락처럼 미세한 일에도 마치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반목하여 함정에 빠져도 손을 내밀어 구하지 않고, 도리어 밀쳐내고 또 돌을 던져 넣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此宜禽獸夷狄所不忍為, 而其人自視以為得計.
이런 짓은 금수(禽獸)와 이적(夷狄)도 차마 하지 못할 일인데, 저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계책이 실현되었다고 여긴다.
聞子厚之風, 亦可以少愧矣.
그러나 자후의 풍도(風度)를 듣는다면 저들 또한 조금은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子厚前時少年, 勇於為人, 不自貴重顧藉, 謂功業可立就, 故坐廢退.
자후는 어릴 때부터 남을 위하는 데에 용감하여 자신을 소중히 여기거나 아끼지 않고, 공적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既退, 又無相知有氣力得位者推挽, 故卒死於窮裔, 材不為世用, 道不行於時也.
좌천된 뒤, 또 서로 알아주는 벗이나 역량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천거가 없었기 때문에 끝내 궁벽한 변방에서 죽어, 재능이 세상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도가 당시에 행해지지 못하였다.
使子厚在臺省時, 自持其身已能如司馬刺史時, 亦自不斥, 斥時有人力能舉之, 且必復用不窮.
가령 자후가 어사대(御史臺)와 상서성(尙書省)에 있을 때 스스로의 몸가짐을 사마(司馬)와 자사(刺史)가 되었을 때처럼 하였다면 좌천되지 않았을 것이고, 좌천되었을 때 힘 있는 사람이 천거하였다면 반드시 다시 기용되어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然子厚斥不久, 窮不極, 雖有出於人, 其文學辭章, 必不能自力以致必傳於後如今, 無疑也.
그러나 자후가 좌천된 기간이 오래지 않고 곤궁함이 극한에 이르지 않았다면, 비록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학문과 문장에 반드시 자신의 노력을 다하여 지금처럼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雖使子厚得所願, 為將相於一時, 以彼易此, 孰得孰失, 必有能辨之者.
가령 자후가 원하던 바를 얻어 한 시대의 장군이나 재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저것을 이것과 바꾼다면 어느 것이 득이 되고 어느 것이 실이 되는지를 판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子厚以元和十四年十一月八日卒, 年四十七.
자후는 원화(元和) 14년(819년) 11월 8일에 죽었으니 향년 47세이다.
以十五年七月十日, 歸葬萬年先人墓側.
원화 15년(820년) 7월 10일에 만년현(萬年縣)으로 돌아가 선영의 곁에 장사 지냈다.
子厚有子男二人, 長曰周六, 始四歲, 季曰周七, 子厚卒乃生.
자후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주육(周六)은 겨우 네 살이고, 차남 주칠(周七)은 자후가 죽은 뒤에 태어났다.
女子二人, 皆幼.
두 딸도 모두 어리다.
其得歸葬也, 費皆出觀察使河東裴君行立.
자후의 운구를 안장하는데 까지 비용을 모두 관찰사 하동군의 배행립(裴行立)이 지출하였다.
行立有節概, 重然諾, 與子厚結交, 子厚亦為之盡, 竟賴其力.
배행립은 절조와 기개가 있어 신의를 중시하여 자후와 교분을 맺었으며, 자후 또한 그를 위해 마음을 다하더니, 사후에 그의 도움을 받았다.
葬子厚於萬年之墓者, 舅弟盧遵.
자후를 만년현 선영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낸 이는 외사촌 아우인 노준(盧遵)이다.
遵, 溥涿人, 性謹慎, 學問不厭.
노준은 탁주(涿州) 사람으로 성격이 신중하고 학문을 싫어하지 않았다.
自子厚之斥, 遵從而家焉, 逮其死不去.
자후가 좌천된 때부터 노준은 자후를 따르며 그의 집에서 살았고 자후가 죽은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既往葬子厚, 又將經紀其家, 庶幾有始終者.
만년현으로 가서 자후를 장사 지낸 뒤에도 자후의 가족을 돌보았으니,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사람에 가깝다고 이를 만하다.
銘曰: 是惟子厚之室, 既固既安, 以利其嗣人.
묘지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자후(子厚)의 유실(幽室)인데 이미 견고하고 편안하니 그 후손에게 이로울 것이다.”
▶️ 見(볼 견, 뵈올 현)은 ❶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❷회의문자로 見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見자는 目(눈 목)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것이다. 見자의 갑골문을 보면 人(사람 인)자에 큰 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눈을 강조해 그린 것으로 ‘보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한자에서는 目자가 주로 ‘눈’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면 見자는 ‘보다’와 같이 보는 행위에 주로 쓰이고 있으니 차이점을 알아두는 것도 좋다. 또 예전에는 見자가 現(나타날 현)자 대신 쓰인 적이 있기에 ‘나타나다’나 ‘보이다’와 같은 의미도 있다. 이때는 ‘현’으로 발음한다. 다만 見자의 기본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보는 것’이나 ‘보이는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마음에 생각하는 점을 의견(意見),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찾아냄을 발견(發見),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편견(偏見),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 남의 일에 간섭함을 참견(參見),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을 식견(識見),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을 예견(豫見),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나 올바로 인식하거나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견(所見),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손님을 만남을 접견(接見), 지체 높은 사람을 찾아 뵙는 일을 알현(謁見), 임금께 나아가 뵈옴을 진현(進見),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뜻에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 또는 대의를 위해서 부귀영화를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의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대책을 세운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頭(머리 두)는 ❶형성문자로 头(머리 두)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머리혈(頁; 머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豆(두)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豆(두)는 고기 따위를 담는 식기로서 둥근 그릇에 높은 발이 달려 있고, 頁(혈)은 얼굴이나 머리에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頭(두)는 豆(두)라고 하는 도구가 서 있듯이 사람의 머리가 몸위에 곧게 달려 있는 모습으로 머리와, 일의 시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頭자는 ‘머리’나 ‘꼭대기’, ‘처음’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頭자는 豆(콩 두)자와 頁(머리 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豆자는 ‘콩’이라는 뜻이 있지만, 본래는 제기 그릇을 그린 것이다. 전국시대 때의 頭자를 보면 豆자 위로 頁자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사람의 머리를 제기 그릇에 올린 것 같지만 이것은 사람의 머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니 豆자는 발음과 함께 사람의 신체 윗부분에 있는 머리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頭(두)는 (1)주로 마소나 양, 돼지 같은 네발 가진 짐승의 수효(數爻)를 세는 단위 (2)골치 등의 뜻으로 ①머리 ②꼭대기, 최상부(最上部) ③우두머리 ④처음, 시초(始初) ⑤첫째, 상위(上位) ⑥맨 앞, 선단(先端) ⑦근처(近處), 근방(近方) ⑧변두리 ⑨물건을 셀 때의 단위, 마리 ⑩사람을 세는 말 ⑪음식상을 세는 말 ⑫지혜(智慧), 재능(才能) ⑬어조사(語助辭)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우두머리 추(酋), 머리 수(首), 으뜸 괴(魁),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꼬리 미(尾)이다. 용례로는 머리의 존칭을 두상(頭上), 머리가 되는 차례를 두서(頭序), 머리가 아픈 증세를 두통(頭痛), 좋지 못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두목(頭目), 실마리를 두서(頭緖), 짐승 따위의 머리에 있는 뿔을 두각(頭角), 머리와 낯을 두면(頭面), 머리 털을 두발(頭髮), 음절의 첫소리를 두음(頭音),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이 어떤 일에 오로지 파묻힘을 몰두(沒頭), 머리나 마음 속의 생각을 염두(念頭), 이야기의 말머리를 화두(話頭), 글이나 일의 첫머리를 벽두(劈頭), 해의 첫머리를 연두(年頭), 이야기나 글의 첫머리를 모두(冒頭), 어떠한 곳에 몸소 나감을 출두(出頭), 마주 대해 입으로 하는 말을 구두(口頭), 시가지의 길거리를 가두(街頭),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고 꼬리는 서쪽을 향하게 놓음을 두동미서(頭東尾西), 머리가 벗어지고, 이가 빠져 사이가 벌어진다는 두동치활(頭童齒闊), 참형을 당하여 머리와 다리가 따로따로 됨을 이르는 두족이처(頭足異處), 정신이 어찔하여 쓰러짐을 두중각경(頭重脚輕),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하면 건강에 좋음을 이르는 두한족열(頭寒足熱) 등에 쓰인다.
▶️ 角(뿔 각, 사람 이름 록/녹, 꿩 우는 소리 곡)은 ❶상형문자로 짐승의 뿔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뿔, 모서리를 뜻한다. 술을 담거나 되로 삼아 물건을 되거나 하였다. ❷상형문자로 角자는 ‘뿔’이나 ‘모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角자는 짐승의 뿔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角자를 보면 뾰족한 짐승의 뿔과 주름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고대부터 짐승의 뿔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角자에 ‘술잔’이라는 뜻이 있는 것도 고대에는 소의 뿔을 술잔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뿔은 짐승의 머리에서 돌출된 형태를 하고 있어서 角자에는 ‘모나다’나 ‘각지다’라는 뜻이 생겼고 또 동물들이 뿔로 힘겨루기를 한다는 의미에서 ‘겨루다’나 ‘경쟁하다’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角자와 결합하는 글자들은 대부분이 ‘뿔의 용도’나 ‘뿔의 동작’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角(각, 록, 꿩 곡)은 (1)모 (2)한 점에서 나간 두 개의 반직선(半直線)이 이루는 도형(圖形), 둔각(鈍角), 예각(銳角) 따위 (3)각도(角度) (4)각성(角星) (5)동양(東洋) 음악(音樂)의 오음(五音) 중(中)의 셋째 음. 장조(長調)의 '미'에 해당함 (6)뿔처럼 만든 나팔. 은(銀)이나 나무로 만드는데 군대(軍隊)를 호령(號令)할 때나 또는 궁중(宮中)의 아악(雅樂)을 연주(演奏)할 때에 쓰던 악기(樂器). 그 크기와 모양에 따라 대각(大角), 중각(中角), 소각(小角)으로 나눔 (7)일부 명사(名詞) 앞에 붙어 뿔로 만든, 뿔의 뜻을 나타냄 등의 뜻으로 ①뿔, 짐승의 뿔 ②곤충(昆蟲)의 촉각 ③모, 모진 데 ④구석, 모퉁이 ⑤각도(角度) ⑥총각(總角) ⑦상투(장가든 남자가 머리털을 끌어 올려 정수리 위에 틀어 감아 맨 것) ⑧술잔 ⑨짐승, 금수(禽獸) ⑩콩깎지 ⑪뿔피리(뿔로 만든 피리) ⑫별의 이름 ⑬뿔을 잡다 ⑭겨루다, 경쟁하다 ⑮다투다 ⑯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비교하다 ⑰시험하다 ⑱닿다, 접촉하다 ⑲뛰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록) 그리고 ㉠꿩 우는 소리(곡)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모날 릉(稜)이다. 용례로는 각의 크기로 일이 전개되는 방면이나 면모나 관점을 각도(角度), 눈의 겉을 싼 투명한 막을 각막(角膜), 힘을 겨룸을 각력(角力), 네모지게 다듬은 나무를 각목(角木), 네모지게 켜 낸 재목을 각재(角材), 서로 버티어 늘어섬을 각렬(角列), 각이 진 모양을 각형(角形), 짐승의 뿔 같은 형체를 각상(角狀), 짐승의 뿔로 만든 잔을 각배(角杯), 승부를 겨룸을 각승(角勝), 깍지로 열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 잡은 상태를 각지(角指), 뛰어남 또는 맞버티어 굴복하지 않음을 각립(角立), 도안이나 무늬로 쓰이는 네모반듯한 글자를 각자(角字), 분침으로 시계의 분을 가리키는 바늘을 각침(角針), 엽전이나 동전 등의 잔돈을 각전(角錢), 무엇을 보는 각도나 보거나 생각하는 방향을 시각(視角), 한 귀퉁이를 일각(一角),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함을 궐각(厥角), 뼈와 뿔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골각(骨角), 활을 만드는데 쓰이는 황소의 뿔을 궁각(弓角), 짐승 따위의 머리에 있는 뿔로 뛰어난 학식이나 재능을 두각(頭角), 상투를 틀지 않은 남자란 뜻으로 결혼하지 않은 성년 남자를 이르는 말을 총각(總角), 거리의 한 모서리를 가각(街角), 수평선과 수직선이 이루는 각을 직각(直角), 직각보다 작은 각을 예각(銳角), 1직각 보다 크고 2직각 보다 작은 각을 둔각(鈍角), 서로 대립하여 겨루고 대항함을 각립대좌(角立對坐), 뿔이 있는 놈은 이가 없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모든 복을 겸하지는 못한다는 각자무치(角者無齒), 쇠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결점이나 흠을 고치려다 수단이 지나쳐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교각살우(矯角殺牛), 달팽이의 촉각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작은 나라끼리의 싸움이나 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을 와각지쟁(蝸角之爭), 무른 오동나무가 견고한 뿔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오동단각(梧桐斷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