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예술이다
영화사에서 리얼리즘 이론을 대표하는 영화이론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1918~1958)은 사진이 사람들에게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저절로 이미지를 복사하는 ‘자동기계’이다. 회화와 달리 인간의 노력이 필요치 않다. 사진은 특별한 기술을 연마한 화가가 아니라도 작동법만 알면 누구나 찍을 수 있다. 그러니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쟁은 사진에는 사람들이 간과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영화도 근본적으로 연속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의 그 특별한 무언가가 영화의 특별함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지닌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일까? 이 특별함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바쟁이 아닌 유대계 독일인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다. 베냐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Kleine Geschichte der Photographie, 1931)에서 사진의 특별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래의 두 이미지를 보자. 하나는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다우텐다이 부부의 초상〉이라는 사진이다.
두 이미지는 각각 회화와 사진이라는 다른 매체로 만들어졌지만 부부의 초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이미지를 비교하면 회화와 사진의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반 에이크의 회화는 당시 초상화의 관행대로 그림에 등장한 인물인 아르놀피니의 주문을 받아서 제작한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부호 아르놀피니는 자신의 혼인(사실은 재혼) 장면을 남기기 위해서 당대의 실력 있는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때 실력이 있다는 말은 그대로 그리는 능력을 뜻한다. 반 에이크에게는 이 신성한 부부의 결혼식 장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기 위한 임무가 주어졌다. 화가의 임무는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The Arnolfini portrait, 1434
다우텐다이, 〈다우텐다이 부부의 초상 사진〉 The photographer Karl Dauthendey with his betrothed Miss Friedrich, 1857
회화 작품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사진 작품인 〈다우텐다이 부부의 초상 사진〉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만, 그 성격은 반대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서 다우텐다이 부부의 사진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다. 이 사진은 당시 사진사였던 카를 다우텐다이가 직접 찍은 것이다(이 사진이 오늘날 유행하는 셀카의 원조라고나 할까). 다우텐다이 부부의 사진은 부부 사진이 으레 그러하듯이 애써 다정함을 연출하고 있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 혹은 기념사진을 찍을 때 억지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김치’ 하고 웃었던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다우텐다이 부부 또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개의 부부 사진이 그러하듯 이 사진의 인물도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색한 웃음과 손동작, 그리고 경직된 몸을 그대로 노출한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단지 있는 그대로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이미지이다. 말하자면 사진에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 예로 든 회화와 사진에는 반전이 발생한다. 반 에이크 그림의 미덕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사실을 재현하려는 화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화가의 선입견이 드러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아르놀피니는 당시 네덜란드가 해상무역이 번성함에 따라 급작스럽게 부를 축적한 나이 많은 졸부인 반면, 왼쪽의 신부는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의 어린 소녀이다. 게다가 아르놀피니는 재혼이었으므로 이 결혼식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큼 떠들썩하게 치러질 수 없었다.
반 에이크의 눈에도 이 커플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었다. 마치 달걀귀신처럼 창백한 아르놀피니의 얼굴을 강조한 것이나 신부의 모습이 수줍게 보인다기보다는 다소 어리석고 멍청하게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원래 화가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하였으나 화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Johannes de Eyck fuit hic)’는 문장을 그림 속(정확히 그림의 중앙 상단 거울 바로 위)에 새겨놓은 점도 그림은 화가가 그린 것이라는 자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반해서 다우텐다이의 사진은 정반대의 반전을 나타낸다. 다우텐다이는 분명 부부의 다정함을 보여주고 과시하기 위해서 이 사진을 찍었다. 이 세상에 불편한 부부 사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우텐다이 부부의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다우텐다이의 사진은 애초에 사진사인 그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사진은 사진사의 의도를 비껴간다.
그것은 이 사진의 주인공인 좌측의 다우텐다이 부인이 얼마 후 가정불화 때문에 자살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이미지로 만들고자 하였던 다우텐다이의 의도와 달리 사진은 야속하게 다우텐다이 부인의 어두운 모습까지 담고 있다. 베냐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우텐다이는 아내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를 비껴가고 있고, 마치 뭔가 빨아들이듯이 불길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반 에이크 그림과 정반대로 다우텐다이는 사진 속에서 자신이 의도한 것을 드러내려 하였지만 사진은 그의 의도를 벗어나고 만다.
말하자면 반 에이크의 회화는 작가의 의도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려 했으나 불가피하게 작가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이에 반해 다우텐다이의 사진은 사진사가 의도를 지니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그 의도를 벗어났다. 여기서 베냐민은 사진의 특별한 무엇을 발견한다. 그 무엇이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다. 화가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리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선입견 때문이다.
가령 앞에 있는 코스모스 꽃을 그릴 경우 화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코스모스 이미지를 떠올리며 눈앞의 코스모스를 그린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의 코스모스의 특이한 모습을 놓치기 마련이다. 해변에 있는 자갈을 볼 때 우리는 머릿속의 자갈 이미지를 떠올려서 그 대상에 적용할 뿐이지 실제로 돌 하나하나의 특이한 생김새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사진은 자신이 보는 대상이 자갈인지 모래인지 흙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의 이미지에서는 주관이 배제되며, 인간의 눈이 볼 수 없었던 세상의 모습과 질서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사진은 인간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자 하는 선입견의 장막을 걷어내고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쟁이 사진의 특별한 어떤 것으로부터 영화의 리얼리즘을 이끌어내려는 이유도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은 예술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