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st there ever was, the best there ever will be.”
- Chicago, United Center, Jordan Statue
시카고 불스의 홈코트인 유나이티드 센터(United Center) 앞에 세워진 마이클 조던의 동상 아래에는 위와 같은 문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지금까지 최고였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어는 최상급을 이용한 현란한(?) 표현이 많다. 하지만 또 살벌한 문구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를 넘어서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탄식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농구팬이었다면 아마 이런 제목의 책을 썼을지 모른다.
“The End of Basketball and the last player”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한 후쿠야마의 생각은 넌센스겠지만, 조던에 관해서라면 동의할 수 있다. 만약 “농구의 5단계 발전법칙” 같은 게 있다면, 조던은 사실상 완벽한 공산주의 단계쯤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어쩌고.....”하는 명제처럼 그는 정말 필요한 경우 단 한번의 예외 없이 득점할 수 있었으니까.
; 시카고 불스의 홈코트 유나이티드 센터 앞에 서 있는 마이클 조던의 전신상. 연도(年度) 아래에 깨알같이 아로새긴 글씨가 보인다.
퍼> 말씀하신 것처럼,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만나뵙자고 한 건, 결국 마이클 조던이란 위대한 영웅 때문입니다. 마치 신을 대할 때처럼 저는 지금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군요.
G> 그랜드캐년과도 비슷하죠. 우린 그 거대한 신화, 정말 신화라고 해야겠죠? 그런 엄청난 규모의 신화가 언제 시작되어 또 언제 어떻게 끝날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하룻밤 이야깃거리로 삼기에 그의 흔적은 터무니없이 넓고 깊죠.
퍼> 네. 정말 그렇습니다. 조던과는 개인적으로 친했었나요?
G> 글쎄요. 조던은 생각만큼 가까이 가기 쉬운 인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그의 뉘앙스는 약간 이상했다. 물론 인터뷰 당시는 알아차리지 못 했는데, 그는 조던에 관한 한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임이 분명하다. 조던과 관련된 많은 숨겨진 일화들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분명 조던과 무척이나 친밀한 관계였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데, 녹취를 풀면서 깨달은 점이었는데, 그는 첫머리에서 조던과의 가까웠느냐는 질문에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G> 슈퍼스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니 스타가 아니라도 기자가 누군가와 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당신도 느끼겠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물론 많았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이야길 알고 있기도 하고. . .
퍼> 조던이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활약할 당시, 당신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요?
G> 물론입니다. NBA 취재를 맡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신인드래프트는 기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할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였어요. 드래프트 당시 불스의 상황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지요. 성적은 꼴찌를 맴돌았고 관중동원도 별로였고. 팀 재정비를 위해서 뛰어난 신인과 과감한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퍼> 조던을 뽑았던 것은 행운이었군요?
G> 그때 불스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행운을 손에 넣 되었는지 미처 몰랐어요. 불스의 사장이던 로드 톤(Rod Thorn)은 “올라주원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이라며 입맛을 다셨지요. 그때 그들은 키가 큰 센터가 필요했거든요.
; 음모연합의 Sky-Walker Project는 5월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 했다. 1977년 5월 27일 Star Wars란 이름으로 1편이, 1980년 5월 21일 제국의 역습(Empire Strikes Back)이란 이름으로 2편이, 1983년 “제다이의 귀환”(Return of Jedi)란 이름으로 3편이 각각 개봉되었다. Project의 또 다른 주인공인 마이클 조던 역시 5월에 ‘발매’되었다. 가운데 사진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코치였던 딘 스미스(Dean Smith)와 함께 프로에 뛰어들기 위해서 대학을 중퇴한다는 발표를 하는 마이클 조던의 모습인데 이때가 1984년 5월 5일이었다.(조던의 코의 생김새를 주의깊게 볼 것!) 대학 3학년 1학기를 채 마치기 전이었다. 오른쪽은 대학(North Carolina University)시절 그의 경기모습인데 아직 나이키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기 전이라 전통(?)의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다.
퍼> 마이클의 NBA 데뷔 직후의 상황에 대해서 기억에 남을 만한 일화가 혹시 있나요? 예컨대 그에 대한 동료 선수들이나 팬들의 반응과 같은 문제 말입니다.
G> 오래 전이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죠. 그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선수였어요. 그러니까... 조던 외 다른 NBA 선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요?
퍼> 네. 어느 정도는요.
G> 아이쟈 토마스(Isiah Thomas)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당시 데니스 로드맨과 함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철벽 수비팀으로 만들었던 리딩 가드였어요.
아이쟈 토마스는 NBA 선수들 가운데에서도 카리스마가 강하기로 유명했다. 비록 6피트 1인치(1m 85cm)에 불과한 단신으로서, 마이클 보다 4년 일찍 데뷔했던 그는, 역대 NBA 선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경기 운영 능력을 갖추었던 천부적인 가드였다. 하지만, 신화가 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무수한 다른 희생양들처럼 그 역시 마이클 조던을 빛내기 위한 초라한 조연에 불과했다. Mr. G가 아이쟈 토마스로부터 마이클 조던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90년대, 마이클 조던이 아닌 다른 선수가 NBA 최종 결승전의 MVP를 차지한 경우는 단 두 번이었다. 그중 하나는 마이클 조던이 드래프트 3위였을 때, 1위로 뽑혔던 아킴 올라주원이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바로 아이쟈 토마스였다.
; NBA 블록슛의 대명사로 통하는 디켐베 무톰보(올라주원은 나이지리아 태생이고 무톰보는 자이레 출신이다)와 매치업을 하고 있는 올라주원(왼쪽 사진). 디켐베 무톰보의 원래 이름을 보면 코미디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서~수한무~거북이와 두루미...” 본명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Dikembe Mutombo Mpolondo Mukamba Jean Jacque Wamutombo. 오른쪽 사진은 2002년 11월 9일, 18년간의 선수생활을 정리하는 은퇴식장의 아킴 올라주원. 참고로 그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9.11 이후 자신의 종교(무슬림)에 대한 미국인들의 ‘정신적 학대’ 때문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 전해진다. 확인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G> 조던이 데뷔했던 1984년 당시, NBA에는 네 명의 걸출한 스타가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닥터 J(Julius Erving), LA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 그리고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마이클이라는 메인디쉬의 에피타이저쯤 될 겁니다. 80년대를 이끌었던 스타들이었지요. 마치 조던과 같은 인물이 나올 때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지요. 또 한 명은 좀 전에 말했던 아이쟈 토마스였어요. 이 영리한 선수가 NBA에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어요. 그는 “영리한 아이쟈”라고 불리며 데뷔하던 해에 NBA All-Star 팀에 선정되었어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그리고 닥터J의 시대를 이어갈 재목이라고 생각되었어요. 당시 조던이 자신의 시대(his own era)를 열기 위해서는 이 경쟁자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물론 아이쟈 외에도 도미니크 윌킨스 같은 선수도 빼놓을 수 없는 마이클의 초창기 경쟁자였어요.
퍼> 도미니크 윌킨스는 마이클과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경쟁한 적이 있었죠?
G> 그렇습니다. 데뷔하던 1985년 그리고 1988년 두 번에 걸쳐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 만났었어요.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마이클을 다른 선수들과 구분해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윌킨스와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이쟈 토마스와의 인연에 대해서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 마이클이 데뷔하던 해, 그가 받았던 팬들과 언론으로부터의 스포트라이트는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어요. NBA에 드래프트 되기 직전 해, 그러니까 1984년 그가 대학(NCAA, 전미대학체육협회) 시절 보여준 평균 득점은 17점에 불과했어요. 물론 아마추어 경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에게 보내진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퍼> 드래프트에서 3번째로 뽑힌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겠죠.
G> 시카고를 넘어서서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 하던 불스가 마이클 때문에 하루아침에 매스컴의 표적이 됐어요. 그건 제 개인적으로도 축복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던 지방지 기자였던 내가 가장 권위있는 불스 취재기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으니까요.
퍼> 신인 드래프트와 불스와의 계약과정에 대해서 기억나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G> 그와 관련된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톱뉴스감이죠. 5년간 4백만달러 계약을 맺은 것 자체가 신인 가드의 계약기록을 경신한 것이었고. 참 계약 이야길 하니 당시 마이클의 계약 가운데 재미난 조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제는 박찬호 때문에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미국의 프로스포츠에서는 ‘스타급’들을 대우해주기 위한 계약상의 특별조항들이 화제가 되고는 한다. 트레이드 금지조항은 이미 상식이 되어 버렸고, 마크 맥과이어가 아들의 비행기좌석을 항상 자신 옆에 배정해달라는 조항과 같은 재미난 것도 많다고 한다. Mr. G가 이야기해 준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이었다.
퍼> 그게 뭐였죠?
G> 스포츠 선수들에게 부상이란 언제나 악몽이죠. 그래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경우 경기에 나가지 않아도 될 권리는 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기 마련입니다. 마이클의 계약조건에는 바로 이 구절이 있습니다. 소위 “love of the game clause”라고들 하지요.
LA Dodgers의 전설적 투수 샌디 쿠팩스나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숀 그린이 유대교의 최대 휴일인 욤키푸르(Yom Kippur)를 준수하기 위해서 게임에 나가지 않은 것과 같다. 하지만 이들이 경기를 거부한 것은 조던에게 주어진 계약서 상의 ‘권리조항’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에 의거한 것이었다.
퍼> 계약조건에 그런 조항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들었습니다만, 그게 신인과 맺는 계약서에 포함되었다니 정말 믿기 어렵군요.
G> 당시에는 모두 믿기 어려웠죠. 나이키와의 계약도 뭐, 마찬가지지요. 그의 NBA 경력은 기적과 함께 시작되어 기적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퍼> “love of the game clause”와 관련해서 더 알려주실 정보는 혹 없습니까? 제겐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라서...
G> 그 이야길 하려면 먼저 조던을 관리했던 매니지먼트 회사 이야길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조던의 에이전트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까?
퍼> 아, 아뇨. 아직 거기까진. (내가 알고 있는 게 대체 뭐지...?)
G> NBA 시작부터 아니 정확하게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시절부터 AmaServ Inc.라는 매니지먼트 기업이 조던을 관리했었습니다. 이 회사는 사실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회사입니다. 한때 아서 애쉬(Arthur Ashe. 70연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흑인 테니스 선수)와 같은 테니스 선수의 뒤치다꺼리를 하긴 했지만, 사실 AmaServ Inc.의 주력 업종은 투자컨설팅이었습니다. 제3세계(남미나 아시아)에 대한 투자알선 업무를 주로 했죠. AmaServ Inc.에서 파견된 조던의 에이전트 David Fallk도 완전한 무명이었습니다. 그 친구 정말 괴짜였어요. 무슨 에이전트가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걸 싫어하는지 원. 마이클이 잘 조련된 연극배우처럼 행동하는, 뭐 사실 스타라는 말이 붙으면 운동선수건 영화배우건 가식을 달고 다녀야 하기 마련이지만, 아무튼 조던은 정말 명배우였죠. 한데 이 Fallk라는 친구는 대인공포증에 걸린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꺼렸어요.
퍼> 상식과는 정반대군요. 에이전트라면 발이 열 개라도 모자랄텐데.
G> 그렇고 말고. 한데 뭐, 마이클이란 상품관리는 역사상 그 어떤 제품보다도 완벽했으니 그게 별 문제는 안 되지요. 사실 능력은 대단한 친구였어요. 스페인어, 불어, 일본어 또 어디더라 포르투갈어든가? 아무튼 영어 말고도 구사할 줄 아는 언어가 대여섯 개 쯤 됩니다. 다른 말은 못 알아듣지만 나도 스페인어는 좀 하거든요? 한데 이 친구 완전 내이티브예요. 엘살바도르에서 한 2년 넘게 투자 상담일을 했다는데 아마 그 때문이겠죠. 성격은 그래도 능력하나는 끝내주는 친구였죠.
‘엘살바도르...' 또 그놈의 파블로프 개처럼 우표하고 맘모스가 반짝하고 떠오른다. 조던의 에이전트에 관한 이야기는 ‘보고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과거 경력에 ‘보고서’의 중간 경유지인 엘살바도르가 나왔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Mr. G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David Fallk가 엘살바도르에 있었던 시기는 좌파의 정권전복에 맞서기 위한 미국주도의 ‘예방혁명’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연이은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CIA가 배후(진두?) 지휘하던 시점이었다. 미국의 이 작전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1984년 미국의 후원을 업은 두아르떼(Jose Napoleon Duarte)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일단은 성공인 셈이었다.
복잡한 남미의 정치지형을 들여다 보려니 한동안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 도졌다. 도대체 그 넓은 땅덩어리는 쿠데타와 전복, 혁명, 게릴라라는 단어가 하나의 문단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모두가 오지랖 넓은 이웃, 미국을 둔 덕분이리라. 아무튼 엘살바도르의 1984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CIA가 투자 혹은 비밀송금의 형식으로 지원한 자금 총액은 무려 1억 4천만 달러에 달했다. David Fallk의 투자상담은 어쩌면 ‘대선캠페인 지원’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인터뷰가 알려준 첫 번째 ‘보고서 외의 정보’였다. 조던의 신인계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된다.
G> 아무튼 이 능력있는 에이전트 친구는 불가능한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조던 말로는 당시 자신은 계약조건과 관련해서 5년이라는 계약기간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나머지 모두는 Fallk에게 일임했다고 하더군요. 신인에게는 불가능한 ‘경기선택 조항’을 비롯해서 나이키, 맥도날드, 코카콜라, 에너자이저, 세브롤레 등등과의 잇단 광고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마치 조던의 NBA 데뷔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이 모든 일은 조던의 업적으로 훗날 당연한 것으로 생각됐지만, 사실 입단 직후라는 상황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이다스가 따로 없었죠. Fallk는 손대는 모든 계약을 ‘최고의 조건’으로 성사시켰습니다.
퍼> 대단한 사람이군요. 지금도 현역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G> 아닙니다. 그는 마이클이 첫 번째 은퇴하던 해, 그러니까 마이클의 부친이 살해당했을 즈음 에이전트를 그만두었습니다.
퍼> 그럼 1993년 경이군요.
G> 그럴 겁니다. 그 뒤로는 그 친구가 관두게 되죠. 그 뒤에는 별다른 소식을 들은 건 없어요.
David Fallk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Mr. G와의 인터뷰가 가져다 준 첫 번째 수확이었다. 마이클은 현역시절 동안 사실상 이 ‘경기선택 옵션’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부상으로 결장했던 몇 달을 제외한다면. 조던은 득점력과 화려한 경기내용 면으로도 예외적인 선수였지만, 체력 역시 NBA의 톱 5에 들 정도로 경기출장 시간이 길었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을 계약서에 명기한 것은 전적으로 에이전트 Falk의 능력문제였지만, 왜 그같은 조항이 필요했을까하는 의문이 남았다. 단 한 경기도 고의로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서 상의 이 조항에 대한 관심은 이내 사라져버렸지만, 그건 사소한 결정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연합’은 만에 하나 조던의 경기출장이 불가능한 경우 혹은 조던에 대한 ‘특별관리’가 필요할 경우 이 조항을 활용할 심산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이 문제는 과제로 남기기로 했다. Mr. G 역시 단지 그런 조항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정보는 전혀 없었으니. 이야기는 다시 마이클의 데뷔시점으로 돌아간다.
* 마이클은 언제나 예외다(Michael Granted) >>
신은 언제나 예외적인 존재이다. 특히 나같이 ‘무늬만 신자’인 경우 더욱 그렇다. 아플 때, 돈이 필요할 때, 대입시험을 볼 때마다, 투페어로 히든 베팅해야 할 때, 이쁜 여자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을 때, 혹은 늘씬한 여자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건너편 자리에 앉았을 때 등등.... 이럴 때만 신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마이클 역시 그렇다. 좀 과장하자면 그는 신적인 존재이고, 현실적으로도 그는 NBA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예외적인 대우’를 받는 선수이기도 했다.
퍼> NBA 데뷔전에서의 마이클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G> 물론입니다. 신인드래프트(1984.6.19)가 열린 지 넉 달 정도 뒤인, 그러니까 84년 10월 26일이네요,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조던의 데뷔경기가 열렸습니다. 불스의 홈개막전이었지요. 대단한 경기였어요.
퍼> 시작부터 날아다녔구만요.
G> 뭐, 꼭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 경기에서 마이클은 38분 정도를 뛰었고 득점은 16점이었으니, 드래프트 3위의 신인치고는 잘했지만, 훗날의 조던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빼어났다고만은 할 수 없지요. 대단했던 건 매스컴과 유명스타들의 관심이었어요. 케이블 채널은 물론이고 3대 방송의 스포츠 특집에서부터 신문까지 연일 이 슈퍼신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났지요. 얼마나 대단했던지 소문난 레이커스 팬인 잭 니콜슨마저 레이커스 홈개막전을 제쳐두고 시카고로 왔겠어요?
퍼> 잭 니콜슨이 레이커스 경기를 포기할 정도로요?
헐리우드 스타 가운데 NBA 매니아로 알려진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잭 니콜슨과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New York Knicks의 열혈 팬)이다. 특히 잭 니콜슨은 LA Lakers의 거의 모든 홈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열성팬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가 이례적으로 클리퍼스의 경기를 관람했다는 것은 당시 마이클 조던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조던이 아마추어 무대에서 보여준 것이라고는 그저 ‘득점력 있는 슈팅가드’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 1989년 조던과 스파이크 리가 함께 출연한 나이키 광고. 오른쪽은 은퇴 후의 조던이 잭 니콜슨과 함께 LA 레이커스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모습. 썬글래스인지 그냥 투명안경인지 구분이 안 된다. 1986년 “She's Gotta Have It”이란 영화로 감독 데뷔한 스파이크 리는 사실 CF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더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스티비 원더, 프린스, 신디 로퍼 등을 비롯한 40여 편에 달하는 M/V도 제작했다. “보고서” 역시 스파이크 리가 문화제국의 충실한 전사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설명한다. 비록 흑인이었지만. 한편 잭 니콜슨은 헐리우드에서 가장 ‘정치색’을 선명하게 띄고 있는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보고서’는 그것이 단순한 ‘정치색’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민주당의 지지자로서 특히 ‘군사제국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파 가운데 한 명이라고 설명하였다.
G> 그랬지요. 개막전 직전에 잭을 잠시 인터뷰했었는데 그러더군요. “조지가 귀띰해주던 걸. 오늘부로 레이커스는 황소 오줌 때문에 시궁창으로 이름을 바꿔야 될 거라고 말야. 하하. 그런 걸 유머감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 친구. 장담컨대 황소는 아마 허우적거리다 익사할 걸세.”라고 말예요.
퍼> 조지라면...?
G> 루카스 감독이죠. 그때 루카스는 한창 스튜디오 건설 때문에 바빠서 같이 오지는 못 했다더군요. 암튼 대단한 경기였어요 명사들이 많이 왔고 그만큼 기자들도 많았다는 말이지요. 유나이티드 센터가 그렇게 붐볐던 일은 그 전에는 없었죠.
당시 루카스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연속 히트로 펜타곤의 배려 아래 군기지를 매입해서 새로운 비밀 스튜디오를 건설 중일 때였는데, 보고서는 ‘음모연합’의 핵심멤버로 그를 지목하였다. 어쨌거나 비록 데뷔전에서는 16득점이라는 평범한 기록에 그쳤지만, 데뷔 첫 해 조던이 세운 기록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신인왕에 올랐고, 신인으로서는 최고기록인 시즌 평균득점 28.2(3위), 6.5개의 리바운드, 도움 5.9개 그리고 가로채기는 2.39개로 그 해 3위였다. 가드로서 평균득점이 25점을 넘는 선수는 NBA 통틀어 세 손가락 꼽기 힘들다. 조던은 가드였음에도 불구하고 28.2점을 올렸다. 그것도 데뷔 첫 해에. 당시까지 NBA의 플레이 스타일은 농구의 절대법칙대로 키 큰 놈이 장땡이, 그러니까 센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래리 버드(포워드), 매직존슨(센터, 가드, 포워드), 줄리어스 어빙(포워드), 압둘 커림 자바(센터) 등등 마이클 이전에 NBA를 풍미했던 스타들은 주로 센터가 아니면 포워드였고, 대부분 그들이 득점왕을 지켰다. 전설적인 득점왕(물론 마이클이 등장하기 이전이었지만) 윌트 챔벌레인 역시 센터였다. 조던이 NBA에 들어서면서 이 전통은 깨지기 시작했고, 날쌘 슈팅가드들의 화려한 플레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클이 16득점을 기록했던 데뷔전의 상대팀은 워싱턴 불릿츠(Washington Bullets)였는데, 16년 후 그는 이 구단(現 Washington Wizards)의 구단주가 된다. 조던의 봉사에 대한 일종의 은급(恩級)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 .
G> 심지어는 마이클 자신조차 이런 과도한 관심을 이해하지 못 하고는 “도대체 왜 사람들이 매직 존슨이나 닥터 J, 그리고 아이쟈 토마스같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나에게 이런 관심을 보이는지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한마디로 신데렐라였지요.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었어요. 마이클은 데뷔 첫 해인 1985년 전 경기(82게임)를 소화하고도 평균득점 28.2를 기록했어요.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갓 프로에 데뷔한 선수가 말입니다! 드래프트 이후 시즌이 개막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어도, 불과 석 달 사이에 그는 NBA의 정상급 기량을 갖춘 선수가 되어 버렸어요. 하지만 누가 상관하겠어요? 시카고 불스는 이 보물덩어리 때문에 평균 관중이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나 버렸어요.
퍼> 마이클에게 NBA는 그다지 큰 도전이 아니었군요.
G> 개인기록이라는 면에서는 그랬어요. 한데 그래도 결코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았어요. 아이쟈 토마스와 관련된 일화는 미미했지만 새로운 시대를 거스르고자 했던 시도도 없지 않았단 걸 보여주죠.
퍼> 무슨 사건이었죠?
; NBA 경력 전부를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활약했던 아이쟈 토마스는 조던보다 두 살이 위인 1961년생이다. 조던과 같은 엘리트 코스(NCAA 챔피언쉽 우승, NCAA MVP, 드래프트 2순위 지명, 신인 올스타 등등)를 거치면서 NBA 결승전 MVP도 두 차례나 거머쥐었지만, 그는 결국 철저하게 조던의 그늘에서 살 운명이었다. 현재 그는 고향이자 모교(Indiana University)가 있는 인디애나 페이서스(Indiana Pacers) 감독을 맡고 있는데, 오른쪽은 말쑥한 정장차림의 감독 아이쟈 토마스.
G> 아까도 말했지만, 마이클은 첫해 올스타에 선정됐어요. 한데, 올스타전이 있기 전까지 마이클은 거의 매 경기 30점 이상을 득점하면서 경기를 압도(dominated)했었는데, 올스타전에서는 결코 그러지 못 했단 말이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같이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던 아이쟈 토마스가 몇몇 다른 선수들과 함께 마이클에게 본떼를 보여주기로 작심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농구용어에 아이솔레이션(isolation, 1:1 플레이를 위해서 한 선수를 고립시키는 공격전술)이라고 있는데 정말로 마이클을 고립시켜 버렸던거죠.
퍼> 왜 그랬을까요? 아이쟈가 특별히 마이클을 싫어할 만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G>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이쟈 역시 마이클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봤겠지요. 그의 그늘에 철저히 가려질 초라한 자신의 미래 말입니다.
1985년 인디애나 폴리스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아이쟈를 비롯한 몇몇의 고참들은 ‘건방진 신인(boastful rookie)’을 길들이려고, 마이클이 완전한 찬스를 잡아도 패스를 해주지 않았는데, 조던은 22분을 뛰면서 아홉 번 슛을 시도했고 그 중 바스킷을 통과한 것은 단 두 번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개망신 당한 거다. 쌩라이브로! 조던과 아이쟈와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조던의 시카고 불스는 이후 세 번이나 아이쟈 토마스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악바리 수비’(이를 당시 언론에서는 “Jordan Rules”라고 불렀다)에 막혀 NBA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 했는데, 마이클에게는 가장 큰 좌절을 안겨다 주었던 팀이었고,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산벌의 계백처럼, 아이쟈는 도도한 새로운 조류에 온 몸으로 저항했던 마지막 전사(戰士)였다. 그가 패배(?)한 후, NBA는 순한 양처럼 마이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만다. 아차차! 로드맨은 예외지만. 계속해서 Mr. G의 말이 이어진다.
; 래리버드는 NBA 구단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백인 팬을 보유한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뛰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직전까지 NBA를 지탱했던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스타. 1978년 전체 6순위로 보스턴에 드래프트 되 이듬해 입단하여 13년간 선수생활을 하면서 게임당 평균 24.3점, 어시스트 6.3개, 리바운드 10개를 기록했고, 81년, 84년, 86년 챔피언 멤버였으며 84년부터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인디애나 주립대 출신이었던 그는 은퇴 이후 고향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감독생활을 했는데 오른쪽은 전형적인 못난이 백인모습의 감독 래리버드. 어떻게 보면 폴 매카트니와 많이 닮은 듯 하다. 오래 전부터 앓아오던 부정맥(심장이 지 X대로 뛴다는 이야기지)으로 99/00시즌이 끝난 뒤 감독직을 그만두었다. 글쎄, 과연 그 때문이었을까?
G>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다음해 그러니까 마이클의 NBA 2년차였던 1986년 조던의 불스는 가까스로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었는데, 첫 상대는 당대 최고의 플레이어이자 ‘백인의 희망’이라 불리던 래리버드의 Boston Celtics였어요. LA Lakers 그리고 Philadelphia 76ers와 함께 80년대 NBA 최고의 명가(名家)를 이루고있던 이 슈퍼스타와 조우한 마이클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신기(神技) 그 자체였습니다. 4월 20일 보스턴 셀틱스와의 경기에서 마이클은 63득점이라는, 플레이오프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했거든요. 데뷔 2년차인 그가 70년 가까운 전통의 NBA 플레이오프 기록을 갈아치운 겁니다. 이 경기가 끝난 다음 셀틱스의 영웅 래리버드는 우리들(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더군요.
“오늘 코트에 나타난 건 마이클이 아니라 신이에요. 마이클 몸을 빌어서...”
G> 아무튼 마이클은 여러모로 예외적인 선수였습니다. 물론 그가 이루어놓은 ‘믿을 수 없는’ 여러 기록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대접받는 선수(granted player)’였습니다. 닥터 J나 래리 버드 역시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과 유사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만큼은 아니었어요. 언젠가 매직 존슨은 TV로 생중계되는 화면에서, 물론 육성도 전달되고 있었는데... 농담투로 이렇게 말했어요. “이봐 래리, 마이클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구. 곧바로 파울 휘슬이 들릴꺼야.”라고 말입니다. 존슨은 여러모로 조던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 정도였지요. 때론 아주 격심하게 항의하는 선수도 있고... 물론 주먹질도 있었지요. 그리고 어떤 경우는 또 완전히 체념하는 경우도 있어요. 폴 웨스트팔 같은 사람이 그랬지요.
; 92/93씨즌 시카고 불스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던 피닉스 썬즈(Phoenix Suns)의 폴 웨스트팔(Paul Westphal) 감독. 썬즈의 가드 출신이었던 그는 감독 데뷔 첫해였던 92/93시즌에 피닉스 선즈 역대 최고의 승률을 올리면서 사상 두 번째로 팀을 챔피언 결정전에 올려놓았다. 상대가 조던의 불스가 아니었다면 데뷔 첫해 그가 거둔 업적은 단연 최고의 화제거리였을 것이다. 역시 다른 많은 경이로운 사건들처럼 그 역시 마이클의 그림자 안에 칙칙하게 갇히고 만다. 오른쪽은 당시 썬즈의 리딩 가드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케빈 존슨.
퍼> 조던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어땠는데요?
G> 그러니까 92/93시즌 챔피언 결정전이었는데, 4차전인지 5차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4쿼터 끝나기 몇 분전에 폴이 작전시간을 요청했어요. 그러고는 케빈 존슨과 또 다른 선수들에게 몇 번씩 다짐을 하면서 지시를 했어요. “마이클을 맡아! 마이클만 맡으란 말야. 그럼 모든 게 끝나!(You got Michael! You got Michael! That's all.)” 중계를 맡았던 NBC의 고성능 마이크에 폴 웨스트팔 감독의 절규하는 듯한 그 세 마디가 전국민 아니 전지구인의 귀를 때렸어요.
퍼> 경기는 역시 불스가 이겼을테죠?
G> 물론입니다. 결국 그 경기와 다음 경기를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우승했는데 재미있는 건 그 경기가 끝난 다음 웨스트팔 감독의 인터뷰였어요.
퍼> 물론 자리에 계셨겠지요?
G> 물론입니다. 당시 신문에선 디트로이트와 아이쟈를 언급하면서 승부의 관건은 조던을 막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어요. 내가 질문을 던졌지요. “4쿼터 종료 직전 타임아웃에서 당신이 마이클을 막으라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다음 경기에선 누구에게 조던 수비를 시킬 건가?”
퍼> 그랬더니... ?
G>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그는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난 그런 말 한적 없소. 나나 우리 팀은 마이클을 막을 수 없어요. 사실 그 누구도 마이클을 막을 수는 없지 않소?” 그러고는 고개를 떨군 채 회견장을 빠져나가더군요. 신임감독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좀 안 되어 보이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퍼> 영웅이란 으레 그런 것 아닐까요? 결국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주어진 건 대리만족 아니면 질투, 뭐, 그런 거 말고 또 있을까 싶습니다만...
G> 그래요.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콧대를 높이던 많은 NBA 스타들이 철저하게 스타일을 구겼습니다. 잠시 이야기했지만, 도미니크 윌킨스 역시 그런 피해를 봤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이들은 도미니크가 마이클에게 슬램덩크 트로피를 “도둑맞았다”고까지 말하는데, 그건 너무 심했고... 아무튼 당시 슬램덩크 챔피언 역시 마이클을 스타덤에 올리는 고비였는데 논쟁거리를 심심찮게 제공해주었죠. 당시 마이클은 50점 만점을 받았어요, 도미니크의 놀라운 덩크도 49.5점이나 받았죠. NBA에 슬램덩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던 닥터 J조차도 50점 만점을 받은 적은 없어요.
조던은 올스타전이 열리는 기간동안 개최되는 덩크슛 콘테스트에 3번(85, 87, 88년) 참가해서 두 번(87, 88년) 1등을 먹는다. 첫 출전이던 1985년에는 윌킨스에 패했지만, 1988년 재대결해서 승리한다. 그보다 1년 전인 1987년에는 윌킨스가 아닌 제롬 커시를 결승전 상대로 맞이했는데, 이때 그 유명한,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프리드로라인 덩크’를 선보인다. 당시 조던의 이 덩크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던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재현되었던(그것도 수우퍼 슬로우 모션으로!) 이 장면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라이트 형제의 꿈이 이제야 비로소, 그것도 제대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조상은 포유류가 아니라 조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서 숱한 인류학도들의 진로에 영향을 주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중력을 무시함으로써 무덤 속에 있던 아이작 뉴튼경을 무안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물리학의 역사에 있어서도 대사건으로 꼽을 만한 사건이었다. 아무튼 이 화려한 퍼포먼스는 그를 농구선수가 아닌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정말 멋지게 날아올라 화려한 날개짓과 함께 사뿐히 착지했다. 인터뷰어 역시 릴레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수백 번 그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지만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언제나 똑같았다.
“저게 인간일까...”
; 위의 사진은 ‘87년의 덩크’를 연속프레임으로 나눈 것이고, 아래 왼쪽은 확대, 아래 오른쪽 사진은 1988년 챔피언 획득 당시의 모습. 역시 프리드로우 라인으로부터 시작된 덩크슛이었다. 정지화면인 관계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래 왼쪽 사진을 자세히 보면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고 있는데(비디오를 보면 확인되지만 사실 그의 혀는 경기도중 쉴새없이 팔랑거린다...마치....), 이를 통해서 모자라는 揚力을 보충하고 있는 듯 하다.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이 노친네가 피곤한 기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른 만큼 좀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만 한다. 조던이 관련된 어떤 의혹에 대한 증거를 찾는다기보다는 J.G가 “전기작가가 된 기분으로”라고 강조할 만큼 그렇게 상세한 인터뷰가 필요한지를 사실 알지 못했다. ‘보고서’의 제목과는 달리 사실 ‘보고서’에는 조던 개인, 그리고 조던의 NBA 경력과 관련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피살사건, 나이키와의 계약관련을 제외한다면 조던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보고서’는 조던의 빽업사단, 즉 ESPN·NBC·CNN·Washington Post·New York Times 등의 미디어, 나이키·맥도날드·코카콜라 등 다국적 기업들, NBA·MLB·IOC 등의 스포츠마피아들이 어떻게 마이클을 이용하여 달러를 그리고 미국적 가치의 보편화를 달성해 나갔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농구인 마이클 조던을 제국의 전사로 활용한 것은 저들 백업사단의 사악함이지 조던의 사악함은 아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미국이 아닌 지역, 미국인이 아닌 인류로부터 달러를 강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혼백마저 빼앗은 건 저들 백업사단이지 조던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Mr. G와의 인터뷰는 조던에 대한 의혹을(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밝혀야 하는 인터뷰이기도 했지만, J.G의 의도를 알아내야 하는 인터뷰이기도 했다.
퍼> 그는 사실 뛰어난 테크니션일 뿐 아니라 자기관리에 철저한 선수였던 모양입니다. 열 세 시즌 동안 서너 달의 공백만 제외한다면 NBA에서 단 한차례도 결장하지 않았던 것은 믿을 수 없거든요.
G> 그럼요. 1985년 발목부상만 아니었다면, 칼 립켄 주니어만큼은 아니지만 또 다른 연속 출장 기록이 나올 수도 있었어요. 좀 아쉽기는 하지만...
1985-86 시즌에서 마이클은 부상을 당했는데, 그의 선수 경력에서 유일했던 장기 결장이었다. ‘좀 아쉽기는 했지만’이라며 말을 흐리는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미심쩍은 구석을 비친다. 그에게서 뭔가 또 다른 힌트를 얻어낼 지도 모른다.
퍼> 아쉽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의 부상과 관련해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도 있습니까?
G> 글쎄요, 알려지지 않았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으니까요.
주저하는 건 기억이 희미해서일까, 아니면 뭔가 숨길 것이 있어서 일까? 제기랄. 이래서 자료 조사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니까. 부상으로 장기 결장을 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어디에서부터 캐고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애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밖에.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입을 열었는데, 아마도 구체적인 날짜를 기억해낼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G> 1985년 10월 29일, 그러니까 조던의 두 번째 시즌(sophomore season)이었습니다. 불스의 시즌 세 번째 경기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Golden State Warriors)를 상대로 오클랜드 콜로세움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해에 불스는 커다란 변화를 시도했었어요. 신예 찰스 오클리를 영입하여 니어 포스트(near-post:골 밑)를 강화하면서 새롭게 시즌을 준비했었는데, 시즌 초반에 조던이 그만 부상을 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의 결장이 길어지면서 억지로 꿰맞춰진 듯한 느낌도 있었는데... 아무튼 당시 언론에서는 골든 스테이트와의 시합 이전에 이미 약간 부상을 당했던 상태라고 추측하기도 했어요. 음,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건 맞지 않는 추측 같아요. 당시 X-ray 촬영은 이상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10월 29일 경기에서의 부상은 좀 심각했습니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블러킹이나 스크린처럼 상대선수와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레이 업을 마치고 착지하는 동작에서 발을 잘못 디딘 것도 아닌데, 부상은 발목 부위였다는 점입니다.
퍼> 좀 자세하게 알려주시죠. 조던에 관해서는 화려한 플레이만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상 당시를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었습니다.
G> 그럴 겁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난 그 날 경기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마침 그 날이 공교롭게도 내 딸의 학예회 발표가 겹쳐져서 나는 오클랜드로 가지 못했어요. 신문사에서 호출이 와, 급하게 편집실로 달려갔어요. 거기서 부상장면을 뉴스로 볼 수 있었습니다. 스포팅 리뷰(sporting review)란 프로에 흘러나온 화면으로는 그저 하프코트(half-court)를 넘어서며 왼쪽으로 턴하던 그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으로 보였어요.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는 불스의 ‘야심찬 새 시즌과 플레이오프 진출 희망’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터라, 과연 그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가가 중요한 문제였지, 그가 왜 넘어졌을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에요. 내가 아는 스포츠전문 클리닉의 전문가도 의아해 하는 점이죠. 그도 그런 동작이라면 통상 하중을 받는 부위가 무릎이어서... 무릎부상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퍼>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NBA 각 구장에는 X-ray가 설치되어 있어서 곧바로 부상 부위와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G> 그렇죠. 물론 오클랜드 콜로세움에도 그 같은 시설이 있습니다. 그 날짜의 오클랜드 지역민방 뉴스는 조던의 X-ray 촬영 결과 큰 부상은 아니라는 단신을 타전하기도 했습니다.
퍼> 좀 혼란스럽군요. 조던은 결국 4개월 이상을 결장하지 않았습니까?
G> 정확하게 4개월 하고도 보름을 쉬었습니다. 시즌 전 경기(81게임) 가운데 64경기를 뛰지 못한 거지요.
퍼> 오클랜드 뉴스가 오보를 냈군요.
G> 네. 그 일로 담당기자가 즉시 교체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2002년 월드컵을 불과 한달 앞두고 월드 뺀질이 베컴의 발등부상이 영국은 물론 전세계를 발칵 뒤집었었다. 시사주간지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일간지, 타블로이드 신문, 공영방송 BBC는 물론 우리 나라의 뉴스에서도 베컴의 발등 X-ray 사진이 등장했었다. 조던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지명도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5년 언론의 ‘초동보도’(초동수사란 말은 들어봤어도, 초동보도란 말은 첨 듣네. 이런 말도 있나? 암튼...)에는 허점 투성이었다.
퍼> 그 경기는 물론 생중계되고 있었겠죠?
G> 물론입니다. 아마 시카고 지역 채널이 중계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하지만, 그날 저녁에는 CBS를 비롯한 전국 채널도 그 필름을 넘겨받아서 TV 전파를 탈 수 있었어요. 한데...
꼭 중요한 대목에서는 항상 “다음 이 시간에...”, “To be continued”란 자막이 나오듯이, 이 노 기자는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꼭 뜸을 들였다. 기자다운 얄미움이다.
퍼> 혹 그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갖고 계시면 보고 싶군요.
G> 글쎄 그게 문젭니다.
퍼> 네? 그게 문제라니요?
G> 어디에서도 그 비디오를 구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퍼> 호...
30분 쯤 전에 꺼내두었던 위스키 뚜껑을 그제서야 열었다. 스트레이트로 한잔을 들이키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G> 사실 난 얼음 없이는 안 마시는데, 여기 호텔 위생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한잔 하쇼.
퍼> 제가 술을 못하는 편이어서요. 전 그냥 생수를 마시겠습니다.
G> 뭐 좋을대로. 비디오를 구하려고 했던 때의 이야기부터 좀 자세하게 하지요. 조던의 두 번째 은퇴가 임박했던 1998년 8월 경에, 나는 “The Jodan Rules”와 같은 쓰레기가 더 이상 “우상 숭배!(worship for our hero)”를 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를 위한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다른 이야깁니다만, 그는 정말 몹쓸 사람이에요.
“The Jordan Rules”란 책은 조던이 NBA Championship을 처음으로 차지했던 90/91 시즌이 끝난 후 나왔던 소위 미국판 ‘그것이 알고싶다’ 스타일의 책이었다. 책 제목이 유래된 것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마이클의 경쟁자, 아이쟈 토마스가 속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수비작전이었다. 이 당시 피스톤즈는 훗날 조던과 같이 팀을 이루었던 로드맨을 비롯해서 아이쟈 토마스 등이 포진한 최강의 수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찰거머리 수비에 마이클 조던도 3년 연속으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
‘Jordan Rules’라는 명칭은 이 피스톤즈의 수비를 뜻했지만, 훗날에는 조던왕국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다.
한데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는 조던을 가장 가까이에서 취재했던(‘insider’ Mr. G는 저자인 Sam을 이렇게 불렀다) 시카고 트리뷴지(誌)의 샘 스미스(Sam Smith)였다. 기자치고 친구 많은 놈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무튼,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의 조던을 비난하기란, 사주(社主)의 명령을 어기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지금도 안티조선 아니 안티조던 싸이트를 찾는 것은 쉽지가 않은데, 당시로서는 조던을 비판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스런 일이었다. 조던은 위대한 플레이어이기도 했지만, 위대한 인간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단 한번도 약물이나 섹스관련 스캔들(물론 그 뒤에 한 두 차례 섹스비디오와 관련된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도 없이 이제 막 NBA 최고자리에 오른, 이 위대한 농구황제이자 찾아보기 힘든 ‘착한’ 흑인에 대해서 모든 미디어는 찬사 일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은 가장 가까운 인사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G> 아무튼, 당시 나는 제대로 된 마이클 조던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었어요. 85/86 시즌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중, 그 사건(부상)과 관련해서 언뜻 다시 한번 비디오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한데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어떤 방송국도 85년 10월 29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와의 경기 비디오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 없었어요. 물론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조던이 뛰었던 게임테잎이 100% 보관되어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없는 것도 꽤 될 겁니다. 하지만 그 경기는 빠질 수 없는 거죠. 당시는 조던과 관련된 것이라면 윙크 장면도 ‘상품’이 되는 ‘조던의 시대(Jordan's Era)’였거든요.
퍼> 이상하군요. 제 기억으로는 동료 선수들이 부축해서 걸어나가는 장면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만.
G> 물론 부상 직후를 비롯해서 그 경기의 다른 장면들은 여럿 찾을 수 있습니다. 유독 부상을 당하는 그 순간만, 그 장면만 증발해버렸어요. 하지만 더 기묘한 사실을 발견했어요.
Mr. G가 사안의 중대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대목에서 그가 위스키 잔을 비우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퍼> ...
G> 부상장면을 구하지 못한 저는, 오클랜드 콜로세움으로 찾아갔습니다.
퍼> X-ray 사진을 확인하려고 그랬군요. 꽤 철저하시네요.
G> 그런데 헛수고였죠. 팀닥터도, 또 X-ray를 비롯한 기자재관리 책임자 모두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빌어먹을 워리어 구단이 X-ray 필름조차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허탕만 쳤죠. 간 김에 오클랜드 방송국도 들러보았는데, 그때 그 오보를 냈던 그 기자도 퇴사한지 이미 오래였어요. 얻은 것도 없이 출장비만 날린 거지, 뭐. 그 뒤로도 한동안 찾아 헤메다 그냥 포기했어요. 조던 관련 자료는 너무 많아서 뭐 그것에 매달릴 순 없었으니까요. 곧 잊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퍼> 참 이상한 일이로군요. 98년 말고 85년 당시에는 왜 부상부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구할 생각을 못 하셨습니까?
G> 내 불찰이기도 했지만 사실 다음날 모든 게 분명해졌어요. 이튿날 그러니까 10월 30일이 되겠지요? 다른 기자들과 함께 담당 주치의의 기자회견장에 갔습니다. 그 병원에서 촬영한 CT 사진은 의사가 아닌 내가 봤을 때도 심각했어요. 발목뼈가 골절된 상태고 인대도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조던에게 85/86 시즌은 물건너 간 셈이었지요. 어떤 성급한 기자들은 조던과 같은 해에 드래프트 2위로 지명된 포틀랜드의 샘 보위(Sam Bowie)처럼 조던의 선수생명도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냄새가 났다. 아주 잔혹한 냄새였다. 직감이었지만, 오클랜드 콜로세움에서 촬영한 X-ray에는 발목부상 흔적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을 묻어버리기 위해서 부상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흔적을 깨끗이 지웠을 테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불쾌한 기운이 머리 끝에서 발끝을 훑고 지나갔다. 약간 취해가고 있는 Mr. G는 이런 나의 변화를 전혀 읽지 못한다.
퍼> ... 아무튼 그땐 바쁘셨겠군요. 불스 취재하랴 조던 상태 체크하랴...
G> 그랬죠. 바빴다기 보단, 추측기사 쓰느라 고생 좀 했지요.
퍼> 추측기사라면...?
G> 사실 조던은 부상기간 내내 거의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카고구단의 공보담당자한테 항의를 여러 차례 했지만, 뭐, 저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거대 언론사들조차 속수무책이긴 했지만요. 꽁꽁 숨겨두고는 도무지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땐 ‘조던이 완전히 갔구나’라는 기사에서부터 ‘실의에 빠진 조던, 도박과 술에 탐닉?’에 이르기까지 낯이 뜨거울 정도로 근거 없는 기사들이 버젓이 실리기도 했지요. 나는 결코 그러지 않았지만.
조던의 부상정도가 ‘증빙자료’에 의해 언론에 공개된 것은 부상을 당한 이튿날, 조던을 관리하고 있던 매니지먼트 회사(AmaServ Inc.)가 관계하고 있던 St. Jones Hospital의 담당의사에 의해서였다. 그는 깨끗하게 출력된 CT 사진을 늘어놓으면서 조던이 앞으로 3-4개월 정도 경기에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보고서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려고 찾아갔던 고등학교 동창놈(물론 이 놈은 정형회과 전문의는 아니다)의 말로는 골절은 X선 촬영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상식이라고 한다. 인대관련 부상이나 특별한 뼈 내부조직의 손상이 아니라 골절, 그것도 발목뼈와 같은 핵심부품(?)의 골절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CT를 촬영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일부 몰염치한 의사들이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CT촬영을 강권하기도 하지만. 슈퍼스타의 부상이니 X-ray촬영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한데 ‘정확함’ 말고도 X선과 CT(Computer tomography)의 차이는 또 있다. 전자는 아날로그 데이터이고 후자는 디지털 데이터란 점이다. 컴퓨터에서 재구성된 디지털 데이터는 출력하는 과정에서 교정이 가능하다. 일반 사진필름과 디지털 카메라 파일과 같은 이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보고서’에서는 85년 10월 29일의 부상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사라진 뒷 부분이 이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수수께끼는 최종 순간 풀렸다.
85/86시즌은 물론이고 어쩌면 선수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던 부상에서 조던은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4개월 보름 뒤, 그러니까 1986년 3월 15일, 밀워키 벅스(Milwaukee Bucks)와의 경기로 복귀한 것이다. 이 경기에서 그는 13분간을 뛰면서 12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한달 후, 앞서 언급했던 보스턴 셀틱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조던은 NBA 60년 역사를 새롭게 썼다. 플레이 오프 한경기 최다득점인 63점을 쏟아낸 것이다. 베일에 가려진 예수의 젊은 시절처럼, ‘은폐된’ 4개월 보름동안 그는 평범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 말 그대로 ‘神’이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그의 부상과 관련된 의혹들은 곧바로 잊혀졌는데,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그 날 밤 Mr. G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것은 ‘찢겨진 보고서 뒷부분’에 대한 수수께기를 풀어주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 부활의 전주곡 : 아버지의 죽음과 첫 번째 은퇴
; 조던의 부친인 제임스 조던의 생전 모습. 그는 1993년 8월 5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베넷스빌 근처의 늪지대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사망 당시 그는 57세였으며, 4만불짜리 빨간색 렉서스를 타고 있었다. 오른쪽은 조던과 그의 어머니.
조던의 강제 퇴장은 음모연합의 고심에 찬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심에 찬 결정’이라고 한 이유는 이 문제가 연합 내에 약간의 갈등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갈등의 발생원인에 대해서 ‘보고서’는 연합 내 산업부문의 가장 강력한 참가자였던 나이키와 나이키의 라이벌이었던 리복 사이의 ‘사소한’ 대립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리복이 연합 내로 새로이 진입하려 했음은 확실했는데, 그것이 불가능 할 경우 연합 전체의 안정을 해칠 우려도 있었다. 연합의 이데올로그들은 이 산업대표들의 아둔함과 사려깊지 못함을 매우 우려했는데, 조던의 강제퇴장은 급작스럽고도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몇 차례의 논쟁이 있었음은 불보듯 뻔할 테다. 가려졌거나 혹은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었던 마이클에 대한 ‘세속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의 도박 전력은 오래 전부터 감지되고 있었지만, 엠바고는 철저히 준수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사인을 내렸는지 알 수 없어도 엠바고는 그의 강제 은퇴 직전에 해제된 듯 했다. 도박, 여자, 마약과 관련한 추문들이 발행부수와 신뢰도가 떨어지는 매체에서부터 서서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타블로이드 신문의 르뽀를 인용하여 메이져 매체들이 ‘우상파괴작업’에 돌입할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 즈음에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 조던(James Jordan)이 실종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안으로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기자회견에서 조던은 농구코트를 떠나기로 했다는 결심을 덤덤하게 발표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첫 번째 은퇴는 Mr. G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그가 시계를 못 보게 하려고 시계를 등지게 한 채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벌써 시간이....’란 말이 나올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질문거리는 더 많이 남았지만, 서둘러 중요한 문제로 들어가기로 했다.
퍼> 첫 번째 은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죠. 그도 역시 인간이었나 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쇼크를 감당하기 힘들었겠지요?
G> 그랬겠죠. 그래도 조던의 첫 번째 은퇴는 여러모로 논란거리였습니다. 그는 이제 막 자신의 전성기에 접어들었던 젊은 선수였어요. 불과 서른 한 살의 나이에 그가 은퇴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퍼> 농구담당 기자셨으니까, 조던 부친의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직접 취재하시진 않았겠습니다.
G> 네. 그렇지만, 그 때가 비시즌이어서 비교적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퍼> 제게 말씀해주실 특별한 이야깃거리라도 혹 있을까요?
G> 글쎄요... 아시겠지만 제임스 조던(James Jordan, 마이클 조던의 부친)은 실종된 지 2주 만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베넷스빌 근처 늪지대에서 부패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한데 형사사건이 늘 그렇지만 의혹투성이의 사건이었습니다.
퍼> 어떤 점이 그랬습니까?
G> 평결을 받았던 당시(1996년)엔 물론 스무 살이었지만, 살인을 저질렀던 때 범인들은 겨우 17살과 16살짜리였어요. 이들이 살인광처럼 살인비디오와 제임스 조던의 장신구들을 걸치고 미친 듯이 찍어댔다는 비디오 증거자료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말이 많았지요. 너무 충격적이고...
짧은 조사기간 때문이었다. 조던의 부친살인사건에 대해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Mr. G는 나의 준비부족을 탓하지 않고 사건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G> 제임스 조던이 실종됐던 건 92/93시즌이 불스의 우승으로 끝난 한달 뒤인 1993년 7월 22일 입니다. 물론 7월 22일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실종’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던 건 그(제임스 조던)가 가족들과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곤 했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조던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不在를 ‘실종’이라고 부르지 않았지요. 아무튼 7월 22일 마지막으로 조던의 동생과 전화통화를 한지 2주 후인 8월 5일 그의 자동차가 발견됐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지요. 시체는 자동차가 발견된 지 8시간 만에 찾았습니다. 곧이어 주변에 살고 있던 그린(Daniel Andre Green)과 데메리(Larry Martin Demery)라는 두 명의 십대가 체포됐어요.
퍼> ‘곧 이어’(soon)라고 하셨는데, 몇 일만에 체포됐나요?
G> 몇 일이 아니라 두 시간 뒤였습니다.
퍼> 호.... 그렇게나 빨리?
G> 아시다시피 경찰들은 언제나 ‘우범자 명단’(usual suspect)을 갖고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 점이 이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의혹이기도 합니다. 로스쿨의 토론주제로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지요.
퍼> 어떤 의혹인가요?
G> 평결에서 결국 주범으로 몰려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다니엘 그린을 체포하는 과정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린은 명백하게 자신이 ‘살인용의자’로 연행되고 또 심문받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심문당했습니다. 명백한 경찰의 위법행위였습니다. 그린의 변호사였던 보웬(Woodberry Bowen)은 심리 내내 이 점을 강조했고, 또 항소심을 담당했던 재판장 역시 경찰의 어리석은 행동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퍼> 그런데...?
G> 노스캐롤라이나 항소법원은, 체포당시에 그린을 체포했던 경찰이 ‘미란다조항’을 피의자에게 진술하지 않음으로서 그린의 권리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논쟁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재판장의 재량이긴 합니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판결이었어요.
퍼> 경찰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더 이상한 건 그린이나 그린의 변호사는 왜 1심 재판에서 그 같은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G> 경찰이란 집단이 원래 그렇습니다. 소나 돼지 잡을 때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 것처럼 범죄자들에게 그딴 ‘예의범절’이 무슨 소용 있겠냐 라는 거겠지요. 물론 피의자가 ‘피의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겠지요. 방심하라는 거지요. 그린의 변호인측이 경찰의 이 ‘불법행위’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인해줄 결정적인 증인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 알리바이요? 그럼 그린이 무죄란 말씀인가요?
G> 하하. 물론 그건 아닙니다. 그 증인은 결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퍼> ...?
G> 차근히 설명드리지요. 애초 그린이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행하는 과정에서 담당 수사관은 그린에게 “이건 체포나 연행이 아니고 그냥 대화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답니다. 물론 그건 진심이었을 수도 있고, 또 연막전술일 수도 있습니다. 연행 당시 그린은 술에 취하거나 마약을 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경찰은 그에게 수갑을 채우지도 않았고 심지어 친절한 말로 함께 식사하자고 권하기도 했어요. 이 우호적인 대화(?)과정에서 그린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2시간 동안의 대화가 사실상 검사 측의 피의자 진술 토대를 구성했는데,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그린이 변호사를 요청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지요. 문제는 그의 알리바이였습니다. 그린은 이미 전과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파고드는 수사관의 질문에 얼버무렸던 모양이에요. 제임스 조던이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그린의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았던 겁니다. 진술 조서에서 그는 서너 가지 다른 이야기를 했어요.
퍼> 그럼 그 알리바이를 확인해줄 증인이란 것도 거짓이군요.
G> 만약 그린과 보웬(그린의 변호사)이 타고난 연기자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시각(제임스 조던의 사망시각)에 그린은 집에서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시각에 집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여럿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증언은 아무래도 신뢰가 떨어지지만 연기처럼 사라진 증인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린과 그의 변호사는 이 사람의 진술만으로 충분히 무죄를 입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고.
퍼> 알 수 없군요. 그 증인이 진짜일까요?
G> 글쎄요. 재미난 것은 첫 공판에 변호인 측 증인으로 출석예정이었던 사람은 증언 직전 이름을 무슬림식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바꾼 이름이 Lord D.A.A.S. U'Allah라고 하더군요. 그 전에 그 인물이 누구였는지 본명이 무었이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그러니까 예정된 공판에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은 채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퍼> 네? 사라졌다구요?
G> 네. 정말 연기처럼요. 증인이 없어진 사실을 안 그린과 보웬의 표정은 정말 보기 안스러웠지요.
‘조던프로젝트’를 추적하면서 정말 많은 연기를 보았다. 미스터 트로이도 그랬지만, 정말 많은 인물들이 연기처럼 사라져갔음을 알 수 있었는데, 우알라(?)라는 인물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증인은 아마도 사소한 범죄, 마약거래나 절도 등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재판정에 출석할 때까지 증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배려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를 납치하거나 혹은 빼돌린 집단이 ‘보안’을 위해서 내린 예방조치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린의 무죄를 석명해 줄 결정적인 증인은 그 후로 지금까지도 행방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철석같이 믿었던 증인이 사라지는 통에, 그린의 혐의는 더욱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초기 그의 진술은 두 가지 방향에서 배심원단으로 하여금 유죄평결을 내릴 수 있게 하였는데 알리바이에 대한 엇갈린 진술, 이는 그린 자신의 알리바이 주장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렸는데 결국 그린이 주장했던 이 증인 역시 ‘가공의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 알리바이를 제외한 모든 초기의 진술, 즉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던 경찰 조사의 진실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주로 살해 장면을 담고 있는 비디오에 찍힌 그린의 행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린보다 약 한 시간 먼저 체포된 데메리의 집에서 16mm 비디오 테이프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테이프 속에는 제임스 조던을 살해하는 장면과 함께 데메리와 그린이 제임스 조던의 장신구(목걸이, NBA챔피언 반지, 손목시계 등)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린은 법정에서 그 물건들이 제임스 조던의 물건인지의 여부는 알지 못했으며, 더구나 살해장면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제임스 조던의 물건은 주인 없는 차에서 발견한 것이었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NBA 챔피언 반지를 보고서야, 반지의 주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게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은 기각되었다. 결정적인 반대증거는 공범이었던 데메리란 청년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G> 그린과 달리 데메리는 공판 초기부터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 것은 그린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법정에서 채택된 비디오 테이프는 크게 두 장면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제임스 조던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장면이었고, 뒷 부분은 그린과 데메리가 번갈아 가면서 제임스 조던의 소지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부분이었어요. 비디오 테이프에 찍혀있는 시간을 보면, 두 부분 사이에는 약 4시간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퍼> 살해된 장면에 범인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군요?
G> 그렇습니다. 재판정은 최고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범인의 모습을 가려내려고 노력했는데, 불행하게도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데메리와 그린이 살인범이라는 걸 추측케 하는 테이프였어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사람을 쏜 후 랩송을 틀어놓은 채 망자의 소지품을 걸치고 춤추는 살인마들이 10대라는 사실이 우리 모두를 전율케 만들었지만 말입니다. 핸드폰 통화기록을 조사한 결과 그린은 제임스 조던의 핸드폰으로 폰섹스까지 즐겼다는데... 그 시간은 놀랍게도 살해한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세상 참 말세죠. 결국 배심원단은 무죄를 주장하는 이 신뢰할 수 없는 흑인 전과자의 말보다는, 불쌍한 표정을 자주 지어서 어떤 때에는 병자처럼 보이던 백인 청년의 고백을 따랐습니다.
퍼> 데메리가 백인이었습니까?
G> 네. 그는 과거도 깨끗했고, 또 나이(사건 당시 그린 보다 한 살이 많은 17세였다)보다 훨씬 늙어보였지만 전형적인 모범생 백인의 모습이었어요.
; 1996년 제임스 조던 살인사건 재판정에서 촬영된 다니엘 그린(왼쪽)과 래리 데메리(오른쪽). Mr .G의 말처럼 데메리의 얼굴은 도무지 스물 한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안(老顔)이다. 게다가 ‘얍실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건의 구성은 그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데메리는 그린의 단독범행이었다고 주장했더라도 풀려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 유죄를 인정했고, 그럼으로써 그린의 유죄는 더욱더 확실해졌다.
퍼> 살인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G> 단순 강도였습니다.
퍼>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전과도 없는 착한 백인청년이 흑인친구를 따라 단순강도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단 말인가요?
G> 뭐, 그 점이 참작되어서 데레미의 형량이 많이 낮춰졌죠... 결국 증거가 너무 뚜렷했어요. 테이프도 그렇고, 또 그린의 집에서 발견된 NBA 챔피언 반지도 그렇고. 사람이란 알 수 없는 동물 아닙니까? 그렇게 순박해 보이던 심슨이 마누라와 정부(情夫)를 그토록 참혹하게 살해하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어요? 참, 그리고 데메리와 그린은 친구사이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쯤 전에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라고 하더군요.
한동안 외신으로 떠들썩했던 O.J심슨의 아내와 정부에 대한 살인사건은 결국 무죄로 판결났지만 아직도 심심찮게 기사화되는 사건이다. Mr. G는 O.J 심슨이 살인범이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 1994년 6월 12일, 오제이 심슨의 아내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정부 로널드 골드먼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며칠 뒤 심슨은 두 사람에 대한 살해혐의로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체포되었다. 왼쪽 사진은 체포 직후 LA PD에서 촬영한 ‘피의자 심슨’, 오른쪽 사진은 LA 하이웨이에서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심슨의 자동차.
그린은 현재 할리팍스 카운티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교도소 내에서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당했고, 그 와중에 12번 이상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폭행사건에 관련되어 있다. 조던이라는 슈퍼스타의 가정에 위해를 가한 인물인 만큼 조던의 팬들이 그를 공격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거듭되는 살해위협에도 불구하고 할리팍스 카운티 교도소 당국은 그린에 대한 보호조치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고 하는데, 그린의 가족들은 그린이 시체가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절망하고 있다. 한편 데메리는 살인공범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수감하고 있으나 전과가 없으며 또 모범수 추천을 여러 번 받은바 있어 머지않아 가석방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반복되는 언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노스캐롤라이나 주법원은 데메리가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의 공개를 거부하였다.
‘보고서’는 제임스 조던의 살인범 데메리와 그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단지 진정한 제임스 조던의 살인자는 ‘음모연합’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음모연합’ 가운데에서도 나이키의 고집을 꺽고 조던의 ‘조기퇴장’을 집행하려는 ‘非산업대표’들이었다. Mr. G는 ‘연대’에 소속된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아닐 가능성이 훨씬 많을 것이다. 아무려면 J.G가 첫 번째 인터뷰이부터 ‘내부인사’를 추천했을 리는 없을 테다. 그는 나를 조던의 전기작가로 알고 있으니 섣부르게 탐정의 흉내를 낼 수는 없다. 그린이 억울한 혐의를 썼을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인터뷰 자리에서 그의 무죄를 공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외 조던의 퇴장과 관련한 몇 가지 단서를 더 확보한 뒤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JG가 보내온 이메일의 내용을 인터뷰 내내 잊지 않았다. 그는 말미에 ‘조던프로젝트’는 ‘스카이 워커 프로젝트’였음을 강조했다. 그 내용을 Mr. G에게 꺼낸다는 게 못내 꺼림칙했다. 하지만, 그가 애써 강조한 걸 보면 Mr. G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얻어내야 할 무엇인가가 그 속에 담겨져 있음은 분명하다. 빈 잔을 채우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퍼> 시간이 많이 흘렀군요. 혹... Sky-Walker Project라고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 그는 마치 얄밉게 달아나려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G> 스카이 워커라... 루크 스카이 워커(Luke Skywalker) 그래, 그래... 마크 해밀... 얼굴 뒤에 감춰진 또 다른... 맞아! 한데 스카이 워커 프로젝트라고?
퍼> 네. 스카이 워커 프로젝트.
G> 글쎄 그건 처음 듣는 소리군. 참, 아까 그 루카스 감독 스튜디오 말이에요.
퍼> 네, 조던 데뷔경기 때 잭 니콜슨 이야기를 하셨었지요.
G> 그 스튜디오 이름도 ‘스카이 워커’에요. 스카이워커 농장(Sky Walker Ranch)이지요.
퍼>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사진 왼쪽은 1977년 개봉된 스타워즈 시리즈의 주인공 마크 해밀(Mark Hamil)이다. 1951년 캐나다 태생인 그는 혜성처럼 나타나 최고의 흥행배우 반열에 올랐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전무후무한 대히트에 따른 잇단 출연제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후 단 한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은 채 잠적하였고 이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오른쪽은 스카이워커랜치의 위성사진. 1970년대 중반까지 이 지역은 1급 비밀로 분류되어 있던 美 국방성 산하 군사기지였다. 반경 10km가 비행금지구역일 뿐 아니라 촬영이나 방문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대지 임대와 관련된 국방성과 조지 루카스의 비밀계약 이후에도 상공비행·접근·촬영 금지조치는 해제되지 않았다. 사진은 러시아(구 소련)의 사설정보업체가 걸프전 직후(1992년 초) 공개한 것이다.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보다는 G의 얼굴에 떠올랐던 득의의 표정이 무엇인지가 중요했다. 그의 기색을 살피느라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이야기는 다시 그가 먼저 시작했다.
G> 자넨 기자다운 철저함을 갖췄구만.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거 같단 말야. 크하하.
웃음소리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앞에 놓인 위스키 병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G> 아무튼 놀라운걸. 그건 조던 데뷔쯤 NBA에 관한 기사를 썼던 워싱턴 위클리 리뷰(WashingtonWeekly Review) 지(誌) 기자가 데뷔 시절 조던에게 붙여줬던 별명입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뭐, 곧바로 나이키 에어시리즈가 나오는 바람에... 조던은 곧 에어라고 불리웠지만, 그건 너무 돈냄새가 많이 나는 별명이죠. 하지만 뭐, 미디어의 위력이 워낙 크니까 우린 금방 에어라는 별명에 익숙해졌죠.
퍼> 조던의 별명이 스카이 워커라구요?
G> 네. 초창기에 기자실에선 항상 그렇게 불렀죠. 에어조던 시리즈가 활개치기 전에는. 그게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튼 스카이 워커라고 불렀어요. 내가 가장 권위있는 조던 담당 기자였으니까. 사실 워싱턴 위클리 리뷰의 그 기자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거든요. 나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어서 종종 그렇게 불렀죠.
퍼> 나이키 에어시리즈가 85년도였던가요? 84년인가?
G> 그쯤 될 겁니다. 아무튼 그 기똥찬 신인에게 적당한 별명을 찾다가 스타워즈 주인공 별명을 붙여줬어요. 수명이 채 반년도 못 채운 별명이지만. 웃긴 건, 1988년도에 조던이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했을 때, 흥분한 ESPN 앵커가 그렇게 외치던 기억은 납니다. “와우,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정말 허공을 밟고 날았어요(Unbelievable! He, a sky-walker, was flying)!” 그 친구 그 뒤로 아마 짤렸다죠. 하하.
퍼> 그 사건 때문에 해고당했다는 뜻인가요?
G> 이 친구 정색하기는. 아니 그냥 그 다음 핸가 그만뒀다고 들었어요. 참 별명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던이 야구할 때 별명이 뭔지는 알죠? ‘정체불명의 사나이’란 뜻의 킬로이(Kilroy)였답니다. 누가 그렇게 붙여줬는진 몰라도.
‘아항, 그래서...’
보고서의 원래 제목이 ‘A Brief about Sky-Walker Project, manipulated by Conspiracy Union’인 이유는 사실 ‘보고서’ 안에도 어느 정도 설명되어 있다. 1970년대 중반, 새로운 세계지배전략을 구상하던 ‘음모연합’은 영화와 스포츠라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인종적·종교적 저항을 비교적 덜 초래할 두 가지 무기를 구상했다. 쿠데타와 비밀작전(covert ops), 암살과 정부전복 등과 같은 낡은 전략을 여전히 고수하고자 했던 구(舊) 지배집단(the ex-Establishment)과 결별한 그들은 전혀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는데, 그것이 스타워즈와 마이클 조던이란 구체적 수단으로 확정된 것은 1975년과 1980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누가 되었건 그 성(姓)은 이미 ‘스카이 워커’로 정해져 있었다. 잘 아시다시피 ‘성’이란 낳아준 사람의 것을 따르게 되어 있고, 또 형제지간의 성이 다를 수 없음은 상식이다. 한데 77년 개봉된 스타워즈 주인공에게는 ‘루크’라는 이름이 주어졌지만, 82년 NCAA 결승전의 기적같은 버저비터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던 마이클 조던에게는 다른 이름이 할당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타워즈와 마이클 조던이 형제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J.G가 이 점을 강조한 이유는 스타워즈와 마이클 조던 사이에는 ‘보고서’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추측이 여기에 이르자 조던에게 그 별명(사실은 본명이지만)을 붙여주었다는 워싱턴 위클리 리뷰의 기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퍼> 워싱턴 위클리 리뷰의 그 친구분과는 아직 연락이 되시나요? 가능하면 다음 미국 출장 때 그 분을 좀 뵙고 싶습니다만.
G> 참 지독한 친굴쎄. 조던과 관련된 일이라면 북극에라도 갈 태세구먼. 한데 안됐는걸. 그 친구 심장마비로 죽은 지 얼마되지 않는다네.
퍼> 네? (벌써 죽였어?)
G> 나이에 비해서는 건강한 친구였는데 안됐지. 등산하다 갑자기 그랬다는군.
퍼> 그게 언제쯤입니까?
G> 그러니까... 작년, 아니 재작년이었을 걸세.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내 수첩 어딘가를 살펴보면 금새 알 수 있으니... 잠깐 기다리게나... 98년 2월 달이었구먼. 2월 16일날 연락이 왔었어.
퍼> 장례식엔 참석하셨나요?
G> 물론이지. 시즌 중이라서 좀 바쁘긴 했지만 가봐야할 친구였으니까. 아무리 전기작가라지만 그 친구에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건 좀 그런데... 나 정도 되니 이해하지, 딴 사람 같았으면 편집증환자라고 나무랄지도 모르이. 크하하... 농담일쎄.
갑자기 장준하가 생각나면서 뒤통수 주변이 다시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1998년 2월이면, J.G와 Mr. 트로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시점이다. “쫓기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만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J.G는 트로이를 만났을 당시 그가 ‘연합’의 더듬이에 이미 걸린 상태임을 직감했었다. 보안은 어디선가 샜고, 워싱턴 위클리 리뷰의 기자도 그 와중에 희생된 것이다. 두 명(물론 지금까지 확인된 희생자 숫자에 불과하지만)의 죽음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둘을 잇는 공통점은 무얼까?’
G> 이봐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나? 시간이 많이 지났는걸.
퍼> 그 분은 언제부터 농구를 담당하셨었나요?
G> 내가 졌네, 내가 졌어! 하하. 사실 그 친구는 농구담당은 아냐. 사실 첫 경기 상대가 워싱턴 불릿츠였기 때문에 그 친구가 관심을 가져서 칼럼을 하나 쓰긴 했지만, 그 친구는 과학전문기자였어. 기자 치곤 학벌이 좋았어. MIT 출신이니까.
퍼> 과학전문 기자요?
G> 그랬지. 주로 나사(NASA)관련 취재를 했었어. 워낙 안목이 있는 친구라서 과학원리같이 따분한 기사가 아니라 정부의 과학관련 정책비판이나 나사의 정부예산 전용문제 같은 사회문제를 많이 썼지. NBA 뿐만 아니라 그 친군 영화평도 썼고 이런 저런 글들을 많이 썼던 편이야. 나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기자라고 할 만 하거든. 이 친구야, 벌써 시간이 5시가 다 되어가네. 시계를 등지게 앉혀놓으면 뭐하나. 탁자 위에 자네가 내려놓은 핸드폰 창에 시간이 대문짝만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말야. 크크크.
피곤한 탓도 있었겠지만 위스키 한 병을 모두 비운 그를 상대로 더 이상 인터뷰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서 들을만한 이야기는 모두 녹음된 상태였고. 간간히 메모를 하던 노트를 덮는 순간 취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모양이다. 오랜 비행과 시차는 그런 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고개를 소파 뒤로 젖힌 채 주정인지 한탄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였다. MD의 녹음버튼은 아직 끄지 않은 상태였다.
G> 조던에 대해 알아 갈수록 자네도 그렇겠지만 말야... 농구란 아니 어떤 스포츠건 간에... 근본적으로 스포츠는 불공평한 게임이야. 안 그래? 그렇고 말고... 룰이란, 모두가 다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거든... 생각해 봐. 전부 똑같아서 서로 구분이 안 되는 분자들(molecules)한테 무슨 룰이 필요하겠어? 끄억~... 그 고약한 계몽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평등이네, 뭐네, 하는 헛소리들 말이지. 거 참 말이 안되지... 모두 개소리야. 생각해 봐. 저 껍데기들을 보라고. 권리장전(Bill of Right)이네, 인권선언이네, 하는 것들. 정말 화려한 레토릭들이지. 암... 결국 우린 불평등에 열광하는 거라고. 자네나 나나 6-7피트 상공을 자유롭게 날아서... 링 속으로 공을 집어넣을 수 있겠나? 이런 젠장... 비행기에서 위스키를 좀 가져왔어야 하는데... 마이클처럼 공을 한 손에 쥐고 하늘 높이 날아 ‘공중에서 차 한잔’ 마신 다음 유유히 착지하는 묘기를 부릴 수 있겠냐 말이야? 검투사들을... 사자와 함께 풀어놓고 열광했던 로마인들이나... 검둥이들이... 경공술을 부리듯 코트 위를 날아다니는 걸 즐기는 우리는 모두 약한 자를 경멸하고픈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일 뿐이라고... 코트 위의 법칙은 단순해. 열등한 유전인자를 전수 받은 키 작은 놈들은 끼어들 수 없어. 오로지 크고 강한 종들, 그리고 날쌘 놈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지...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핫핫... 물론이지... 위대한 농구의 神 앞에 우린 모두 평등해... 그를 ‘경배해야할’ 평등한 의무가 있다고... 개새끼들! 커~~억... 커~~억...
기자들 주사에는 국경도 없구만. 뻗어버린 그를 침대에 누이고 감사메모를 남긴 채 숙소로 돌아왔다. 뒤를 흘끗흘끗 돌아보면서... 짐작은 했지만 인터뷰는 더 많은 수수께끼를 던져놓았다. 노트북에 몇 가지 메모를 남겨본다.
* 우선 조던을 관리했던 Fallk의 행적에 대한 조사가 필요함. 아울러 그가 소속되었던 매니지먼트 회사가 엘살바도르(혹은 다른 남미국가)에서 수행했던 비밀작전의 내용도 체크할 것.
* ‘경기선택조항’에 담긴 ‘연합’의 의도는 무엇인가...
* 왜 그 많은 NBA의 슈퍼스타들은 조던에게 머리를 조아렸을까... 왜 안 개겼지? 자존심도 없는 쉐이들...
* 증발된 136일. 1985년 10월 30일에서 1986년 3월 14일까지...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를 유폐시킨 자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머리카락 보일까봐’ 꼭꼭 숨겼을까? 어차피 머리카락도 없는 대머리였는데... 아차차... 부상 당시 조던은 아직 삭발하지 않았음. 언제 삭발했지?
* 조던은 왜 은퇴를 거부했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자초했는가? 반드시 제임스 조던을 살해해야만 했을까? 이 소심한 제국주의자들에게 겁을 줬던 사건은 뭐였을까...
* ‘연합’내의 세력구도는? 산업대표와 비산업대표?
* 워싱턴 위클리 기자의 글에 대해 조사가 필요함. 그와 Mr. 트로이를 잇는 공통점은? 스카이 워커? 과학? 공대출신? 사망한 시기? 무엇이건 관련된 것은 모두. . .
* ‘새로운 제국의 戰士’란 공통점 말고 조던과 스타워즈는 어떤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가?
* 잭 니콜슨은 왜 조던의 개막식에 참가했을까? 그가 원탁회의에 참가한 것은 ‘Project I’와의 관련때문이었는데... 조던과는 무슨 관계일까? 또 조던과 루카스 그리고 스파이크 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 미디어를 통제하고, 판사에 압력을 가하고, 지방 경찰을 움직임. 야전에서 뼈가 굵은 작자들...
* 그리고... 광석이는 왜 그리 일찍 죽었을까... 설마 놈들이 광석이까지?
갑자기 김광석의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비몽사몽 간에 인터뷰에서 미진한 부분을 정리하는 동안 MP3에서 그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잠이 들기 직전 갑자기 화난 부장의 얼굴이 떠올라 화들짝 깬다.
이종범은 개뿔 무슨... 박정태라믄 또 몰라도. 아무튼 돌아가서 깨질 각오는 해야했다. 왕복 비행기삯과 숙박료로 한달치 월급에 달하는 출장료를 타내기 위해 이종범과 인터뷰 약속이 되어 있노라고 사기를 쳐야했었다. 1년 내내 퇴출위협을 가하던 쩍발이들의 추잡한 심리전에도 불구하고 주니치 드래곤즈 잔류가 결정된 터라 이종범의 골수팬이었던 부장은 쉽게 속아 넘어갔었다.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하고... 인터뷰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을 때 더 많은 아이디어를 메모해보려 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이었다. 혹 분실이라도 될까봐 녹음된 MD를 트렁크 깊숙한 곳에 숨기고 이내 잠이 들었다.
이틀 뒤 출근한 서울 사무실의 컴퓨터에는 J.G의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고했던 것처럼 다음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일주일 쯤 후, 미국출장과 관련된 나의 인터뷰기획 보고가 있었던 편집회의 이후로 부장에게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비단잉어’ 직원들끼리는 ‘붕어’라고 불렀지만 부장 앞에서는 업그레이드 시켜서 ‘비단잉어’라고 불렀다. 사실 잉어나 붕어나 기억력이 3초를 넘기지 못하니까 크게 상관은 없다. 그 날의 편집회의 시작부터 일본출장비를 허탕쳐버린 내 보고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부장은, 회의 말미 반색하면서 [미주원정인터뷰계획]을 승인했다.
첫댓글 좋은 자료군요..몇몇분들..조던시대때는 경쟁자가 없어서 조던이 날려다녔다.이런 말 하시는 분들. 이글좀 읽어보셨으면..닥터 제이, 래리버드, 매직존슨, 아아자야 토마스..등등 지금의 난사형 포스트조던들과는 무게부터 다른 경쟁자들이 당시에도 즐비했습니다.
재밌는 소설이네요.. 어디서 퍼오신건가요?? 아니면 혹은 직접쓰신건가요?? 개인적으로 이런류의 글들을 너무 좋아합니다. 더 읽고 싶은데...
오.,추리 소설 분위기도 나고 흥미있는데요? 어디서 좀 더 가져오실수 없을까요?
근데요..90년대면 팀던컨도 MVP 받지 않았나요?? 99년에..아!! 태클은 아니에요..(())
조던 데뷔할때 유나이티드 센터가 있었나?? 아닌듯..^^ 전 스타워즈 광팬인데 조던이랑 이런식으로 연결 되는군요.. 잼있었습니다~!
브렛 하트의 멘트를 조던이 인용한건가요 조던의 멘트를 브렛이 인용한건가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