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 피맛골 열차집
몇 십 년 외국생활하다가 갓 돌아온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하고 싶을까. 장담할 수 있다. 그가 뉴요커였건 유러피언의 고급문화를 누렸건 혹은 티베트 고원이나 마추픽추 산간 오지에서 은둔자의 비경을 경험했건 결론은 하나다. 순수 토종 오리지널 김치찌개, 된장찌개 또는 짜장면! 아마도 허겁지겁 어릴 때 먹거리를 찾아 헤맬 것이 틀림없다.
맛의 기억이란 참 끈끈한 것이다. 이런 증상이 세계 어느 민족과 비교해도 유독 한국인에게 심하다는데 요리 연구가 한복진 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게 통증의 기억이란다. 짜고 매운 강한 맛은 혀에 가하는 구타와도 같은 것인데 그걸 그리워한단다. 어릴 때 매 맞은 일을 그리워한다는 뭐 그런 해석?
꼭 외국생활을 하다 온 것이 아니어도 그리움을 안겨주는 옛맛의 추억은 참 많다. 어머니 손맛에서부터 학창시절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까지. 맛의 기억이 장소의 기억과 결합하면 사태가 좀 복잡해지는 것이어서 가령 똑같은 음식이 나와도 '그때 그 맛이 아녀…' 하는 한탄이 나오기 일쑤다. 장소뿐이겠는가. 지나간 음식에 그리움을 품을 때면 이미 폭삭 나이를 먹은 거다. 누구도 재현해 줄 수 없는 개인적 추억이 결부된 혀의 고집을 어찌 충족시켜 줄 수 있겠는가.
늘 새롭게 태어나듯이 오직 현재만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좋으련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기억을 품고 산다. 그 기억이란 자신의 정체성과 다름없는 것. 그런데 기억을 부수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어찌 이리도 많을까. '제발 부수지 좀 말라!'라는 제목의 격한 칼럼을 썼던 적도 있다. 서울시청 신청사를 지으면서 옛 건물을 허물어 버린다는 뉴스를 접하고서였다. 경제성, 도시미관 운운하는데 그럼 차라리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까지 다 밀어버리고 고층빌딩을 지을 것이지.
피맛골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피맛길이라고도 부르는 광화문 교보문고 후문 앞에서부터의 긴 음식점 골목길 이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관대작 행차에 '아랫것'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읍례해야만 했다. 꾀를 냈다. 행차를 피해가는 뒷길을 만들자. 요즘으로 치면 피마(避馬) 대신 피차(避車)의 통로다. 전쟁이 끝나고 번성하는 서울의 중심지가 이 부근이었다.
회사라는 것이 엄청나게 생겨나 '직장생활'이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생긴다. 퇴근 후 한잔. 이 신풍속도의 주역이 피맛골이었다. 이곳에 남다른 평판이 따른다. '모든 집이 다 맛있다'라는 것. 빈대떡에서 순대, 생선구이, 골뱅이까지 거의 모든 종목의 서민음식이 집집마다 각각 '전문'의 이름으로 다채롭게 펼쳐졌다는 것.
싸고 맛있고 다양하다는 것이 신 고관대작의 눈에는 더럽고 우중충하고 미개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속내야 끔찍한 땅값의 유혹이었겠지만 소위 도시미관의 이름으로 그 역사 공간은 속절없이 헐려버렸다. 어느 날 부서지는 길목 앞에서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전통 토속어를 사용해야 했다. "썅!"
내 평생의 데이트 장소가 딱 세 군데다. 청계천 부여집, 충무로 영동 골뱅이집 그리고 피맛골 열차집. 돼지곱창, 골뱅이, 빈대떡만으로 일생의 모든 여인을 커버했다. 그 특유의 불결함이나 주변 탁자에서 연신 들려오는 "씨부럴!" 따위의 민속 간투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인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털어놓자면 한남동 유엔빌리지 두 채를 개인 작업실로 쓰는 귀족여인과도 언제나 돼지곱창전문 부여집만 다녔다.)
그런데 열차집에는 좀 특별한 사정이 따른다. 내 비록 그랩(grab)의 추문까지는 아니어도 별별 밝힐 수 없는 비밀이 많건만 열차집에서만은 결백하다는 사실. 결혼생활 20년, 그 이전의 데이트 5년까지 합해 열차집은 주야장천 오로지 아내하고만 다녔다. 엄마들 때문이다.
손맛에 마음씨까지 좋은 할머니가 차려주는 식당이 제법 있지만 절대로 종업원이 바뀌지 않는 열차집 분위기는 좀 남달랐다. 손님 대하는 '뽄새'가 영업용이 아닌 가정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하는 분 전원이 집안 친척 간이었다. 내가 누구랑 사귀는지 뻔히 아는 그 집 엄마들에게 차마 다른 여인을 데려갈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갈대 같은 사내를 자동으로 순정파로 만들어 버리는 그곳 분위기가 좀 그랬다는 말이다.
열차집은 빈대떡집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야 한다. 열차집은 어리굴젓으로 먹는 빈대떡집이다. 젓가락으로 넓게 자른 빈대떡 토막에 어리굴젓을 올리고 그 위에 간장에 담근 날 양파를 얹는다. 한 가지라도 빠지면 절대로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없다.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 돼지기름으로 지져낸다.
느끼한 기름기가 매콤한 굴젓과 양파를 만나 녹두의 풍미를 극대화시키면서 몸에 반응을 일으킨다. 세상에 없는 맛! 적절한 표현을 새로 발굴해야 마땅할 그 복합적인 감각! 그런데 서글퍼라. 그 맛이 세월과 나이의 맛이기도 한 모양이다. 언젠가 아내가 이십대 제자들을 몰고 의기양양하게 찾아갔는데 아무도 감동하지 않더란다. 조심스레 '횟집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요?' 하면서.
이쯤 해서 흘러간 식당 홍보원 노릇을 그쳐야겠다. 어쨌거나 피맛골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질펀한 골목길에 오래된 풍경처럼 자리했던 음식점들 가운데 꽤 여러 집이 인근에 옮겨 새로 문을 열었다. 열차집도 조계사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한데 이 뭔 변괴일까. 새로 문 연 열차집 빈대떡 맛이 영 아니올시다로 느껴진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조리기구는 물론 종래의 탁자들, 심지어 공간 크기까지 똑같이 했다는데….
한두 차례 찾아갔다가 아쉬워하면서도 가차 없이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30년 발걸음을 끊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어느 날 불현듯 다시 찾아가 주인장과 밤 12시 심야의 대토론회를 벌였다. '왜 파삭파삭하고 고소했던 맛과 샛노란 색이 사라지고 희멀건하고 눅진해졌는가?' 주인의 첫 번째 답은 이랬다. '아무래도 장소가 바뀌니까 기분이….'
나는 정색을 하고 따졌다. '바보도 아니고 어찌 기분만으로 맛이 바뀌는가.' 조금씩 주인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녹두 수입처가 미얀마로 바뀌었는데 과거에는 껍질 깐 녹두를 사용했고 지금은 그냥 쓴다. 일부 야채도 넣는다. 번철의 둘레가 과거에는 벽돌로 싸여 열보존이 됐는데 지금은 분산된다. 버너가 바뀌었는데 열이 약해졌다 등등.
놀랍지 않은가. 혀라는 게 요물이어서 이 자금자금한 조건의 변화를 감지해냈던 것이다. 실은 주인장이 설명하는 현실적 이유가 따로 있었다. 젊은층 손님들이 지금처럼 변화된 맛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졸지에 6·25풍 꼰대가 돼버린 기분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청일집, 남원옥 등등 장소를 옮긴 다른 식당들의 사정은 어떨까. 혹시 유사한 아쉬움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통의 유지와 관련해 흔히 일본과 비교를 한다. 작년에 나도 교토에 정착한 친구를 세 차례나 찾아갔다. 400년 전, 그러니까 임진왜란 전에 개업한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카운터에 앉은 미모의 젊은 주인여성은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다가 가업을 잇기 위해 돌아와 정착했다고 한다.
교토 기온 신바시 인근은 아예 몇 백 년 된 식당들로 타운을 형성하고 있는데 불쑥 중세로 들어온 기분을 안겨준다. 우리가 그럴 형편을 갖고 살아오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아파트조차 소비재처럼 한 20년 되면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한다. 모두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다이내믹 코리아 스타일이라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언제까지 '건설과정 중'으로 붕 떠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대체 피맛골을 허물어서 누가 이득을 보았을까. 하지만 그곳은 보존되어야 옳았다. 허물고 새로 들어선 건물 속 프랜차이즈 식당, 커피숍의 경제가치보다는 유서 깊은 식당의 풍미가 더 높은 부가가치를 낳게 하는 비책은 없을까.
열차집에 처음 드나들던 이십대 초반, 떠올리면 낯 뜨거워지는 주벽이 있었다. 술에 취하면 마구 아무 데나 올라가는 습관이다. 자동차 위, 건물 벽타기, 지나가는 행인 어깨 짚고 올라타기 등등. (한 번은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올라타기의 주 타깃이 가로수였다. 가로수 꼭대기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다 열차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온몸이 새카매져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다시 착하고 순진한 얼굴이 되어 빈대떡을 집었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첫댓글 나도 종로 학원 종합반 다닐때 많이 갔었는데,,,
장마철이라서 그런가
요즘 춘수님의 글들이
홍수처럼 올라옵니다 ㅎ
청진동 빈대떡골목의 열차집.
경원집과 목포집도 있었지요.
젊었을때 알바하던 그 골목...지금도 변했지만 가끔 갑니다.
참...모밀로 유명한 미진도 있었지요.
종로 언저리에서 놀던때가 그립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