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제 평양이다
7사단 8연대도 평양 진입
선교리에 도착한 뒤였다. 저녁 무렵에 들어서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동강을 건너는 아군 주력을 지켜보다가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7사단 8연대장 김용주 대령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지금 우리 부대도 평양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냐? 작전구역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왔단 말이냐?”고 거듭 물었다. 그는 자세한 경위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군단 작전지역에 예고 없이 들어서면 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다”면서 경위를 캐물었지만 그는 시원스럽게 털어놓지를 않았다.
나중에 벌어진 일이지만 국군 7사단도 “우리가 평양 선착 부대”라고 선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실은 한국군이 미군에 평양 선두 입성을 빼앗길까 저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염려가 작용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상징적인 평양 선두 입성의 기록을 미군에게 내주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듯하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일권 장군에게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미군에 앞서 입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던 것이다. 정일권 총장은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이 배속해 있던 평양 주공 병력인 미 1군단 서쪽에서 북한의 중부 내륙지역을 향해 진공 중이던 국군 2군단에 “평양에 어떻게 해서든 먼저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에 따라 평양에 진격한 부대가 위에서 말한 국군 7사단의 8연대였다. 북진 길에서 미군보다 출발이 늦었던 국군이었고, 병력을 옮기는 수송능력에서도 미군보다 한참 뒤떨어진 국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만큼은 놓칠 수 없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뭐라고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정해진 작전구역이 아닌 곳에 아군이 출현하면 아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일은 다시 벌어져서는 곤란했다. 공을 다투다가 잘못하면 장병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다행히 7사단 8연대와 교전이 벌어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교리 초등학교 바로 옆에는 내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었다. 마침 그곳 학교에 사단본부를 설치한 김에 나는 내가 살던 집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다시 만감이 교차했다. 북녘에 두고 왔던 누나의 안부에도 생각이 미쳤다. 나는 살던 집 이웃들을 만나 누이의 안부를 물었다. 시집을 간 누이는 전쟁이 난 뒤 평양 교외로 옮겨 가 잘 지내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
- 평양과 교외 지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국군이 선무작업을 벌이는 모습
5년 만에 찾아온 옛집황혼 무렵이었다. 차량 대열이 사단본부가 있던 선교리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갑자기 밀려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프랭크 밀번 군단장이었다. 그는 나를 불러 그의 앞으로 오게 하더니 불쑥 훈장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어 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간단한 의식이었다. 내가 손에 받아든 것은 ‘은성(銀星) 무공훈장’이었다. 매우 영예로운 미군의 포상(褒賞)이었다. 밀번 군단장은 평양 선두 탈환의 명예를 나와 국군 1사단에게 걸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날은 저물었다. 우리의 다음 작전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을 향하면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우선은 평양 북쪽의 숙천과 순천 일대에 대규모 공중강습 작전이 벌어진다고 했다. 미군의 공정사단이 벌이는 그런 작전 또한 인천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켰던 작전처럼 후방을 받쳐주는 연계(link-up) 작전이 필요했다.
그 연계작전을 우리 1사단이 맡았다. 공중에서 강습부대를 낙하시켜 적의 퇴로를 끊음으로써 보다 큰 규모의 적군 전투력 상실(喪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길을 또 부지런히 가야 했다. 미군 공정대의 공중강습에는 다른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적의 후퇴로를 끊으면서 그들에게 붙잡혀 북으로 끌려간 남한 인사들을 구출하는 일이었다.
도시는 늘 장병을 유혹하는 법이다. 우리가 평양 선두 탈환의 명예로운 공적을 쌓으면서 도착한 지점이 당시로써는 한반도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었던 평양이었다. 야전(野戰)을 누비면서 험난한 길을 걸었던 장병이 도시에 닿으면 마음이 풀리는 법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당시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은 당시의 기억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선교리를 넘어 평양에 들어선 뒤 부하들의 채근에 시달렸다고 한다. “평양 기생이 아주 유명하니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들러보자”는 주문이었다는 것이다.
험로(險路)를 걷고 또 걸어 평양을 선두로 탈환한 마당이었다. 부하들의 그런 부탁을 모른 척하고만 있기에는 조금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점곤 연대장은 부하 몇몇과 함께 평양 기생집을 찾았다고 한다. 평양에는 원래 기생집이 몰려 있던 곳이 하나 둘 있다.
김점곤 연대장은 그 중의 한 곳에 들렀던 모양이다. 예상 밖으로 기생집이 버젓이 운영 중이었다고 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노동당의 간부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만큼 장사할 수는 없었지만 노동당 간부들이 단골로 찾아오면서 운영을 멈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김점곤 연대장은 그때 여러 가지를 살폈다. 우선 기생들이 한결같이 검은색 치마와 저고리에 버선 또한 까만색을 입거나 신고 있었다. 아울러 화장도 진하게 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잠자코 있던 기생들이 술을 한두 잔 마신 뒤에는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라면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
- 평양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붙잡힌 북한군 포로들이 이송되고 있다.
평양기생의 넋두리김점곤 연대장 일행은 그런 점이 궁금해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기생들은 “일반인들은 출입하지 못하게 우리더러 검은색 한복으로 입은 채 장사를 하도록 했고, 화장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했다. 더 괘씸한 점은 노동당 간부들이 외상으로 술을 먹고서는 돈을 떼먹기 일쑤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구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평양 기생은 아주 유명했다. 미모도 미모지만, 기생으로서의 엄격한 훈련과정을 거쳐 쌓는 음악과 가무(歌舞) 등의 수준이 아주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평양 기생이 이름을 드날린 진짜 강점(强點)이 하나 있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계산에 밝다’는 점이었다. 장삿속이 아주 철저해 남에게 돈 떼먹히는 일은 거의 없으며, 악착같다고 할 수 있는 장사수완으로 돈을 잘 버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평양의 기생에게 외상을 적어놓고 돈을 생으로 떼먹다시피 했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결국 대한민국 적화까지 벌이려 남침했던 노동당 간부들의 진면목이었던 셈이다.
김점곤 연대장은 나중에 그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잇속에는 밝기 그지없던 평양기생의 등을 처먹는 사람들이 바로 북한 노동당의 공산주의였다”면서 말이다. 그들 일행은 오랜만에 차린 음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제대로 차린 음식을 좀체 맛보지 못했던 평양의 기생들이 왕성하게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는 광경을 자리에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집에서 대동강 푸른 물을 오가며 뛰어놀던 무렵의 어린 시절을 아련히 회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이면 일찍 길을 떠나 숙천 일대의 공중에서 낙하하는 미군 공정대의 뒤를 받쳐줘야 했다. 그래서 우선은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아침 일찍 나는 미군이 깔아놓았던 부교를 건너 평양 시내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그때 미군 2사단 소속으로 어깨에 ‘인디언 헤드’ 마크를 부착한 미군 중령이 나를 찾아왔다. 약 100명 정도에 이르는 부하를 이끌고서였다. 그는 내게 “GHQ(미군 극동군사령부) 소속 문서 수집반에 있다. 이제 평양 시가지에 들어가 적군 수뇌부 등이 남긴 문서를 수집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왔다. 사령관께서 우리가 시가지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달라”고 했다.
-
- 평양시내에 진입한 국군이 막바지 작전 마무리에 나서고 있다.
미군은 그렇듯 치밀했다. 적들이 남기고 간 대량의 문서를 수집하기 위해 벌써 그렇게 일찍 평양에 도착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들은 내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평양 시가지를 향해 들어갔다. 그들은 나에 앞서 강을 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GHQ의 문서 수집반은 평양 시내의 공공건물 등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서를 확보했다.
강을 건너자 김일성의 집무실 사정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전쟁을 벌인 자, 수많은 살상의 피와 눈물을 이 땅에 몰고 온 자의 사무실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수대 인민위원회라는 건물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지프에 올라타 그곳으로 향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