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왜곡되고 축소 굴절된 백제역사가 아닌가 한다.역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평가해야 한다.
백제의 역사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초기백제국립현충원 밑으로 지나고 있는 지하차도에서'일그러진 백제의 역사' 단면을
찾아 볼 수 있다.도시개발계획 그대로 방치하였다면 백제국립현충원은 중간으로 도로가 뚫려 두 동강으로 잘려나갈 형편이었다.
'강남개발광풍'이 백제국립돌마리현충원에도 몰아닥쳤다.1983년 봄부터 3호분과 4호분 사이를 관통하는 석촌로 백제고분로
공사가 시작되었다.1983년 5월 25일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 교수가 석박사과정 학생 17명을 이끌고 현장을 찾았다. 그때였다.
학생들과 함께 3호분 적석총 동쪽 15m 지점에 있는 민가 주변을 살피던 이형구 교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목격했다.
왕릉급 고분이 확실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갔고, 무덤의 남쪽 석축 상당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약 10m 폭의 판축
흙을 불도저와 포클레인 삽날로 밀어버렸다. 잘린 단면에서 처참한 광경이 목격됐다. 한성백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옹관까지
잘려나간 흔적이 보인 것이다. 곁을 살피자 더 참혹한 광경이 나타났다.
“백제 고분이 3분의 2 가량 잘려나가면서 그 안에 안장돼있던 백제인의 유골들이 포클레인 날에 찍혀나간 흔적을 보았습니다.
잘려나간 판축에서 갈비뼈와 다리뼈가 보였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4호분을 돌아봤습니다. 고분의 판축이
역시 파괴되었습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묘도)과 무덤방(묘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분화구 같이 파였습니다.”
각 언론이 다투어 학술대회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백제 유적의 보전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교수는 백제 왕릉급 고분인 3호분을 잘라내고 지나가는 석촌로(백제고분로)를 지하로 뚫자는 의견을 각계에 전했다. 지상은 3·4호분을 연결해서 이 일대 사방 1㎞를 백제유적보존지구로 설정하자는 것이었다,
“도로공사가 강행됐습니다. 서울시가 주체가 된 개발계획이 쉽게 중단될 리 없었습니다. 제가 포클레인 앞을
막아서 공사를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습니다. 6월27일 야밤을 틈타 포장공사를 완료해버렸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학술대회가 열리고, 참석한 30여 명이 건의문을 작성해서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보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각 언론이 다투어 학술대회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백제 유적의 보전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교수는 백제 왕릉급 고분인 3호분을 잘라내고 지나가는 석촌로(백제고분로)를 지하로 뚫자는 의견을 각계에 전했다. 지상은 3·4호분을 연결해서 이 일대 사방 1㎞를 백제유적보존지구로 설정하자는 것이었다.이렇게 해서 생긴 지하차도다.

석촌호수 남쪽에 위치한 이 전통마을 이름은 돌마리다.송파강가 모래와 뻘흙이 많았던 곳이다.원래 돌이 없던 마을이다.
원래 돌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드넓은 충적평야였다.그런 마을에 돌이 많은 마을 곧 ‘돌마리’ 라고 불렀다고 한다.한자로는 석촌동
(石村洞)이라고 했다.바위 산도 돌도 없는 모래벌판 마을에 돌로 축조한 대형 무덤군들이 많았기 때문에 '돌마리' 석촌동(石村洞)으로 불러왔다고 한다.병자호란 때 침입한 청나라의 군대는 이곳에 주둔지의 진터를 만들었다.그래서 이 마을을 '진터뻘'이라고 했다.

보통 석촌동 고분(古墳)이라고 쉽게 부른다.고분은 왕릉이나 고위층의 무덤을 뜻하지 않는다.그저 오래된 옛 무덤 고분(古墳)이다.
신라나 고구려의 왕릉을 고분이라고 하지 않는다.무덤의 주인공이 어느 왕인지를 알 수 있을 때는 왕릉이라고 편하게 부르고 있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때 총(塚)이라는 이름을 붙인다.신라의 왕릉을 발굴하다가 어느 왕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그 무덤에서
천마(天馬) 그림이 출토되었다.틀림없는 그 무덤은 분명 왕릉급 무덤이다. 그때부터 그 왕릉은 천마총(天馬塚)이라고 불렀다.
석촌동 국립현충원에도 왕릉급 대형 무덤이 아주 많았다고 전한다.가장 큰 3호분을 적석총(積石塚)이라고 한다.틀림없는 왕릉이다.
초기백제 지도급 인물들의 무덤이 몰려있는 곳을 그저 '석촌동 고분'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한다.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이라고 했다.
이보다는 초기백제국립돌마리현충원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석촌동에서 가락동에 이르는 곳에 백제시대 무덤군이 몰려있었다.돌마리석의 언덕배기를 오봉(五峰)이라 했다.
돌무더기가 5개의 작은 봉우리를 이룰 정도로 쌓였다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5개의 큰 봉우리를 비롯한
대형 무덤은 초기백제 국립돌마리현충원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89기(토총 66기, 적석총 22기)의 백제 고분이 표시돼있다.
이것을 토대로 1919~1920년 사이 정밀 조사한 결과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에 293기 이상의 백제고분이 분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석촌동을 포함한 이들 지역의 백제고분은 1970년대 초까지 방치되었다.
방치 정도가 아니라 ‘오봉’ 위에 무허가 민가들이 들어설 정도로 마구잡이로 훼손되었다. 오봉 중 하나는 완전히 사라졌고,
3호와 4호 고분도 도로공사로 곧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돌말 현충원에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분 적석총(積石塚)이다.3호분은 거의 방형에 가까운 적석총이다.
누구의 묘인지를 모를 때 그 무덤을 총(塚)이라고 한다. 이 계단식 돌무덤도 정확하게 누구의 묘인지 모른다.
왕릉임에 틀림없다고 했다.그래서 적석총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시대의 무덤은 평지에 있었다.
이 왕릉은 먼저 정리 작업을 한 후 진흙을 깔아 다지고 지대석을 놓은 외곽부에는 돌을 깔았다.
그 위에는 장대석을 기선분에 한 줄로 배치시키고 이 기단석렬 내부로는 역석을 쓰지 않고 비교적 납작한 활석을 쓰고 있다.
이렇게 1단을 쌓고 90cm쯤 올린 다음 2단을 쌓아 올렸다. 제3단은 높이가 다른 단의 두배이다. 돌무지 모두 강돌이 아닌 깬돌과
막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다.무덤 안팎을 돌로 쌓아 올린 게 특징다.이렇게 돌계단은 7층까지 올렸다고 한다.
이 묘제는 북방식(北方式)이다.하늘을 아버지로 섬기는 천손(天孫)사상을 토대로 한 묘제다.
여기서는 되도록 하늘에 가까운 곳에 계단을 올리고 그 높은 계단 위에 주검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 왕릉은 3세기 쯤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그 주인공은 백제를 사상 최대 규모로 국토를 확장한 근초고대왕으로 짐작한다.

적석총 3호분 옆에 있는 4호분이다.규모가 3호분보다는 작은 편이다.이 무덤은 겉만 돌로 쌓아 올렸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3호분은 안팎을 돌로 채웠다.기단 곳곳에는 호석(護石)을 기대놓았다.이 호석은 돌의 흐름을 막아주고 외부에서 악기(惡氣)를
막아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석촌의 한 부락은 수많은 황폐해진 무덤 사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고분들이
이 부락을 중심으로 하여 동남쪽에까지 넓게 분포하며 논과 밭 사이에 산재하고 있다.”-<조선고적도보>에서

현충원 남쪽 끝자락에 있는 남방식 무덤이다.땅을 어머니로 해서 태여났다고 믿는 지모(地母)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땅 깊숙한 곳까지 구멍을 만들고 그 안에 주검을 모시는 묘제다.주검을 모시는 공간은 직사각형이다.봉분은 둥근 원형을 하고있다.
'하늘은 둥글고(天圓) 땅은 네모나다.(地方)' 우리 고유한 전통사상을 반영한 묘제다.
온조가 기원전 18년 하남위례성에 나라를 세웠다.
제21대 개로왕이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오늘날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천도할 때까지 초기백제는 전성기를 누렸다. 백제의 도읍지 한성임을 뒷받침하고 있는 3대 유적이 있다.
거의 하남위례성의 왕성으로 밝혀지고 있는 풍납토성과 왕성을 뒷받침하였던 산성 몽촌토성
그리고 도읍지 위례성의 왕릉이 있었던 '국립돌마리현충원'이 그 유적이다.
이 돌마을 일대에는 1917년까지 돌무지 무덤인 석총(石塚) 23기와 함께 봉토가 있는 토총(土塚) 66기가
몰려있었다고 한다.1970년대 잠실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돌마리에서 가락동까지 몰려있던 거대한 백제무덤은 밀려났다.
지금은 10기도 채 안되는 백제국립현충원이 초라하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