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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어느 날 국립서울현충원 제2묘역 육군중장 채명신의 묘다.
그 날도 채명신 장군을 찾는 참배객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그 좁디 좁은 묘는 참배들의 헌화로 둘러쌓였다.
채명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월남전 참전 노병들도 채명신 사령관의 죽음을 무척 가슴 아파하면서
줄을 지어 묘를 찾고 있는 것이다.일부러 맘먹고 참배 오는 월남전 참전 노병들도 참으로 많다.
적지 않은 일반인들도 가족단위로 또는 지인들끼리 삼삼오오 묘 앞에서 정중하게 예를 표함을 보게 된다.
그 날 채명신 장군의 묘를 찾아 참배를 끝내고 묘 주변을 살피고 있었을 때였다.
한 여인이 그 주변의 잔디를 정성껏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사뭇 궁금했다.
-채명신 장군과는 어떤 인연이기에 이렇게 묘를 손질하고 계십니까?
"..................."
정중하게 서너차례 같은 질문을 했다. 그냥 빙긋이 웃을 뿐이다.
아무 대답도 없이.바로 옆 주차장에서 한 남성이 급하게 달려왔다.
-왜 그러시죠?
"채장군 님의 묘를 정성껏 손질하고 있어 어느 분인지 궁금해서요?"
-바로 채 장군의 사모님이십니다.
이렇게 채명신 장군의 부인 문정인 여사와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채 장군 묘 옆에 간이의자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 부부의 사랑이야기를 들었다.
문정인 여사는 채 장군이 돌아가신 뒤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채 장군을 찾는 게
일과가 되었다며 이렇게 채 장군을 좋아하는 국민들에게 고맙다고 말 문을 열었다.
그는 채 장군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국민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글을 이렇게 올렸다.
제 남편 채명신 장군은 11월 25일 오후 3시 12분, 생일을 이틀 남겨놓고 88세의 일기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평소 남편은 동작동 제2묘역에 누워있는 병사들을 창문을 통해 가리키며 당신도 월남에서 생사를 같이 한 그 병사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 하셨습니다.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병사들을 위대하다 하셨고, 오늘의 당신이 있는 것도, 오늘의
조국이 있는 것도 다 그 병사들의 희생 위에 터잡은 것이라며 먼저 산화한 병사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하셨습니다.
병사들과 똑같이 화장하고 병사들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묘비를 세워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어려운 부탁이었지만 대통령께서 친히 저희 부부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래서 남편은 동작동 현충원 제2묘역 앞자리에
그 병사들과 함께 누워 계십니다.
육군장이라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11월 28일의 영결식에 이어 안장식에 이르기까지,
만 나흘 동안 육군참모총장님을 비롯한 많은 장병들께서 애쓰시며 정성껏 도와주셨고, 수를 알지 못 할 만큼 많은
국민들께서 먼 길 찾아 조문과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
이 인터넷 공간을 찾았습니다. 일일히 찾아뵙고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감사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제 처지가
그렇지 못해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방법으로 대신하게 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분한 축복을 받은 저는 하루에 두 차례씩 남편이 누워있는 귀한 곳을 찾아갑니다.
찾을 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남편의 묘를 찾아오셔서 예를 표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제 남편이 누리는 축복일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허락해 주신 대통령님과 이를 위해 애써 주신 여러 분들께 저는 이 세상 하직할 때까지 감사한 마음
간직하고 살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함께 하시지는 못하셨어도 곳곳에서 고인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계실
모든 국민들께 고인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와 뜨거운 사랑의 뜻을 드립니다.
2013년 12월 5일
채명신 장군 가족 문정인 올림
-채 장군은 남편으로서는 어떤 분이었나요?
"그 분과 싸워 본 적 없고 늘 배려하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게 하고, 어디든 가고 싶은데 자유로이
친구들과 가게 하고, 그의 말이나 주위 오랜 친구 분들 말을 들으면 그런 남편이 지상에 잘 있을 것 같지 않고,
그야말로 세상 모든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남편이었죠."
온유하고 싸울 거리가 없으며 맛이 없어도 아무 불평 없이 그릇을 옆으로 살짝 비켜둘 뿐이라고 했다.
누구를 비난하거나 안좋은 이야기 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오직 엄청 욕을 하는 건 김일성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아니 여보, 그리 부드러워 가지고 전쟁은 어떻게 하오' 하면 전장에 나가면 마음이 싹 달라진다고 했다며 웃는다
일생 남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사람 차별 인간 차별을
아주 싫어한 것이라고 했다.
-자녀들에게는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십니까?
"아이들에게는 좀 엄한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아이들에게 늘 사람 차별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죠.
사병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아주 싫어 했습니다.워낙 사병들만 챙기시니까 둘째 딸이 어릴 때
'아버지는 내가 좋아,군인 아저씨가 좋아?'라고 물었어요.그때 어쩔 줄 모르고 대답을 한참 하지 않다가
나중에 '너랑 군인 아저씨랑 둘 다 똑같이 좋지'라고 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사병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남달랐다고 생각해요."
-결혼 할 당시 군인 채명신은 어떤 매력이 있었나요?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군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죠.
군복을 입은 스타일이 참 멋있었요.참 호감이 갔어요.남편은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신혼 시절 전방에서 생활할 때 다정한 편이라 서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채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고향의 지인을 통해서다.
채 명신 대령은 북한에서 월남해서 그녀의 고향인 영덕에 주둔하고 있었다.
채 대령은 제20사단 60연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연대장으로 있을 무렵, 그는 문정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문정인은 경북 영덕의 재력가 집안 출신으로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던 것 같다. 1967년 5월 31일 이화여대 대운동장에서 초록 갑사차림의
제2대 <홈커밍·퀸> 문정인(39·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 부인) 여사가 대관하여 박수갈채를 받았으니 말이다.
-육군중장 채 명신 장군을 어떻게 사병묘역에 모셨나요?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남편이 돌아가시기 3일 전에
그의 뜻을 담은 편지를 써서 청와대에 보냈어요.다행히 그게 받아들여진 거죠,당신의 뜻대로 월남전우 곁에
모시게 된 겁니다.막상 장군묘역을 보니까 처음에는 그게 참 넓고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속으로는
'아이구,이걸 보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죠.남편이 많은 국민들로부터 넘치는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바로 조금 전에 평소 전혀 모르는 시민들이 저렇게 꽃을 정성껏 놓고 가시는
겁니다.참으로 고맙고 고맙죠.사병묘역으로 정말 잘 모셨다고 생각해요."
문 정인 여사는 가족사의 비밀을 이야기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인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때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2013년 11월 30일자 중앙일보를 참고하여 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문 정인 여사와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의 가족사의 비밀은 2013년 11월 30일 중앙선데이 <채 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적장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를 아래에 옮기려고 한다.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 때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 10월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 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문 정인 여사는 남편 채 명신을 이렇게 그리워하고 기렸다.
"남편은 참 행복한 군인이었어요.많은 분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니 행복하게 돌아가셨죠.
마지막 남편이 한 말이 생각나요.'당신과 나는 한 몸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마'라고 하셨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아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