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남서쪽으로 비행기를 타고 5시간쯤 날아가면 "따뜻한 미소의 나라"로 불리우는 타이에 도착한다.
타이인들은 이방인들을 부드러운 미소로 맞이한다.
이들의 인자한 미소 뒤엔 강함이 넘치며 용맹스러운 무술인 "무에타이"라는 하나의 문화가 깊이 뿌리박혀있다.
그 무에타이는 타이라는 나라가 5천 년 이상 외세의 지배를 단 한 번도 받지 않게끔 도와준 호국무술이다.
무에타이의 기원은 찾아보기힘들다.
중국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양무술의 원조로 불리우는 중국의 무술류에서 무에타이역시 흘러나갔다는 주장을 하지만 타이인들은 중국무술이 무에타이에서 흘러나갔다는 반대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어느쪽의 주장도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중국 이외에 타이와 근접한 캄보디아와 미얀마, 라오스에서도 무에타이의 종주국은 서로 자신들의 나라임을 주장하고있다.
캄보디아 측의 주장에 의하면 무에타이는 9~15세기경 크메르문명에 의해 전파된 것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앙코르왓의 벽화에 무에타이를 표현한 많은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한 것은 알 수 없으며 타이 측은 캄보디아의 이러한 주장에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또한, 미얀마측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타이보다 이른 기원전 300년경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미얀마측이 1세기경 타이로 불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반도복싱이라 불리우는 버마복싱과 비슷한 격투술이 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버마복싱"이라 불리우는 "따잉" 과 무에타이의 유사한점을 근거로 타이의 무에타이 역사는 미얀마의 버마복싱(따잉)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하지만 타이측은, 미얀마에 사람이 살기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로 알려져 있을뿐 역사에 관한 기록도 문자의 부재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10세기 이전의 미얀마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있음을 증거로 강력히 부인하고있다.
또한 타이불교의 유입을 6세기경 스리랑카로부터 유입되었다고 주장하며 미얀마의 버마복싱(따잉)과 무에타이의 역사는 별개임을 주장한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타이는 무에타이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보존하지 못하였으며 이로 하여금 무에타이의 역사는 미스테리로서 남아있을뿐이다.
단지 근대 무에타이의 기원은 타이의 오래된 군사무술 지도서인 "유타삿"이라는 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책에는 창과 칼, 전쟁용 도끼, 방패, "마이속" 이라 불리우는 "ㅓ"모양의 몽둥이 등을 이용한 전투 방법이 나와 있으며 전장에서 무기를 잃었을 경우 백병전으로 싸울수있는 맨손 격투술이 수록 되어있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이기 전부터 "타이" 라는 나라는 주변의 나라로부터 수없이 많은 침략을 받았으며 무에타이를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타이 고고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타이무술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무에타이는 이미2,000년 전부터 존재하여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무에타이는?
"무워이 보란" (무워이=싸움, 보란=고대)이라 불리우는 무에타이의 과거형 격투술은 지금의 무에타이와 많은 부분이 다르다.
무워이보란 이라 불리우는 고대의 무에타이는 일반적인 무술이 아니었다.
고대의 무에타이는 전장에서 적을 살해하기위한 살상기술 이었을 뿐이다.
그 고대의 "무워이보란"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고 변하여 현재와 같은 스포츠 방식을 갖는 무에타이가 된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무에타이는 타 무술과는 달리 어떠한 형식도 없으며 특별한 이름도 없는 것이다.
"유리가루를 붙인다음"
현재의 무에타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것은 1917년 1차 대전 부터였다.
당시 태국은 연합국으로 전세계의 전장에 태국의 용감한 군인들을 파병하였고 태국의 군인들은 무에타이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무에타이는 가죽과 대마로 주먹을 감싸고 유리가루를 붙인다음 신체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여 치고, 차고, 꺽고, 조르는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일정한 룰도 없이 상대방이 항복하는 순간까지 진행하는 고대 방식의 경기였다.
그전 몇천년전 부터 무에타이는 전쟁시에는 전쟁무술로서 평시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도박으로써 가장 대중적인 놀이문화였을지도 모르나 1921년(라마 6세 왕 재위기간)에 "무워이"로 불리우던 그 명칭이 "무워이타이"라는 정식이름을 갖게됨과 동시에 태국의 국기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때부터 무에타이는 격투스포츠로 자리를 잡게되었다.
(라마 6세)
이때부터 무에타이는 보다 대중들과 친숙해지며 "룰"이라는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외세의 영향과 근대화의 추진으로 급격하게 변하는 태국사회에서도 잔인한 도박경기보다는 스포츠로서의 발전을 꾀하는것이 외국으로 부터 비난을 받지도 않을뿐 더러 무에타이를 외국에 알림으로서 국제적 외교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으니 무에타이의 발전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게 되었다.
‘무에타이의 근대화’
1950년대 이후로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서 복싱 글러브가 도입이 되었고 링에서 경기를 하기 시작했다.
1965년 드디어 태국의 텔레비젼에서 무에타이를 볼수있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최고의 프로모터였던 "반쭉" 이라는 프로모터에 의해 짜여지던 라차담넌 스타디움의 무에타이 경기가 채널 5에서 생중계 되기 시작했다.
(라차담넌 스타디움)
그후로 또다시 5년이 지난 1970년 룸피니 스타디움에서도 ‘뻐쌉 탐마슬릭’ 이라는 프로모터에 의해서 텔레비젼 중계를 시작하고 1972년 ‘티얌분’ 이라는 프로모터가 채널 7 (BBTV) 방송국에 자체 경기장을 만들어 정규 방송프로그램으로서 TV중계를 시작했다.
(룸피니 스타디움)
이때쯤 태국에 복싱 경기차 방문했던 ‘노구치 오사무’ 라는 일본의 복싱 프로모터가 무에타이 경기를 보게 되었고 이를 일본으로 가져가 흥행에 이용하면 돈벌이가 된다고 판단한 그는 무에타이의 주술적이고 전통적인 부분을 생략한 ‘킥복싱’ 이라는 일본식 격투술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의 무에타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1, UFC등의 이종격투기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무술로서 그 실전성은 이미 입증되었다.
또한 몇 년전 개봉한 ‘옹박’ 이라는 영화로 인하여 무에타이의 드용은 더욱 높아졌으며 세계적인 무술로 각광을 받고 있슴은 물론이다.
‘후기’
필자는 1990년 서울의 정동문화체육관에서 한국선수와 맞서 싸우던 태국선수를 목격하게 되었고 그것이 처음 무에타이를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태국선수의 소름끼치도록 노련하며 여유 있는 플레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으며 필자는 결국 무에타이에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태국이라는 나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자가 태국이라는 나라를 수없이 헤멘지도 어언 1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한낱 외국인이 그들의 문화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태국에서 수많은 무에타이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무에타이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각 스타디움에 보관된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수들과 정강이를 부딪혀 가며 그들의 무에타이를 몸소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태웅회관에서 집필한 무에타이에 관한 모든 내용은 태국현지의 무에타이 원로들의 증언과 각 스타디움에 보관된 자료를 토대로 작성 되었슴을 알려드리며 본 싸이트를 찾아주신 모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공 선 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