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성환(李晟煥 1900∼? ) 임전보국단 간부, 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
농민운동가. 농가에서 태어나 농민의 비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도쿄의 고등잠사학교에 유학, 귀국 후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농민조직화에 힘썼으며, 1925년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농민단체인 조선농민사의 이사장이 되었다. 초기 조선농민사는 농민 자신들의 생산과 생활을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영농개선운동을 펼쳤고, 30년대에는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을 조직, 공동경작·구입·판매활동을 펼쳤으나, 30년 천도교 청년당(靑年黨)의 지도하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 다시 전조선농민사(全朝鮮農民社)를 결성하였다. 총독부 시절 친일활동으로 41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결성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한국인의 전시동원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2. 이승우(李勝宇 ?∼? ) 전 경성부회 의원, 전 국민총동원 이사
조선 말기 문신.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홍문관수찬·증광감시초시시관(增廣監試初試試官)을 지냈다. 84년 선전관, 90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94년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초토사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데 참가하였다. 95년 홍주(洪州;현재의 洪城)의 의병진을 강제해산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96년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900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내고 1904년 충청북도관찰사를 지낸 뒤 전라북도선무사로 부임하여 군민을 위무하였다. 1906년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를 거쳐 1907년(순종 1)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
3. 윤치호(尹致昊 1865∼1945 ) 대한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연희전문학교 교장
정치가. 충청남도 아산(牙山) 출신.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을 비롯한 일본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이때 영어를 익혀 한·미수호통상조약 비준 때 초대 주한미국공사 L.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하였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었으며, 고종과 푸트공사, 그리고 개화당간의 교량역할을 하였다. 84년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김옥균·박영효(朴泳孝) 등과 친밀한 관계였으므로 정변 실패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문과 기독교에 접하였다. 95년 귀국하여, 외부협판·학부협판 등을 지냈으며, 96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따라 참석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98년에 제 2 대 회장 겸 《독립신문》 사장이 되었다. 그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공격하면서 일본인에게 아부하지 말 것,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大臣) 단독으로 하지 말 것,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등 시정개혁안 6개조를 결의하고 국정에 반영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황국협회의 모함과 테러의 위협으로 피신하였으며 독립협회도 해산당하였다. 99년 덕원감리겸 덕원부윤으로 임명되는 등 관직에 올랐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육사업과 국력배양에 힘썼다. 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여 청소년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평양의 대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12년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5년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YMCA 회장, 연희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내며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 실력향상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20년대부터는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45년에는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저서로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 등이 있다.
4. 김연수(金演洙 1907∼1974 ) 경성방직 사장, 전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악원(國樂院) 이사·국악원장·서울특별시문화위원·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부위원장·국립창극단장
창극인(唱劇人). 호는 동초(東超). 전라남도 고흥(高興) 출생.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수학한 뒤 중동중학을 나왔다. 유성준(劉聖俊) 문하에서 《수궁가(水宮歌)》,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의 송만갑(宋萬甲) 문하에서 《흥부가(興夫歌)》 《심청가(沈淸歌)》 등을 배웠다.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이사로 선임된 뒤 조선창극단 대표·김연수창극단 대표·우리극단 대표·국악원(國樂院) 이사·국악원장·서울특별시문화위원·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부위원장·국립창극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창본(唱本)으로 《춘향가(春香歌)》를 출판했고, 창극계의 일인자로 평가되었다.
5. 고원훈(高元勳) 중추원 참의, 전 도지사 -자료없음-
6. 신태악(辛泰嶽 1902∼1980 ) 변호사
자유당(自由黨) 창당준비책임위원·감찰위원장,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냈으며, 63년 야당에 참여한 이래 민정당(民政黨) 전당대회의장, 신민당(新民黨) 운영위원장, 국민당(國民黨) 정무위원
법조인. 함경북도 부령(富寧;지금의 羅津) 출생. 1919년 3·1운동 만세사건, 21년 신의주설화사건으로 각각 옥고를 치렀고, 24년 시대일보사 기자를 지내다가 도일(渡日)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와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졸업했다. 31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이듬해 변호사 개업을 하여 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신간회 재건을 위해 활약했으며, 36년 조선일보사 이사를 지냈다. 광복이 되자,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구국문화사(救國文化社)를 창립, 월간지 《구국》을 발행하였다. 자유당(自由黨) 창당준비책임위원·감찰위원장,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냈으며, 63년 야당에 참여한 이래 민정당(民政黨) 전당대회의장, 신민당(新民黨) 운영위원장, 국민당(國民黨) 정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7. 조병상(曺秉相) 종로경방단장 -자료없음-
8. 여운홍(呂運弘 1891∼1973 ) 친일논문 발표, 시국 강연
사회민주당 결성,제 2대 민의원 의원,자유당 선전부장,초대 참의원의원 역임
정치가. 경기도 양평(楊平) 출생. 여운형의 동생이다. 미국 우스터대학을 졸업한 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피선되고 20년 상하이[上海]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22∼25년 보성전문학교 영문과 교수, 27∼39년 싱어미싱회사 조선총판 감독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정치계에 뛰어들었으며, 46년에는 중도좌파노선의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후 제 2 대 민의원 의원, 자유당 선전부장, 초대 참의원의원을 역임했다. 저서 《몽양 여운형》이 있다.
9. 인정식(印貞植 1907∼? ) 사회주의에서 전향후 국민문학 등에 친일논문 발표
농촌경제학자.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생. 1925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제 4 차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위원, 고려공산당청년회 일본부 책임비서로 활동하면서 고려공산당청년회 기관지 《조선청년》 《레닌주의》 등을 간행하였다. 28년 일본총국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국내로 피신했다가, 다시 건너가 도쿄·오사카(大阪) 등지의 잔류인원을 모아 재건활동을 했다. 29년 2차 검거사건이 나자 국내로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다. 34년 가출옥할 때까지 5년 동안 감옥에서의 엄청난 독서량은 뒷날 그가 연구가로 활동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출옥 후 고향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농민들에게 민족의식·공산주의 등을 고취시켰다. 35년 서울로 돌아와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일했는데, 이때부터 농업문제를 적극 연구하기 시작, 36년 《중앙》에 <토지의 점유형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조선의 농업기구 분석(1937)》은 농업연구의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평가된다. 38년 공화계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고, 6·25 때 서울에서 공산당 일을 하다가 50년 9월 이후 실종되었다. 논문으로 <조선의 토지문제> <안창호론> 등이 있다.
10. 박희도(朴熙道 1889∼1951) 전 동양지광 사장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황해남도 해주(海州) 출신. 해주 의창학교(懿昌學校) 보통과와 고등과 졸업, 1904년 기독교인이 되어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앙유치원과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이 되었다. 16년 6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회원 확대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19년 1월 각 학교 학생대표들과 만나 운동을 꾀하다가 전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발표할 것을 계획하였다. 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죄로 2년형의 옥고를 치른 뒤 잡지 《신앙생활》을 창간하였고, 22년 11월 13호의 기사로 3년간 옥고를 치렀으나, 39년 이후의 친일경향으로 광복 후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1. 이각종(李覺鐘) 전 총독부 촉탁, 국민정신총동원 연맹 상무이사 -자료없음-
12. 김한경(金漢卿) 동양지광 등에 친일논문 게재 -자료없음-
13. 김시권(金詩權) 전 도지사 -자료없음-
14. 박인덕 (朴仁德 1897∼1980)(여자)전 청화여숙장
인덕대학교 설립,덕화여자실업고 설립
독립운동가·교육가. 평안남도 용강(龍岡;지금의 남포직할시 용강군) 출신.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이화학교·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선동자로 붙잡혀 4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그 뒤 애국부인회·적십자사에 참여하여 지하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22년부터 배화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신문·잡지·강연을 통하여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26년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뒤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1년 동안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8·15 후 자유국가여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렸다. 61년 인덕실업학교(지금의 인덕대학)를 설립하였다.
15. 이정섭(李晶燮) 조선 임전보국단 의원 -자료없음-
16. 김사연(金思演) 중추원 참의, 전 도지사 -자료없음-
17. 문명기(文明琦) 전 조선신문 사장 -자료없음-
18. 한상룡(韓相龍) 전 중추원 고문, 전 관동군 최고 고문, 조선총력연맹 사무국장 -자료없음-
19. 정교원(鄭僑源) 전 도지사 -자료없음-
20. 차재정(車載貞) 전 대동민우회 간부 -자료없음-
21. 이성근( 李聖根 ?∼? ) 전 중남지사. 전매신(每新) 사장
일제강점기 친일파. 황해도 금천(金川) 출신. 조선 말기 황해감찰부 순검으로 일본경찰과 합동하여 각처의 항일의병을 체포하였다. 국권피탈 뒤 총독부 경찰이 되었다. 3·1운동 때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압록강 일대에서 활약한 오동진(吳東振)의 독립군 부대를 거의 전멸시킨 것을 비롯하여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체포, 살해하여 전라남도 산업과장, 충청남도 도지사 등을 지냈으며, 41년에는 매일신보사 제 2 대 사장이 되었다. 43년 김연수(金秊洙)·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 등과 유학생의 학병지원 권고 강연을 하였다. 그 뒤 조선인처우개선감사사절단을 조직, 일본의 각지 신궁을 찾아 참배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찬양하는 등 반민족행위를 하였다. 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22. 박흥식 (朴興植 1903∼1994) 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
화신백화점 회장,화신레나운 설립,화신그룹회장
기업가.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생. 1915년 용강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미곡상·인쇄업·지류판매업을 하다가, 31년 귀금속판매점인 화신상회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화재로 없어지고 37년 새로 지어진 화신백화점은 50년대까지 각광을 받았으며, 그는 <조선 제1의 갑부>로 불리게 되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구속되기도 한 그는 56년 화신백화점을 다시 개장하였고, 62년 흥한화섬을 설립, 비스코스공장건설에 착수하였는데, 이는 69년 실패로 끝났다. 그 뒤 73년 종합의류 메이커인 일본의 레나운과 합작, 화신레나운을 설립하여 화신그룹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79년 하반기 시설확장으로 인한 경영압박으로 사업이 기울어 80년 10월 도산하였다
23. 박춘금(朴春琴) 민족학살 도모한 대의당 당수
상애회 ( 相愛會 ) 조직 결성
1920년 박춘금(朴春琴)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직한 친일노동단체.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노동인구가 급격하게 유입되자, 이들의 사상을 통제·단속하기 위하여 일본정부와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된 노동단체이다. 일선융화,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정신적 교화와 경제적 구제 등을 표방하였으나 실제 노동자를 학대한 폭력·착취기관이었다. 38년 조직된 협화회(協和會)의 중심세력으로 해체, 통합되면서 소멸되었다.
24. 안인식(安寅植) 총력연맹 참사 -자료없음-
25. 한규복(韓圭復) 중추원 참의, 충북지사 -자료없음-
26. 이종린(李鍾麟) 천도교 요인 -자료없음-
27. 최 린( 崔麟 1878∼? ) 천도교 요인. 중추원 참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함경남도 함흥(咸興) 출생. 1896년(고종 33) 함경남도 관찰부 집사가 되었고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에 피신하였다. 귀국 후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고 1904년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 보성고등보통학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3·1운동 때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를 연합시키려 노력하였고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매진하여 도령(道領)·대도정(大道正) 등을 지냈고 27년 미국·유럽 등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뒤 친일파로 변절하여 34년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37년 매일신보사장을 지내고 광복 때까지 임전보국단장(臨戰報國團長)으로 활동하는 등 친일행위로 일관하였다. 49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출감하였으며 6·25때 납북되었다.
28. 최남선( 崔南善 1890∼1957 ) 사학자
문화운동가·작가·사학자. 호는 육당(六堂). 서울 출생. 10세 이전에 한문과 한글을 익혀 1901년 황성신문·제국신문·독립신문 등에 논문을 투고하였다.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였고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3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1906년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모의국회사건으로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7년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1908년 종합월간지 《소년》을 창간하여 창간호에 한국 최초의 신체시(新體詩)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설립위원이 되고 다음해 조선광문회를 창립하여 고전을 정리, 출간하였으며 《붉은 저고리(1902)》 《아이들 보이(1913)》 《샛별(1913)》 《청춘(1914)》 등을 계속 간행하여 신문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책임자로 체포되었다가 다음해 출옥하였다. 그 뒤 22년 출판사 동명사(東明社)를 세우고 《동명》을 발간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동아일보》 객원으로 논설을 썼다. 27년 총독부가 식민정책의 하나로 만든 조선사편수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38년 만주 신징[新京;長春]으로 가서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으로 있다가 재만일본관동군(在滿日本關東軍)이 세운 건국대학교 교수를 지낸 뒤 42년 귀국하였다. 8·15 뒤 4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6·25 때는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위원,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뒤 국학 분야 저술생활을 하였다. 한국 신문학운동의 선구자로서 출판을 통하여 자주독립과 신교육 등을 주창·계몽하였고 국사의 대중화에도 공헌하였으나 친일행위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백팔번뇌(1926)》 《심춘순례(尋春巡禮, 1926)》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1927)》 《시조유취(時調類聚, 1928)》 《조선불교 1930)》 《조선독립운동사(1946)》 《고사통(故事通, 1939)》 《조선역사(1946)》 등이 있다.
29. 박윤진(朴允進) 친일 시국 강연 -자료없음-
30. 이돈화(李敦化) 천도교인
천도교사상가. 호는 야뢰(夜雷)·백두산인(白頭山人), 도호(道號)는 두암(豆庵).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신. 1902년 동학에 입교하고, 10년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 사원으로 들어가 20년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했다. 그 뒤 《개벽(開闢)》을 창간하여 주간을 지냈고, 23년 김기전(金起田)·박내홍(朴來弘) 등과 천도교청년당을 만들었으며, 26년 《신인간》을 창간했다. 한편, 천도교의 지도관장(知道觀長)·종법사(宗法師)·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 행정상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46년 평안남도 양덕(陽德) 천도교수도원에서 공산군에게 납치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저서로 《인내천요의》 《천도교창건사》 《신인철학(新人哲學)》 《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 등이 있다.
31. 장덕수(張德秀 1895∼1947 ) 전 보성전문 교수
보성전문학교 교수 및 《동아일보》 부사장,한국민주당조직-외교부장·정치부장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설산(雪山). 황해남도 재령(載寧)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3·1운동 때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하의면(荷衣面)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하였으나 1919년 도쿄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가는 여운형(呂運亨)의 통역업무로 동행하게 되어 풀려났다. 이듬해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에 힘썼다. 23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보성전문학교 교수 및 《동아일보》 부사장 등을 지냈다. 8·15 후 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조직하고 외교부장·정치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47년 12월 현직 경관인 박광옥(朴光玉)과 무직청년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하였다.
32. 방응모(方應謨 1890∼1950) 조선일보 사장
언론인.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호는 계초(啓礎).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25년 교동광업소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다. 33년 《조선일보》를 인수, 조만식(曺晩植)을 사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영업국장으로 있다가 1개월 뒤 사장에 취임하였다. 사세가 확장되어 35년 서울 태평로에 새 사옥을 짓고 출판부를 신설, 월간잡지 《조광(朝光)》 《여성》 《소년》 등을 차례로 창간하였다. 33년 이심회(以心會)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장학사업을 펼쳤다. 36년 동방문화학원을 설립했고 46년에는 숭문상업중학교를 세웠다. 광복 후 《조선일보》를 복간하였으나 6·25 때 납북 도중 황해북도 서흥(瑞興)에서 공습을 받아 숨졌다
33. 김석원(金錫源) 일본 육군 소좌 -자료없음-
34. 김동원(金東元) 평양상공회의소 회주 -자료없음-
35. 박정형(朴正衡) 가(假), 경무국 경찰(현재 세도 부림) -자료없음-
36. 정방오(鄭方五) 가(假), 전 일제 헌병대(현재 세도 부림) -자료없음-
37. 김신석(金信錫) 은행가 -자료없음-
38. 손영목(孫永穆) 강원,전북 지사. 국민동원총진회 이사 -자료없음-
39. 고일청(高一淸) 임전보국단 간부 -자료없음-
40. 차재명(車載明) 황국신민의 십자군 간부 -자료없음-
41. 문덕상(文德常) 황국신민의 십자군 간부 -자료없음-
42. 박상준(朴相駿) 귀족원 의원 -자료없음-
43. 김오성(金午星) 공산주의에서 전향후 월북 -자료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