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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시대인 요즘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미국 테러 사건같이 굵직한 국제 사건이 있을 때마다 CNN 뉴스 룸에서통역을 하는 동시 통역사나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방한 때 여왕 옆에서 통역을 하는 사람 모두, 한국어는 물론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하는 동시 통역사다. 영어를 귀로 들으면서 동시에 입으로 한국말로 옮기는 일이다. 임종령씨(35세)는 영국 여왕이 방문했을 때, 3박 4일간 여왕 곁을 지켰던 베테랑 동시 통역사다. 호주 수상이 왔을 땐 '완벽한 영국식 발음'이라며 극찬을 받았고, 힐러리 클린턴이 왔을 땐 격조있는 미국 동부 상류 사회의 영어 발음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던 실력파다. 그렇다면 꽤 오랜 세월 외국 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예상과 달리, 그녀는 철저히 국내 생활파다. 외국 생활이라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은행 임원인 아버지를 따라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살았던 것이 전부다. 아마 영어보단 브라질인들이 사용하는 포루투갈어를 먼저 접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땐 지금과 달라서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지만 알파벳의 A, B, C도 몰랐어요. 국제 학교에 전학 가서 처음 얼마 동안은 멍청히 앉아만 있었어요. 도무지 못 알아 듣겠는 말만 하는 선생님이나 친구들 앞에서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어요."이때 임종령씨의 개인 교사는 바로 어머니 문명자씨(64세)였다. 중학교 영어선생님이던 어머니는 국제 학교에 전학을 시키고 생활기초 영어 한 권으로 종령 남매를(언니, 오빠) 가르쳤다. 문법이나 어휘가 채 갖춰지지 않았던 아이들은 영문법 공부 대신, 책에 나온 문장을 줄줄 외워야 했다. 발음 기호도, 알파벳도 읽지 못해 어머니가 한글로 토를 단 기초 영어를 좔좔 외웠다. 책 한 권을 다 외워갈 즈음, 지겹도록 기계적으로 외운 문장들이 일상 생활을 할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지겨웠을 법도 하건만, 대학교 3학년(이화여대 영문과 85학번이다) 무렵 동시 통역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전문 직업을 가진 여성이 되길 바라는, 작고한 아버지 임서규씨(작고)의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통역사 관련 책과 한영사전을 사다 주시며,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던 말씀은 힘들 때마다 큰 위로가 되었지요. 통역대학원 입학 시험 준비할 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영어 공부만 했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기초 생활 영어를 외우게 한 방법을 그대로 써먹었지요. 이번엔, 영자 신문을 외웠어요. 통역사는 시사 상식은 물론 다양한 계층의 언어를 빨리 습득해야 했기 때문이죠."통역대학원 입학을 위해 준비하던 마지막 6개월 동안은 영어학원,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평생 후회 없을 만큼 지독하게 영어 공부한 기억밖에 없다. 통역대학원 시절은 더 끔찍했다. 한 학년의 통역사 과정은 대여섯 명 안팍. 외국인 교수는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통역을 하느냐? 정 못하겠으면 저 창 밖으로 뛰어내려라'는 등의 심한 말도 서슴지 않으며 맘속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낙오하는 친구도 몇 있었지만 종령씨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는 오기로 끝까지 밀어붙여 어떨 땐 영어 선생과 꿈 속에서 싸우는 꿈까지 꾼다. 영어로 말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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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큰 딸 서 영이(9세)가 다음 날 있을 국제 회의 준비 때문에 자료를 보며 씨름하는 엄마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은 저렇게 텔레비전 보면서 쉬는 거고, 엄만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해서 지금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난 아빠처럼 돼야지."성형외과인 아빠(이동진씨)는 편안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통역사인 엄마는 코 박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다. '영어의 달인 동시 통역사'의 공부는 이렇게 끝이 없다. 국제 회의 주제에 따라 보험 공부, 신용 카드 공부, 전자파, 심장 이식 등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야 한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산업자원부 전속 통역사로 3년, 그 후 미국 대사관에서 3년을 일하는 동안, 그녀가 통역한 국제 회의는 모두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미리 자료를 보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새로운 정보를 대할 때, '재미가 없다' 생각하면 통역하는 일은 고역일 뿐이다. 그때마다 새로운 기술이나 정보를 남보다 먼저 알게 된다는 '지적 호기심'이 없다면 지겨워서 일을 못했을 것이다.
어떨 땐 통역사가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번역 생성'하는 기계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통역사는 만능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마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공부해야 한다. 특히 전문 회의는 일상 용어만 다루지 않기 때문에 더욱 까다롭다. 신기한 것은 열심히 외웠던 전문 용어들은 그 회의만 끝나면 머리 속에서 싸악 사라지는 것이다. 아마도 용량의 한계가 있는 인간의 머리는 늘 새로운 정보를 넣어두기 위해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문적인 국제회의 때뿐 아니라 귀빈을 모실 때도 까다로운 건 다름이 없다.
지난 번 엘리자베스 여왕 방한 때는 왕실의 예절을 몸에 익혀야 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통역사지만 여왕이 한국에 머무는 3박 4일 일정 동안 지켜야 할 왕실 예절은 한 둘이 아니었다. 여왕보다 튀는 원색 옷을 입지 말 것, 여왕보다 앞서 걷지 말 것, 여왕보다 커 보이게 하이힐을 신지 말 것 등의 시시콜콜한 지적은 물론 여왕이 지나갈 길을 미리 답사해 길 안내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뉴스 속 인물인 유명인사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왕실 전용기도 타보고, 호기심이 많은 여왕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일일이 대답하는 동안, 참 자상한 할머니 같다 느낄 수 있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또 대사관 전속 통역사로 일할 때 제주도에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의 통역을 한 적이 있어요. 힐러리가 어떤 사람이라 비평받더라도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참 똑똑한 여자란 것이에요. 방문지인 제주도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만날 사람에 대한 정보도 미리 챙기는 치밀함은 아무나 느끼는 게 아니죠."귀빈을 곁에서 지켜보고 때론 비서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는 것과 달리 심각한 '협상'을 통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의 이익을 앞세워 협상을 진행할 때, 감정이 격해져 욕설이 튀어나오고, 심각한 상황이 되면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재치껏 상황을 마무리해야 하는 '순발력' 역시 동시 통역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때 지나치게 한쪽 편만 들었다간 상황은 악화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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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통역사가 된지 11년이 되었다. 국제 회의도 적었고, 외국과의 교류도 흔치 않았던 초창기와 달리 요즘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국내외에서 각종 국제 대회가 열리고 지방에서 열리는 경우도 많다. 초창기에는 자료를 받을 때 우편이나 팩스로 받았지만 요즘은 이 메일로 받는다. 그만큼 사회 전체가 스피디해졌다. 세계가 한 걸음 안으로 가까워졌다는 뜻일 게다. 세계가 좁아지는 만큼 통역사의 할 일도 많아진다.
프리랜서인 임종령씨는 올해 들어 한 달의 20일 이상은 출장 중이다. 수백 명의 동시 통역사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7명밖에 없는 세계 동시 통역사 협회(AIIC)의 회원으로 소문난 그녀의 실력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우스개 소리로 프리랜서 통역사는 택시 기사랑 똑같다고 하곤 해요. 적금을 못 들고(고정 수익이 없다), 안 끼는데 없다(대화의 소재를 가리지 않고 다 아는 척한다)는 것이죠."그래도 아직 통역사가 된 걸 후회해 본적은 없다. 대사관을 그만 두고 약 1년 통역대학원에서 강의하기도 했지만 천성적으로 '통역하는 일'이 좋아 곧 포기했다. 가르치는 일보다 현장에서 통역하는 일이 더 신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선 해외여행 많이 하고, 고급 호텔 생활하고, 유명한 사람들을 곁에서 볼 수 있어 좋겠다고 부러워들 하지만, 통역사는 결코 화려하기만 한 직업은 아니다. 정말 이 일이 좋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야 지치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몇 시간씩 집중해 영어로 듣고 말하는 일, 끼니를 거르기 일쑤는 회의 진행은 보통 체력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서비스직'인 통역사가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나며 자조하기도 한다. 어렵게 통역대학원을 나와서도 실제로 활동하는 통역사는 그리 많지 않은 것도 그 이유다. 외국인회사의 간부가 된 친구도 있고, 해외 주재원으로 일하는 친구도 있지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건 현장에서의 통역사로서의 역할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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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출장이 많고 바쁜 그녀는 스스로를 '빵점 엄마, 빵점 아내'라고 말한다. 아마 통역사로서의 일과 엄마, 아내 역할 모두 백점 맞으려고 했다면 지금까지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92년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사는 동안 친정 어머니의 도움과 일곱 살 차이 나는 남편의 이해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자랑스레 할 수 있는 요리 메뉴는 없어도 그녀가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큰 딸 서영과 둘째딸 해원(3세)과 함께 목욕하는 것은 빼 먹지 않는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 시간만큼은 엄마 역할에 충실하려 애쓴다. 몸은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워도 아이들과 따뜻한 물 속에서 스킨십을 나누며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메꾸려 노력한다. 늘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다. 두 딸이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게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이 일과 가정을 지키는 또 하나의 노하우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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