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님과 쿤데라님 글에 대한 답변 :
간단히 말해 모든 독서는 과거 텍스트에 대한 오독이며 재창조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주로 미국에서 유행하는 해체주의이겠죠. 공교롭게도 쿤데라님께서는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로 해체적이다라고 말하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로쟈님과 쿤데라님의 사유는 공통으로 해체-이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두 분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만요)를 언급하시면서 로쟈님께서는 "루소의 <인간언어기원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소의 거의
잊혀진 이 텍스트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이후에 재발견된 텍스트입니다(그래서 영어로 재번역됩니다)."라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은
조금은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는 단지 실증적 문제가 아니라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위상과 해체주의를 다시 점검하는 일이 될테니까요(그렇지만 여기에선 많은 것을 말하기엔 힘이 부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단지 원천과 흐름에 관한 얘기입니다).
한편으로 인용문["루소의 <인간언어기원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소의 거의 잊혀진 이 텍스트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이후에 재발견된 텍스트입니다(그래서 영어로 재번역됩니다)"]은 로쟈님의 해체주의적 독법과
텍스트주의에 대한 의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질문이기에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아울러 분명 루소의 <인간언어기원론>은 <그라마톨로지>라는
상품 때문에 유명해진 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언어기원론>의 한국어 번역자도 <그라마톨로지>를 읽으면서 책을 번역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으니까요. 헌데, 이 <인간언어기원론>이 영어로 번역된 건 1966년, 그러니까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를 출판하기 1년 전의 일입니다(J-J.Rousseau, <Essay On the Origin of Languages>, trans by John H.
Moran, New York, 1966).
하지만 어설픈 실증주의는 이런 사실에 대한 지적에서 머무르고 말겠죠. 데리다가 미국에서 유명해진 시기가 늦게 잡아 1966년이고, 아마 미국의 해체주의 비평가 폴 드 만의 제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이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이보다 조금 뒤니까, 적어도 미국에서 루소의 <인간언어기원론>에 대한 뒤늦은 관심은 스피박의 데리다 번역 이후에 비로소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로쟈님의 언급("루소의 거의 잊혀진 이
텍스트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이후에 재발견된 텍스트입니다(그래서
영어로 재번역됩니다)")에 이상한 점은 별로 없습니다. 단지 "(그래서 영어로 재번역됩니다)"라고 말한 점은 루소의 <기원>이 데리다의 미국 진출 이후로 (66년의 <기원> 번역 이후에) 다시 번역되었다면 문제가 없을 진술이겠죠. 하지만 마찬가지로 "루소의 거의 잊혀진 이 텍스트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이후에 재발견된 텍스트입니다"라는 바로 앞의 진술도 충분히 문제를 삼을 만합니다. 물론 전에 쿤데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프랑스에서만큼은 비주류철학자인(성서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했지요) 데리다의 이 책이 고국에서 얼마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의 많은 부분이 현상학(데리다에 따르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최후의 보루)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책들은
보통 구조주의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데리다 책의 많은 부분이 바로 그 구조의 창출자인 현상학적 주체(초월적 주체, 의미의 최종적인 담지자인)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라는 점이 한편으론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데리다가 적어도 <그라마톨로지>나 <글쓰기와 차이>에서 그가 다시 읽는 현상학자는 사르트르, 하이데거나 메를로 퐁티라기보다는 제너바 학파 비평가 그룹(현상학적 비평가 그룹이라고
바꿔 말해도 되겠지요)이라고 불리는 장 스타로뱅스키나 장 루세, 조르쥬
풀레 등입니다(물론 이들 뒤에는 후설과 바슐라르라는 거대한 스승이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문학비평가와 철학자의 글을 한데모아 나란히 독서하는
것이 데리다의 해체적 글쓰기의 특징이기도 하겠죠). <그라마톨로지>에서는
많은 부분 장 스타로뱅스키의 매우 중요한 책(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도 언급이 되지요), <장 자크 루소 : 투명과 장애>(1954;1971)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이 책은 영어(1988)와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루소의 <기원>은 이미 그의 책에서 스타로뱅스키가 다루고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아더 골드해머의 영역판 304-22쪽은
오로지 <기원>에 대한 분석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루소 비판(인류학/레비-스트로스/구조주의 비판)은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분 스타로뱅스키와 같은 현상학적 글쓰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통과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 합니다(데리다의 루소 비판에서 스타로뱅스키는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비판은 주로 루소로 향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이는 데리다의 교활한 속임수로 보입니다).
<글쓰기와 차이>가 그 서두를 스타로뱅스키와 같은 현상학적 비평가인 장
루세의 저작을 다시 읽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그가
다른 글들에서 조르쥬 풀레의 저작(<인간과 시간>)을 다시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미의 현전과 초월적 주체의 상정을 낭만주의 문학전통으로부터 읽어내고 있는 이들 현상학적 비평가들의 글쓰기(그 원천을 또 따져보면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요)는 데리다의 공격목표 1위가 될 만한 것입니다. 한편, 로쟈님도 이미 페터 지마의 <데리다와 예일 학파>를 읽으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예일학파 비평가들이 모두 낭만주의 문학연구가이며, 특히 그 중 힐리스 밀러가 원래 조르쥬 풀레의 저작을 연구하고 미국에 소개했다는 사실도 간과하기 어려운 것입니다(그는 데리다의 미국 방문을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로 간주^^, 해체주의로 개종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 지적한다면, 아직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데리다의 동료이자 제자인 필립 라쿠 라바르트와 장 뤽 낭시의 <절대의 문학>(로쟈님도
이 책을 알고 있을 겁니다)은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인 예나 서클(슐레겔
형제와 노발리스 등)의 문학운동을 다루고 있지요(서로 다른 경향을 보이지만 국내의 최문규 교수나 비평가 김진수는 이런 점에서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요컨대 제가 말하려고 했던 바는 데리다의
해체적 비판에는 현상학의 중력이 자리잡고 있고 그 중심으로 루소나 구조주의가 선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이런 중심/주변이 데리다에겐
또 하나의 해체의 대상이겠죠). 쓸데 없이 말이 길어졌지만, 로쟈님의 말씀을 좀 더 섬세하게 부각시키느라 여러가지 사실들을 끌어모아 재구성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루소의 <인간언어기원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소의 거의 잊혀진 이 텍스트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이후에 재발견된
텍스트입니다(그래서 영어로 재번역됩니다)"와 같은 언술이 로쟈님의 해체주의적 독서에 대한 견해와 오독 이론의 연장에서 제출된 것이라면, 이것은
조금은 문제적으로 보입니다. 아쉽게도 이렇게 끌고 온 글이다 보니까, 데리다와 미국의 해체주의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을 여기에선 할 수가
없었네요. 그렇지만 이를 단순히 실증주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