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의 생애는 파란과 영욕으로 점철됐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믿음직한 장수였던 임경업이 두각을 나타낸 건 '이괄의 난' 때에
공을 세우면서였다.
친명반청(親明反淸)의 이데올로기를 전투와 모사로써 투철하고도 줄기차게 구현했던 그는
병자호란 때에 명과 합세해 청을 치려했으나 실패했다.
급기야 김자점의 모함에 빠져 곤장을 맞고 세상을 졸업했다.
이 어이없고도 애석한 임종을 맞은 그의 일생을 소설화한 작품이 '임경업전' 이다.
임경업이 속리산에 들어온 것은 "글이야 이름자를 쓸 정도에서 족할 뿐, 모름지기 장부란
천하를 경륜할 무예에 통달하는 게 본령" 이라는 초 패왕 항우(項羽)의 철학을 입수한
열 두엇 나이 때였다고 한다.
전설의 통신에 따르면 임경업은 독보(獨步)대사에게 무술을 사사했다.
비스듬히 칼을 등에 을러메고 바위에서 바위로 휙휙 뛰며 다리며 화살을 날리는 임경업의
무술 수업 광경이 선히 그려지는 경업대 주변 풍경은 쿵후 영화의 무대를 연상시킨다.
산골작에서 '우우우', 바람소리만 올라올 뿐 주밀한 적막에 휘감긴 이 산마루는 정체 모를
방랑 검객이 고독과 우수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요요히 바윗부리에 걸터앉기에 걸맞은
독특한 묘경(妙境)을 이룬다.
경업대 건너편엔 입석대가 우뚝하다. 해발 1000m 산허리에 곧추 헌 입석대는 임경업이 7년 수도
끝에 내공을 과시사리 위해 누워 있던 바윗덩이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전설이란 두꺼비가 왕자로 변하는 식의 황당한 과장으로 포장되게 마련이다.
임경업이 기관차만 한 바위를 일으켰다는 전설이 그리 수상할 것은 없다.
경업대 지척의 아래편에 있는 금강석문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으로 기이하고 오묘한 석문이다.
무지막지한 암반 틈서리로 조붓한 통로가 나 있는데 이 역시 임경업이 칼로 쪼개면서 생긴 길이라는
전설이 붙어있다.
석문을 벗어나 돌계단을 오르니 관음암(觀音庵)이 나타난다.
한심하도록 허름하고 진절머리나도록 외진 이 암자는 임경업이 토굴을 후비고 살았던 곳이라 해서
'임경업 토굴' 로 부르기도 한다.
암자 입구 바위 동굴 속에는 석간수가 고인다.
임경업이 마신 물이라고 해서 장군수(將軍水)로 통한다.
장군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텅 빈 관음안 뜰에 서서 벌써 기우는 붉은 해를 바라본다. 임경업의 꿈과 기개를 음미한다.
속리산을 하산할 때 그의 육신은 호랑이처럼 늠름하고 불곰처럼 강인 했을 것이다.
맨 손으로 돼지 창자를 꺼낼 만한 장부로 진급했을 것이다.
속리산의 정령이 협찬해 그에게 뱀 같은 슬기와 독수리 같은 지혜를 선물했을 것이다.
이로써 난세로 나아간 그는 우국청정의 견본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곤장에 맞아 죽은 그 종말은 허무하다. 허망하다.
아니다. 하늘은 때로 농간을 부려 인간의 재주를 시기하는 게 아닌가.
임경업의 비통한 영웅 서사는 이미 예정된 각본이었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꿈이 있는가? 성공한 영웅이 있는가?
여행정보>
■ 추천산행코스 = 법주사를 관람한 뒤 속리산을 오른다.
법주사→세심정 휴게소→복천암→중사자암→문장대→청법대→신선대→경업대→비로산장→
세심정→법주사(약5시간 소요)
■ 맛집 = 법주사 상가단지에 위치한 산토불이 약초식당(043-543-0433)의 약초산채버섯정식은
복령ㆍ산마ㆍ송이ㆍ오갈피 등 자연산 약초와 산채로 요리한 60여 가지의 반찬이 나온다.
4인분 한 상에 8만원.
■ 교통편 = 자가운전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이나 옥천 나들목으로 나와 보은읍에
이른 뒤, 국도 37번을 따라 30여 분을 달려 법주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대중교통은
동서울 터미널에서 하루 12회 운행하는 속리산행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 속리산 정보 = 국립공원 속리산 사무소 (www. npa.or.kr/songni) 043-542-5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