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큰길 양쪽의 상가건물 뒤로 가면 좁고 긴 골목길이 나온다. 이 곳이 그 유명한 피맛골이다. 피맛은 피마(避馬.말을 피하다)에서 유래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말 탄 권세가들을 피하기 위해 지나던 골목이라는 뜻이다. 이 골목길을 만들게 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조선시대에 고위 여하를 막론하고 함께 다니던 큰 길이 있었다. 조선시대 때에 평민들이 제일 듣기 싫어했던 소리가 있다. “여이∼ 물럿거라! 누구누구 대감마님 행차시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그 행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의 행차 소리에 길가던 아낙네부터 무거운 짐 짊어진 남정네까지 엎드려 조아려야 했다.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다 보니 불편하다는 민원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한 임금이 “백성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뒷골목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 무렵 '말을 피해 다니는 좁은 골목'이라는 의미에서 피마(避馬)라 불리는 골목이 생겨났다. 피맛골은 서울 종로 1~6가에 걸쳐 종로에서 18m 북쪽으로 나 있는 폭 2~3m 정도의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다. 이 동네를 ‘피맛골’로 불렸다. 이 골목길은 평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길이 됐다. 내외술집·모주집·목로집·색주가 등이 대거 들어섰다. 1930년대 중반엔 200여개의 선술집이 성업했을 정도다. 지금도 광화문 교보빌딩 후문에서 종로 제일은행 본점까지, 종각에서 종로2가까지, 피카디리극장과 서울극장 뒷골목엔 그 옛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빈대떡, 굴전, 파전, 순대, 곱창구이, 낙지볶음, 골뱅이, 떡볶이 등 값싼 안주에 소주나 막걸리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특히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종로2가 YMCA 뒤편의 40∼50개 학사주점은 대학생과 회사원들이 울분을 삭이며 김치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던 곳이었다. “가끔씩/중심에서 비켜서고 싶을 땐/습관처럼/피맛골로 간다.” 시인 김중진은 ‘피맛골’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피맛골은 조선민중의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역사현장이다. 피맛골엔 현재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민이 즐겨 찾는 선술집이 제법 남아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골목 안에 진동하는 빈대떡 냄새가 술꾼과 시인묵객을 불러들인다. - 초가집님 글 중에서...
이 피맛골을 서울사는사람치고 안가본 사람이 어디있겠느냐만은, 피맛골-이뜻을 제대로 아는사람또한 몇이나 될까싶다.
광하문 교보빌딩에서 종로3가까지 피맛골을 걸어본다.
교보문고 후문에서 바로 피맛골입구다.
청진동길이 나오며 피맛골이 잠시 끊긴다.
옆의 종로거리는 하루가멀다하고 변하지만, 사실 피맛골은 10년전이나 20년전이나 크게 변한것이 없다.
다시 피맛골이 이어진다.
이제 피맛골이 종로사거리로 이어진다.
종로사거리로 나오며 초 현대식의 삼성증권건물이 보인다.
종로구청의 피맛골 공식 안내문이다.
종로사거리는 오랬만에 나와보는 나에게도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신신백화점 자리는 언제부터인가 초현대식의 종로타워건물이 들어섰다.
맞은편에는 보신각이 보이고...
휴식공간도 보이고...
공중전화 부스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지?
큰 길가는 현대식으로 모습을 바꾸어가지만, 피맛골은 그대로다..
서피마길이라...
종로2가 파고다공원까지 피맛골 모습이다.
파고다공원에서 잠시 피맛골이 끊기도...
파고다(탑골)공원 건너편 종로 3가 버스정류장 쪽에 아트박스가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책방 ‘마리서사’를 열었던 장소다. 피마골에는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대중적인 음식점들이 번창했다. 장국밥집, 목로술집, 내외술집, 모줏집, 그리고 색주가가 있었다. 목로술집이란 오늘날 스탠드바와 같은 선술집이다. 내외술집은 몰락한 양반이 먹고 살 길이 없어 운영하는 술집으로, 양반 체통을 보이느라 내외를 깍듯이 하는 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내외술집에 들러 “이리 오너라!” 하면 주인 여자는 방문 안에서 “손님께서 거기 있는 자리를 깔고 계시라고 여쭈어라!” 고 한다. 손님이 자리를 깔고 “술상 내보내시라고 여쭈어라!”하면
차린 술상을 방문 밖에 밀어 내놓는다. 이와 같이 주인 여자는 일체 손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며 있지 않은 인물을 가운데 두고 대화를 함으로써
내외법을 지키는 이상한 양반 술집인 것이다. 여자가 접대하는 색주가는 파고다 공원 뒤에서 종로 3가에 걸친 피맛골에 있었다.
이 피맛골은 '현대화''재개발'등에 밀려 점차 옛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이 피맛길은 힘없고 헐벗은 민초들의 애환을 품에 안으며 수백년을 이어져온 우리 민중들의 삶의 편린이다.
파고다공원 정문이다.
그리고는 종로3가 단성사극장까지 계속된다.
이른바 색주가인데, 그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길 이름도 서피마길에서 동피마길로 바뀌며, 역사를 이어간다.
단성사극장.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때와는 전혀 다른모습을 보여주는 단성사극장.
종로 3가거리.
대로변에서 비껴나있는 피맛골 골목.
종로 큰거리는 세월의 변화를 잘 따라간다.
하지만 바로 옆의 피맛골은 그러한 변화를 무시한채 오늘도 어제와같이..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하고있다.
서울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큰길 양쪽의 상가건물 뒤로 가면 좁고 긴 골목길이 나온다. 이 곳이 그 유명한 피맛골이다. 피맛은 피마(避馬.말을 피하다)에서 유래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말 탄 권세가들을 피하기 위해 지나던 골목이라는 뜻이다. 이 골목길을 만들게 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조선시대에 고위 여하를 막론하고 함께 다니던 큰 길이 있었다. 조선시대 때에 평민들이 제일 듣기 싫어했던 소리가 있다. “여이∼ 물럿거라! 누구누구 대감마님 행차시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그 행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의 행차 소리에 길가던 아낙네부터 무거운 짐 짊어진 남정네까지 엎드려 조아려야 했다.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다 보니 불편하다는 민원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한 임금이 “백성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뒷골목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 무렵 '말을 피해 다니는 좁은 골목'이라는 의미에서 피마(避馬)라 불리는 골목이 생겨났다. 피맛골은 서울 종로 1~6가에 걸쳐 종로에서 18m 북쪽으로 나 있는 폭 2~3m 정도의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다. 이 동네를 ‘피맛골’로 불렸다. 이 골목길은 평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길이 됐다. 내외술집·모주집·목로집·색주가 등이 대거 들어섰다. 1930년대 중반엔 200여개의 선술집이 성업했을 정도다. 지금도 광화문 교보빌딩 후문에서 종로 제일은행 본점까지, 종각에서 종로2가까지, 피카디리극장과 서울극장 뒷골목엔 그 옛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빈대떡, 굴전, 파전, 순대, 곱창구이, 낙지볶음, 골뱅이, 떡볶이 등 값싼 안주에 소주나 막걸리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특히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종로2가 YMCA 뒤편의 40∼50개 학사주점은 대학생과 회사원들이 울분을 삭이며 김치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던 곳이었다. “가끔씩/중심에서 비켜서고 싶을 땐/습관처럼/피맛골로 간다.” 시인 김중진은 ‘피맛골’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피맛골은 조선민중의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역사현장이다. 피맛골엔 현재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민이 즐겨 찾는 선술집이 제법 남아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골목 안에 진동하는 빈대떡 냄새가 술꾼과 시인묵객을 불러들인다. - 초가집님 글 중에서...
이 피맛골을 서울사는사람치고 안가본 사람이 어디있겠느냐만은, 피맛골-이뜻을 제대로 아는사람또한 몇이나 될까싶다.
광하문 교보빌딩에서 종로3가까지 피맛골을 걸어본다.
교보문고 후문에서 바로 피맛골입구다.
청진동길이 나오며 피맛골이 잠시 끊긴다.
옆의 종로거리는 하루가멀다하고 변하지만, 사실 피맛골은 10년전이나 20년전이나 크게 변한것이 없다.
다시 피맛골이 이어진다.
이제 피맛골이 종로사거리로 이어진다.
종로사거리로 나오며 초 현대식의 삼성증권건물이 보인다.
종로구청의 피맛골 공식 안내문이다.
종로사거리는 오랬만에 나와보는 나에게도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신신백화점 자리는 언제부터인가 초현대식의 종로타워건물이 들어섰다.
맞은편에는 보신각이 보이고...
휴식공간도 보이고...
공중전화 부스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지?
큰 길가는 현대식으로 모습을 바꾸어가지만, 피맛골은 그대로다..
서피마길이라...
종로2가 파고다공원까지 피맛골 모습이다.
파고다공원에서 잠시 피맛골이 끊기도...
파고다(탑골)공원 건너편 종로 3가 버스정류장 쪽에 아트박스가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책방 ‘마리서사’를 열었던 장소다. 피마골에는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대중적인 음식점들이 번창했다. 장국밥집, 목로술집, 내외술집, 모줏집, 그리고 색주가가 있었다. 목로술집이란 오늘날 스탠드바와 같은 선술집이다. 내외술집은 몰락한 양반이 먹고 살 길이 없어 운영하는 술집으로, 양반 체통을 보이느라 내외를 깍듯이 하는 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내외술집에 들러 “이리 오너라!” 하면 주인 여자는 방문 안에서 “손님께서 거기 있는 자리를 깔고 계시라고 여쭈어라!” 고 한다. 손님이 자리를 깔고 “술상 내보내시라고 여쭈어라!”하면
차린 술상을 방문 밖에 밀어 내놓는다. 이와 같이 주인 여자는 일체 손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며 있지 않은 인물을 가운데 두고 대화를 함으로써
내외법을 지키는 이상한 양반 술집인 것이다. 여자가 접대하는 색주가는 파고다 공원 뒤에서 종로 3가에 걸친 피맛골에 있었다.
이 피맛골은 '현대화''재개발'등에 밀려 점차 옛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이 피맛길은 힘없고 헐벗은 민초들의 애환을 품에 안으며 수백년을 이어져온 우리 민중들의 삶의 편린이다.
파고다공원 정문이다.
그리고는 종로3가 단성사극장까지 계속된다.
이른바 색주가인데, 그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길 이름도 서피마길에서 동피마길로 바뀌며, 역사를 이어간다.
단성사극장.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때와는 전혀 다른모습을 보여주는 단성사극장.
종로 3가거리.
대로변에서 비껴나있는 피맛골 골목.
종로 큰거리는 세월의 변화를 잘 따라간다.
하지만 바로 옆의 피맛골은 그러한 변화를 무시한채 오늘도 어제와같이..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