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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치과 다닐 때
숙제로 읽고 네이버카페에 올렸던 것을
2013년 다음카페로 옮겨오면서
사진(->그림 : 사진과 그림은 다르죠)을 다시 첨부하느라
1시간 가량 흘러갔네요.
...................................................
<공자> 영화를
2년전인 2011.11.4 금요일 밤에 보다가 졸려서
토요일 다시 보고
[논어] 읽기 시작
2011년 11월 5일 토요일부터
연에 그린 그림 & 김홍도의 풍속도
흑룡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
성취하시는 한 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곽봉수 - 새천년의 꿈
1. 논어라는 책
논어란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 사는 이치나 교육, 문화, 정치 등에 관해
논의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그 안에는 공자의 혼잣말을 기록해 놓은 것도 있고,
제자의 물음에 공자가 대답한 것
그리고 제자들끼리 하던 이야기도 있다.
또한 제자 이외에 당대의 정치가들이나 은자隱者들 또는
마을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책 제목이 [논어]가 되었다고 한다.
공자와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토론한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또 한편으로는 공자에 관해 남은 기록들을
제자들이 '논의하여 정리한 이야기'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논어]라고 알고 있는 책의 저본이 되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을 법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노론魯論], [제론齊論], [고론古論]이라는 세 가지 판본이다.
[노론]과 [제론]은 각각
노나라와 제나라에 전해지던 것이라 하고,
[고론]은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고문古文으로 된 [논어]이다.
그러나 이들의 판본도 온전히 전하는 것은 없고,
지금 우리가 보는 [논어]의 모습은
후한後漢의 정현(鄭賢, 127-200)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노론]을 바탕으로 하고
[제론], [고론]은 물론 당시에 전해지던 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지금의 [논어]를 만들어 냈다.
[논어]에는
공자의 풍모와 성격이 곳곳에 배어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이야기하던
분위기와 말투까지도 그대로 살아 있다.
김귀인 - 산수
2. [논어]에 관한 책
지금까지 [논어]와 관련된 책은
3천여 권이나 발간되었다고 한다.
[논어]는 동양 고전 중에서도
글이 매우 간략하고 함축적이며
구어체의 문투가 거의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생생한 말에 풍부한 함의를 담고서
독자의 지적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차원의 독해가 가능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논어]는
고려시대 이래로 교육의 기본서로 사용되었고,
그에 관한 해설도
권근(權近, 1352-1409),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이익(李瀷, 1681-1763),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많은 학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역작으로는 아무래도
정약용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논어고금주]에는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
고금에 걸친 주석에 대한 종합비판과 아울러,
공자 당대의 사상에 입각했다는
정약용의 독자적인 해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김봉민 - 해와 달
3.공자와 춘추시대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지었다고 하는 [춘추]春秋는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0년까지의
노魯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에 기록된 시기를 춘추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주나라 중심의 천하질서가 무너진 이후
제후諸侯들이 할거割據하기 시작한 시대에서부터
대부大夫들의 할거시대,
즉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라는 대부들의 나라로 갈라지던 시기 이전까지를
그 시기로 본다면,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부터 기원전 402년까지가 된다.
그리고 전국戰國시대는 그 다음해인
기원전 402년부터
진秦나라 왕인 정政이
중국을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를 칭하게 되는
기원전 221년까지가 된다.
이렇게 보면 공자가 활동한 때는
주나라가 천자국으로서 힘을 잃고
동쪽으로 쫓겨가 동주東周를 세운 후
이미 춘추시대 후반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시기였다.
이제는 하나의 제후국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는 상황에서
제후국들간의 필요에 의해
주나라는 그저 천자국의 명분만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가장 강한 제후가 '패자覇者'가 되는,
불안정한 천하의 질서가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공자가 태어난 것은 이런 식의 불안한 질서가 이미
200여 년간 지속된 때였다.
초楚, 진秦, 제齊, 진晉, 오吳, 월越 등의 강대한 제후국들은
패자覇者가 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노魯, 위衛, 정鄭, 송宋, 조曺, 진陳, 채蔡 등 약한 제후국들은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심해야 했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비교적 약소국에 속했던 노나라였다.
특히 노나라는 패자가 되려는 의지가 강했던 강대국
제나라의 옆에 붙어서 수시로 존립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다만, 노나라는 무왕을 도와 주나라의 천하통일과 문물제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한 주공周公이 봉해진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약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후들이 함부로 합병을 시도할 수 없었다.
노나라는 여전히 주공의 권위가 받쳐 주고 있었고,
또한 주나라의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나라를 합병한다는 것은
다른 제후국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초래할 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논어]에 수없이 등장하는 세 대부의 집안,
즉 계손씨季孫氏, 숙손씨叔孫氏, 맹손씨孟孫氏가
노나라를 좌우하다가,
나중에는 계손씨의 가신인 양호陽虎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의 한 예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천자국 중심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역사는 이미
대부들의 반란을 통해
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전국戰國시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김영배 - 기러기
4. 공자의 삶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지역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노나라는 주나라의 주공이 봉해진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주나라의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었고,
그러한 환경은 공자가 성장하면서
주나라 예禮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공자 자신의 집안 내력은 확실하지 않지만,
60이 넘은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젊은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는 [사기史記]의 기록이 어느 정도 확실하다면,
어쨌든 별달리 가문의 후광을 입을 처지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더욱이 늙은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공자가 젊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기에,
공자는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창고지기나 가축관리 등의 천한 일을 하면서도
예에 관심이 많았었다는 공자 자신의 기억이
몇몇 기록에 묻어서 전해질 뿐이다.
19세에 기관씨?官氏의 딸과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부인에 관해서도 믿을 만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 리鯉와
제자 공야장公冶長에게 시집보낸 딸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논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유소 - 기원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남들에게 배우기를 즐겨했던 공자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했다고 한다.
[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서른 살 무렵이면
이미 공자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그의 행적을 보면
이미 열다섯에 뜻을 둔 학문이란 것이
단순히 옛 제도와 예법을 공부하여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뒷날 그가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뜻을 펼치려다가
양호나 환퇴桓? 등으로 인하여 위험에 빠졌을 때,
그는 자신이 세상에 도를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해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뜻을 둔 학문이란
주나라 문화와 제도의 회복을 통하여
천하의 안정을 되찾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 준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나라에서 토지 문제를 관리하는 사공司空,
형벌과 치안을 담당하는 사구司寇 등
적지 않은 벼슬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관직에 나아가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세 대부의 집안이
나라의 기강을 뒤흔드는 현실 속에서
공자는 뜻을 펼칠 수가 없었고,
결국 55세에 노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된다.
문인상 - 삶
그는 여러 나라의 제후들을 만나
인仁과 예禮에 입각한 자신의 사상을
현실 정치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생사가 걸린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제후들은 공자의 고상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이상 실현을 위해
먼 길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공자는 현실의 벽을 절감했고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13년간의 긴 여행을 정리하고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제 이미 68세의 노인이 된 그가 전념한 것은
교육과 저술이었다.
공자가 처한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을지라도,
먼 훗날 어느 때든
그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희망의 싹을 심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공자는 실권은 없을지라도
노나라에서 명망 있는 원로로 대접받았고
그의 제자들은 미미한 자리나마
정치의 일선에 섰다.
공자는 이 시기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악樂], [춘추春秋] 등의
이른바 '육경六經'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기원전 479년
7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생전에 원했던 만큼은 아닐지라도,
말년에 희망했던 대로
그의 사후에 2,000년이 넘도록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도 그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민병문 - 설악의 기운
5. 공자의 사상
공자의 시대에는 예禮를 익히고 가르치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예에 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제후나 세도가들에게 교육, 문호, 정치 등에 관해
자문을 해 주고
그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며
그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공자도 이런 지식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공자가 특별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예라는 번잡한 형식을 왜 따라야만 하는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철학적 의미를 찾아서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는 데 있다.
그 이전까지는 대체로 예의 형식적인 면에만 치중했을 뿐,
그 정신적 토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달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기한 예의 정신을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인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이란 논어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개념이고,
공자의 사상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개념이다.
공자는 '인'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인'은 그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러 차례 언급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의 경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런데 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는
그가 자신보다도 뛰어난 인재로 지목했던 제자 안연顔淵이나,
요임금, 순임금 등의 전설적인 성인을 꼽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인仁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안연을 인仁한 사람이라고 한 이유도 단지
'궁핍하게 살면서도 진리道를 추구하는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는
설명에 그치고 마는데,
그런 지조와 용기라면
또 다른 제자인 자로子路도 뒤질 바가 아니었으니
인仁의 경지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박문수 - 연꽃
공자가 분명하게 인을 정의한 것은
제자인 번지樊遲의 질문에 대해
"(인이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愛人]이라고 한 것이다.
그 내용을 미루어 보자면,
"자기가 서고자할 때 남을 먼저 세워주고,
자기가 뜻을 이루고자할 때 남이 먼저 이루도록 한다."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것이다.
이러한 인의 덕은
항상 겸손하게 말을 조심하며,
이기적인 욕구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야 한다는
예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인'이란 글자 그대로
'두 사람二人',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공자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통하여
사회의 안정을 추구했고,
이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인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예를 통해 인의 실현을 이루려 하되,
그러한 인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근거를
효孝라는 자연적 본성에서 찾았다.
공자는 누구나
자신의 부모를 잘 모시고 싶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데 착안하여,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인간 관계의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상정했다.
박창수 - 화조
.
.
.
공자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君君, 臣臣, 父父, 子子]
살아가라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갈 때,
마치 온갖 악기들이 하나의 멋진 교향악을 만들어 내듯이
조화로운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삶의 최고의 경지를 음악에 비유하곤 했다.
"시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 자립하고,
음악에서 완성을 이룬다."
[흥어시興於詩, 입어덕立於德, 성어악成於樂]
그리고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의 길을 이렇게 묘사했다.
"도에 뜻을 두고, 덕을 바탕으로 하여, 인에 의지하고, 예술의 세계에서 노닐었다."
[지어도志於道, 거어덕據於德, 의어인依於仁, 유어예游於藝]
공자에게서 예에 따라 산다는 것은
경직된 규범에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도덕적 욕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다만,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욕구와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내면적인 공부와 병행하여
생활 속에서 예라는 형식의 반복을
수행을 통한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공부와 반복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음악과 같은 예술의 경지이고,
그것이 공자가 꿈꾸었던 이상적 삶과 사회의 모습이다.
박채배 - 무궁화
제1편
학이學而
공자께서
원문은 '자子'이다
'자'는 성 아래 붙여
남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한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서,
굳이 공선생님[孔子]이라는 표현 대신
'선생님'[子]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논어]에서 '자왈'子曰이란 것은 모두
'공자(공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뜻이다.
유자
유자有子는 공자의 제자인 유약有若을 말한다.
공자보다 43세 연하로,
모습이 공자와 닮았다고 전해진다.
유약에 대해서도 '자'子를 붙여 '유자'有子라고 칭한 것을 보면,
이 문장은 유약의 아랫사람이 기록한 듯하다.
증자
증자曾子는 공자보다 46세 연하인 제자로,
증은 성이고, 자는 존칭이며, 이름은 삼蔘, 자字는 자여子與이다.
[대학]大學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철학적인 면에서 공자의 중요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원문은 '충'忠이다.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이 합쳐진 모양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
즉 '진실된 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남의 일이라고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반성한다는 뜻이다.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은 없는가?
원문은 '신'信으로 '믿다', '신뢰하다'는 뜻이다.
벗과 신의로 맺어질 때는 목숨도 함께 할 수 있지만
신의가 무너지면 남일 뿐이기 때문에,
벗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신의를 든 것이다.
박충호 - 금강산만물상
자하
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며, 자하는 그의 자字이다.
공자보다 44세 연하이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다고 한다.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기를 마치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어진 이를 대할 때는
어진 이로서 대접하되
마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듯이
아주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대하라
라는 의미로 본다.
자금
자금子禽은 공자의 제자라고도 하고
자공의 제자라고도 한다.
성은 진陳, 이름은 강(또는 항;亢)이고, 자금은 자이다.
자공
자공子貢은 공자의 제자로
공자보다 31세 연하이며,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공은 그의 자이다.
공자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언변에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경우에는 자식의 속마음을 살펴보고,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자식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으므로,
그 자식이 진정 효자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 자식이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면서
마음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한 것이 도의에 가깝다면 그 말을 실천할 수 있고,
원문은 '신근어의'信近於義이다.
인간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도의에 맞는가 하는 점이다.
도의에 어긋난다면
어쩔 수 없이 신의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주의 남자>드라마에 나오는 김승휴와 신민이 생각났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서기순 - 매화
제2편
위정爲政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을 정치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고도 부끄러워함이 없다.
원문은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이다.
백성들이 형벌만 교묘하게 피해 나가려 하고
자기 행위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법치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또한 잘못을 바로 잡게 된다."
원문은 '유치차격'有恥且格이다.
덕과 예로 다스리면
사람들은 잘못된 언행에 대해
형벌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그 자식이 병날까 그것만 근심하신다."
원문은 '유기질지우'唯其疾之憂이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이다.
'그것 기'其가 가리키는 대상을
'자식'으로 보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 다른 걱정은 안 하고
건강만 염려하도록 하는 것이 효'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대상을 '부모'로 보면
'부모가 병에 걸릴까 걱정하는 것이 효'라는 풀이도 된다.
양남자 - 비상
자유
자유子遊는 공자보다 45세 연하인 제자로
성은 언言, 이름은 언偃일며 자유는 그의 자이다.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회와 함께 하루종일 이야기를 해도
그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뒤에 그가 생활하는 것을 보니,
또한 그 내용을 충분히 실천한다.
안회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안회
안회顔回는 공자보다 30세 연하의 제자로,
성은 안, 이름은 회, 자는 자연子淵이다.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우수한 제자로서
큰 기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특히 덕행德行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단명하여 4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고,
이로 인해 공자가 크게 상심하였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여러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당파를 이루지는 않고,
소인은 당파를 형성하여
여러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군자와 소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공公과 사私이다.
국가나 사회 또는 천하의 이익과 정의를 우선시하는가 아니면
개인이나 소속 집단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가에 따라
각각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는 것이다.
유
유由는 공자보다 9세 연하의 제자로,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는 자로子路, 계로季路이다.
공자의 제자 중 정치에 재능이 있었으며,
직선적이고 용맹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전해진다.
우용태 - 민화비룡
제3편
팔일八佾
공자께서 계씨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뜰에서 천자인 양
여덟 줄로 춤추게 하다니,
이것을 참고 봐줄 수 있다면 그 무엇인들 참고 봐주지 못하겠는가?"
원문운 '계씨'季氏로 노나라의 세도가인 대부大夫 계손씨를 말한다.
원문은 '팔일' 八佾이다.
가로와 세로에 각각 여덟 줄로 서서
64명이 추는 춤이며, 천자가 사용하는 예식이다.
제후는 육일六佾로 36명,
대부는 사일四佾로 16명,
사士는 이일二佾로 4명이 하게 되어 있다.
공자는 대부의 집안인 계손씨의 집에서
천자의 예법을 사용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25일 금요일 집에서 읽기 시작
제 4편
리인(里仁)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제5편
공야장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해 보지 않겠느냐?"
자로가 말하였다.
"수레와 말과 좋은 털가죽옷을 벗들과 함께 나눠쓰다가
그것이 못쓰게 되더라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안연이 말하였다.
"잘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공로를 과시함이 없돌고 하고자 합니다."
자로가 여쭈었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노인들은 편안하게 해주고,
벗들은 신의를 갖도록 해주고,
젊은이들은 감싸 보살펴 주고자 한다."
이범주 - 월광곡
제7편
술이(述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도리를) 안 사람이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
공자께서는 사람들과 노래 부르는 자리에 어울리시다가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시고는
뒤이어 화답하셨다.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시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시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셨다.
제10편
향당(鄕黨)
공자께서 마을에 계실 때는
겸손하고 과묵하여
말을 못하는 사람 같으셨다.
그러나 종묘와 조정에 계실 때에는
분명하게 주장을 펴시되 다만 신중하게 하셨다.
밥은 고운 쌀이라야 싫어하지 않으셨고,
회는 가늘게 썬 것이어야 싫어하지 않으셨다.
밥이 쉬어 맛이 변한 것과
생선이나 고기가 상한 것은
드시지 않으셨다.
빛깔이 나쁜 것도 안 드셨고,
냄새가 나쁜 것도 안 드셨다.
잘못 익힌 것도 안 드셨고,
제철이 아닌 음식도 안 드셨다.
썬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안 드셨고,
간이 적절하게 들지 않은 것도 안 드셨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밥 생각을 잃을 정도로 드시지는 않으셨다.
술만은 한정을 두지 않으셨으나,
품격을 어지럽힐 정도까지 이르시지는 않았다.
사 온 술과 사 온 육포는 드시지 않으셨다.
생강은 물리치치 않고 드셨으나
많이 드시지는 않으셨다.
나라의 제사에서 받은 고기는
하룻밤을 묵히지 않으셨다.
다른 제사에서 나온 고기도
삼 일을 넘기지 않으셨고,
삼 일을 넘기면 드시지 않으셨다.
식사하실 때는 말씀이 없으셨고,
잠자리에서도 말씀이 없으셨다.
비록 거친 밥과 채소국이라도
반드시 고수레를 하셨는데,
언제나 엄숙하고 삼가는 모습이셨다.
이양원 - 희
11월 28일 월요일 계속해서 읽기 후9:04
16
잠자리에서는 시체처럼 몸을 함부로 하여 눕지 않으셨고,
집에 계실 때에는 엄숙하지도 않으면서도
몸가짐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상복 입은 사람을 보시면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낯빛을 바로잡으셨고,(?)
예복을 입은 사람과
장님을 만나시면
비록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낯빛을 달리하셨다.
상복을 입은 사람에게는
수레 위에서도 예의를 표하셨고,
나라의 지도나 문서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도
수레 위에서 예를 갖추셨다.
손님으로서 훌륭한 음식을 대접받으시면
반드시 낯빛을 바로잡고
일어서서 예를 표하셨다.
천둥이 심하게 치고 바람이 거세게 불면,
반드시 낯빛을 달리하셨다.
제11편
선진(先進)
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사람들은 예(禮)와 음악에 있어서
야인처럼 질박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예와 음악에 있어서
군자처럼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만일 내가 마음대로 택하여 쓸 수 있다면
나는 옛 사람들을 따르겠다."
야인(野人)은 벼슬을 안 한 일반 사람들처럼,
형식보다는 질박함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군자(君子)는 사대부처럼 예약의 형식미를 갖춘 사람들을 뜻한다.
정기철 - 해질 무렵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할 때
나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나의 문하에 없구나.
덕행(德行)으로 모범이 된 사람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었고,
언변에 뛰어나기로는
재아, 자공이 있었고,
정치에 능하기로는
염유, 계로가 있었고,
문장과 학문으로는
자유, 자공이 있었다."
문하에 없구나
원문은 '불급문'(不及門)이다.
주희는 '지금은 문하에 없다', 즉
'지금은 다 떠났다.'는 뜻으로 풀었다.
그런데 또 정현은
'벼슬에 나아가는 문에는이르지 못하였다'고 풀었다.
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구나."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공자가 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말을 들으면 모두 이해하여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고
기뻐하기만 한다는 말이다.
최선미 - 천리
11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술이] 20장에도
"공자는 괴이한 일, 힘으로 하는 일, 사회를 어지럽히는 일,
귀신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子不語怪力亂神]고 하셨다.
신기하고 괴이한 일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사람들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하여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공자의 관심사였다.
12
민자건은 공자를 곁에서 모실 때
더불어 즐거워하면서도
주장이 분명하였고,
자로는 강하고 용감하였으며,
염유, 자공은 강직하였다.
공자께서는 이런 제자들과 지내며 즐거워하셨다.
그러나,
"유(자로)와 같은 사람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17
시는 어리석고
삼(증자)은 둔하고
사(자장)는 형식에 치우치고
유(자로)는 거칠다.
시(柴)는 공자보다 30세 연하인 제자로,
성은 고(高), 시는 이름이며,
자는 자고(子羔)이다.
증삼은 둔했지만 한편으로 매우성실하여,
공자의 만년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자장은 재능이 뛰어났지만 성실하지 못하여,
형식적인 것만 대강대강 익혔다고 한다.
자로는 성격이 강직하되 거칠었다고 한다.
최진옥 - 향기
21
자로가 "좋은 말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하고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듣는 대로 곧 행하겠느냐?"
염유가 "좋은 말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하고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곧 행해야 한다."
공서화가 여쭈었다.
"유(자로)가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부형이 계신다'라고 하셨는데,
구(염유)가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하고 여쭈었을 때는
'들으면 곧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의아하여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염유)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한 것이고
유(자로)는 남을 이기려 하기 때문에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
1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이룩하도록 해주고
남의 나쁜 점은 이루어 주지 않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19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만일 무도한 자를 죽여서
올바른 도리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선생께서는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죽이는 방법을 쓰시겠습니까?
선생께서 선해지고자 하면
백성들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입니다."
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한 사람이 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다면,
잔악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사형할 일이 없게 된다.
진실이로다. 이 말은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왕도정치를 행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 뒤에야 풍속이 인(仁)해질 것이다."
18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몸가짐이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숨겨 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숨겨 주지만,
정직함은 바로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해하기가 좀 ~~ 양을 훔친 이유가 궁금해진다)
2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그를 기쁘게 하려 할 때
올바른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자가 사람을 부릴 때는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일을 맡긴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쉽다.
그를 기쁘게 하려 할 때는
올바른 도리로써 하지 않더라도
기뻐한다.
그러나 소인이 사람을 부릴 경우에는
능력을 다 갖추고 있기를 요구한다."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맡겨 놓고는
능력이 모자람을 탓한다는 말이다.
2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한 사람이 백성들을 7년 동안 가르친다면,
전쟁에 나아가게 할 수 있다."
3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을 가르치지 않고서
전쟁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을 버리는 것이다."
제14편
헌문(憲問)
1
원헌이 수치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道)가 행해지고 있을 때도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녹봉이나 받아 먹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도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고
녹봉을 받아 먹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주희의 해석에 의하면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는
도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수치이고,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는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수치라는 것이다.
공안국과 황간은
앞의 구절을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는 벼슬을 하지만'이라고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11월 30일 수요일 낮잠 후 계속해서 후5:30
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德)이 있는 사람은 바른 말을 하지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仁)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용감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한 것은 아니다."
6
남궁괄이 공자에게 여쭈었다.
"예는 활을 잘 쏘았고
오는 배를 끌고 다닐 만큼 힘이 쎘지만,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임금과 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차지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남궁괄이 밖으로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로구나, 그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그 사람은"
남궁괄(南宮适)은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용(子容)이었으므로
남용(南容)이라고도 불렸다.
그에 대한 공자의 칭찬은
[공야장] 2장과 [선진] 5장에도 보인다.
예(?)는 유궁(有窮)의 임금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그의 신하인 한착(寒?)에게 죽음을 당했다.
오(?)는 요(?)라도도 하며,
한착(寒?)의 아들로 2011.12.5.월 저녁 9 :06 시작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닐 만큼
힘이 세었다고 한다.
하(夏)나라 임금인 소강(少康)에게 죽음을 당했다.
우임금은 하나라의 첫 임금으로,
치수(治水)를 잘하여
중원에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하였다고 하며,
그 공으로 순임금에게서 천하를 물려받았다.
직(稷)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며,
주나라를 세운 문왕과 무왕이
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천하를 소유하였다고 한 것이다.
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14
공자께서 공명가에게 공숙문자에 대해서 물으셨다.
"정말입니까?
그 분은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으며
재물을 취하지도 않습니까?"
공명가가 대답하였다.
"선생님께 말씀드린 사람이 지나쳤습니다.
그분은 말할 때가 된 후에 말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의 말을 싫어하지 않고,
즐거운 연휴에 웃기 때문에
남들이 그의 웃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의로운 것임을 안 후에 취하므로
남들이 그의 취함을 싫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습니까?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공숙문자(公叔文子)는 위(衛)나라의 대부인
공손발(公孫拔)이며,
문(文)은 시호이다.
공명가(公明賈)는 위나라 사람으로,
공명이 성이고 가가 이름이다.
17
자로가 여쭈었다.
"제나라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그를 위해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仁)하지 않다고 해야 되겠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그만큼만 인하면 되리라!
그만큼만 인하면 되리라!"
공자(公子) 규(糾)는
제나라 환공의 이복 형제이다.
제나라 양공(襄公)이 죽은 후
환공과의 왕권다툼에서 패하여 죽음을 당했다.
이 때 공자 규를 추종했던
소홀(召忽)은 그를 따라 죽었지만,
그의 편에 섰었던 관중은
오히려 환공에게 추천되어
재상이 되었다.
소홀은 제나라의 대부로
공자 규의 스승이었던 그는
공자 규가 환공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도 따라서 죽었다.
원문은 '구합'(九合)이다.
주희는 구(九)를 '규'(糾)로 보아
'(제후들을) 모으다, 규합하다'로 풀이한다.
황간은 글자 그대로
'아홉 번 모으다'로 풀이한다.
관중도 완전하게 인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관중만큼만 인하면 된다는 의미이다.
주희는 '유여기인'(?如基仁)의 '유'(?)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라고
관중을 적극적으로 칭찬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2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했는데,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한다."
ㅋㅋㅋ 그 시대에도 저랬다니
2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직위에 있지 않다면
그 직위에서 담당해야 할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
3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
4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을 떠나 숨어 산 사람이 일곱 사람 있었다."
이 일곱 사람에 대해서
포함은
장저(長沮), 걸익(桀溺), 장인(丈人), 석문(石門), 하궤(荷?),
의봉인(儀封人), 초광접여(楚狂接輿)라고 하였고,
왕필(王弼)은
백이(伯夷), 숙제(叔齊),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유하혜(柳下惠), 소련(少連)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희는
굳이 이렇게 인물을 찾아서 실증하는 것은
천착이라고 비판하였다.
47
궐당의 동자가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여쭈었다.
"공부를 쌓아 나가는 아이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저 아이는 어른 자리에 앉고,
손윗사람과 나란히 걸어다닙니다.
공부를 쌓아 나가려는 아이가 아니라
빠른 성취를 바라는 아이인 모양입니다."
궐당(闕黨)은 고을 이름으로 공자가 살았던 궐리(闕里)라도고 한다.
동자는 본래 자리가 없이 귀퉁이에 앉아야 했다.
제15편
위령공(衛靈公)
1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진법(陳法)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제사에 관한 일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지만,
군사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이튿날 드디어 위나라를 떠나셨다.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던 사람들은 병이 나서 일어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자 자로가 성이 나서 찾아 뵙고 말하였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라야 진실로 곤궁함을 견딜 수 있다.
소인은 곤궁하면 곧 함부로 행동한다."
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곧구나 사어여!
나라에 도(道)가 행해질 때도
화살처럼 곧았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도 화살처럼 곧았다.
군자로다,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벼슬을 하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능력을 거두어 감출 수 있었구나"
사어(史魚)는 위(衛)나라의 대부
사추(史?)를 말한다.
주희는 사(史)를 관직명이라고 하였다.
1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좋을까'하며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도 정말 어찌할 수가 없다."
2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일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2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사관이 의심스런 글을 빼놓는 것과
말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런 일들이 없어졌구나!"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 내용의 글을
사관이 제외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과거에는 그런 양심적인 사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돕고 살았던 과거의 풍습을 말하는 것이다.
2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이다."
3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서
사색을 해 보았지만,
유익함은 없었고,
공부하는 것만 못했다."
여기서는 사색보다 공부가 유익함을 강조했지만,
[위정] 15장에서는
공부와 사색이 병행되어야 함을 밝혔다.
41
장님인 악사 면이 뵈러 왔을 때,
섬돌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섬돌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자리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자리입니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모두 앉자,
공자께서는 그에게 "아무개는 여기에 앉고 아무개는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일러 주셨다.
악사 면이 나가자
자장이 여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님 악사와 말씀하실 때의 도리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것이 본래 장님 악사를 도와주는 도리이다."
면(冕)은 악사의 이름이다.
2011.12.5.월 저녁10:56까지
제17편
양화(陽貨)
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최상급의 지혜로운 사람과
최하급의 어리석은 사람만은
바뀌지 않는다."
1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비루한 사람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원하는 것을 아직 얻지 못했을 때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이미 얻고나서는
잃을까 근심한다.
진실로 잃을까 근심하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권력이나 재물 등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못하는 일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1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 병폐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그것마저도 없어진 듯하다.
옛날에
뜻이 거창했던 사람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주견대로 했으나,
지금의
뜻이 거창한 사람은
주견도 없이 함부로 한다.
옛날에
자긍심이 강한 사람은
엄격하고 모가 났으나
지금의
자긍심이 강한 사람은
성내고 싸움이나 한다.
옛날에
어리석은 사람은
정직했으나
지금의
어리석은 사람은
속이기만 할 뿐이다."
24
자공이 여쭈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미워하는 게 있지.
남의 나쁜 점을 떠들어대는 것을 미워하고,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것을 미워하며,
용기만 있고 예의가 없는 것을 미워하고,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
"사야, 너도 미워하는 게 있느냐?"
"남의 생각을 도둑직해서
유식한 체하는 것을 미워하고,
불손한 것을
용감하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면서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합니다."
2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을 한다."
제18편
미자(微子)
1
미자는 떠나가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에 세 사람의 인(仁)한 사람이 있었다."
미자(微子)는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며,
미(微)는 봉국(封國)의 이름이고,
자는 작위이다.
주왕의 무도함을 보고 간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났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주왕의 숙부임,
기(箕)눈 봉국의 이름이고,
자는 작위이다.
주왕에게 간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고,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며 살았다.
비간(比干)은 은나라 주왕의 숙부이다.
주왕에게 계속 간하자
주왕은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더라"
라고 하면서,
비간을 죽여서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4
제나라 사람이
여자 가무단을 보내 오자,
계환자가 이를 받았다.
이들과 즐기느라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자,
공자께서는
노나라를 떠나셨다.
계환자(季桓子)는
노나라의 실권자로서
대부인 계손사(季孫斯)를 가리킨다.
제19편
자장(子張)
8
자하가 말하였다.
"소인들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
소인들은 잘못을 범했을 때
이를 고치기보다는 ,
잘못이 아닌 듯이 꾸밈으로써
더 큰 잘못을 범한다는 말이다.
9
자하가 말하였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변화가 있다.
그를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서 대해 보면 온화하며,
그의 말을 들어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
10
자하가 말하였다.
"군자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은 후에
그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신뢰를 얻지 못했을 때는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군자는
윗사람의 신임을 받은 후에
간언을 하는 것이니,
신임을 받지 못했을 때는
자기를 비방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제20편
요왈(堯曰)
2
자장이 공자께 여쭈었다.
"어떻게 하면 정치에 종사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친다면,
정치에 종사할 수 있다."
자장이 말하였다
"무엇이 다섯 가지 미덕이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군자는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
수고롭게 일을 시키면서도
원망을 사지 않으며,
뜻을 이루고자 하면서도
탐욕은 부리지 않고,
넉넉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다."
자장이 말하였다.
"어떤 것을 가리켜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다고 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것에 따라서
백성들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곧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애써 할 만한 일을 가려서
수고롭게 일하게 한다면,
또한 누가 원망을 하겠느냐?
인을 실현하고자 하여
인(仁)을 이룬다면,
또 어찌 탐욕스럽다 하겠느냐?
군자가
많든 적든,
작든 크든간에
감히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넉넉하되
교만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군자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위엄있게 하여,
엄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바라보고는
그를 어려워한다면,
이것이 곧 위엄은 있으되
사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
자장이 말하였다.
"무엇을 네 가지 악덕이라고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서
잘못했다고 죽이는 것을
학대한다고 하고,
미리 주의를 주지도 않고서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을
포악하다고 하며,
명령을 내리는 것은 태만히 하면서
기일만 재촉하는 것을
해친다고 하고,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어야 함에도
출납을 인색하게 하는 것을
옹졸한 벼슬아치라고 한다."
12.9.금 새벽 2시까지
어쨋든 한 번은 읽었네. 휴~~
예전에 읽고 기록한 내용에
그림 첨부하고
글씨 예쁘게 색칠하느라
3시간 30분이 흘러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