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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
(스리랑카 일지 2013. 12.18- 2013. 12. 28)
박영란
길에서~ 콜롬보
여행은 길에서 시작하여 길에서 끝난다. 부산~서울~인천~ 스리랑카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시차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계절도 바뀌었다. 사람들의 피부색, 옷, 언어, 거리의 풍경, 건물…등. 하루 사이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이 생소함이 어딘가로 떠나왔다는 것을 매번 확인시켜준다. 뭔가 낯 선 이 막연함이 늘 여행의 시작이었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공항에 내리니 밖은 어둡고 더웠다. 입고 간 겨울옷을 버스 안에서 하나씩 벗으며 새벽 불빛 속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스리랑카를 보았다. 공항을 벗어나는 도로변은 허술한 소도시의 느낌이었지만, 특이하게도 지나가는 거리 곳곳에 신상이 모셔져 있다. 유리상자 안에 모셔진 부처님, 야자수 나무 아래 서 있는 성모님, 사당 같은 힌두교 사원- 이들은 마치 작은 상점에서 켜 놓은 전구의 불빛처럼 달리는 차 안에서도 금세 눈에 들어왔다.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보는 첫 풍경치고는 좀 의아하였다. 어딘지 허술하면서도 순박해 보이는 이 신상들이 왜 길가에 나와 있는지 알 수 없다.
‘인도양의 진주’라 불리는 스리랑카. 지리상으로는 인도 바로 밑에 한 방울의 눈물처럼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불린다. ‘진주’와 ‘눈물’이라는 아이러니를 다 가진 스리랑카는 ‘찬란한 섬’이라는 의미도 지녔다. 우리나라에서는 ‘실론’이라는 국명과 홍차 그리고 불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죽기 전에 꼭 가 봐야할 곳으로 BBC가 선정한 이 곳은, 유럽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많은 수식어로 화려해 보이는 이 나라에서 과연 ‘찬란한’ 것은 무엇일까, 차장 밖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다시 스쳐갔다.
네곰보 항구에 도착했다. ▶네곰보 어시장의 새벽 시장
섬나라인 스리랑카의 최대 어시장을 보기 위해서다. 새벽 어시장의 진면목을 보려고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공판장을 향한다. 어스름한 새벽, 많은 상인들이 북적거리는 질척한 바닥과 난전에는 온갖 종류의 생선들이 너부러져 있다. 이 곳 사람들의 까만 얼굴과 커다란 눈동자들이, ‘이 새벽에 웬 엉뚱한 손님’ 하는 시선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왕새우에서 잔 새우까지 더미를 이루고 있고, 육중한 참치나 상어는 숫제 좌판에도 오르지 못하고 바닥에 내 동댕이쳐 있었다. 청어, 잔잔한 민물생선, 킹크랩 그리고 우리에게 낯익은 수종- 갈치, 꽁치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도 낯익은 생선은 더 반갑다. 한 곳에서는 드릴이나 칼로 상어를 토막 내고, 몇 사람이 붙어 거대한 참치를 끌어 저울에 달고 경매를 붙이는 장면들은 고기와 사람들이 벌이는 사투처럼 보인다. 저 바다 길 어디에서 잡힌 고기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몰골이 되고 해체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전체가 토막토막이 되고 뼈와 살이 갈리고 거친 바다에서 살아 숨 쉬었던 아가미와 부레는 뜯기어 한 쪽 쓰레기통에 모아지고 있다. 호수와 바닷물이 모여들어 풍부한 어장이 된 네곰보 어시장. 이곳에는 길을 놓치고 잘 못 걸려든 어족들과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길을 잘 못 들면 저렇게 진창이 되고 마는 것일까. 첫 행선지에서의 느낌은 좀 엉뚱했다. 신상도 어시장도.
네곰보~ 아누다라푸라
아누다라푸라로 향한다. 전날 비행기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 네곰보를 거쳐 다시 4시간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피곤하다. 스쳐가는 들판과 시장과 사람들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스리랑카 최초의 수도, 아누다라푸라는 이천 오백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곳은 북인도 벵골 지방의 싱할라족이 스리랑카 섬으로 건너와 처음 세운 왕국이다. BC 3세기 경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오면서 아누다라푸라는 행정적인 수도와 더불어 불교 성지가 되었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온 불교는 대승불교다. 반면 스리랑카를 통해 미얀마, 라오스, 태국으로 퍼져나간 것은 소승불교(상좌부 불교)다. 계율과 수행을 중요시하는 소승불교의 출발과 중심지가 바로 아누다라푸라다. 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최초의 계율과 교리가 확립된 곳이다. 도시 전체는 ‘스리랑카의 로마’로 비견될 만큼 수많은 탑과 최초의 불교 사원 등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스리 마하 보디 사원 은 잠시 내린 비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사원 입구에서부터 신발을 벗자 까슬까슬한 모래 입자가 맨발에 닿는다. 맨발의 거부감도 잠시 흙의 냉기가 발바닥에서 등줄기를 쭉 타고 오르면서 파스가 닿은 듯한 시원한 느낌이 좋다. 보폭도 줄어들고 몸과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기 온 모든 사람이 맨발이어야 하는 이유는 맨발이 되어봄으로서 알 수 있다. 이곳은 석가모니가 인도의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그 보리수 가지를 옮겨다 심은 성스러운 곳이다. 기원전 245년경에 심은 이 보리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수(聖樹)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인도 부다가야에 있었던 원래의 보리수는 화재로 사라져 버려, 여기 스리 마하 보디의 보리수 가지를 다시 이식시켜 심은 것이다.
▼ 스리 마하 보디 사원 내 보리수
그러고 보니 난 ‘의미심장’한 두 보리수를 가까이에서 친견한 셈이다. 오래 전 인도 부다가야 사원에서 본 보리수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날- 초파일이 불교의 큰 행사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날, 성도일이 가장 큰 축제이다. 티벳 사람들은 일년동안 저축한 돈으로 히말라야를 넘어 이 곳 부다가야까지 와서 이 성도일을 보내는 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긴다. 이 시기에는 부다가야 사원의 보리수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불교 신자들이 모여 자기 식으로 불교의식을 치루는 것을 보았다. 서양 남자가 장구 같은 악기를 두드리며 염불을 외던 모습,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사람, 달빛 아래서 까만 드레스를 입고 너울을 쓴 채 천천히 행선을 하던 여자. 왜 그 때 ‘요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실지 요기를 본 듯 했다. 시멘트 맨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참고 앉아서 좌선을 하던 나. 일찍 일어나서 사원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보리수 잎을 주워 모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일들. 스리 마하 보디 사원의 보리수 앞에서 지난 일들이 묻득 떠올랐다. 성스러운 보리수들을 다 만날 수 있는 이 인연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에 비해 지금 이 곳은 아주 조용하고 경건하다. 여인들은 하얀 옷을 입고 신발을 벗고 예를 갖추어 꽃을 받친다. 한구석 아이와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나, 바닥에 앉아 있는 스님이나, 모두 지나치지 않는 듯 하면서도 그들만의 신실함이 베여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건해지는 느낌이다.
사원을 나와 루완웰리세야 다고바으로 향한다. 해인사로 치면 일주문에서 대웅전 쪽으로 걸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가는 길목 곳곳에는 무너진 사원의 잔해와 수 천명의 스님들이 기숙했다는 숙소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스리 마하 보디 사원은 그 옛날 엄청난 규모의 사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멀리서 보이는 다고바(탑)의 뽀족한 첨탑은 마치 신기루처럼 하얗게 솟아있다. 우리나라 탑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색과 모양 그리고 크기가 아주 색다른 다고바를 향해 호기롭게 걸어간다. 이 때 길게 이어진 주황색 천을 머리 위로 받들고 탑을 향해 걸어가는 긴 행렬을 만났다. 나도 스스럼없이 긴 휘장 아래 그들 사이로 끼어들자 선선히 웃으며 자리를 내어준다. 스리랑카 불자들이 스님들께 가사를 공양할 때 올리는 의식으로 탑돌이를 하는 것이다. 모두 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스님들은 그 주황색 천을 다고바 하단에 긴 띠로 두른다. 이 뜻밖의 의식에 참여하면서 이 곳 불교국가에 와 왔음을, 새삼 행복하게 실감한다. 바닥에 앉아 하얀 설산 같은 거대한 탑 둘레에 쳐진 붉은 색의 띠를 보고 있으니, 그 산뜻하고 절묘한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
▼ 멀리서 본 우완웰리 세야 다고바
가사는 스님들께서 걸치는 법의다. 나라마다 종파마다 그 빛깔은 다르지만, 소승불교의 스님은 붉은색의 가사를 걸친다. 부처님께서 7년동안 고행하셨던, 인도 북부의 전정각산은 불가촉천민이 사는 곳으로 이들이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다. 당시 고행하시던 붓타께서 시체를 싼 피 묻은 천으로 당신의 몸을 가리셨던 것이 오늘 날 가사가 붉은 색인 이유이다. 비단금의를 걸쳐도 모자람이 없는 자리를 버리고, 피 묻은 천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부처. 부처의 정신은 저 붉은 가사에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 가사 공양을 드리러 붉은 천을 이고 행렬하는 모습 ▲ 다고바에 가사 천을 두르는 모습
아누라다푸라~ 담불라
이수루무니야 사원 가는 길은 파란 하늘과 들판에는 논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고, 작은 호수들 주변에는 싱그러운 들꽃들이 피어있다. 불교가 전파된 후 최초로 지어진 이 사원은 작은 연못을 두고 암벽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암벽을 파서 와불은 모셔놓은 형태가 무척 특이하면서 경주에 있는 석굴암 부처님을 생각나게 한다.
▼ 스리랑카 최초의 이수루무니아사원
누워있고 앉아있는 자세가 서로 다른 불상의 형태이지만, 돌에서 온화한 기운이 느껴진다. 바위벽에 새겨진 부처님 자태 또한 참으로 자유롭고 한가로운 느낌이 퍽이나 사실적이다. 사원 뒤쪽 암벽 위로 올라가니 마을의 전경이 아주 시원하게 한 눈에 들어온다. 넓은 평지에 그 흔한 아파트는 찾아볼 수가 없고, 저 멀리 떨어져있는 거대한 다고바만 높이를 달리하고 있었다. 최초의 사원을 나와 현존하는 다고바 중에서 가장 크다는 아바야기리 다고바를 찾아갔다. ‘최초’와 ‘최고’라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도 여행 코스에서 이들이 가지는 비중은 크다. 무엇이든 최초와 최고는 선택의 대상인 동시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정말 이바야기리 다고바는 육중한 크기와 무게감으로 버티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맞닥뜨린 다고바는 거대한 구조물처럼 위압감을 주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기원전 1 세기에 건설되었다고 하니 무려 2천년도 더 된 탑이다. 탑은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기단 부분은 큰 대접을 엎어 놓은 듯 하고 그 위에는 정방형의 네모가 얹혀 있고 상단에는 첨탑 같은 기둥이 세워져 있다.
▲ 육중한 이바야기리 다고바
불교의 상징인 탑. 우리나라에서는 탑이라고 하지만, 인도에서는 스투파라 부르고 스리랑카에서는 다고바라 한다. ‘탑’이라는 이름이 서로 다른 만큼 탑의 모양, 크기 재질도 나라마다 다르다. 하지만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어느 나라든 불교의 상징 그 자체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서로 절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화강암으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듯이, 여기 이바야기리 다고바는 벽돌로 쌓고 그 위 회칠을 하여 피라미드처럼 단 하나의 단순한 실루엣을 보여주고 있다. 흙으로 쌓아올린 부피감이 부드럽고 뭔가 원시적인 친밀감을 준다. 단순한 형태에서 오는 강렬한 힘이 산처럼 응집되어있다. 이것은 이 나라가 가지는 있는 종교적 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일구어 낸 미적 감각인지 모른다.
많은 순례객들이 거대하고 오랜된 다고바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하나 같이 정갈한 흰옷을 입고 맨발로 두 손을 모은 채 다고바를 도는 여인들. 나도 따라 걷는다. 굳이 행선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이 순간만큼은 발바닥과 땅이 만나는 감각을 알 수 있다. 온전히 내 체중이 발바닥에 실리고 그 실린 힘이 까슬한 시멘트 위에 닿을 때의 찹찹함과 딱딱함 그리고 따끔거리는 아픔과 부드러움이 전해져 오는 느낌에 집중한다. 비로소 ‘걷는다’는 것을 알고 걷게 된다. 하지만 그 집중도 잠시, 탑돌이를 하면서 상좌부불교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봤다. 돌아보면 인도를 거쳐 미얀마를 다녀왔고 이어 스리랑카까지 오게 된 이 우연한 인연에 감사한다. 이 여행들이 어떤 선업의 결과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주어진 기회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 욕심대로 사는 삶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수행을 해야겠다는 발심을 일깨어준다.
고개를 들어 다고바를 보지만, 가까이에서는 오히려 그 큰 형체는 보이지 않고 회칠이 벗겨진 사이로 무수하게 쌓아올린 붉은 벽돌이 보인다. 가공할 만한 수의 벽돌. 저 벽돌을 과연 누가 쌓아 올렸을까. 복덕과 왕생극락을 꿈꾸는 자들의 공덕이었을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 쌓아 올린 바벨탑 같은 것이었을까. 그것을 위해 평생 노역에 시달린 백성들의 피땀이었을까. 엄청난 유적을 볼 때면 똑 같은 의문이 치켜들 듯, 이바야기리 다고바에서도 그런 생각이 스쳐간다.
장소를 이동하면서, 최초의 불탑 투파라마 다고바와 제타바나 다고바를 보게 된다. 어디에서나 보이는 저 웅대한 다고바를 보면서, 사람들은 순간순간 경건해지리라. ‘열심히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들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탑은 크고 높고 위대하다. 인도의 아쇼카 왕이 부처님 열반 뒤 나온 사리를 스투파를 만들어 그 안에 봉안한 것이 탑의 원형이었다. 그 원형이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왔다. 나라마다 규모와 모양은 전혀 다르지만 탑은 불교의 건축물인 동시에 부처님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오랜 세월동안 탑을 지어왔고, 지금도 길을 가다 돌무덤을 만나면 돌 하나 주워 조용히 올려놓는 우리의 심성에는 여전히 탑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다고바를 뒤로 하고 아나다라푸라를 떠나 담불라로 간다. 담불라 는 작은 마을이지만 세계적인 담불라 석굴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넓은 평원 위에 솟은 180미터 바위산에 가기 위해 제법 많이 걷는다. 석굴에 도착할 쯤 갑자기 세찬 폭우가 쏟아진다. 동굴은 적절한 피신처가 된다. 석굴을 보고 다음 석굴로 건너갈 때 쏟아져 내리는 열대우림의 스콜을 보니 뭔가 묘한 느낌이 든다. 이천년 전에 만들어진 석굴은 경주 석굴암처럼 굴을 파 불상을 모신 곳인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일부만 개방된 다섯 개의 동굴 안에는 157개 불상이 모셔져 있고, 그 불상의 자세와 규모가 놀랍도록 다양하다. 왕국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여러 왕조들이 수 백년에 걸쳐 규모를 넓혀 가며 만든 석굴이지만, 거대한 자연 암벽을 파서 이렇게 장엄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는 게 신기하다.
처음 들어간 가장 오래된 제 1 석굴에는 누워있는 부처, 와불이 인상적이다. 열반하실 때의 모습으로 약 14미터가 되는 크기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팔을 베개처럼 받치고 쭉 뻗어 누운 발바닥에는 연꽃이 채색되어져 있고, 그 옆에는 제자 아난다그리고 머리쪽에는 힌두신 비슈누가 있다.
▲ 담불라 제 1동굴 내부 ▲ 담불라 제 2동굴 내부
제 2굴은 담불라의 최대 석굴이다. 천장에는 세밀하고 화려한 문양의 천장벽화가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좌불을 한 불상이 쫙 도열해 있다. 이곳 스리랑카 인의 피부색과 모습으로 불상은 거의 비슷하면서도 표정은 조금씩 다르다. 여러 표정을 하고 있는 만큼 불상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상을 조성하느라 힘들었던 어느 석공의 마음도 있고, 무병장수하고 싶은 어느 왕의 심정도 들어있고, 수행을 제대로 하고 싶은 어느 스님의 불심도 저 어딘가에는 담겨있으리라.
제3·4 석굴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감흥도 사라지고 쏟아지는 비에 마음이 간다. 한꺼번에 내리고 단숨에 그쳐버리는 스콜. 하얗게 퍼 붓는 빗줄기를 보니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석굴의 무수한 불상도 사라져버리고 비속으로 나도 사라지는 듯하다. 상相, 생각도 자신도 사라진다. 하루 한 두 번 이런 엄청난 비를 보는 이 곳 사람들은 뭔가 다를 것 같다. 부처가 말한 ‘무상, 무아’는 어떤 것일까. 그런 생각도 스쳐갔다.
시기리야- 플론나루와
이른 아침 산책에 나선다.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이 호텔은 넓은 숲속과 호수변에 자리 잡고 있다. 숲속 사이사이에 자리잡은 숙소는 한 채씩 띄엄띄엄 들어서 있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길들이 미로처럼 연결된다. 턱까지 오는 긴 빗자루대로 싹~싹 소리를 내며 흙 길을 쓸고 있는 이 곳 여인들과 ‘아이고 안’ 하고 인사를 나누며,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를 향해 걷는다. 안개가 걷히고 조용한 물파랑이 이는 수면에 물새가 서성이는 고요한 아침. 상쾌하다. 쫓기지 않고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곳을 산책할 수 있는 짬. 때로는 그 어떤 유적과 유물에도 비교할 수 없는 인상으로 남는다.
▼ 호수에서 본 아침 풍경
시리기야로 향한다. 그곳에는 바위꼭대기에 왕궁을 요새처럼 지어놓고 외롭게 살다간 이상한 임금님의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이 된 젊은 왕자는, 동생의 보복이 두려워 높이 370미터나 되는 돌덩이 위에 성을 지었다. 마치 ‘겨울왕국’의 공주처럼 두려움으로 자신을 유폐시킨 카파샤 왕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카샤파는 459~477년 아누다라푸라를 통치한 왕이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평민이었고, 왕족 혈통의 배다른 동생 -목갈라나가 있었다. 동생에게 왕위계승권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에 아버지 다투세나 왕을 감금하고 왕위를 빼앗는다. 형의 이런 행동을 증오하며 동생은 인도로 망명을 가고 아버지에게 숨겨 놓은 전 재산을 요구했지만, 아들에게 자신이 건조한 저수지를 보이며 이것이 나의 전 재산이라고 말한다. 이에 분노한 카샤파는 부하를 시켜 아버지를 살해한다. 부왕을 살해한 고통과 보복의 두려움으로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에 궁전을 짓고 살던 왕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곳은 일명 ‘사자바위’라고 불린다.
멀리서 보면 정글에 싸여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넓은 평원에 불쑥 솟은 우람한 바위 덩어리만 보인다.
그 정상을 바라보며 왕궁으로 올라가는 길은 보기만 해도 만만찮다. 암벽을 감싸고 있는 나선형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5세기 후반에 사람들은 어떻게 이곳에 물자를 날라 성을 지었는지 참 알 수 없다. 계속 올라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물을 저장한 취수장, 병사들과 하인들의 숙소, 놀이터 등. 왕궁의 제반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던 흔적들만 남아있다. 바위위에 무슨 왕궁? 하는 생각을 하고 올라갔지만, 왕궁은 정교하게 계획적으로 지어진 듯 했다.
▲ 시리기야로 들어가는 정면입구
더욱 놀라운 것은 바위를 따라 선명한 색채로 그려진 여러 미녀들의 모습이 프레스코화로 남아있다. 남방의 미녀들이 상의를 벗은 채 농염한 자태와 신비스런 표정으로 과일을 들고 있거나 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이 벽화 속 미녀들은 누구일까? 카샤파 왕이 자신이 죽인 아버지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이 벽화를 그렸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누드의 여성은 상류 계급이고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은 시녀라고 한다. 아름다운 벽화의 여인들은 비바람에 침식되고 지워져 버려 500개의 벽화였던 것이 이제는 18개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벽화의 색감은 아주 생생하고 고혹적이다.
▲ 사자의 발톱을 하고 있는 사자바위의 입구 ▲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미인도
회랑 벽면으로 거울의 방이라 불리는 매끈한 벽을 지나자 왕궁의 입구가 나온다. 사자 발톱을 하고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사자의 목 안으로 들어가는 듯 하다. 좁고 가파른 길을 한 참 더 올라 꼭대기에 서자, 텅 빈 왕궁의 터가 눈에 들어왔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함과 동시에 불안에 떨면서 고독하게 살다 간 한 인간의 흔적이 다가왔다. 천년의 세월이 다시 흘러도 그 애잔하고 쓸쓸한 기운은 남아있을 것 같다.
플론나루와로 행했다. 플론나루와는 10~12세기의 싱할라 왕조의 두 번째 수도다. 아누라다푸라가 남인도의 침략을 피해 10세기 말 남쪽으로 새로 터를 잡은 곳이다. 천년 동안 밀림 속에 묻혀 있다가 1900년부터 발굴이 되었다. 전성기 때에는 태국이나 미얀마에서 승려가 찾아 올 정도로 불교가 번영한 도시였다. 그때의 영화를 보여주는 찬란한 유물들이 허물어진 채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다.
유적지는 비가 내리고 짙푸른 숲과 고요 속에 묻혀있다. 폐허가 된 왕궁의 터에는 화려했고 웅장했던 흔적만 남아있다.
큰 호반을 앞에 두고 빈 터의 큰 덩어리들이 제단, 접견실, 저수지 등 그 당시의 용도를 추정해 준다. 유적은 남아있는 형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허물어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온전한 형체가 없는 미완의 공간에서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여기저기 무너진 돌덩어리들에서 알 수 없는 적요와 쓸쓸함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며 시간을 초월한 것들에게서는 알 수 없는 무상함 같은 것이 있다.
▲ 플론나루와의 옛 왕궁터
어느 나라의 왕조나 종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왕궁과 사원 그리고 성당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듯, 퀴드랭글 사원도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스리랑카 왕조의 안녕을 빌면서, 부처님 치아 ‘불치’를 모셨던 곳이다. 그만큼 이곳은 불교와 정치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사원 안에는 투파라마 불당, 불교의 윤회를 나타내는 문스톤, 플론나루와 최대의 불탑인 랑콧 비하라, 원형불탑, 쿼드랭글 사원 등이 밀집해 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붕을 받쳤던 흔적만 남아있거나 벽면은 지금도 무너져 가고 있다. 본래의 모습을 다 상실한 건축물들이지만, 어느 유적지건 위대하고 숭고한 그 무엇이 제압하고 있다. 심오한 분위기와 무게감이 발걸음을 멎게 하고 심호흡을 하게 한다. ▼ 바타다게 사원 내의 원형불탑
눈길을 끄는 바타다게 사원의 원형 불탑 안에는 네 방향으로 좌불이 모셔져 있는데, 제대로 남아 있는 형상은 하나뿐이다. 불상의 머리, 팔, 가슴 모든 부분이 훼손되어진 채 좌불을 하고 있지만 균형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원형불탑 전체를 둘러 싼 벽은 정교한 조각들이 가득하고 입구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압살라의 무희가 춤을 추고 있다. ‘불교’라는 같은 종교를 가진 나라이지만, 그 종교를 표현해내는 방식이 나라마다 이처럼 다양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과거 어느 나라건 왕조의 권력과 부로 일구어 낸 종교적 건물들이 훗날 경이로운 유적으로 남게 된다는 것. 거기에는 이미 종교와 정치를 초월한 위대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이 아닌 인간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쿼드랭글 답사를 마치고 이어 찾아간 랑카틸라카 사원도 그랬다. 플론나루와가 12세기 때 불교의 최고 중심지 역할을 했던 만큼, 방대한 규모에 세워진 이 사원은 전성기 시절 얼마나 번성하고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본당은 다 무너지고 높다란 양 벽면 정면으로 거대한 입상을 만났다. 서 있는 부처님이 너무 커서 고개를 체치고 올려다보니 거기에는 머리가 없는 입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벽의 한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거대한 불상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는 듯한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다 망가진 부처님의 형상에서 온화함이 느껴지고 전율할 듯 위엄스럽다. 장엄하면서도 스산하다. 흙으로 완성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부처님께 압도된다. 형상은 단순히 想이 아니다. 시공을 초월한 ‘정신’이랄까 그런 위대함이 살아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위에 새겨진 저 상에서 부처의 법과 진리가 순식간에 전율하듯 스쳐 갈 수 있을까.
그 부처님을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은 와불이 있는 갈비
▲ 랑카틸라카 사원 내의 거대한 불상
하라 사원이었다. 생각해 보면 누워 계시는 예수님 형상을 본 적이 없다. 신자가 아닌 나의 부실한 정보인지 몰라도, 많은 성당을 보았지만 그 안에 정녕코 누워 계신 예수님을 본 적은 없었다. 스리랑카에서는 누워 있는 부처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곳 사람들을 닮은 까무잡잡한 피부와 모습을 하고 있는 와불은 한가롭게 보이기도 하고 방심해 보이도 한다. 앉아있거나, 서있거나, 턱을 괴고 있거나, 아예 누워 자는 모습까지, 사람들은 자유롭게 부처의 형상을 만들었다. 나무로, 돌로, 때로는 청동으로. 여기 갈비하라에는 평퍼짐한 언덕정도의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와불을 만들었다. 길게 누워 계신 부처님의 길이는 무려 14미터. 돌에 새겨진 투명한 가사 아래로 매끈한 몸매가 드러나 보이고 그 옆에는 제자 아난다가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다. 열반에 드신 부처는 그지없이 평화롭다. 그에 반면 아난다 존자는 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아난다 존자’. 그는 언제나 부처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항상 부처님을 시봉하였고, 보고 들은 견문이 부처님 제자 중 제일 많았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지혜와 노력이 으뜸이었다. 저 입상에는 돌이 되어서라도 부처님을 지키겠다는 고집스러움이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묻어나 있다. 거대한 석상에서 말 없는 두 분의 서사가 읽혀지고, 보고 있으니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 뒤로 하루해가 지고 있다.
▲ 갈비하라 사원의 열반상과 아난다 존자
담불라~캔디
스리랑카에는 ‘문화삼각지대’ 가 있다. 이미 거쳐 온 ‘아누라다푸라’, ‘플론나루와’ 그리고 ‘캔디’. 이들은 스리랑카의 고대도시이며 불교유적지로 지도상에서 연결하면 삼각형이 된다. 모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어있고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보호되고 발굴되고 있다. 오늘은 그 마지막 꼭지점이 되는 캔디로 갔다. 일광이 쏟아져 눈부시게 화창한 날, 차는 산골을 달리고 도로변을 달리고 정감 어린 시골마을을 거쳐 중부 내륙까지 내려간다.
▼ 언덕에서 본 캔디의 정경
캔디는 이름이 예쁜 도시이지만 역사적으로 비운의 도시이기도 하다. 2000년 이상 이어오던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이자 식민지로 영국에 무릎을 꿇었던 곳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불교국가로서 자긍심을 지켰던 자랑스러운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를 높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완만한 고원 위에 녹음이 우거지고 이국적인 집들과 파란 물빛의 호수가 잔잔히 자리잡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불치사는, 우리가 곧 가야할 곳이다.
‘불치사’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사원이다. 이 사원이 있어 캔디는 불교의 성지이자 명소이며 세계 사람들이 몰려온다. 캔디와 불교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붓다의 치아를 옥쇄로 생각했을 만큼, 스리랑카 국민은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있어야만 왕조로 인정했다. 나라가 수도를 옮길 때마다 ‘불치’를 봉안할 곳을 먼저 마련했고, 왕조는 그 정통성을 이어갔다.
▼ 일몰후의 불치사
16세기 초 포르투칼이 스리랑카를 지배할 때 불치를 없애버리고 기독교를 심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8세기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은 스리랑카 왕권을 없애고 직접 통치를 하려고 했지만 지배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영국은 스리랑카 수도를 콜롬보로 옮기면서 왕과 치아사리를 분리시켜 버렸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불치는 캔디에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민족의 자부심을 하나로 묶어주는 큰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이 곳 ‘불치’는 붓다의 열반 후 인도 왕조에서 보관되었다가, 4세기경 스리랑카 왕조에 전해졌다. 그 과정의 경로와 진위가 정확하게 입증되므로 전 세계 불교도들이 인정하는 성지가 되었다.
일몰 후 불치사로 갔다. 하얀 벽체를 한 사원에서는 어둠 속으로 환한 불빛이 새어나고 수많은 참배객들이 사원 안과 밖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신발을 벗고 그 인파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차 공양을 드리는 예불의식이 진행 중이다.
▼ 불치사내 불치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
드럼, 긴 나팔 같은 전통악기가 내는 소리가 기이하면서도 장중하게 이어지고, 긴 줄을 따라 나도 모르게 이층 치아사리가 있는 곳으로 조금씩 옮겨갔다. 현지 사람들은 정갈하게 흰 옷을 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손에는 몇 송이의 꽃들이 들려있다. 꽃을 공양하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아름답다. 정녕 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 나라 부처님은 늘 꽃향기 속에 계신다. 치아사리가 모셔진 황금빛 함과 참배객들 주위에도 온통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꽃은 많은 사람들의 열기와 부산스러움을 가라앉히고 경건한 마음으로 치아사리를 접견하게 한다. 성물을 본 설렘과 감동도 있지만, 성물이 모셔진 이곳에서 스리랑카인들의 신앙심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패엽경(넓은 야자수 잎에 경전을 새겨둔 것)과 오래된 경전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밤에 본 사원은 아주 이채롭고, 그 밤 불치사내 ‘불치’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 공기는 아주 싱그러웠다.
캔디- 하푸탈레
캔디는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라고 한다. 폐허가 되어버린 다른 두 곳의 문화삼각지보다 전통과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쾌적하고 활기찬 도시다. 거기에는 캔디의 또 다른 자랑거리 ‘페라데니야 식물원’이 있다. 과거 스리랑카왕실의 전용 정원이었지만, 영국인들에 의해 재정비되면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식물원은 거대하고 희귀한 나무의 수종들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그 곳을 느긋하게 산책한 후 홍차의 산지로 유명한 하푸탈레로 행한다.
스리랑카는 불교의 명성만큼 홍차로도 유명한 나라다. 세계 생산량 2위를 자랑하는 홍차의 나라다. 이제는 북부의 고대도시를 떠나 중부내륙에 자리 잡고 있는 차 밭, 하푸탈레로 차는 달린다.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여러 소도시를 지나가고 주변 풍광이 산길에서 들길로 바뀌고 먼지가 자욱한 장터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차장으로 보는 내내 길은 지루한 줄 몰랐다. 해발고도 1500미터 고원인 차밭을 굽이굽이 올라가는 동안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차밭의 풍경은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운무와 차밭 집으로 가는 아이들
▲ 시계방향으로 운무와 차밭,집으로 가는 아이들,,찻잎을 따서 수매를 받는 여인들,길위에서 팔고있는 예쁜 야채들
길가에서 가지런히 야채를 모아 놓고 팔고 있는 아이, 갓 따온 찻잎을 수매를 받기 위해 저울에 달고 있는 여인들. 차를 재배하고 유통시키기 위해 영국인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과 그 옆 힌두교 사원. 하푸탈레를 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이런 풍경들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홍차’가 홍차로 명명된 이유는 이렇다. 옛날 중국에서 수출된 녹차가 오랜 시간 배로 운반되면서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찻잎의 색이 초록색에서 검은색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영국인들은 이 비싸고 귀한 차를 버리지 못하고 이것을 찌고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그 후 붉은빛과 새로운 향의 차를 만들어 낸 것이 ‘블랙 티(Black Tea)다. 하지만 차를 우리면 붉은 색이 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를 ‘홍차’라 하였고 우리도 ‘홍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뒤 홍차는 영국왕실과 귀족사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호음료가 되었다. 중국산 차에만 의존하던 영국이 인도의 아삼종 차나무를 스리랑카 등지에 옮겨 심으면서 차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 후 인도와 스리랑카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현지에서 대량의 차를 재배하게 되었고, 차는 서민에게 대중화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차茶는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기호 식품인 커피나 차를 식민지에 이식시켜 열악한 조건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아프리카 등지에서 현지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어 세계적인 커피 메이커들에 대해 비판의 여론이 일고 있다.
하푸탈레는 열대지방이지만, 서늘한 고원지대의 일정한 기온과 사시사철 안개를 내뿜는 청정한 산간지역이다. 고품질의 차를 재배하기 좋은 곳이다. 차 산업을 하기 위해 영국은 남인도에 사는 타밀족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곳으로 강제 로 이주시켰다. 강제 이주된 많은 타밀족들은 힌두교들이었고, 스리랑카의 대부분은 싱할라족으로 불교도였다. 식민지 시절 영국은 이 타밀족을 교묘히 이용하여 우대를 해 주었다. 하지만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스리랑카는 그 후 모든 주요 권력을 싱할라족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타밀족은 오랫동안 억압과 차별을 받게 되고 스리랑카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26년간 스리랑카에서 이어졌던 참혹한 내전의 원인이었다. 오랜 시간 서로간의 수많은 인권유린과 희생, 폭력, 전쟁으로 나라경제는 결국 빈민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직도 이 종족간의 아픈 상처는 아물지 않고 남아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이 평화로운 차밭이 그런 비극의 역사가 되는 불씨가 되었음을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사리를 걸친 여인들의 모습에서 인도색이 강하게 느껴지던 일이며, 왜 곳곳에 힌두사원이 자리잡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내일은 아름다운 차 밭 하푸탈레를 트레킹 하는 날이다. 워낙 고산이어서 그런지 바람도 불고 춥다. 점퍼를 껴있고 호텔에서 주는 작은 난로를 켜 놓고 잤다.
하푸탈레~ 히카누와
▲ 비가 그친 찻밭 속에서 ▲ 아저씨가 찻잎을 따면서 웃어준다
밤 새 비가 퍼 붓고, 바람은 쉴새없이 강풍으로 회오리를 치며 유리창을 때린다. 비몽사몽 자다가 깨다가 걱정한 것은, ‘트레킹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트레킹을 하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계획이 무산될 것 같다. 새벽부터 출발하려던 걸음은 묶이고, 무작정 내리는 비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포기는 쉽지 않고 그렇다고 짙은 안개처럼 상황판단도 되지 않는다. 인솔자의 고심이 역력하다. 일단 봉고차로 ‘립튼시트’에 가 보기로 한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찻잎을 타러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보인다. 비닐 같은 우의를 걸치고 허술한 옷에 맨발이거나 슬리퍼를 신고 있다. 비가 오는 고산의 찬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우리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마음과는 달리 그들은 해맑다. 마을을 벗어나 차밭으로 들어서자 비는 거짓말처럼 그치고 안개는 서서히 달아나고 있었다.
순식간의 반전. 차에서 내려 차밭 속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 비가 휘 젖어 놓은
차밭은 초록의 농밀한 색과 향으로 환상적이다. 밀집된 차밭 사이사이에는 골처럼 길이 나 있고, 수많은 골을 타고 차 밭을 거슬러 올라간다. 현지인들에게는 힘든 노동의 현장이지만 우리에게는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고즈넉함에 빠지게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걷기가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이렇게 걷기 위해 걷는 일도 드물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사진 차밭 사이에 솟대처럼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가 운무에 풀려 춤추는 모습을 본다. 차밭의 병충해를 쫓는다는 이 나무는 차밭의 끝없는 수평 위에 수직으로 서서 지극히 신령스럽기도 하고 지극히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차밭은 기하학적인 문향으로 리듬을 타면서 그 질서와 규칙이 아주 멋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어린 학생들, 차밭 일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아저씨들 그리고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등등. 하푸탈레 차밭에서 만난 이 풍경들은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즐거웠다.
트레킹을 하면서 ‘립튼시트’에 올랐다. 그 정상에는 ‘Lipton′s seat'에 관한 내용의 안내판이 걸려있다. ‘립튼’이 자주 이 곳을 찾아와 차 밭을 감상하며 감회에 젖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 홍차를 한 잔 마시는 동안 운무가 사라진다. 그 틈에 저 멀리 마을과 차밭의 풍경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립턴’하면 노란색 포장지에 낱개로 포장된 홍차를 떠 올릴 수 있다. 누구나 간편하게 홍차를 마실 수 있게 홍차를 용량별로 포장하여 판매한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차를 대중화 시킨 인물이 립턴이며, ‘립턴’사의 창시자다. 그는 영국인이었고 식품업을 하여 돈을 번 백만장자였다. 1890년 스리랑카로 건너간 립턴은 1,400미터의 고원지대에 있는 하푸탈레 지역의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의 차 재배를 시작했다. 차의 품질관리를 철저히 하고 유통 경로를 최소화 하면서 차의 가격을 낮추어 홍차의 대중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립턴’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지금은 스리랑카 정부에서 차의 생산과 판매에 관한 모든 통제를 법으로 직접하고 있다. 콜롬보의 경매시장에서 가격이 정해지고 최고급 차들은 영국이나 해외로 수출되어 영국산 최고급 브랜드로 다시 재포장된다. 스리랑카 홍차는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100% 실론티로 만든 제품에 동일한 로고를 붙이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스리랑카에서 사온 홍차를 마시고 있는데, 홍차 맛이 정말 깔끔하다. 맛이 강한 것도 아니고 연한 것도 아니면서 특유의 향이 갖는 묘한 감칠맛이 자꾸 홍차를 마시게 한다. 여행 중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곳에서 홍차를 구입해 보았다. 찻잎을 직접 수매해서 가공하는 공장에서 파는 제품이나 호텔에서 구입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홍차나 포장이 허름한 시장의 물건이나 홍차의 맛은 거의 비슷하다. 나의 식감으로는.
▼ 립튼 시트 정상에서 본 안내문과 스리랑카 차 로고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멋진 트레킹을 마치고, 저 남쪽 인도양에 접해있는 히카두와로 행했다. 인도양을 본다는 설렘. 이동시간이 잘 맞으면 인도양에 떨어지는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목적지까지 달리고 달렸다. 히카두와는 스리랑카 남부의 최대 항구이자 야자수가 우거진 긴 해변과 멋진 일몰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히카두와 해변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해 했을 때는 이미 일몰이 지고, 오늘이 크리마스 이브임을 알리는 캐롤과 트리 장식들이 반겨준다. 저녁 식사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는 만찬 분위기 다.
고깔모자를 쓰고 건배를 하면서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여행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얼굴에는 기쁨과 설렘이 묻어있다. 파티 장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 터지자, 젊은이, 아이들이 환호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그 판에 끼는 것이 쑥스러워 노는 것만 그냥 지켜보는 나의 스타일(?)을 고수한 채. 인도양의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캐롤이 어우러지는 해변의 밤바다를 거닐면서, 2013년의 크리스마스 이브!의 해피한 밤은 깊어 갔다.
갈레- 콜롬보
▼ 버스안에 놓인 불상
‘갈레’로 가는 날, 버스에 올랐다. 차 안은 반짝이와 풍선 그리고 산타인형, 종 등이 창문 위에 장식되어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임을. 기사와 조수는 아이들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 놓고 손님을 맞았다. 그 꾸밈이 천진스럽고 흥겨워 싱긋 웃게 만든다.
여행의 시작부터 십여일 줄 곧 이용하는 버스 안은 처음부터 싱긋 웃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차 앞 백밀러에는 십자가가 달린 묵주가 걸려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거기다가 기사가 앉은 천장 위에는 중국 돈 100위안의 지폐가 붙어있다. 그러니까 돈을 ‘신흥종교’로 치자면 버스 안에는 하느님, 부처님 이렇게 세 개의 종교가 흔들리며 달리고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이 흐뭇한 장면은 뭔가 의문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싱긋 웃음 짓게도 했다. 누가 이 원만한 공존을 이루어냈는지, 여행을 하는 동안 때론 심심할 때 생각해 보는 화두였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 낸 자애인지, 아니면 부처님의 자비로 이루어진 평화인지, 돈의 위력이 보여주는 단결인지. 운행이 시작되는 아침마다 차에 올라타면서 기사와 조수는 각자의 종교에 예를 올린다. 잠시 묵주 앞에 서 십자가를 그으며 목례를 하는 기사와 불상 앞에 서 합창을 하는 조수- 이 아저씨는 아침마다 들꽃을 꺾어 우리에게 한 송이씩 나누어 주고 불상 앞에도 꽃공양을 올리는 분이다. 그러니까 기사는 기독교, 조수는 불교도다. 조수는 차의 온갖 허드렛일과 기사의 심부름과 기분까지 맞추어야 하는 보조관계지만, 기사가 믿는 유일 신 앞에 불상을 당당히 올려놓을 수 있는 베짱?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연 우리라면? 하는 의문이 드는 이 조화로운 관계는 여행을 하는 내내 보기 좋은 흐뭇한 모습이었다.
▼ 비 내리는 인도양 해변
밖은 비가 퍼붓고 차창 밖으로는 인도양이 끝없이 펼쳐지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려간다. 왠지 이 ‘인도양’의 어감은 내가 정녕 멀고 먼 곳까지 왔다는 걸 실감시켜준다. 해변 위에 정박된 나룻배들과 파도로 뒤집어 지는 바다의 하얀 속살, 바람에 휘청되는 야자수 그리고 잿빛 하늘이 마치 인상파 그림의 한 장면 같다. 아니 더 리얼하고 멋지다. 달리는 차 안에서 마구 사진기의 셔트를 눌렸는데, 사진은 예상 밖으로 잘 나왔다.
갈레로 가는 길에 외다리 낚시라 불리는 ‘Stilt Fishing' 보러갔다. 대한항공의 TV광고에도 나왔고,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장면에 이 이미지는 자주 나온다. 이는 긴 나무 작대기를 산호초나 돌 틈에 박고 거기에 올라서서 낚시를 하는 스리랑카 전통 낚시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낚시 방법은 작업 환경이 나쁘고 해안지역의 상업화로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여행객들은 여전히 호기심을 가지고 이 낚시하는 것을 보러 몰려든다. 이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돈을 받고 ‘연출’을 하고 있다.
해변에는 띄엄띄엄 말뚝처럼 세워진 낚시터가 있고, 관광객과 흥정이 되면 즉석에서 입고 있는 긴 사롱 (이곳 남자들의 전통 복장인 긴 치마)를 주섬주섬 말아 올리고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낚시대를 드리운다. 잠시 지켜보는 동안 이 즉석 어부는 용케도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리더니 할 일을 다 한 양 내려와, 몇 컷트를 찍는 사진의 모델까지 되어준다. 그 인위적인 것에 뭔가 씁쓰레한 기분이 들지만. 그들의 ‘전통’은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스리랑카 전통 ‘외다리 낚시-Stilt Fishing
갈레는 스리랑카 남부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역사가 매우 오래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도시다. 옛날 솔로몬 왕의 시절 왕은 시바 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곳에서 사파이어와 향신료 등을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14세기경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동방 무역기지로 번영한 곳이다. 하지만 16세기 초에는 포르투갈, 17세기에는 네덜란드 18세기 말부터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식민지 시절의 다양한 문화가 남아있다. 불교유적과 차 문화와 더불어 인도양에 펼쳐지는 이 이국적인 풍경은 스리랑카 여행에서의 또 다른 매력이다.
포르투칼인들이 해적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갈레포트’ 성채를 걷는다. 해안과 마을을 경계 지어 놓은 긴 석축들이 요새처럼 단단하다. 지금껏 보아 온 이 나라 사람들이 돌로 쌓은 스타일이 아니라, 유럽 사람들이 쌓은 성처럼 야무져 보인다. 그 어떤 적도 너끈히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 나라의 적이 적을 지키겠다는 발상이 만들어 놓은 갈레포트가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이곳은 구시가지인 성채와 식민지 시절에 들어 온 기독교의 교회들,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건물들이 남아있다. 마치 18세기 유럽을 보는 듯한 유럽식 광장과 광장을 중심으로 아름드리 노목과 고풍스런 우체국, 도서관, 교회들이 마치 세트장처럼 이어져 있다. 한때는 경제수탈의 창고 역할을 했던 ‘동인도 회사’의 오래된 노란 건물과 묵직한 장석을 하고 있는 수문들이 얼마나 중후하고 아름답던지. 역사의 장소는 이렇게 비극이든 영광이든 그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낸 또 다른 모습으로 거듭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초월한 그 자체로 남아 있는 것에서는 알 수 없는 애잔함과 쓸쓸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스리랑카 여행은 이런 감정을 만나고 확인해 주었다.
마치 들어 간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의 행사가 다 끝난 뒤였다. 아이들 손에 쥔 비닐 봉투 안에는 뭔가가 잔뜩 들려 있고, 예수의 구유와 색종이로 장식된 아기자기한 교회가 우리의 사라져 버린 옛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것 같았다.
갈레를 떠나 콜롬보를 향하면서, 또 다른 해안 마을인 마두강가에 들렀다. 이곳의 명물이라고 하는 ‘킹크랩’으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작은 보트로 마두강가 사파리를 했다. 바다와 강이 연결된 거대한 호수인 마두강가는 수많은 섬들로 나아갈 수 있는 길로 이어지면서 울창한 숲으로 싸여있었다. 금방이라도 악어가 물살에서 고개를 쳐들고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열대우림과 물고기를 잡는 작은 배들, 그곳 수중 가까이에 있는 가옥들을 볼 수 있었다.
‘콜롬보’라는 도시의 지명은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따왔다. 콜롬보는 세 나라의 식민지 시절 보석과 실론티를 실어 나르는 항구도시로 건설되고 발전되었다. 지금은 인구 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로 정치와 경제, 문화가 중심이 되는 행정수도다. 콜롬보로 향해 가는 길은 완전히 달랐다. 야자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시골 마을도, 찰랑찰랑 논물이 고인 논의 풍경도 사라지고, 무너져 있는 돌무더기의 유적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스리랑카답지 않는 도시가 콜롬보라고 하지만, 역시 한 나라의 수도다웠다. 많은 빌딩과 경적을 울리는 소음, 매연을 뿜는 차들이 체증을 일으켰고, 주위의 시끌벅적함이 비로소 대 도시에 온 것을 실감나게 한다.
크리스마스 이자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 곳은 식민지 시절 병원이었던 건물을 아주 운치있게 리모텔링한 식당이다. 야전 막사 같은 느낌을 주는 긴 실내는 적갈색의 나무와 어두운 조명으로 아늑한 분위기로, 군데군데 놓인 큰 화병에 꽂힌 극락조가 인상적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게 요리를 잘 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이 식당은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어떠한 술도 팔지 않았다. 성인이고 관광객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성탄일을 축제처럼 마시고 논다는 개념이 아니라, 종교의 특별한 날은 경건하고 엄숙하게 보내는 원칙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탄산수로 게 요리를 먹으면서 이들만의 황당한 고집이 어이없기도 하지만, 이윤을 떠나 나름의 규칙을 지키는 철저함이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면이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콜롬보
여행의 마지막 날은 뭔가 쫓기고 바쁘기 마련이다. 도심에 자리 잡고 있는 명소 ‘강가라마 템플’에 도착 했을 때, 새삼스럽게 신발을 벗고 맨발이 되는 일도 왠지 번거롭게 생각되었다.
▶ 강가라마 템플 내부
스리랑카를 대표한다는 이 사원은 몇 개의 건물들이 모여있는 큰 규모다. 복도로 이어지는 방마다에는 전 세계에 보내온 진기한 불상과 불교에 관련된 보물, 자료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계, 안경 생활용품…(아마 고승들이 사용한 유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들이 체계 없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진이 찍힌 친서처럼 보이는 자료도 허접한 여러 물건들과 함께 놓여있다. 아무런 차별없이 나란히 진열된 것이 신기하다. 여기가 대체 창고인지 박물관인지, 사원인지 분별하려던 마음도 슬그머니 내려지면서 편안하게 관람하였다. 어쩌면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이런 방식의 진열은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주지 않는다. 값어치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게 한다.
스리랑카인들은 스리랑카 3대 인물로 부처님, 립턴, 제프리 바와를 꼽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설명이 필요치 않는 분이시고, ‘립턴’은 스리랑카에서 차 산업을 일으킨 인물이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의 영국인 그를 3대 인물로 인정하는 것을 보면, 이 곳 사람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감정보다는 객관적인 잣대로 인물과 역사를 평가하는 냉철함을 읽을 수 있다. ‘제프리 바와’는 스리랑카 최고의 건축가이자 세계 건축계에서도 거장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가우디처럼, 제프리 바와도 스리랑카에서 그런 인물이다. ▼ 제프리 바와가 설계한 말라카 사원
시마 말라카 사원은 제프리 바와의 작품이다. 현대건축을 설계한 제프리가 남긴 유일한 종교 건물이자 스리랑카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이 사원은 강가라마 사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고, 인공호수 위에 둥실 떠 있었다. 다리를 건너야 하는 사원은 육지와도 떨어져 있으면서 파란 하늘과 파란 호수 그 중간에 떠 있는 느낌이다. 연결된 세 개의 건물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정자처럼 보이지만, 스리랑카 전통가옥양식을 도입했다고 한다. 나무의 빗살로 된 벽체의 틈에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실내를 화사하고 오묘하게 한다. 여러 불상과 호수가 어우러진 사원은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거장의 철학과 자연관 그리고 창의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원보다 더 눈길을 끄는 신랑 신부가 여기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왕의 복장을 한 듬직하고 귀골이 흐르는 신랑 (스리랑카 남자들에게는 결혼식 날만은 특별히 왕의 복장이 허용된다고 함)과 황금빛 사리 사이로 배집을 살짝 드러낸 고혹적인 신부에 정신이 팔린다. 그 귀족적인 풍모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맞은 편을 보니, 아난다 존자의 입상이 거기에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양 입술이 살풋 위로 올라간 이 모습을 어디서 봤지 하는 순간, 갈비하라 사원에서 와불 옆에 서 있던 모습 떠 올랐다. 제프리 바와도 그 아난다 존자를 눈여겨보았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뒤에 살짝 숨겨 놓은 듯한, 장난스럽기도 한 그 절묘함이 참 좋다.
◀스리랑카 전통의상을 입은 신랑, 신부
10일간의 스리랑카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단 한 번 스쳐간 여행으로 어떻게 한 나라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런디피티’- 일찍이 이곳을 드나들던 아랍 상인들이 ‘뜻밖의 행운,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나라라고 했지만, 난 아난다 존자의 입상을 보면서도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웠다. 맨발로 대탑을 돌던 때의 촉감, 거센 비에 꿈틀대던 인도양의 풍경, 그리고 긴 장대비로 마당을 싹싹 쓸던 여인들, 부처님 앞에 꽃 한 송이 공양하는 경건한 모습들. 차밭의 운무, 그리고 무너져 있는 돌무더기들의 유적들…내게는 이런 것들이 의외의 즐거움이었다. 스리랑카 작은 섬 안에 응축되어있는 그 무엇, 그 느낌으로 이 글을 썼다.
첫댓글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가지 못한 스리랑카.
내가 알고 있던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갑니다.다음에 더 많이 가르켜 주십시요.
윤풀이 초록님 한글 파일을 받아 원판 사진용량만 줄여 편집했심다.
올린지 하룻만에 12시간마에 123회 조회라




우리 까페 신기록입니다.
10일간의 여행
불교문화와 역사 식민지 문화와 종교와 역사 그리고 그네들의 생활상~
구구 절절한 설명으로 구경 잘 했습니다.
다녀오신지도 꾀 오래되셨네... 좋은정보 감사~
지난 연말에 다녀오세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