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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꼭 마곡사를 가세요 들어가는 글 지난 늦가을 추사고택을 둘러보고 예산에서 공주로 넘어갈려고 했다. 갑자기 '마곡사'란 이정표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핸들을 꺾어 버렸다. 유구에서 마곡사까지 가는 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비가 눈으로 돌변하더니 시야까지 가로막고 경사까지 급해지면서 몇 번을 차를 돌릴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무엇에 끌렸는지 마곡사의 품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대광보전 문 틈새로 가느다란 불빛과 예불소리가 묻어나왔다. 그 문을 살며시 열고 힐큼 올려다보니 벽에 편안히 기대고 있는 부처님이 손가락을 보둠고 앉아 계셨다. 어찌나 놀랍고 감동을 받았는지....새 봄에는 꼭 마곡사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약속을 했다. 마곡사 가는길 새봄은 아니지만 그 약속을 지키려고 마곡사로 향한다. '春麻谷 秋甲寺'란 말을 보여주듯 입구부터 노랗게 물든 유채꽃이 상춘객의 마음을 빼앗는다. 여느 사찰과 달리 주차장부터 절집까지는 꽤 멀어 걸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걸 탓하는 사람은 없다.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와 풍성히 내뻗은 나무들 때문인지 오히려 다리품 파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
해탈문 가까히 다리를 낼 수 있음에도 태극 문양의 개울 때문인지, 오솔길도 자연에 순응하듯 휘감아 돌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해탈문은 담벼락도 없다. 번뇌와 망상의 그물에서 벗어나는데 무슨 격식이 필요할까? 해탈문엔 큼직한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보살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진흙이 떨어져나가 너덜 너덜거려 안스럽게 보인다. 금강역사의 주먹이 유난히 커서 사악한 마음은 한방에 날릴 태세다. 또 다른 금강역사는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이 자릴 잡고 있다. 해탈문을 벗어나면 작은 부도밭이 두 개의 문 사이를 지켜보고 있다. 절구처럼 생겨 질박한 모습 그 자체다. 대찰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한 부도가 매일 신도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서도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는 고승의 소망이겠지. 천왕문 천왕문이 나온다. 왜 현판
'天王門'에서 유독 '王'자의 크기가 작을까? 함께 한 일행과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 설전을 벌일 때 고목 밑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꾸벅 졸고 있다. " 그래. 쓸데 없는 집착은 하지 말자. 그저 천왕문이다." 절묘한 가람배치 극락교가 나타난다. '春麻谷'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해탈문, 천왕문을 개울 남쪽에 세워 남쪽 영역도 북쪽의 품안에 넣은 것이다. 그리하여 홀로 떨어진 영산전, 명부전 그리고 여러 요사채도 자연스레 북쪽 영역에 포함이 된 것이다. 지형의 약점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선과 악도 두 개가 아닌 하나며, 미혹함과 깨달음도 하나라는 진리를 가람배치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영산전 (보물 800호) 극락교를 건너기전 영산전을 놓치면 곤란하다. 마곡사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어서 나이로 따지면 가장 큰 형님이기 때문이다. 배홀림의 주심포 건물로 납작한 맛배지붕을 하고 있다. 현판은 세조가 썼으며, 왼편에 '世祖大王御筆'이란 작은 글씨가 보인다. 막돌을 천연덕스럽게 쌓아놓은 기단석이 의외로 높지만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법당 안에는 영산회상도 밑에 부처가 모셔진 것이 아니라 천불이 모셔져 있다. 서로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천 개의 부처를 살펴보는 맛도 또하나의 즐거움이다. 명부전 영산전 옆에는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다. 영산전이 단정스런 느낌이 든 반면 명부전은 추녀가 높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새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만약 영산전처럼 기단석이 높았다면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김구선생님과 향나무 극락세계로 건너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나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지 날이 더워서 그런지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다. 가장 반가운 것은 대롱을 따라 살며시 흘러 내려오는 약수다. 한 모금 축이고 극락세계를 구경해본다. 김구가 민비시해후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한후 마곡사에 은거하여 도를 닦던 곳이란다. 조국 광복후 우연히 대웅전 주련에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속의 일 같구나"라는 글씨를 보고 김구는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을 것이다. 어찌나 감개무량 했던지 바로 이곳에 향나무를 심은 것이다. 사미승으로 입산하면서 얼마나 많은 번민을 했을까? 그리고 3년동안의 마곡사 스님 생활..훗날 민족의 스승이 된 원동력은 자연과 벗삼으며 심신을 단련했던 것은 아닐까? 김구가 은거한 내용이 적힌 무지막지한 표석이 향나무 앞에 서있다. 소박한 김구선생님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조그맣게 써도 좋으련만.......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799호)과 굴뚝 기존 사찰에서 흔히 보던 탑모양이 아니다. 높은 기단석 위에 날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금속으로 된 호리병까지 얹어 있어 더욱 색다른 모습이다. 바로 라마식 탑모양이다. 고려 말기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으로 전세계 3개밖에 없다는 탑이다. 모방은 했어도 손 맛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붕선의 반전과 새겨진 부처 모습은 영락없이 고려의 것이다. 탑 오른쪽에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고, 그 담벼락에 우직한 굴뚝이 세워져 있다. 탑은 날렵하게 하늘로 치솟고 있고, 굴뚝은 질박함을 보여주고 있어 조화를 이룬다.
심검당 스님의 요사채인 심검당은 아늑하다.. 근래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의 멋진 초서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린 것은 당시 청나라의 기풍을 따랐을 것이다. 해강의 이런 풍의 글씨는 강화도 전등사에서도 본 적이 있어 더욱 반갑다. 심검당 앞마당엔 이렇게 예쁜 창고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이 한번 일렁일 때마다 그 자연에 맛이 살포시 배일 것이다. 주렁주렁 매달린 저 시레기국에 밥한공기 말아 먹었으면..... 대광보전(보물 802호) 앞 건물이 대광보전이고 뒷건물이 대웅보전이다. 전자가 수평이라면 후자는 수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대광보전은 아주 큼직한 건물이다. 지붕도 아주 넓다. 탑의 뾰족한 상승감 때문에 그걸 보완하듯 옆으로 길게 늘려놓은 것이다. 듬직한 기둥도 민홀림으로 안정감있게 서있다. 대광보전 현판은 영정조시대의 화가 '표암 강세황'의 글씨란다. 표암의 자화상을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섬세함에 놀랐는데..글씨까지 만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대광보전에서 다양한 문양의 문살을 보는 맛이 그만이다. 마곡사 비로자나불 지난 가을에 이 불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나를 마곡사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비로자나불이 불전 가운데 모셔진 것이 아니라 법당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모셔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영주 부석사 아미타불이 이런 형태를 취했는데...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이런 위치에 앉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무엇보다 마곡사에 다시 찾아온 이유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얼굴을 보기 위함이다. 대개가 둥글고 넓적하여..일률적으로'부처님의 얼굴'이라는 도식이 있게 마련인데, 이 부처는 사람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것도 이곳 충청도 사람의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어 더욱 인간미가 넘친다. 이것보다 평범한 진리가 어디 있을까? "누구나 기도하면 부처가 된다."
대웅보전 (보물 801호) 다시 계단으로 몇걸음 올라서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높은 지대에 2층으로 세워 더욱 상승감이 돋보인다. 2층이지만 내부는 통층이다. 화려한 단청에 포작이 무척 화려하다. 이곳에서 바라본 지붕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포근한 산세와 비스듬한 지붕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저 안에서는 끊임없는 수행이 계속될 것이다.
계곡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가득하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봄나들이 하기에 적합하다. 마곡사 입구엔 상당히 큰 장승공원이 있다. 역대 대통령의 장승까지 보인다. 마침말 이 일대가 조선조 '십승지지'다. 즉 전란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곳이 마곡사다. 임진왜란의 전난을 피했으며, 한국전쟁때도 병화를 입지 않았던 곳이다. 김구선생도 왜경에 발각되지 않고 은거 했을 정도다. 또한 마곡사는 오늘날까지 계속 선승을 배출한 참선도량이다. 근대의 선승 만공스님도 마곡사에서 주지를 역임했던 적도 있었다. 찬란한 불교문화 그리고 정신세계가 겯들여진 마곡사가 미래에도 '십승지지'이길 그저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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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장님 덕분에 넘치는 호사를 했지요. 감회가 새록새록... 사진을 보니 계곡의 물소리가 귀에 쟁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