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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7 아내와 남편에게 2006. 4. 12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1)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2)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의 집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결혼하기 전에 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행복하기 위하여 결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결혼한다는 것이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깁니다. 물론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표와 방향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기를 어느 정도로 순복하라고 하는지 말씀하고 있는데 남편을 ‘주’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종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여자가 결혼하면서 남편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종으로 살겠다고 결혼하는 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편을 바깥주인 여자를 안주인 그렇게 말합니다. 종이 아니라 주인이고 싶은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은 안팎으로 여자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서 누가 남편을 주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나의 행복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말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과 정말 맞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본다면 우리 결혼생활의 행복이나 직장생활의 성공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나의 행복과 나의 기쁨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왜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까? 주를 위하여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유인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발 딛고 사는 나라의 법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행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입을 막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습니까? 제일 불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답니다. 그러니 주를 위하여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 종들은 주인을 대하기를 너그러운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이라도 범사에 두려워하며 순복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종이 자기 상전에게 하는 것을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이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있어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이미 자유인이기에 종으로 있다고 하여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열악한 환경이라도 주를 섬기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봅니다. 3:1절입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무엇과 같이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까? 바로 앞에서 말한 종이 주인에게 순복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종은 그야말로 노예입니다. 생사여탈권을 주인이 쥐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의 종이 주인에게 순복하듯이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복해야할 남편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내는 믿는 사람이고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 남편에게 순복하기를 자신은 종이요 남편을 주인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흔히 예수를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사이의 갈등을 이야기 합니다. 남편이 이해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전혀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기에 이해를 하지 않고 방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아내가 남편을 ‘주’로 여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아내는 교회를 다니는데 남편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남편이 자기 아내가 보기 싫어서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처럼 믿으려면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으로 믿는 모습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행동도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그런 남편이 요구하는 것과 상관이 없이 오늘 말씀에서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종들이 주인을 대하듯이 아내가 남편에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라고 하여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도를 순종치 아니하는 남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남편이라도 말로서가 아니라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아내의 행위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아내를 통하여서인데 아내가 말만 하고 자기 이기적인 모습으로만 산다면 남편은 복음조차 잔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을 본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어떤 행실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두려워하며,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도 두려워할 것입니다. 남편을 두려워하다니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를 하는가 하시겠지만 정말 믿는 여자가 남편을 두려워한다면 백 마디 말보다 그 행동하나가 더 큰 전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자는 정결한 행위를 나타내고 그 행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정결한 행위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패물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온유하고 안정이 되어 있으면 남편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아내가 사납거나 다른 남편이나 가정과 비교하여 우리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하느냐며 안절부절 못해하면 남편은 귀가 공포증에 걸릴 것입니다. 온유하고 안정된 썩지 아니할 속사람으로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갚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듣는 아내들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말씀이 죄 지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면, 속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을 다 실천하지는 못하여도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부끄러워는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아내들이 믿는 다는 아내들이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5-6절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단장은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자기를 단장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사라의 예를 듭니다. 사라는 자기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8:12절을 보시면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자신도 노쇠하고 내 주인도 늙었다고 하면서 속으로 웃습니다. 여기서 자기 남편을 주인이라고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남편이 자기 목숨 살리고자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순종하였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남편하고 살겠습니까? 그런데 사라는 자기 남편을 주인으로 여겼기에 자기가 다른 남자의 여자로 팔려 가는데도 순복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무사히 돌아오게 됩니다만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자들의 모습이라고 오늘 말씀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여자는 사라처럼 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며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라는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한 것은 남편을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많이 당한 사라입니까? 그러나 남편을 주로 여겼기에 감당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여자들이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면 어떤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할 것입니다.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소망을 하나님께 둔 자는 놀라지 아니합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믿음의 딸인 것입니다.
7절입니다. 남편에게는 한절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절만 말씀하여도 지금까지 말씀한 모든 원리는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라는 말씀으로 앞과 연결합니다. 인간의 세운 제도나, 사환이나, 남편으로서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합니다. 지식이란 여자의 특징을 이해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남편이 주인이라고 해서 폭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역시 아닙니다. 아내에 대한 지식이란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그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었으니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는 다는 이 말씀은 말라기서를 보면 상세하게 나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2:13-16절입니다.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10절부터 보시면 유다와 이스라엘이 궤사를 행하기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도 받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 궤사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려도 다시는 헌물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들의 손에서 받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즉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용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면서 이혼하면 된다고 합법화 하여 살았던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나 남자나 자기의 행복을 위한 결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결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나의 만족이나 보람이나 수입이 목적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생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물이 다 주님에게서 창조되었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6절에서 천지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5:22-33절의 말씀을 보시면 아내와 남편에게 주시는 말씀이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남편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전혀 그러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그런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통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이 증거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