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신정호반의 양담배 추억
온양온천역전에 있는 이 충무공사적비(史蹟碑) 앞에서 충청수영로 2일째
아침을 열었다.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1868~1953) 초대 부통령 이 쓴 현판 '이 충무공
기념각(李忠武公紀念閣)'이다.
역전삼거리에서 온천대로 따라 방축동(方築)사거리까지 나아갔다.
국민관광단지로 발전한 신정호 갈림길이다.
신정호(神井湖)는 1970년대에 내게 큰 추억 하나를 만들어준 호수다.
양담배를 피는 자는 수하 막론 엄벌로 다스리던 양담배 절대금연 시절.
입신양명한 고위공직자들이 양담배 피웠다는 죄로 추풍낙엽이 되던 때에
이 호반에서 양담배를 피다 적발됨으로서.
우리 담배의 질이 놀랍도록 향상된 이 시대에는 양담배를 선호할 이유가
없지만 당시의 국산담배는 워낙 저질이었다.
그랬음에도, 정부는 전매청을 두고 담배를 국가의 전매(專賣/Monopoly)
사업으로 강제하던 때였다.
그러나, 국산이라는 이유로 저질을 기껍게 애용할 만한 애국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는 없다.
어쭙잖은 애국심이 되레 국산품 품질향상의 저해요인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 차를 몰고 미8군 영내에 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트렁크
안에 양담배를 가득 싣고 와서 피웠다.
적반하장격으로 내 통 큰 일갈에 서슬 퍼렇던 전매청 감시반 담당자들이
감동을 먹었던가.
이후로, 그들과 마치 호연지기처럼 상통하게 되었고 그들의 관할은 물론
지방 어느 곳에서도 양담배 때문에 봉변당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김 아무개를 모르면 감시반원이 아니라는 말이 돌 정도로 통했으니까.
외국담배가 물밀처럼 들어와 판을 치는 이 시대에는 양담배 때문에 어이
없게도 망신 패가 당한 이들의 사연만 가련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신정호에서 곡교천으로 흘러가는 오목천(오목교)을 건넌 후 45번 국도를
질주하는 차량들을 피해 가다가 1시간여의 알바를 했다.
빗길 피하다가 시궁창에 빠진 꼴이었다.
곡교천에서 12리 신창(新昌)은 옛 신창현의 지역으로 지금의 읍내리인데
남성리(南城)를 지나 오목리(五木) 신창면소재지까지 가게 된 것.
1922년 장항선이 개통될 때 오목역이었으며 현 신창역으로 이전함으로서
폐역이 된 구 신창역이 있던 곳이다.
어렵사리 오목삼거리로 나온 후 623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읍내리의 신창
척화비(斥和碑)와 신창향교 앞에 당도했다.
병인(丙寅/1866)과 신미(辛未/1871),두 양요(洋擾)를 겪은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처의 200여 교통요충지에 소위 척화비를 세우게 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짓이고 화해를 주장함은 매국이다"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기 위해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
병인양요 후 제작에 들어갔으며 신미양요를 겪고 나서 바로 세운 것일 터.
그러나 대원군과 함께 쇄국정책은 사라졌고 척화비는 뽑혀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가 파멸되는 운명이 되었다.
신창 척화비도 광복 후 우연히 발견되어 문화재로 대접받게 된 운이 좋은
30여곳 중 하나라 하겠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6호가 되어 숨쉬고 있으니까.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한 왕조의 패망은 대개 척신정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의 고려가 그랬거니와 이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의 이조 역시 세도
정치라는 이름의 척신세력의 전횡이 왕조의 막을 내리는 원인이 되었다.
세도정치를 혁파하고 잘 나가는 듯 하였던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양요
후 쇄국정책을 버리고 척화비 건립 대신 서양과 과감하게 악수했더라면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을까.
사랑의 집짓기운동과 화합의 마을
무의미한 상상(가정)을 접고 충남도기념물 제113호인 신창향교를 떠나서
45번국도에 합류하는 읍내삼거리로 진출했다.
옛 신창현의 다운타운이었으나 면사무소는 오래 전에 오목리로 이전했고
지금은 순천향대학교 마을이다.
전라남도 순천의 순천대학교와 달리"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마을"(順天鄕)
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의과대학이 모태가 된 대학교다.
수도권전철 1호선이 새 신창역까지 연장되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4km 이상 이설하여 1호선 종착역과 장항선 철도역으로
거듭난 신창역이 대학교 캠퍼스 바로 옆이다.
철도공사와 대학은 상호 이익관계일 것이다.
1만명을 상회하는 학생은 철도공사의 1등고객이고 학성산(鶴城山) 자락,
시골의 큰 대학에게 철도는 비할 데 없는 최고의 발이니까.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따르면 대학캠퍼스 타운에는 면학분위기
조성에 맞는 서점,도서관 등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상반되어 있다.
허허벌판 또는 산간벽지라도 대학 건물이 들어서면 함께 문을 여는 것은
주점, 당구장을 비롯해 온갖 위락시설이다.
여학교에는 화장품점, 미용실과 의상실이 우선이다.
순천향대가 예외일리 없으며 자녀를 둔 부모에게 요즘의 최고가 주택지는
대학 주변이 아니고 유명 학원가 지역이다.(최고와 최고가는 다름)
나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많은 대학을 방문했다.
'대학인순례자협회'의 프로그램에 따른 카미노 상의 대학교방문이었지만
나의 가장 큰 관심은 교수요원과 도서관의 장서 및 장학제도였다.
우리나라 처럼 시간강사로 때우지 않고 도서관의 장서를 양(量) 아닌 질
(質)로 평가하는데 감명받았으며 우리의 대학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대학교와 신창휴게소를 벗어나면 유황온천으로 이름난 도고(道高)면이고
와산리(瓦山)를 지나면 향산리(鄕山)의 옛 이름이라는 용호원이다.
대동지지의 용항원(龍項院)은 용호원의 오기일 것이다.
'신창에서 7리'라면 와산리를 지나 향산리의 현'용원'마을 쯤이 되며 이조
시대에 길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용호원이란다.
감나무가 많다는 시전리(枾田) 도고온천역이 고령자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도고온천지역 또한 활기를 띄고 있단는 것 같다.
신창역까지의 무임우대 전철효과리라.
충청수영로는 21번과 45번이 함께 가는 국도의 완만한 고개를 넘는다.
용호원에서 6리인 갈치(葛峙/갈티마을)로 짐작되는 고개마루다.
정상에는 '화산추모공원' 안내 화살표가 서있다.
행정상으로는 예산군 대술면 화산리에 속하는데 지름길이 있는가.
조금 뒤에는 '화합의 마을'(Village of Reconciliation) 안내판도 있다.
금산리(金山)의 72세대 아담한 숲속 마을이다.
"지미 카터(James Earl Jimmy Carter, Jr./1924~ ) 특별건축사업2001,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Habitat for Humanity Korea)"에서 지은 집들이다.
미국 제48대 대통령(1977. 1~1981.1) J. E. 카터는 단임으로 끝난 실패한
대통령이지만 퇴임 후에 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중재가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트러블 슈터(Trouble shooter)가 되었고
세계를 무대로 사랑의 집짓기운동'을 실천함으로서.
2002년에는 인권과 중재 역할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그의
족적이 여기 금산리 산자락에도 뚜럿하게 남아있다.
'해비타트(habitat)'는 거주지, 주거환경, 보금자리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사랑의집짓기운동(Habitat for Humanity)은 거주지를 갖지 못하고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하나 제대로 되었으며, 감당할
수 있는(simple, decent, and affordable)" 집을 지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국제적, 비영리 비정부 기구의 사회적 운동이다.
원망스럽던 예산군 오가면
금산리교차로를 지나 아산과 예산의 경계인 간양교차로까지 국도를 따른
후 간양사거리에서는 갈치 발 6리인 옛 신례원(新禮院) 마을로 향했다.
예산읍 신례원은 옛부터 여객의 왕래가 빈번해 원(院)이 있던 마을이고
오늘날도 장항선 철도역이 있으며 버스 노선도 꽤 발달한 교통요지다.
점촌삼거리에서 국도를 떠나 신례원 마을을 거쳐서 예산군청으로 갔다.
예산지역의 자료가 전무했기 때문에 참고 자료를 구득하기 위해서.
청사(廳舍)는 낡았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싱싱했다.
예산군청에서 받은 첫 인상이며 군청 문화관광과 직원들이 늙은 길손인
내게 준 귀한 선물이다.
빚더미에 올라앉아서도 호화청사에 취해있는 골빈 지자체들과 달리 낙후
된 듯 하나 고달픈 군민과 애환을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으니까.
자투리 공간들을 최대로 활용하여 군민에게 무료주차공간을 제공하는 등.
지자체들 중 군계일학이라고 주저없이 꼽겠다.
문화관광과 직원들로부터 예산지역에 대한 성의있는 안내를 받고 나와서
예산대교를 통해 무한천(無限川)을 건넜다.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백월산(白月) 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예당저수지를
거쳐 와서 삽교천에 합류하는 길이 67㎞ 하천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배를 이용했다는(潦則用船/대동지지) 무근성천(無根城
川)이란 이곳 무한천의 오기일 것이다.
신례원에서 10리 전후의 하천은 무한천 뿐이며 다음으로 가까운 하천은
삽교천이니까.
예산읍 산성리의 산성 이름도 무근산성이 아니고 무한산성이다.
限(한)과 根(근), 柯(가)와 河(하)는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쉬운
한자(漢字)들이다.
평해대로의 交柯驛(교가역/삼척시 근덕면)도 대동지지 권(卷)16 '삼척'
편과 달리 권27 정리고(程里考)에는 交河驛으로 오기되어 있다.
국가하천 무한천의 꽃으로 단장된 예산대교 건너편이 오가면이다.
군(郡)의 심벌마크도 캐릭터도 사과를 주 소재로 할 만큼 예산군(禮山)의
주산물인 사과의 대표적 산지 오가면(吾可).
1970년대에 나는 오가면산(産) 사과를 많이 먹었다.
이 시기에 거의 월 1회꼴로 오가를 방문하였는데 그 때마다 내 차안에는
사과 또는 사과주(酒)가 실려 있었으니까.
21번, 45번 국도와 지방도로들, 장항선 철도(오가역/지금은폐역)에 당진~
대전 고속국도까지 더해 교통이 발달한 오가는 다량의 점토매장지역이다.
점토(粘土)는 옹기의 주 원료다.
오가면에서 옹기류 제조업이 발달한 이유일 것이다.
오촌리(五村)에는 냉장고용 김치독,옹기가마솥 등 옹기류 그릇을 만드는
전통옹기공장(명장 황충길)이 있으며 3대를 이어오고 있단다.
다량의 점토 매장(埋
교통망은 이 관계를 원활하게 도와주는 보완자라 하겠다.
한데, 나로 하여금 오가를 드나들게 한 것이 바로 이 점토다.
친구의 부친이 이곳에서 점토광산을 경영하고 있을 때였다.
Y대학 농구선수출신으로 소위 마당발인 K는 주호(酒豪)인 나를 챙기는데
각별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가끔 차를 모는 것은 빚갚는 일인 듯 했다.
업무상의 필요 때문이었지만 1970년대 초부터 차를 소유한 죄(?)라 할까.
이 차 때문에 내 아내는 호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말과부였으니까.
단 둘이 다니던 여정에 친구가 늘어났다.
4명의 남자와 홍일점으로 차가 묵직해졌다.
산을 타고 술도 마시고 온천도 즐김으로서 인기있는 월중행사가 되었다.
지망자가 늘어났으나 여석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게 될 만큼.
80년대까지 이어지던 이 행사는 K의 부친의 광산 철수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하나씩 시나브로 병을 앓더니 내 곁을 떠나갔다.
야속하게도 단 하나도 남지 않고.
금북정맥을 타던 2004년, 가야산을 비롯하여 예산지역을 통과할 때 나는
이 몹쓸(?) 사람들 때문에 줄행랑치듯 했다.
금북정맥 종주기도 이들 4명 때문에 중단했다.(간절한 생각 때문에)
오가면을 원망했고 나만 두고 먼저 가버린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5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오가를 지나갔다.
함께 오른 산들에 찍힌 발자국들이 지워진지 오래고, 오를 때마다 사기꾼
이라고 내게 퍼붓던 원성(?)이 귓전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죽기살기로 마셔대던 술버릇이 없어진지도 오래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 중 하나라는 말이 정녕 맞는가.
그들의 뒤를 따라갈 날이 얼마 남지 않기 때문인지 대범해졌으니까.
적동지무 금곡지문, 충절의 땅 홍북면 노은리
오가면소재지는 역촌(驛村)과 탑동(塔洞)을 합친 마을, 역탑리다.
예전에 역말이었음을 의미한다.
오가사거리에서 예산과선교를 넘는 국도를 피해 옛길을 택하였으나 역탑
교차로에서 국도에 흡수되었다.
철길과 막 개통된 30번고속국도(당진~대전)를 건너(월곡리) 응봉사거리
조금 지난 지점에서 매우 친절한 한 트럭 운전자를 만났다.
예산(오가면)에 거주하지만 홍성땅(洪北面大仁里)의 농토를 돌보러 가는
길이라는 그가 승차를 권했다.
홀 늙은이가 걷고 있는 것이 안쓰럽게 보였던가.
'64세 이영재'라고 본인을 밝인 그도 늙어가는 나이라 늙은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던가.
덕분에 응봉면(鷹峰)을 지나는,긴장하고 걸어야 하는 21번국도를 30여분
단축해 대인리에 당도했다.
무한천에서 20리, 홍성군 홍북면의 옛 인후원(仁厚院)이 있던 마을이다.
옛부터 어질고 후덕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는가.
홍북면은 충청남도 도청이 이사오게 되었다 해서 들떠 있는 것 같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하며 그 지역까지 밝혔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고.
10고을이란 결성, 해미, 태안, 서산, 면천, 당진, 홍주, 덕산, 예산과 신창
등을 말하는데 그 중심지인 홍주(홍북면)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나.
택리지가 쓰인 때가 1750년대초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중환의 진단이 250
여년 후에 입증되는가.
인후원회관에서 얼마 가지 않아 국도변에 '최영 장군 사당'과 '성삼문 선생
유허지' 안내판이 서있다.
고려말의 일편단심 무신 최영(崔瑩/1316~1388)과 이조 초기의 절신(節臣)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출생지가 여기 홍북면 노은리(魯恩里)란다.
적동지무(赤洞之武), 금곡지문(金谷之文)이라 하여 이름난 마을인데 무와
문 두 충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마을 이름이 최영의 출생시인 고려때는 적동리였고 성삼문이 태어난 이조
때는 금곡리였다는데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불통으로 평하기도 하지만 위국충절이 만고
불변한 고려의 충신이라는데 이의를 달 아무도 없는 최영.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를 원망할 정도로 일편단심의 성삼문.
이 두 사람의 출생지라는 것 만으로도 노은리는 보기 드문 충절의 땅이다.
그런데도'살기 좋은 곳'정도로 평가했다면 이중환은 허명이었거나 견문이
짧았던가.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白冶 金佐鎭/1889
~1930) 장군도 홍성(갈산면 행산리) 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후손(손녀)은 자기 조부와 총뿌리를 겨눴던 소위 황군(왜군)
장교의 딸에 붙어 온갖 아양을 떨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안내판을 지날 때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인후원에서 20리 수오랑점(水烏浪店)을 찾아가는 일을 포기하라는 신호에
다름 아니었다.
백주에도 사람 보기 어렵거늘 인적이 끊겼는데 상대할 누가 있는가.
교통사고의 위험이 따라도 길 안내판(이정표)이 갖춰진 대로(大路) 외에는
함부로 뛰어들 수도 없다.
곧 어두워졌기 때문에 금마면을 거쳐 홍성읍 도심, 대교리의 찜질방(서울
스포렉스)에 도착하기 까지의 나의 충청로는 없다.
금마면 이후의 이 길이 충청로인지도 분명치 않고,오직 경직된 몸을 풀 수
있는 찜질방에서 보내게 된 것만이 다행인 밤.<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