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김용철교수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모임이 있으니 홍대 앞까지 나오란다.
선후배가 모여서 그림에 대해 토론도 하고 그림도 보고 당연히 술도 한 잔 한단다.
그러잖아도 뵙고 싶던 터이고 마침 시간도 비어 있어서 별로 배도 안 고팠지만 저녁을 둘 째 놈하고 챙겨먹고는 서둘렀다.
여기서 홍대 앞이면 멀고 또 퇴근시간이고 약한 술이지만 한 모금 '땡기려면' 차를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거기가 주차하려면 전쟁터 같은 곳이니 빨리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마침 홍대 앞으로 아는 분 만나러 간 집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접촉사고를 냈다고.
운전경력이 벌써 얼마인데 대로서 후진하다 트럭을 받는단 말인가?
바쁜 와중에 그걸 처리해 주고 나오느라 더 마음은 조급했지만 후다닥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행하게도 버스는 금방 와서 나의 조바심을 달래 줬다.
그리고 러시아워도 내 맘을 걱정 해주는지 길도 거의 안 막히고 차는 잘 굴러서 1호터널을 지나고 나는 뻥 뚫린 중앙극장 앞에서 내렸다. 그래도 청계천 고가다리를 날려 버린 것은 잘 한 일이다란 생각이다.
우리 동창 중에 지금은 불란서 사람이 된 시골출신의 친구가 20년도 전인 학창시절에
"서울 처음 올라 왔을 때 차가 막 하늘을 날더라고"했고 또 지금은 고인이 된 어떤 서울 출신 친구는
"흉물스런 청계천 고가는 부숴 버려야 되!"
나는 그 두 친구의 말 중에 어느 편을 들어야 될지 오랫동안 고민 아닌 고민거리였었는데 그것을 현재의 '이모시기'씨가 확 해결을 해 주었다.
지금 보면 없애는 것이 나았다 싶다.
그리고 나도 지금은 그 시골 출신의 친구 고향인 경주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옛날의 모습으로 환원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건물이 올라가고 현대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을 옛스러움과 섞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 둘을 분명히 나누어서 발전시키고 보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을 한다.
경주, 인사동, 절간 등이 그렇다.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왜들 뜯어고치지 못해서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다들 새로운 것을 좋아하다 보니 요즈음은 이혼율도 엄청 느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야 잠시 푸념 같은 것이고 나의 발은 열심히 지하도로 향한다.
지하도에 내려오니 을지로 2가 쪽이 가까운지 3가 쪽이 가까운지 망설여지는데 바로 내 앞에서 내렸던 덩치가 크고 두꺼운 종아리를 횐 스타킹으로 '덮어 씌운' 여자가
3가 쪽으로 가기에 나도 그 길을 택했다.
나의 예상은 점쟁이처럼 적중해서 그녀도 지하철을 타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방에 '노숙자 하우스'가 보인다.
커다란 '포장박스'가 이렇게 요긴하게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 '보루박스'로 거푸집을 만들어 놓고 바람을 막고는 그 안에 들어가서 잠들을 자는 모양이다. 일순 늘 불만투성이인 나의 삶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은 늘 그렇듯이 오랜만에 타는 나도 문짝을 헛갈린다던 지 쇠기둥에 머리통을 부딪힌다는 일 없이 그냥 잘 타고 홍대역에서 내려 지하철 벽에 붙어 있는 지도그림을 보면서 북새통의 홍대앞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거기가 지금은 온갖 상가와 장사꾼들과 행인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당인리 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길이 있던 곳이다.
몇 년 동안 기차가 지나는 것을 본 것은 두어 번도 안되고 주로 친구들이 시장통에서 막걸리나 소주잔에 거나해서 휘적휘적 걷던 말하자면 '취객전용 산책로'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곳이 지금은 이렇게 번화한 곳으로 변해서 그 옛날의 그런 모습은 그저 길의 꼬부라짐으로만 가름할 수 있을 뿐이였다.
그 길을 쭈욱 따라서 발전소 쪽으로 가는 길에 우리의 만남의 장소가 있었다.
이름하여 '호프소'
'호프집'을 영어로 쓰면 그리 쓰는 모양이다.
아마 '해우소'할 때의 '소'자와는 어원적으로는 전혀 뜻이 다르겠지만 듣기에는 엇비슷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웬걸 내가 너무도 일찍 도착했나 보다.
전혀 아는 얼굴은 코백이도 없고 아주 젊은 여자 두엇이 오늘의 모임을 준비하는 중인 것 같았다.
회비를 내고 건네주는 조그만 맥주병을 소중히 껴안고 자리에 앉아서 할 일 없이 나의 서두른 시간을 좀 원망하려니 "아저씨!" 하는 외마디에 되돌아보니 김교수님 큰 딸 '다은'이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유럽 여행이야기를 물어 보며 시간을 보냈다.
조금 있으니 아는 얼굴도 등장하고 또 교수님도 등장하셨다.
한 참을 시끄러운 중에 영상물을 돌린다. 에니메이션이다.
정신 없이 시끄러운 상황에서 뭐 딱히 할 이야기도 없어 열심히 볼려도 잘 들리지도, 눈에 들어오지도 안 했다.
기대를 가지고 영상물을 가지고 왔을 작가한테 괜실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어서 이희명씨의 공연이 있단다.
아까 들어 올 적에 앞에서 마이크며 뮤직박스를 만지작거리던 여인이 말하자면 오늘의 '카수'신가보다.
원래가 그림쟁이들이 재주가 많은 이가 많다보니 저런 가수도 있나보다.
노래도 기가 막혔다.
'웟스 고잉 온'이라나 하는 영어 노래였는데 그 부르는 음이 다양해서 듣기가 좋았다.
대부분의 노래가 다들 같은 톤이나 음색이나 창법으로 하는 것이 다반사지만 그 노래는 입으로 불렀다, 이로 불렀다, 목으로 불렀다, 가성으로 불렀다 하며 자유자재의 영역을 드나들면서 부르는 말하자면 틀이 없는 그런 노래였다. 표정도 다양했다. 어느 때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하듯이 또 "어이! 거기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듯이, 중얼거리듯이 또 냅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욕이라도 하는 듯이 불러 젖히고 조 무슨 소프라노처럼 목청을 돋구기도 하고 참으로 노래에서 멀게만 살고 있는 나로서는 신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우리들 환쟁이들이 꿈꾸는 '자유'가 그 노래 속에, 그 창법 속에, 그녀의 목구멍 속에 오롯히 배겨있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 중에는 자작곡도 있었고 한국 노래도 있었고 편곡한 것도 있었다.
그녀의 그림은 전혀 모르지만 이 정도면 그녀한테는 실례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림보다는 노래쪽이 훨씬 '인생쇼브'로는 빠르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선배 중에 지금은 고인이 된 그런 대학원 동창 한 분이 있었다.
그 분의 '18번'은 '명태'였다. 목소리가 폭포수 쏟아지듯 웅장하고 깊고 섬세했었다.
그냥 잘 나갔으면 요즈음 누구나 선호하는 의사가 돼서 평생을 잘 살았을 텐데 괜실히 중간에 삐끗해서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그 분의 인생역정은 복잡해진 그런 분이셨다.
그저 의사영역이야 모르겠지만 문외한인 나의 느낌이 얼마나 정확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노래만은 아까웠다.
혼자 그 분을 생각할 때마다 늘 그림보다 노랠 불렀으면 하던 생각이 들던 그런 분이셨다.
또 다른 선배 중에 한 분은 유럽 여행 중에 심심해서 기차 객차 중간에 나와서 이태리 가곡을 여러 곡 불러 '제끼는데' 어떤 흰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외국인이(거기서는 내국인) 화장실 왔다가는 그것도 잊고 한 참을 쭈그려 앉아서 노랠 듣더니 자기 레스토랑이 시실리아에 있는데 거기 가수로 나올 수 없냐고 하더란다.
그 분이야 잠시 여행 온 중에 직장을 제안 받았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는데 하여튼 가나 본다고 그 섬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쫙 도열을 해서 그 양복의 사나이를 맞더란다.
말하자며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그 유명한 '패밀리'였던가 보다.
식당도 엄청 크고 제의도 계속 유효했지만 그냥 돌아 왔단다.
지금은 한국에서 미대 교수님으로 활동하시지만 까닥했으면 '오리지날 카페가수'가 될 뻔한 그런 분이다. 그 분도 그분한테는 역시 실례지만 어쩌면 그림보다는 노래 쪽이 훨씬 앞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나하고 남이 생각하는 내가 그런 식으로 오차가 나는 법인가보다.
그런 것을 누가 교통정리를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기의 선호도에 의해서 인생의 키가 결정이 되는 것이니 그런 소질의 객관성을 부여하는 무슨 기준 같은 것이 있다든지 그런 방향을 알려주는 학원같은 것이 있다면 운영자는 돈도 벌고 남의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 것 같다.
나도 내가 본 내가 참을 잘 못되었었던 것이 아닐까 자주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림보다는 구두제조공이나 가구장이가 되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늘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시대를 좀 일찍 타고 태어나서 초상화가나 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내 인생은 이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으니 다 부질 없는 생각이고 그저 물감 칠이나 열심히 하면 좋을텐데 맨 날 놀기만 열심이니 내 인생도 볼 장 다 본 것 같다.
이어서 또 자유시간과 멕시코 벽화들을 보여주고 한참만에 '뽑기'를 한단다.
3등부터 뽑는단다. 물감이 열 통이고 한 명에 한 통씩이란다.
어떤 이들은 벌써 자리를 떠서 오늘 모임의 정표인 그 아까운 선물을 놓친 이도 있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굳이 누가 전해 줄 일도 아니어서 그냥 건너뛰었다.
나도 한 개 뽑으래서 뽑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하필 내 이름을 내가 뽑았다. 처음에는 거꾸로 봐서 누구 이름인가 했더만 사회자 말이 내 이름이란다.
무슨 복권도 이처럼 극적일 수가 있을꼬?
그래도 공짜인데 열심히 잘 쓰겠다고 했다.
이어서 머그 잔과 사모님이 터키에서 사오셨다는 캐시미어 원단 스카프가 뽑히고......
그것도 그것을 포장한 후배가 뽑혔으니 오늘은 뭔가 '주최자 농간 뽑기 사기극'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기기묘묘한 뽑기 행사가 되 버렸다.
그래도 어찌나 즐거워들 하는지 동문이 이런 것이고 동 직종의 우정이 이런 것이다 싶었다.
이어서 2부 공연이 진행되었다.
예의 그 내가 머리가 나쁘지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이름 이희명씨가 노래를 한다.
그 이름은 우리 처남의 이름이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노래는 여전히 좋았고 반응도 '환장적'이었다 '파도타기'하는 친구들, 그냥 자유자재로 흔들기로 박자 맞추기 하는 친구들 해서 모두가 하나였다.
우리는 그 작은 공간 '호프소'에서 그렇게 하나로 만났다.
사실 처음에 나는 좀 계면쩍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리 나이 좀 위거나 아래인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려니 했더니 우리 또래는 완전히 '노인네'였다.
졸업 연도들을 말하는데 감이 잘 안 왔다.
98학번이라니? 89학번이라도 감이 멀 판인데 98이라니?
그것은 너무도 멀고 먼 다리였다. 십 년도 아니고 이십 년도 아니고......강산을 비교하려니 그것도 멀고 머리칼을 얘기하려니 너무도 그 개수가 성성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 그냥 쭈그리고 앉아서 가슴에 안고 앉았던 맥주는 벌써 비웠고 김 교수님이 풀어 놓은 양주잔을 홀짝이다 보니 얼굴 온도만 올라간다.
그래도 초록은 동색이라지 않는가!
우리는 초록이고 또 '환쟁이'들이고 또 같은 공간에 이렇게 한 호흡으로 있지 않은가?
그래 그것이면 족하다 싶었다. 시간이 아니고 눈이고 기쁨이고 가슴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태극기를 휘날리는 전사'들처럼 한자리에 하나로 뭉친 것이다 오늘.
그것이면 모든 것이 다 '오우케이'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과 어색한 마음도 달랠 겸 분위기에 호응도 할겸 노래 부르는 가수의 기타줄 조리개에 실례건 말건 '쩐'을 돌돌 말아 꽂았다.
그것이 나의 오늘의 자리함에 대한 변명이고 기쁨이고 후배사랑이라면 후배사랑이고 뭐 그런 복합적인 언어였다.
이제 점점 달아오르는 나의 취기는 나의 감당한계선을 넘어 갈 즈음 노래방 시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은이의 노래에 그 동생 예은이의 그 초롱초롱한 눈이 빛을 발하고 우리들 모두는 즐거움으로 작은 공간을 더욱 가득 채울 때 우리 또래들은 슬슬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도 이제 슬슬 막차시간도 신경써야 할 것 같아 아쉬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예전의 그 기찻길을 상상하면서 역까지 걸어와 지하도를 내려가는데 올 때 비닐로 온 몸을 둘둘말고 쭈그리고 앉아 있던 구걸인이 내가 즐거웠던 그 긴 시간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빈 바구니에 작은 종이 한 장을 채워 넣었다.
지하철을 타니 대충 11시 반은 된 모양이다.
깜빡 졸다가 을지로3가를 지나쳐 4가까지 와버려서 할 수없이 개표구 개구멍을 통과해서 건너편에서 되돌아오는 지하철을 타고 내리니 올 때의 그 '노숙자 하우스'는 훨씬 그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그 작은 상자 속이 그 사람들의 인생의 전부려니 하는 생각에 안쓰러움이 쌓였지만 난 빌게이츠가 아니니 별 수가 없다.
중앙극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으잉! 그런데 웬 눈이?
오늘의 나의 외출 마무리를 축하라도 해 주려는 듯 눈이 내렸다.
버스에 올라서도 그냥 내쳐 눈을 붙였다.
깨보니 분당이고 바로 집 근처다. 헐레벌떡 눈을 뜨고 내리니 눈이 허였다.
집에 들어와 양말을 벗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는 순간 모든 것이 밀려 왔다.
지리산 갔다오느라고 못 잔 잠들이며 못 먹는 맥주에 양주를 '섞어찌개'로 밀어 넣은 배는 이상했고 머리가 무거워 지면서 자꾸 바닥 쪽으로만 기울었다.
나는 윗옷만 겨우 벗고는 그냥 뻗어 버렸다.
잠결에 내 침대를 같이 쓰는 둘쨋 놈이 몇 번인가 깨워서 나를 침대 위로 올려 보려고 시도를 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냥 내쳐 뻗어서 거기가 천당이려니 하고는 지상을 차고 날라 버렸다.
그래서 나의 오늘 모임은 끝을 아주 화려하게 나는 것으로 마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