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심(The Fullness of God’s Forgiveness)
시편 32편
J.S. 버트(J.S. Burt)
어떤 사람이 “사람의 악한 행위는 철판에 끌로 기록하고, 선한 행위는 물 위에 기록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건은 이제 모든 사람이 아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정직하심이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을 살해한 음모에 대한 기억하기 싫은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강포하고 뻔뻔스런 죄였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개인의 죄를 넘어선 자신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자기 가족과 밧세바와 그 남편과 또한 자신의 몸에 저지른 엄청난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처음으로 그 두렵고 심한 고통 속에서 회개에 이르렀을 때, 그 무엇보다도 오직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이 한가지 사실로 인해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죄사함의 기쁨
다윗의 죄는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다윗이 이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죄사함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이 시편의 표제어는 히브리 말로 마스길인데, “교훈을 위한” 혹은 “지혜롭게 하는”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시편 32편은 13개의 마스길 시편 가운데 그 첫 번째 시편이지만, 흔히 회개의 내용을 담고있는 시편 가운데 두 번째 시편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즉 시편 32편은 시기적으로 볼 때, 다윗이 경험했던 회개의 고뇌를 담고 있는 시편 51편 다음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기 영혼의 고뇌와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이 다시 자신에게로 얼굴을 돌리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담겨있습니다.
시편 32편은 지복(至福)의 즐거움을 토하면서(‘ash ray’; Blessed; 복이 있도다) 시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 “아쉬 라이”라는 말은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아, 이 어떠한 행복인가!” 혹은 “실로 복이 있도다!”라며 감격의 말을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죄사함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다룰 때,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인데, 다윗은 자신 생애 가운데 이를 경험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편 32편에는 죄와 관련된 세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허물(transgression)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over-stepping) 행위로써 반역적인 태도이며 반항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죄(sin)라는 말은 표적에서 빗나가다는 의미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길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정죄(iniquity)란 말은 도덕적인 타락, 우리 본성의 내적인 악용, 악한 행위 그 자체에 나타나는 왜곡된 모습 등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양심은 혹시 어떤 허물이 있으면 그러한 죄악된 행위로 인해 크게 각성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렬해지는 끔찍스러운 양심의 송사를 통해, 마침내 고통스럽지만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자기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각각의 허물과 죄를 범하는 것 뒤에 따라오는 것으로써 범죄가 있는 곳에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부패와 타락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음의 세가지 단어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완전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들어올리다” 혹은 “가져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사함을 얻고(forgiven)’라는 말은 죄의 짐을 없애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리움을 받는’ 것은 죄의 얼룩을 보이지 않도록 감추어 준다는 의미가 있는데, 가리움을 받음으로써 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되는 것으로, 이는 마치 그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해준다는 말입니다. ‘정죄를 당치 않는다’는 말은 죄의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그 빚이 이미 갚아졌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사용된 여섯가지 단어는 레위기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속죄일에 행하는 엄숙한 절차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속죄제의 제물인 염소의 피가 흘려지고, 그 피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성막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속죄소(Mercy seat) 앞에서 피를 일곱 번 뿌리게 됩니다. 동시에 살아있는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광경을 생각하면서 다윗은 자신을 그 허물의 사함을 얻기 위해 자신의 죄를 고함으로써, 그 죄를 짊어진 염소가 광야로 떠나가듯 하나님의 기억에서 자신의 허물이 기억되지 않게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속죄제로 드려진 염소의 피로써 자신의 죄가 가리움을 받으며, 주께 더 이상 정죄를 당치 않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광야로 사라진 염소의 머리 위에 자신의 죄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양심의 고통스런 송사
다윗은 이제 자신의 경험과 이러한 진리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범죄한후 거의 일여년동안 완고하게 양심의 송사를 무마시켜 왔습니다. 다윗은 자기 몸에 큰 고통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영혼에도 비참하리만치 큰 고뇌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4절). 델리치(Delitsch)라는 성경학자는 “4절 끝에 사용된 (셀라)라는 말은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에게 잠시 쉴 것을 지시하는 표시로써 음악도 멈추게 되는데, 이는 각성된 양심과 상한 심령이 조화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지옥불의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라는 영적인 실제를 놀라운 통찰력으로 보았습니다. 각성된 양심은 자백할 때,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솔직하고 온전한 자백만이 즉각적인 죄사함과 용서를 낳습니다(5절).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죄를 용서하심에 대한 다윗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윗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도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6절). 이제 하나님과 화목케 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세가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다윗은 “은신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궁핍할 때마다 언제든지 피할 수 있는 안식의 피난처요, 안전한 은신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다윗은 주님을 “환난에서 자신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받는 환난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환난으로 인해 멸망하지 아니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은 자신을 “구원의 노래로 에우게 된”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자신을 죄에 대해 구원의 능력으로 두르심으로써, 그러한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러한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8절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고집스럽고 자기 의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로는 자갈과 고통스러운 환경의 굴레를 씌우시거나, 징계로써 다루실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만일 날마다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갈 길을 보이시며, 우리가 걷는 삶의 모든 여정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9-10절).
이 시편 32편에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노래하는 부분에서 또다시 3의 숫자가 나타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은 이제 다윗의 마음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표시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즐거워 할찌어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므로써 오는 기쁨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는 승리의 삶을 살므로써 승리의 환희를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편 32편은 죄사함의 결과인 행복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의 결과인 기쁨의 충만으로 마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