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존중’ 삼성재벌 ‘무노조’ 전략의 실제
: 삼성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시도의 역사1)
조돈문(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I. 들어가는 말: 삼성의 ‘인간존중’과 무노조 현상.
재벌그룹 삼성에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정상적 활동을 하는 노동조합을 찾을 수 없다. 왜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에는 노동조합이 없을까? 삼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노동조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까?
재벌그룹 삼성이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경영철학 핵심에는 ‘인간존중’이 있다. 삼성은 “삼성 경영철학의 최우선 순위는 ‘인간존중’” “삼성의 사회적 존재 이유이자 경영활동 방향을 결정짓는 경영철학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인간존중’에서 출발합니다”며 인간존중 경영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측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인간존중 경영철학은 “인간존중의 틀은 작게는 삼성이라는 배가 제대로 항해할 수 있도록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조직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존중이고 크게는 고객, 즉 인류 전체에 대한 존중입니다”로서 ‘조직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1).
삼성 SDI는 2000년 12월 28일 노동부로부터 “신노사문화 대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대기업부문 대통령상으로서 최고의 상이었다. 노동부 관계자에 따르면열린경영, 지식근로자 육성, 공정한 성과보상, 작업장 혁신, 노사 관계 개선, 종업원 만족제고 등을 심사한 결과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노사공동체를 형성한 기업으로 이들 6개 기업을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2). 삼성SDI는 2003년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에서 “상장제조업체 249개 중 대상 및 전기전자 업종 최우수기업”으로 경제정의기업상을 수상했다. 경실련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기업을 선정하는데 있어 7대 평가항목인 ①기업활동의 건전성 ②기업활동의 공정성 ③사회봉사 기여도 ④소비자보호만족도 ⑤환경보호만족도 ⑥종업원만족도 ⑦경제발전기여도”(경실련 2003)였으며, 삼성SDI는 이러한 평가기준에 있어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삼성SDI가 신노사문화 대상과 경제정의기업상 등 노사관계와 사회정의 실현에 있어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정부와 유력 시민단체에 의해 평가받는 것은 ‘인간존중’을 경영철학의 핵심으로 천명한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로서 이상할 것은 없다. 삼성SDI는 스스로도 기업의 사회적책임성 수행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기업이다. 삼성SDI는 2003년 국내 최초로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삼성SDI는 2003년 보고서에서 “‘GRI 2002 지속가능보고서 가이드라인’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삼성SDI 2003: 2)고 밝히고 있고, 2004년 보고서에서도 “국내최초로 2003년도에 GRI 가이드라인에 근거하여 지속가능성보고서를 자발적으로 발행하였습니다”(삼성SDI 2004: 75)며 선도적 지위에 대한 자부심을 표명했다. 삼성SDI는 “경제, 환경, 사회의 triple bottom line에서 지속가능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삼성SDI 2004: 2)며 사회적 책임성의 핵심인 “상호신뢰하고 협력하는 생산적인 노사관계”(삼성SDI 2004: 65)를 실천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존중’ 경영철학의 기치 아래 신노사문화 대상과 경제정의기업상을 수상하고 기업의 사회적책임성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재벌그룹 삼성계열사들에 노동조합이 없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처럼 보여진다. 그것이 삼성측의 설명이기도 하다. 뷰라워이(Burawoy 1985)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전제적 지배와 헤게모니적 지배로 양분화하여, 전자를 강제에 의한 지배, 후자를 노동자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지배로 정의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동원하는데 사용되는 자원은 통상 조직론에서 언급되는 물리적 강제력, 물질적 보상, 도덕적 동의이다(Etzioni??). 이러한 이론적 틀에 비추어 보면 삼성의 무노조상황은 노동자들이 삼성 자본의 지배에 도덕적으로 동의하여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 결성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재벌그룹 삼성계열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인가?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없었다면 삼성의 무노조상황은 노동자들의 자발적 선택에 기초한 헤게모니적 지배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있었다면, 그리고 진정성이 있었다면 삼성의 무노조상황은 노동자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제된 선택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있었다면, 왜 실패했는가? 어떻게 재벌그룹 삼성은 무노조 전략을 관철시키고 있는가, 얼마나 ‘인간존중’ 경영철학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관철시키고 있는가? 이른바 민주화가 이루어진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시기별로 편차는 없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변을 얻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인간존중’ 경영철학과 무노조 상황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II.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노동조합 현황과 조직 시도 역사
1. 삼성그룹 노동조합 조직 현황.
현재 삼성그룹 계열사들 가운데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곳은 삼성그룹이 인수하기 전에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던 삼성생명(1989 동방생명 인수, 민주노총 소속), 삼성증권(1992 인수, 민주노총 소속), 삼성정밀화학(1994 한국비료 인수, 한국노총 소속)으로서 삼성그룹 인수 이후 노동조합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지만 노동조합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3). 대부분의 그 외에도 삼성화재, 삼성중공업, 호텔신라, 에스원 등에도 노동조합이 신고되어 있으나 조합원 규모가 작은 곳은 3명, 큰 곳도 40명 이내로서 노동조합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주로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조합 설립 신고 직전에 노조설립을 저지하기 위해 신고된 유령노조4)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삼성계열사들은 유령노조마저 신고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노동조합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에도 <표 1>처럼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많았지만 노동조합 설립에 성공하여 정상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경우는 전무하다. 거의 모든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은 회사측과 공권력의 탄압 혹은 회류로 노동조합 설립에 실패했거나 설립된 다음 와해되었거나, 회사측이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악용하여 정부당국의 협조로 어용노조를 선제등록함으로써 노동조합 설립 신고가 저지되며 노동조합 조직화가 포기되는 것으로 끝났다.
<표 1> 삼성계열사 노동조합 설립 시도 및 설립 신고 연표.
회사명 |
노조설립일 |
비고 |
삼성생명 |
62.12.31 |
인수전 노조존재(동방생명 1989 상호변경) |
삼성증권 |
83.6.13 |
인수(92)전 노조존재 |
삼성화재 |
87.11.30 |
유령노조(안국화재 1993 상호변경) |
중앙일보 |
87.12.1 |
자체적 결성 |
삼성중공업 |
88.6.3 |
유령노조(96.6.28 대법원 판결)/ 중장비 1998 볼보 양도/ 발전설비 1999 한국중공업 양도 |
삼성지게차 |
88.11.26 |
11.26(설립신고) 6.7결성; 유령노조(1998 클라크에 양도) |
삼성정밀화학 |
|
인수(94)전 노조 존재(한국비료) |
창원 삼성중공업 |
1997 |
유령노조 선제 등록 |
삼성SDI |
1997-2001 |
수차에 걸쳐 노조결성시도 탄압으로 실패: 수원(97, 99.12, 00.10) 울산(98.10, 01.12) |
신세계백화점 |
1998.10.9 |
신세계 노조 결성 |
에스원 |
00.5.27 |
유령노조(선제등록) |
삼성코닝 |
00.10 |
아텍엔지니어링 사내기업노동자 설립실패(유령노조 선제등록) |
에스원 |
01.04 |
노조설립 무산(유령노조 존재) |
삼성그룹노동조합 |
01.08 |
초기업단위, 01.09 대구시 직권해산시킴 |
삼성캐피탈 |
01.08 |
회사탄압 무산 |
아르네삼성(광주소재) |
2002 |
탄압으로 사직 |
호텔신라 |
2003.3.24 |
지도부 행방불명, 유령노조 선제등록 |
삼성일반노동조합 |
2003.2.6 |
삼성일반노동조합 건설 설립필증 교부, 8.12 인천시청 직권취소(근거: 해고자 노조 가입 규약개정 불법) |
삼성프라자(경기분당) |
2003.9.5 |
노조 설립필증 교부(이후 탄압으로 노조설립 자진 취하) |
한국항공우주산업(경남사천) |
2003.9.25 |
노조 설립, 조합원 1000여명 가입(삼성재벌이 대주주) |
삼성전자 |
2004.5.25 |
노조설립신고서 접수, 몇일 후 노조설립 취소함 |
금속노조 가입 |
2004.8.9 |
수원 삼성전자 홍두하, 삼성 SDI 강재민 등 총 6명 ⇒ 2004.8.16-9.9 사이에 모두 탈퇴함(협박, 금품제공); |
* 자료: 김기원(1996), 노민영(1995), 김성환․이정미(2002), 삼성일반노조
(http://www.samsunggroupunion.org/), 삼성해복투(http://www.outsamsung.net/) 등.
2. 삼성계열사 노동조합 결성 시도: 시기 구분.
삼성그룹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투쟁은 시기별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7년 말 경제위기 발발을 분기점으로 하여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87년 이전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이며, 두 번째 시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노동자들이 보다 조직적으로 추진하지만 체계적 준비 없이 투쟁을 전개하는 시기이고, 세 번째 시기는 1997년 말 경제위기 이후 삼성그룹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압박 하에서 연대의 틀을 갖추며 전국적인 구심점을 형성하여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제1기, 1987 노동자 대투쟁 이전>
삼성그룹 계열사들에서 삼성자본에 맞서 투쟁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는 1950년대 제일제당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에서부터 시작되어, 1960년 6월 제일모직 대구공장, 1973년과 1977년 제일제당 김포공장에서 전개된 바 있다(삼성해복투 2000). 이러한 초기의 산발적이고 간헐적으로 전개되었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은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계열사들에서 동원된 구사대와 조직폭력배들의 폭력행위와 회사측의 관련자 해고조치들로 노동조합은 와해되었다.
<제2기, 1987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보다 조직적으로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시기부터였다. 19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물결 속에서 삼성그룹 노동자들도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삼성중공업과 삼성전관(현 삼성SDI)을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5).
삼성중공업의 경우 1987년 8월 노동자 대투쟁 물결이 울산과 창원을 중심으로한 남해안 산업벨트 지역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창원2공장 노동자들은 구사대 폭력에 맞서며 노동조합 설립총회를 개최하고 창원시청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제출하였으나, 이미 하루 전날 다른 노동조합 설립신고서가 접수되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는 반려되었다. 이듬해인 1988년 4월 거제조선소 노동자들도 노동조합 결성 집회를 개최하고 거제군청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접수하려 했으나 한발 앞서 회사측의 노동조합 설립신고서가 접수되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설립 신고는 거부되었다. 당시 노사협의회 위원이었던 최석철이 회사측에서 제출한 노동조합 설립신고서의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되어 있었으나, 당사자는 서류를 만들지도 않았고, 노동조합 설립신고서가 접수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한국노총 금속연맹의 협조를 받아 다시 노동조합 설립 시도를 했으나, 역시 하루 먼저 도청과 시청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서가 접수되어 있어,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또다시 실패하게 되었다. 이처럼 1987년 8월부터 시작하여 1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 시도는 회사측의 한발 앞선 유령노조 설립신고서 접수로 좌절되었으며, 이처럼 회사측의 노조설립 저지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복수노조를 금지하는 노동조합법 규정뿐만 아니라 행정관청의 협조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93년 10월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으로 당선된 이재용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회사측은 폭행과 감금을 통해 전국노동자대회 참여 등 외부세력과의 연대를 차단하고 금전적 보상을 통해 회유하려했으나 실패하고, 수원 발령을 거부하자 이재용을 1997년 4월 징계해고시켰다.
삼성전관 노동자들 역시 노동자 대투쟁 물결 속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삼성전관 노동자들은 부산사업장과 수원사업장에서 각각 1987년 8월 노동조합 설립을 위한 투쟁을 시도하였다. 수원사업장 노동자들의 경우 사전에 발각되어 파업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부산사업장 노동자들의 경우 열흘 정도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부산사업장의 경우 핵심 인물들은 강제로 사직당하고 노사협의회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타협하면서 파업투쟁은 끝났다. 한편 수원사업장의 경우 1989년 초 노조결성을 위한 소모임 활동이 추진되었으나 역시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고, 다시 1991년 4월 노동조합 설립 등을 요구하며 3일동안 파업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노사협의회 운영방식 개선 등 요구조건들을 관철시키는 대신 노동조합 결성은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업투쟁 이후 노사협의회 근로자측 위원장 직선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고, 핵심 활동가들은 징계조치 당하거나 구속되며 조직력은 와해되었다.
III. 삼성그룹 계열사 노동조합 결성 시도 및 결과.
경제위기 이후 삼성그룹 계열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경제위기와 함께 추진되기 시작한 구조조정 조치로 인하여 노동자들은 평생직장 개념을 잃고 삼성측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한편 이해관계의 적대성을 깨닫게 되어 더 이상 삼성측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의 불만과 노동조합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연대의 망과 전국적 투쟁의 구심점이 형성되면서 과거의 노동조합 조직화 시도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한단계 더 체계화된 노동자들의 조직화 시도도 거의 모두 실패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제3기를 중심으로 재벌그룹 삼성계열사 네 곳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신노사문화 대상과 경제정의기업상을 수상한 삼성SDI의 수원사업장과 부산사업장, 재벌그룹 삼성의 간판 기업인 삼성전자의 수원사업장, 그리고 재벌그룹 삼성계열사들의 노동조합 결성 저지를 위해 자주 동원되는 삼성 에스원의 노동조합 결성시도를 분석한다.
1. 삼성SDI 부산사업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
삼성SDI 부산사업장은 1996년부터 이미 경영혁신과 자동화 등으로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으며, 경제위기가 발발하면서 구조조정은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98년 장기근속자를 중심으로 희망퇴직을 강제하여 700-800명을 감축하였고 상여금 감액 및 체불, 각종 복지혜택 축소 등을 실시하였다. 1997년과 1998년 노사협의회 위원으로 당선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송수근은 동료 노사협의회 위원 14명과 함께 3회에 걸쳐 외출증을 끊어 사내기업에 대한 조사를 하는 한편 민주파 노사협의회 위원 7명과 함께 서울본사로 가서 회사측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항의하였다. 송수근과 함께 움직였던 노사위원들은 모두 정상근무처리되었지만, 송수근만은 무단결근, 무단외출을 사유로 1998년 9월 24일자로 징계해고되었다6). 송수근의 경우, 회사측은 “평생 노사위원 하는 것도 아닌데, 이제 사원들을 위해 할만큼 했다... 이제 모르는 척 좀 해주라. 관리자 자리하나 줄테니 나를 좀 도와달라” “회사가 추진하는 제도를 계속 반대하면 가만두지 않는다”(송수근 2004; 삼성경기공대위 2005)는 등 회유와 협박을 계속하였으나 구조조정 반대의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발견하자 동료 노사위원들은 빼고 송수근만 해고조치한 것이었다.
송수근은 민주노총 등과 연대하여 10월 30일 회사앞에서 부당해고 조치에 대한 항의집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 집회 전날 회사 직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동해안으로 끌려가게 되어 집회에 참여할 수 없었다7). 이후에도 회사측은 송수근의 회사 정문 앞 1인 시위를 저지․방해하기 위해 폭력과 소음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설립의 뜻을 갖고 송수근과 교류하던 노동자들의 경우, 윤양근은 수원으로 전보배치된 다음 말레이시아로 발령났고, 이만신은 중국 천진으로 발령났는데 2년 정도 아예 업무를 주지않기도 했으며, 김일경과 오충언은 3개월간 중국 출장, 장호래는 감금-폭행 뒤 한달간 말레이시아 강제출장을 당했으며, 집단폭행 당하는 사례들도 발생하였다.
2000년 1월 5일 노사협의회 위원 4명이 체불임금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울산 지방노동사무소를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회사측 관리자들과 세콤(현 에스원) 등에 의해 강제감금되어 있다가 8일 뒤에 풀려난 일도 있었다. 한편, 1998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삼성SDI 출신 노동자 2500여명이 사내하청기업 노동자로 전환되었고, 이들은 삼성의 정규직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보장을 약속받았었다. 하지만 동일임금 보장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사내기업 노동자 11명은 2000년 3월 11일과 21일 연이어 모임을 갖고 노동조합 설립에 관한 의견을 모아가자 삼성SDI는 노무팀을 동원하고 사내기업 사장들에게 이 모임을 해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내기업 사장과 간부들은 류철규, 명승호 등 사내기업 노동자들을 “송수근을 만나지 마라” “사내기업 모임에 참석하지 마라”(삼성경기공대위 2005)고 협박하며 납치, 감금, 폭력을 행사하여 사직서를 쓰게 하였다.
2001년 12월 22일 저녁 삼성SDI 부산사업장 반장 최영주는 회사측 김재윤반장, 정승용부장과 이창건노무과장에 의해 납치되었다8). 최영주는 삼성SDI의 강제적 구조조정과 노동자탄압을 규탄하고 노동조합 건설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삼성SDI 사내와 노동자 밀집지역 아파트단지에 배포한 바 있고, 그로 인해 회사측에 의해 미행, 감시당하고 있던 터였다. 최영주는 납치팀들로부터 도주하려다 절벽에서 떨어져 양쪽 발목과 허리에 전치4주의 큰 부상을 입었으나 이창건노무과장 등은 병원치료를 허용하지 않고 최영주를 밀양, 중산리 등지로 끌고 다녔다. 이들은 “죽인다” “생매장시킨다” “확 끌어묻어버린다”(최영주 2001)고 협박하며 홍보물 배포와 관련된 동료 노동자들의 이름을 추궁하였다. 결국 최영주는 24일날 회사측이 요구하는 <표 2>와 같은 내용의 서약서를 써주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표 2> 최영주가 서명한 서약서 내용.
일자: 12월 24일
사번: 8703956
성명: 최영주
상기 본인은 유인물을 작성하고, 배포한 것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고 노사문제에 대해서도 가담하지 않고 문제인물들과도 만나지 않겠습니다.
문제인물 장호래, 이광형, 제해천 등.
위 사실을 어길 시에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
* 자료: 삼성일반노동조합(2004a: 55)
2003년 6월 5일 삼성SDI 부산사업장에서 노사협의회 노동자위원 선거가 있었다. 노사협의회 위원 32명 모두 참석하여 실시된 제15대 노사협의회 위원장 선거에서 김영관이 18표를 얻어 13표를 얻는데 그친 박문일 현 위원장을 이기고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삼성SDI언양공장분신기도진상조사단(2003: 29-37)에 따르면, 삼성SDI측은 반장, 직장, 팀장, 파트장에서부터 임원에 이르기까지 공식 위계조직을 총동원하여 선거에 개입하여 인사고과에서의 배려를 들먹이며 강성 후보를 찍지 말고 회사측 후보를 찍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예컨대, 제1선거구의 경우 8선의 박태권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모를 밀어 당선시켰으며, 그 외에도 최모, 또다른 최모, 조모, 이모 등을 노사협의회 위원으로 당선시켰다고 한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낙선한 박문일 위원장을 포함하여 15명이 식사를 하던 도중 박용민과장이 노사협의회 선거에 대한 회사측의 개입을 비판하며 “회사개입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면 안된다... 본인이 앞장서서 죽으러 가는데 한사람만 따라와라”고 한뒤 회사로 향했다. 박용민은 함께 따라나선 양재수위원, 임경완위원, 문복수위원 등과 함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산 다음 삼성SDI 공장 본관 총무팀 관리동으로 돌진하여 휘발유를 뿌리고 회사의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연설을 한 뒤 분신을 시도했다. 울산지방노동사무소(2003a, 2003b, 2003c, 2003d)는 분신사건 당사자들은 재판중이거나 요양중이라는 이유로 면담하지 않고, 6월 18일 박문일 노사협의회 위원장을 면담하여 “회사에서 제15대 노사협의회 위원장 선거에 개입하였다는 단정적인 근거는 없으나 눈에 보이지 않게 선거에 개입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한다는 진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금번 선거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진술에 기초하여 삼성SDI측에서 노사협의회 위원장 선거에 개입 또는 방해한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결국, 같은 해 11월 8일 분신기도 관련 당사자들 4명이 징계해고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9).
2. 삼성SDI 수원사업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
삼성SDI(구 삼성전관) 수원사업장은 이미 1985년 말부터 노조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조직한 바 있고, 1987년 8월, 1989년 초, 1991년 4월 등 수차에 걸쳐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는 소모임을 조직하거나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파업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1997년 말 외채위기와 뒤이은 경제위기 속에서 삼성SDI 수원사업장도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9년 들어 회사측은 일부 공정들을 분사조치하고 나이 많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퇴직시키며 부분적으로 비정규직을 신규채용하여 대체하는 방식으로 본격적인 인원감축을 시작했다(김용구 2000: 1; 구영식 2000). 회사측은 한편으로는 “경쟁력 제고를 위한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인원감축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사협의회의 합의 하에 연봉제를 도입하였고 “(평의원들이) 연봉제문제로 사원대표들을 만나 대화하는 자리까지 간부들이 같이 참석하여 명단을 check하고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기록, 관리, 보고하며 심지어 그해(99년) 고과성적까지 불이익이 가해졌다”(김용구 2000: 1).
수원사업장 노동자들 가운데 회사측의 구조조정 공세와 노사협의회의 무기력함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김용구, 장갑수, 최윤국, 고영선, 박경렬, 김갑수(당시 천안사업장 근무) 등 10명은 1999년 11월 21일과 12월 2일 모임을 갖고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를 하고 노사협의회 평의원이었던 최윤국, 고영선이 일본연수를 마치고 귀국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12월 11일의 다음날인 12월 12일(일요일) 노동조합 설립총회를 갖고 13일 노조설립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다10). 이들은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수원지구협의회 이선희사무차장 등의 협조를 받으며 노동조합 설립을 위한 구체적 준비를 하였다(김용구 2000: 3-4; 구영식 2000). 하지만 회사측이 창립총회 이전에 노동조합 설립 시도를 발각하고 강제납치, 해외억류 등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장갑수의 경우 12월 9일 회사간부들이 차량에 태우고 강제로 양평, 울진, 동해, 설악산 등지로 데리고 다니며 노조설립 포기를 종용하고, 이에 응하지 않자 수원사업장 복귀는 불가능하니 해외사업장 전보 혹은 희망퇴직 중 택일할 것을 강요했다11). 결국 장갑수는 7일간 강제억류당해 있던 설악파크호텔에서 12월 20일 희망퇴직서에 서명했고, 그 직후 인사부장이 희망퇴직금 명목으로 현금 6천만원을 받고, 퇴직처리절차가 완료된 24일에야 수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강제납치, 감금,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다 장갑수처럼 노조포기 댓가로 거액을 받고 사직하였다.
한편, 고영선과 최윤국은 노사협의회 평의원 자격으로 사측노사담당자 등과 함께 28명의 일본연수단의 일원으로 연수일정을 마치고 귀국예정일이었던 12월 11일 회사측은 고영선과 최윤국에게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동료 연수단원들로부터 분리하여 강제로 일본에 체류토록 했다. 당일 오후 “국내로부터 권영만상무, 김광하이사(부산사업장)가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합류”(삼성일반노동조합 2004a: 22)하여 신한쿄호텔에 강제 투숙시킨 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원직복직은 절대 안된다. 나는 전권을 위임받아 왔다.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줄테니 희망퇴직을 하든지 아니면 해외사업장으로 전배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사발령을 내서 해고시키겠다. 이 문제가 결론나지 않으면 귀국 못한다. 나랑 여기서 같이 살아야 한다” “희망퇴직을 하면 2년치의 위로금을 주겠다”(구영식: 2000)며 희망퇴직 혹은 해외사업장 전배를 강요했다. 이후에도 중국 심천사업장 김재욱이사, 본사 이동원 인사부장, 도쿄 주재원 등이 합류하여 최윤국과 고영선을 서로 분리하여 회유와 협박을 지속하였고, 마침내 최윤국은 12월 18일 희망퇴직서와 각서에 서명하고 귀국했고, 고영선도 다음날 만취상태에서 희망퇴직서와 각서에 서명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최윤국과 고영선은 12월 20일 각각 8천만원씩을 희망퇴직금 명목으로 수령했다. 이렇게 노조결성을 추진했던 사람들 가운데 5명은 6천만원에서 8천만원까지를 받아 퇴사했고 김용구와 박경렬 등 퇴직을 끝까지 거부한 나머니 5명은 이후 해외공장으로 장기출장 혹은 파견 근무하게 되어 현장 노동자들로부터 격리되었다12).
삼성SDI 수원사업장 노동자들은 회사측의 강도 높은 감시와 통제 하에서도 수 차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한 바 있어, 회사측은 노동조합 결성 시도를 사전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일상적 감시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상적 감시활동의 극치는 핸드폰을 이용한 불법위치추적 행위였다13). 삼성노동자감시공동대책위원회(2004: 6-9, 45-52)와 피해자들(김용구 외 2004: 4-7, 17-19)에 따르면, 삼성측은 사망한 사람과 퇴사한 노동자 등 4명의 핸드폰(tracer: 위치추적에 사용되는 핸드폰)과 위치추적 대상자들 20여 명의 핸드폰(target: 위치추적 대상이 되는 핸드폰)을 불법복제한 다음 위치추적 대상자들의 명의로 ‘친구찾기’ 서비스에 가입하여 2003년 7월부터 2004년 6월까지 1년 동안 위치추적을 해왔다고 한다. 불법위치추적의 피해자들은 김용구, 박보영, 강재민 등 삼성SDI 수원사업장 현직 노동자 3명, 박경렬, 고영선 등 수원사업장 해고자 2명, 송수근, 김학근, 이신혜 등 부산사업장 해고자 3명,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 등 삼성SDI 수원사업장에서 노동조합 결성 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 있거나 노동조합 결성 작업을 지원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삼성측이 불법위치추적을 주도했으며 노동조합 결성 저지를 위한 것이라고 동 공대위와 피해자들은 단정하고 있다. 위치추적은 주로 퇴근시간 이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노동자들 사이의 모임이 있는 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위치추적 핸드폰의 발신 기지국이 대부분 삼성SDI 수원사업장이 위치한 수원시 영통구라는 점에서 불법위치추적을 한 범죄자가 삼성SDI 직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삼성SDI 사업장이 위치한 수원과 부산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위치추적이 이루어졌고, 피해자들이 삼성SDI 수원사업장과 부산사업장에 근무하고 있거나 퇴사한 노동자라는 점에서 삼성SDI가 전국적 수준에서 노동조합 결성 저지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여 체계적으로 불법위치추적을 하며 문제 노동자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법위치추적의 피해자 6명은 2004년 7월 13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7개 인권-사회단체들과 함께 불법위치추적 사건을 폭로하고 고소장을 접수하였고, 추가 피해자들의 피해사실이 드러나면서 22일 다시 피해자 6명이 2차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접수하였다. 8월에는 김용구 외 10인이 수원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삼성SDI 수원사업장 노동자 4명 가운데 3명은 “삼성측의 심리적인 압박(작업장 1m 내의 감시, 퇴근후 미행, 가족 접촉 등)에 못 견뎌 고소취하”하고 강재민만 고소취하를 거부하였다(삼성노동자감시공동대책위원회 2004: 59).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에 따르면 불법위치추적 피해자들에 대한 ‘1m 그림자 감시’란 “현장에서 쉬는 시간에 노동자가 화장실․휴게실․식당 등 어디를 가든 1m 안에서 노동자를 밀착감시를 하는 것이며, 심지어 퇴근 후에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있다”고 한다(오마이뉴스 2004.8.17).
불법위치추적 사건은 MBC 시가매거진 2580에서 2004년 7월 11일과 25일 두 차례에 걸쳐 “유령의 ‘친구찾기’”라는 제목으로 불법위치추적 사건을 취재하여 보도하면서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되게 되었다. 강재민은 삼성SD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취하하기를 거부하며 MBC 취재팀의 인터뷰에 응한 것이 알려지면서 회사측 간부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회유와 협박, 동료 노동자들로부터의 ‘왕따’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여기에는 김광하 공장장, 정기회 소사장, 그룹장인 이장대 차장, 하영철 부장, 윤희석 과장, 이대영 대리, 이종길 반장 등 수원사업장의 다양한 직위자들이 동원되었다.
“회사 사정이 시끄러우니 삼성 해복투 해고자 김갑수, 송수근과의 만남을 자제해 달라”
“삼성의 무노조경영에 반대하는 사람이니 만나지 말라” “방송 나가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이 새끼 말로 해서 안되겠네. 너 패죽이고 나도 회사 때려친다”
“회사 다니고 싶으면 똑바로 해라... 그따위로 하면 너 칼침 맞는다. 야, 너 목숨이 몇 개나 되냐”
“30년 회사생활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은혜 잊지 않겠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강대리 뒷일 도와주겠다”
“너희들은 왜 공장안의 사정을 김성환에게 보고하느냐... 너희들이 민주노총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민주노총에서, 김칠준 변호사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다 그 사람들 자기욕심 채우기 위하여 너를 이용하는 거다”
“씨발놈 할 얘기 있어. 내가 전화할테니까 나와... 나와, 이 씨발놈아”
“용기는 가상하지만 고소취하 안 하면 내가 상당히 곤혹스럽다”
“세태에 묻어가라. 양심 없이 세상사는 놈 99%야. 넌 왜 1%로 가냐”
“우리가 (몇몇 노동자들에게는) 돈을 준 전력이 있어... 뭘 힘겹게 하나. 어려운 싸움 아니냐. 일단 이 내부에서 노조는 실패걸랑” (강재민 2004b: 11-20; 매일노동뉴스 2004.10.4).
이러한 회사측 협박과 회유의 요점은 공장장이 한 세가지 부탁에서 확인된다: “1. 고소취하, 2. 노동조합 하지 말라, 3. 법정에서 회사에 유리한 증언”(강재민 2004b: 15-16).
불법위치추적 사건에 대한 서울중앙지검 고소 건은 “공소권 없음” “기소중지”로 끝났고, 단병호의원의 삼성SDI 김순택대표에 대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채택 요청은 2004년 9월 24일 열우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강재민이 불법위치추적 고소취하를 거부하고 노동조합 결성 추진 및 금속노조 가입과 관련하여 회사측은 2004년 8월 4일부터 봉착반에서 봉입반으로, 9월 20일 다시 TFT로 전환배치함으로써 인사상의 불이익을 준 것에 대해 강재민은 10월 4일 부당전보 및 부당노동행위로 노동부 수원지방노동사무소에 고소하였다(노동부 2004, 2005). 노동부는 12월 22일 수원지검에 수사 지휘를 건의했으나 검찰은 피의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혐의없음’으로 결론내고 불기소 처분하였다(수원지방검찰청 2005). 수원지방노동사무소 관계자는 “부당노동행위와 부당전보를 한 것으로 보기에는 법적 구성요건이 충분치 않다고 검찰이 지휘하는 바람에 삼성SDI 대표이사에 대해 결국 혐의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한겨레 2005.4.12)고 밝혀 검찰의 지휘로 인하여 기소를 포기했음을 시인하였다.
3.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
삼성SDI는 수원사업장과 부산사업장을 중심으로 수차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이 있었으나, 삼성전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매우 조용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직후 삼성전자 전체 수준에서 고용규모는 1만에서 1만 5천명 정도 감축되었다. 회사측은 1998년 적자가 날 것이라며 머지않아 정리해고가 시작되면 위로금도 없어진다며 1년분치 위로금을 받고 명예퇴직을 선택하라고 압박하였다(안진 2000).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조직적 반발 없이 명예퇴직 압박에 밀려 상당수가 사직했고 삼성전자는 1998년 흑자를 냄으로써 “적자” 선전은 명예퇴직을 유도하기 위한 악선전이었음이 드러났다.
2004년 들어 삼성전자에 구조조정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중장기계획으로 수원사업장을 첨단사업장으로 재편하기 위해 백색가전 부분을 광주공장과 해외공장들로 이전하는 작업을 준비하여 왔다. 2004년초부터 수원단지 내에 IT산업 연구단지를 건설하는 계획은 구체화되어 3월에는 전자레인지를 해외로 이전하였고 5월에는 세탁기, 에어콘 부분을 광주공장으로 이전하기 위해 해당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직과 명예퇴직을 강요했다. 세탁기부문 150여 명의 노동자들은 퇴사후 광주이전이라는 회사측 정리해고안에 반발하며 4월 29일 12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광주이전 및 정리해고 반대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김창국, 대변인 겸 부위원장에 김태식을 임명했다. 비대위는 회사측과 구조조정 관련 협상을 전개하여 5월 중순 회사측과 보상과 고용승계 문제 등에 대해 잠정합의를 이루었고, 노동자 ‘전체인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비대위원장이 서명했다(김성환 2005a; 김한영 2004).
세탁기부문 노동자들은 비대위가 회사측에 굴복했다며 협상결과와 처리방식에 반발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는 모임들이 조직되게 되었다. 세탁기 부문 이모, 배모, 최모 등 노동자 5명은 민주노동당 장안구의 지원으로 5월 23일 경기대학교에서 노동조합 결성 준비모임을 갖고 27일쯤 설립신고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회사측에서 당사자들을 집에서 포위하거나 중도에 납치 혹은 저지하여 23일 노조결성 준비모임은 무산되었다(김한영 2004; 인천일보 2004.5.24). 한편 세탁기 자동화팀의 오영길과 김규태는 애니스 노동조합 오세현위원장과 함께 5월 25일 오영길 위원장, 김규태 부위원장 명의로 삼성전자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수원시청 민원실에 접수시켰다. 하지만 당일 저녁부터 오영길과 김규태는 인사팀 김준선 보안과장, 김선진 대리, 김진호 인사부장, 성준석 차장, 유의민 차장 등에 의해 회사 안팎에서 감시와 협박을 당하게 되었다. 오영길은 5월 25일 밤 아파트에서 회유․협박을 당하다가 다음날 0시 30분경 회사로 끌려가 인사팀 회의실에 5시까지 감금된 뒤 노조설립 취하서에 사인한 뒤 풀려났다. 한편, 김규태는 5월 27일 회의실로 끌려가서 협박과 심문을 당한 끝에 성준석 차장으로부터 “지급약속 2900만 약속함, 인사그룹 성준석” 각서를 받고 퇴직원에 서명을 하였고, 인사팀에 끌려 수원시청으로 가서 노조설립신고서를 받아서 취소하였다(김성환 2005a; 김규태 2004; 김규태․오영길 2004).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이 회사에 노출되어 모두 실패하자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은 신규노조를 결성하여 또다른 희생자를 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금속노조에 가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홍두하 외 2인은 삼성SDI 수원사업장 강재민 외 3인 등과 함께 2004년 8월 9일 금속노조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삼성측의 회유와 협박을 못이겨 8월 16일부터 9월 9일 사이에 강재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금속노조를 탈퇴했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탈퇴한 삼성전자 홍두하의 경우, 9월 9일 성준석 인사차장이 “(노조탈퇴만 하면) 불리하지 않게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고 이미 다른 4명이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인도 노조탈퇴만 하면 회사는 계속 다닐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노조탈퇴서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성준석 차장은 “삼성의 경영이념에 배치되는 사고로 노조에 가입했던 사람은 삼성에 다닐 수 없다”며 퇴직원도 쓸 것을 강요하며 구조조정과 동일한 수준의 명예퇴직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김성환 2005a).
삼성전자측은 9월 9일 성준석차장 명의로 홍두하에게 노조탈퇴를 조건으로 “퇴직원 접수 후 TOTAL 2.5억원에 대한 지급을 약속함. 단 세금 포함 금액. 인사그룹 성준석. 2004.9.9”(<그림 1>)라는 금품제공하겠다는 지급확인서를 작성하여 주었다. 홍두하의 설명에 따르면, “위 금액 중 1억 1500만원은 정상적인 퇴직시에도 지급되는 금액이고(중간정산 후 남은 퇴직금 3000만원 + 명예퇴직금 8500만원) 나머지 1억 3500만원은 노조탈퇴를 조건으로 지급한 금액”이다(홍두하 2004, 2005; 단병호 2005a, 2005b; 매일노동뉴스 2005.1.11). 성차장은 위 금액을 민주노총 사람들 접촉 등 홍두하의 상황을 봐가며 3개월에 걸쳐 분할 지급하겠다고 했으며, 삼성전자는 이후 3개월간에 걸쳐 위 금액을 모두 홍두하에게 지급하였다14).
<그림 1>
* 자료: 매일노동뉴스(2004.12.7).
홍두하는 퇴직 후 2005년 1월 11일 단병호의원,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과 함께 삼성전자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 날 금속노조 김창한 위원장과 함께 이건희 대표이사와 회사 관계자 5명을 대상으로 부당노동행위, 감금, 강요죄로 수원지방노동사무소에 고소하였다(김창한․홍두하 2005a, 2005b). 삼성전자 측은 대표이사 윤종용을 채권자로 하여 홍두하에 대해 부동산 가압류 신청서를 제출하여 홍두하 소유의 수원시 권선구 소재 아파트를 가압류토록 하였다. 윤종용(2005)은 홍두하가 서명한 각서를 근거로 제시하였으며, 그 각서는 노조결성 관련하여 삼성계열사를 퇴사하는 사원들이 노조탈퇴 혹은 퇴직원 서명시 작성하는 것으로서 각서는 <표 3>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홍두하는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수원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 3> 홍두하가 서명한 각서(삼성전자주식회사 양식).
각 서
소속:
성명:
주민번호:
상기 본인은 금번 퇴직이 본인의 자의에 의한 퇴직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본 퇴직에 관련되는 일체의 경과나 수령금전에 대해 보안(비밀)을 유지할 것을 서약하며, 향후 회사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각종 Site 등재(회사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시) 및 본 퇴직과 관련된 민, 형사상 소송이나 어떠한 형태의 이의를 제기할 경우에는 수령금전 일체를 반납토록 하겠습니다.
2004년 *월 *일
위 본인 : (인)
주민번호:
주소 :
삼성전자주식회사 귀중 |
* 자료: 삼성전자주식회사(2004).
4. 삼성 에스원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
삼성 에스원(구 세콤)은 삼성그룹 계열사로서 주로 경비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이지만 삼성 계열사들에서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있을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자주 동원되어 왔다. 이러한 에스원 내에서도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1999년 부산에서도 에스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설립 허가증까지 받은 적이 있으나, 회사와 협상하여 2-3억원을 받고 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00년 5월의 서울 에스원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돈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2000년 5월 24일 삼성 에스원 노동자 5명은 민주노총 공공연맹과 삼성해복투(삼성그룹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함께 서울 중구청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접수시켰다15). 경제위기 속에서 삼성계열사들도 구조조정을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삼성자동차 임원들을 포함한 다수의 타 계열사 임직원들이 에스원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에스원은 부채 없이 1천억원의 현금예금을 갖고 있을만큼 재정적 어려움은 없었으나 타 계열사들의 임직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에스원 직원들을 구조조정하기 시작했다. 에스원에서 적어도 세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이 있었는데, 매번 희망퇴직 대상자 명단이 하달되었다는 점에서 강제해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왜곡된 방식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에스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한 것이다.
중구청은 설립신고 다음날 민주노총에 복수노조가 아님을 확인해 주고 27일 설립필증을 발부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27일 회사측의 노동조합 설립신고서가 민주파 노동자들의 신고서보다 20분 먼저 강남구청에 접수되었었다며 회사측에서 접수한 신고서에 대해 노동조합 설립필증을 발급하였다. 결국,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따라 중구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했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설립필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중구청 관계자는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큰 일이어서 문제가 안 생겼으면 좋겠다. 빨리 빠지고 싶다. 삼성은 대단히 무서운 조직이다. 엄청난 힘이 동원된 것 같다. 물론 증거는 없다. 누군가 양심선언을 하지 않으면 밝힐 수 없다”(구영식 2000). 26일날 중구청이 삼성 에스원에 신고된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해 주었지만, 삼성측의 개입과 행정부 권력의 야합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삼성 에스원측은 도리어 민주노조파들이 “돈을 요구하려고 노조를 만들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전립선염으로 치료받은 민주노조파 노동자에 대해 “문란한 성생활”로 악선전을 함으로써 회사측의 유령노조 등록으로부터 관심을 벗어나게 하는 한편 노동조합 결성 시도의 정당성을 훼손하고자 하였다.
2001년 4월 6일 대구경북지역 에스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대구 동구청에 제출했지만, 동구청은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들어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반려했고, 해당 노동자들은 징계해고를 당한 일이 있었다(김성환․이정미 2002: 65-66). 유령노조의 존재와 해고-탄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에스원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그치지 않았다. 2004년 여름 수원지역 에스원 노동자 정모 등 8명은 노동조합 설립을 위한 자문과 지원을 받기 위해 민주노총 경기지부를 찾아왔다16). 에스원 노동자들은 재난 발생시 구조사업과 안전-경호 서비스와 관련된 직무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채용되었으며, 이들은 그 방면의 전문적 역량과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조합 결성시도들이 전개되는 속에서 이들에게 내려진 업무지시들은 “***를 감시해라” “삼성그룹 내에서 노동조합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파악해 와라” “민주노총 출입하는 자가 있으면 삼성 연수원으로 데려와라” 등 노동자 감시와 노동조합 결성 저지 행위들로서 채용당시 소개된 직무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2004년 봄 삼성전자에서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있었을 때 실제로 “민주노총 1층에서 삼성쪽 출입자들을 감시해서 보고”하는 활동을 했음을 시인하였다. 삼성전자 등 수원지역 삼성계열사들의 구조조정이 많이 진전되어 노조결성 저지를 위해 채용되었던 에스원 인력 자체가 부담이 되기 시작하여 정리해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직무의 내용에 대한 불만에 더하여 에스원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인터넷에서 비공개 까페를 운영하기도 하였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지만 복수노조 금지 조항과 유령노조의 존재로 인해 노동조합의 결성이 억압과 해고라는 높은 비용에 비해 매우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민주노총의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들은 민주노총과 함께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하던 중, 어느 하루 아침 9시에 민주노총 사무실에 결집하여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삼성측에서는 낌새를 알아채고 같은 날 오전 11시에 구조조정본부의 부장이 팀장 정모에게 전화하여 만나자고 했으나 거절당했지만, 끈질긴 시도 끝에 정모 등 에스원 노동자들은 구조조정본부측과 만나서 2-3년의 고용보장과 탕정공장 전환배치 등에 대해서 타협했다. 결국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타협의 내용에 따라 탕정공장으로 내려갔으나 여전히 경비일을 시켜서 일부는 퇴사하기도 하였다.
IV. 토론 및 맺음말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은 끊이지 않고 전개되어 왔다. 다만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거듭되는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며, 무노조 상황이 노동자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삼성측의 강도 높은 체계적 탄압에 의해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노조 상황은 삼성측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의미한다. 결국 삼성의 무노조 전략은 물리적 강제력에 기초한 전제적 지배의 형태로 관철되고 있으며, 물질적 보상도 매수와 회유를 위한 보조적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노동자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헤게모니적 지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표 4>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적 지배는 스웨덴, 독일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반면, 삼성의 무노조 상황은 일본에서 흔히 발견되는 노동자들의 개인단위 포섭에 기초한 협력관계와는 달리 폭력과 납치 등 물리적 강제력에 기초한 전제적 지배 방식으로서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고려도 없는 제3세계 유혈적 테일러주의(bloody Taylorism) 부문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방식이다(Lipeitz 1987).
<표 4> 노사관계 유형 분류와 삼성의 무노조 상황.
노동자대표조직 |
자본의 노동자-노동조합 대응 전략 |
대립적(지배의 대상) |
협력적(협력의 대상) |
무노조/
어용노조 |
전제적 지배(유혈적 테일러주의):
제3세계 수출자유지역, 1987이전 한국, 삼성 무노조상황의 실제 |
개인단위 포섭(제한적 참여):
일본, 삼성측 주장 |
노조존재 |
갈등적노사관계(분규일상화,제로섬):
영국, 1987이후 한국 |
헤게모니적지배(참여협력적 노사관계,공동결정):
스웨덴, 독일 |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은 폭력과 납치, 해고와 구속이라는 높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 삼성측이 노동조합 결성을 저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살해한 사례는 아직 확인된 바 없지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을 당한 경우는 많았다. 살해 위협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강제납치, 강제억류, 집요한 감시와 외부로부터 단절된 고립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살해 위협이 현실로 실현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했으며, 노동조합 결성 포기 등 삼성측의 강압적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었더라면 삼성측의 폭력이 어느 수준까지 이르렀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1999년 에스원 사례와 같이 돈을 노린 위장된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경우 노동조합 결성 시도의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시기별로 동기와 추진 방식에서 일정 정도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시기별 차별성은 <표 5>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제1기에는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제2기에 들어서면서 보다 빈번하게 발발하였다. 하지만 제2기의 경우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와 이후 몇 년 동안의 기간에 집중되고 있어, 노동자 대투쟁으로 고양된 노동자들의 권리의식과 성공가능성의 분위기 속에서 내부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된 경우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1997년말 경제위기 이후 제3기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은 보다 체계적 준비 속에서 추진되었으며,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좌절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시도되는 지속성을 보이고 있다.
<표 5>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시도와 시기별 차별성.
|
제1기 |
제2기 |
제3기 |
시기 |
1987 노동자 대투쟁 이전 |
1987-1997말 경제위기 |
1998이후 |
<구조적 조건> |
정치적 조건 |
군사독재 |
민주화 과정 |
민주정권 |
경제적 조건 |
국가주도 고속 경제성장 |
세계화 속의 경제성장 |
경제위기 경험, 신자유주의 세계화 |
<노조결성 시도> |
내부 조직력 |
부재 |
미흡 |
연대의 틀, 투쟁 구심점 |
노조결성 동기 |
불만 |
불만, 권리의식, 노조결성 분위기 |
불만, 권리의식, 강제적 구조조정 시기 생존전략 |
노조결성 시도 |
산발적 |
체계적 준비 결여 |
체계적 준비, 지속성 |
<노사관계> |
노사이해관계 |
포지티브섬 |
포지티브섬 |
제로섬(공세적 구조조정) |
노동자 의식 |
삼성 자부심, 회사와의 일체감 |
삼성 자부심, 회사와의 일체감 |
고용불안, 평생직장개념 실종, 삼성과의 괴리 |
교섭과 투쟁 |
개념 없음 |
삼성측 호의 기대 |
삼성무노조전략 완고함 경험, 삼성과의 투쟁 필요성 절감함 |
노사갈등 |
거의 없음 |
산발적 |
높은 강도, 구조적 충돌 |
<외부 연대> |
노동조합 운동 여건 |
어용노조시기 |
민주노조운동 활성화, 노동운동 이중구조 |
민주노조운동 헤게모니 |
외부 연대세력 |
한국노총 |
한국노총 |
민주노조운동(전노협-민주노총) 연대 |
연대의 성격 |
일회적 |
일회적, 소극적 |
지속적, 적극적 활용 |
1997년 말 경제위기 이후 제3기의 삼성그룹 계열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보다 체계적으로 추진된 것은 노동조합 결성 동기가 단순한 불만과 권리의식을 넘어서 경제위기 이후 전개된 삼성측의 강제적 구조조정 속에서 느낀 생존의 절박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일류기업 삼성의 구성원이라는 자부심과 삼성측과의 동일시를 통한 일체감은 경제위기 하에서 삼성측이 타 그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적 어려움이 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적 구조조정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며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자, 노동자들은 평생직장 개념과 삼성과의 일체감을 잃고 삼성과 괴리감을 갖고 스스로 생존책을 강구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받게 되었다. 구조조정을 위해 퇴사를 강제하는 삼성측과 해고압력에 맞서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제1기와 제2기에서와 같은 경제성장기 기업의 성장과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이라는 포지티브섬 게임과는 다른 제로섬 게임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대립구도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비롯되어 쉽게 포기될 수 없었으며 보다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하고 삼성에 맞서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과 삼성 측 사이에 제2기에서와 같이 노사협의회 운영 개선 등과 같은 타협의 여지는 상대적으로 크게축소되었던 것이다.
삼성측과 노동자들 사이에 형성된 양보의 여지 없는 대립구도는 제3기 들어 노동조합 결성 추진 세력들의 조직화 방식과 투쟁 방식에 큰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첫째,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 사이에 계열사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의 틀을 형성하고 조직화와 투쟁의 구심점을 형성한 것이다. 재벌그룹 삼성의 무노조 전략과 구조조정이 개별 계열사 수준을 넘어서 구조조정본부(구 그룹비서실)에 의해 그룹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그룹에 맞서 구조조정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개별 계열사 수준을 넘어선 노동자들의 연대와 투쟁의 구심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2000년 2월 삼성해복투가 조직되었고, 2003년 2월에는 삼성일반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의 조직적 구심점이 되어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과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과의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2기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독자적으로 추진되거나 한국노총의 협조를 받아 전개되기도 했지만 일회성 연대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제2기에도 1993년 10월 삼성중공업 노동조합 결성 시도와 같이 민주노조운동과 결합된 경우도 있었지만 고립된 사례로서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제3기 들어 삼성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삼성해복투가 민주노총의 전해투 소속 조직으로 활동하고 삼성일반노동조합이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러한 삼성 노동자들과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합은 삼성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이 민주노총과의 연대 속에서 추진되는 경향성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삼성 노동자들은 삼성측의 양보의향이 없어 지속적 투쟁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 한국노총17)에 비해 조직력과 투쟁 동원역량이 월등한 민주노조세력의 지원을 필요로 한 것이었다.
삼성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제3기 들어 보다 체계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실패한 대표적 요인은 삼성측의 강도 높은 탄압과 폭력만이 아니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자주적 노동조합을 결성하더라도 설립신고서를 받기 어려웠고, 삼성측의 치밀하고 집요한 감시 활동으로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노동조합 결성에 이르지 못하거나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설립신고를 한 뒤에도 노동조합 설립신고서에 등록된 구성원들의 신분노출로 집중적인 탄압과 사직압력을 받게 되었다. 2004년 8월 수원지역 삼성전자와 삼성SDI 노동자들이 금속노동조합에 가입한 것은 이러한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신분노출로 인한 탄압을 회피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관련법 개정 없이 현재 법규정에 따라 2007년부터 단위사업장 복수노조가 허용된다면 삼성 계열사들의 어용노조들의 존재는 더 이상 노동조합 결성 시도에 걸림돌이 될 수 없게 되고, 재벌그룹 삼성 계열사들에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들이 결성될 수 있는 가능성은 훨신더 커지게 될 것이다. 물론 민주노조들에 대한 삼성측의 탄압은 더욱 강도높게 전개되고 유령노조 대신 어용노조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삼성그룹 내의 노동조합 이중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결국 어용노조의 ‘노사화합 선언’, ‘무쟁의 선언’으로 또다른 ‘신노사문화 대상’을 타게 될 수 있겠지만, 제로섬 게임의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어용노조의 역할은 제한적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자료>
- 강재민(2004), 고소인 보충진술서, 피고소인 삼성SDI주식회사, 수원지방노동사무소, 2004.10.
- 경실련(2003), 제12회 경제정의기업상 보도 요청, 경실련.
- 구영식(2000), “납치, 미행, 매수, 유령노조... 공포의 무노조전략: 삼성 SDI와 에스원을 통해 본 삼성 무노조경영의 실체”, 월간말, 2000년 9월호.
- 김갑수(2002), 준비서면 보충서(종합), 서울고등법원.
- 김갑수(2003), 상고이유서, 2003-다-58355-해고무효, 대법원제1부. 피고 (주) 삼성SDI.
- 김규태(2004a), 경위서. 2004.11.30.
- 김규태(2004b), 고소장. 2004.12.7.
- 김규태․오영길(2004), 진술서. 2004.12.3.
- 김기원(1996), “삼성재벌의 노사관계”, 이정우 외, 한국의 노사관계아 노동자생활, (서울사회경제연구소). 34-63.
- 김성환(2004a), 삼성재벌과 삼성SDI 회사 대응내용: 위치추적관련 방송 인터뷰사실을 알고 나서, 2004.7.13.
- 김성환(2004b), 추가고소장, 다산종합법률사무소. 2004.7.
- 김성환(2005a), “2004년 삼성전자 노동조합 설립 탄압 경위”, 삼성일반노동조합, 2005.2.6.
- 김성환(2005b), 항소이유서: 2005노224 명예훼손 등. 225.3.25.
- 김성환․이정미(2002), 벼랑끝에서 희망을 움켜쥐고, 삼성재벌노동자탄압백서, 민주노총.
- 김소희(1997), “동면을 뚫고 나온 삼성노동자의 반란”, 월간말 (1997.3). 90-95.
- 김용구 외 10(2004), 소장, 손해배상 (기) 청구의 소, 수원지방법원. 피고 삼성에스디아이 주식회사. 2004.8. -- 불법위치추적;
- 김용구(2000), “노동조합 설립의 문제로 인한 갈등”, 2000.11.27.
- 김용구(2004), 고발장(고발인 김용구, 박보영, 강재민), 2004.6.
- 김창한․홍두하(2005a), 고소장. 2005.1.12.
- 김창한․홍두하(2005b), 고소인 의견서. 2005.1.
- 김한영(2004), “수원 삼성전자, 노조는 꿈도 꾸지마”, 2004.6.16.
- 노동부(2004), 삼성SDI 특별조사결과, 2004.10.
- 노동부(2005), 관할 삼성관련 사업장 고소사건 수사진행 과정 정리 보고, 2005, 노동조합과.
- 노민영(1995a), “삼성의 무노조전략은 범죄행위다”, 사람과 일터, (1995.5). 32-39.
- 노민영(1995b), “삼성이 개발한 노조를 막는 노동조직”, 사람과 일터, (1995.5). 40-44.
- 단병호(2005a), 기자회견문: 삼성전자 노조가입 조합원 탈퇴강요 및 금품제공 사실로 확인. 2005.1.11. (홍두하 관련)
- 단병호(2005b), 보도자료: 홍두하씨가 받은 명예퇴직금이 2억 1700만원에 달하는 사실이 회사 문서에 의해 입증돼. 2005.1.19.
- 단병호의원실(2005a), “삼성계열사 노동조합 집행부 현황”, 단병호의원실.
- 단병호의원실(2005b), "삼성전자 부당노동행위관련 현황". (홍두하 관련).
- 삼성(2005), 보도자료. 2005.3.16. (삼성경영원칙 관련)
- 삼성경기공대위(2005), “삼성 이건희회장 고려대 명예박사 수여식 사태와 관련한 인권시민단체 기자회견 및 삼성노동자 인권침해 사례 발표대회”, 2005.5.9.
- 삼성노동자감시공동대책위원회(2004), 삼성의 노동자감시 및 정보인권유린의 진상, 삼성노동자감시공대위 자료집, 삼성노동자감시공동대책위원회, 2004.9.17.
- 삼성일반노동조합(2004a), 삼성재벌 노동자탄압 국정감사 자료집, 2004.9.3.
- 삼성일반노동조합(2004b), “삼성재벌의 노동자에 대한 위치추적을 규탄한다”, 2004.7.13.
- 삼성일반노동조합(2003), “2003년 삼성노동자 관련 사건일지”, 2003.12.29.
- 삼성전자주식회사(2004), “각서” 양식. 2004.
- 삼성해복투[삼성그룹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2000), “‘인간중심의 철학’이 낳은 노동자 탄압”, 2000.9.22.
- 삼성SDI(2003), 지속가능성보고서 2003. 2003.
- 삼성SDI(2004), 지속가능성보고서 2003. 2004.
- 삼성SDI언양공장분신기도진상조사단(2003), 삼성SDI노동자 분신기도 진상조사자료집, 민주노총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
- 송수근(2004), “삼성SDI 해고자 송수근 탄압사례”, 2004.10.25.
- 수원지방검찰청(2005), 불기소이유통지(고소인 강재민). 2005.4.11.
- 수원지방노동사무소(2005a), 국회의원 요구자료 제출, 2005.1.6. (2004 삼성전자 가전부문 구조조정 관련)
- 수원지방노동사무소(2005b), “주요현안 사항 보고: 단병호의원님 보고”, 2005.1.17. (애니스, 강재민, 김규태-홍두하, 이마트);
- 수원지방법원(2004), 결정: 2004카기 2026 증거보전(신청인 김용구 외 2). 2004.6.23.
- 안진 면담(2000). 2000.11.18)
- 오영길(2004), 경위서.
- 울산지방노동사무소(2003a), 삼성SDI(주) 노동동향보고. 2003.6.5.
- 울산지방노동사무소(2003b), 참고인 면담결과 보고. 2003.6.18.
- 울산지방노동사무소(2003c), 참고인 면담 및 자료입수 보고. 2003.6.14.
- 울산지방노동사무소(2003d), 삼성SDI(주) 내사결과 보고. 2003.8.12.
- 울산지방노동사무소(2005), 단병호국회의원 요구자료 보고. 2005.4.8.
- 울산지방법원(2005), 판결: 2003고단3746, 2004고단2603(병합), 2005.2.22. (김성환)
- 윤종용(2005), 부동산 가압류 신청서, 2005.2.7, 수원지방법원.
- 최영주(2001), “고소장”, 울산지검, 2001.12.29.
- 한선주 면담(2005).
- 홍두하 퇴직소득원천징수영수증/지급조서.
- 홍두하(2004). 진술서. 2004.12.23.
- 홍두하(2005), 경위서. 2005.1.11.
- Burawoy, Michael(1985). The Politics of Production: Factory regimes under capitalism and socialism, London: Verso.
- Lipietz, Alain (1987). Mirages and Miracles: The Crises of Global Fordism. (London: Verso).
- MBC(2003), "불패신화, 무노조 삼성“, MBC PD수첩, 2003.4.29 방영.
○ 인터넷 웹페이지: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게재일자는 온라인 게재 기준이며 실제 출판일자와 다를 수 있음].
- 삼성소개(http://www.samsung.co.kr/about/corp/philosophy.html).
- 삼성일반노조(http://www.samsunggroupunion.org/).
- 삼성해복투(http://www.outsamsung.net/).
-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