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는 이제 겨우 9월 중순인데도 하얼빈의 아침은 벌써 겨울이었다. 하얼빈 역으로 이어지는 포도(鋪道)는 얼어붙은 듯 희게 번들거렸고, 음산한 하늘은 이따금 푸슬푸슬 싸락눈을 뿌렸다. 안중근은 역 앞 광장으로 접어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반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심코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왼손 끝에 차고 딱딱한 물체가 와 닿았다. 그쪽 허리춤에 언제든 빼기 좋게 갈무리한 단총(短銃)이었다.
번쩍 정신이 든 안중근은 새로운 경계심과 관찰력으로 역 광장과 대합실 쪽을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일곱 시가 지났을 뿐인데, 역 광장과 대합실은 벌써 이런저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것은 하얼빈을 관할하고 있는 러시아측 인원이었다. 정복과 제모를 갖춰 입고 나온 역 직원들에 이런저런 러시아 공관원들이 벌써 나와 있었고, 러시아군 의장대와 군악대도 환영과 사열을 위한 구내 배치를 앞두고 역 광장 한 모퉁이에 집결해 있었다.
일본인들도 많았다. 영사관 직원과 영사 경찰에다 민간인처럼 꾸미고 있어도 밀정이나 경찰보조원 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는데도 그중에는 한국인도 더러 섞여 있는 듯했다. 기자도 여럿 알아볼 수 있었다. 러시아 신문이나 중국 신문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지의 일본 기자들도 일고여덟 명은 되어 보였는데, 개중에는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거나 당꼬바지(탱크바지)에 도리우찌(헌팅캡)로 멋을 낸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얼빈에 체류하는 일본인 환영객들이었다. 저마다 일본 옷에 일장기를 들고 저희 영웅을 환영하기 위해 두 시간 전부터 몰려들어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제야 안중근은 기자로 위장하기로 한 것을 떠올리고 외투 윗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수첩과 연필 그리고 임시로 박아낸 대동공보 통신원증을 넣어둔 곳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위장이 꼭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본인은 전혀 검문검색을 하지 않는 듯했고, 특히 기자들은 역 구내와 광장 대합실을 제 집 안방 드나들듯 하고 있었으나, 어찌 된 셈인지 러시아 헌병도, 일본 경찰이나 밀정도 한 번 잡고 신분을 확인하는 일조차 없었다.
원래 이등박문이 하얼빈으로 떠나려 할 때 관동도독부 헌병대에서 경호를 자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호기(豪氣)인지 교오(驕傲)에서인지 이등박문은 그 경호를 사양하였다. 또 하얼빈을 관할하고 있는 러시아측에서도 하얼빈에서의 경호를 러시아 헌병대가 맡겠다고 나섰으나 이등박문은 그마저 사양하였다. 거기다가 일본 총영사는 한 술 더 떠 일본인 환영객을 검문검색하지 말도록 요청하였고, 특히 일본인 기자들에게는 최대한의 취재 지원을 해주도록 당부하였다.
그런 내막을 알 리 없었지만, 그 때문에 느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경계와 경호 상태는 긴장으로 몽롱해져 하얼빈 역으로 왔던 안중근을 오히려 냉정하게 일깨워 주었다. 이에 한동안 경계와 탐색의 눈길로 역 구내를 둘러본 안중근은 역 구내에 있는 찻집에 자리를 잡고 특별열차가 들어온다는 아홉 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공연히 부산하게 움직여 일본 영사경찰이나 밀정들의 이목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하얼빈 역 안팎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러시아군의 의장대와 군악대는 특별열차가 설 철길 곁으로 길게 펼쳐진 플랫폼을 따라 두 줄로 늘어섰고, 뒤늦게 도착한 청나라 부대도 그들에 이어 늘어섰다. 맨 위쪽 러시아 재무장관 일행과 현지의 장관(將官)들이며, 각국 사절과 일본 영사 및 관리들의 자리도 천천히 들어찼다. 그리고 군인들이 도열한 뒤로는 일본인 환영 인파가 몰려들어 일장기를 흔들며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때쯤은 안중근도 찻집에서 일어나 일본인 환영 인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중근이 인파를 헤집고 러시아군 뒤로 바짝 붙어서도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자로 보이는 몇몇은 무시로 도열한 러시아군과 일본인 환영 인파 사이를 넘나들며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이윽고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더니 러시아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이어 이등박문이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 구내로 들어서 인파가 기다리는 플랫폼 앞에 멈추었다.
찻집에 앉아 역 안팎의 동정을 살필 때부터 안중근이 고심한 것은 언제 이등박문을 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아침 아홉시에 이등박문이 온다는 것뿐, 그날 하얼빈 역두에서의 환영행사가 어떤 절차로 어떤 식순(式順)에 의해 거행될 것인지는 전혀 알려진 게 없었다. 그러다가 열차가 들어오면서 안중근은 은근히 다급해져 이등박문이 가장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자신을 노출하기만을 기다렸다.
기차가 서자 가장 많이 술렁거린 것은 러시아 의장병들 왼편에 몰려서 있던 러시아 재무장관을 비롯해 이등박문을 환영하러 나온 외국 문관들이 모여선 곳이었다. 안중근은 환영 인파 속에 섞여 도열해 선 러시아 의장대 뒤로 외국 문관들이 모여선 곳으로 갔다. 그때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러시아 관리 하나가 몇몇 수행원을 데리고 방금 선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이등박문을 맞으러 열차에 오른 것이었다.
코코프체프는 객차 안에서 환영인사와 간단한 예비회담을 겸해 이등박문과 20분 정도 환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긴장과 흥분으로 점차 몽환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안중근에게는 그 20분이 무한처럼 느껴졌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제거해야 할 거대한 악이, 생명을 거두어줌으로써 더는 악을 행할 기회를 잃게 하여 구원해 주어야 할 타락한 영혼이, 몇십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그 기차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데서 몇 배나 더해진 조급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군악 소리와 함께 구령이 울리고 안중근 앞쪽에 도열해 섰던 러시아 의장병들이 '받들어 총' 자세로 경의를 표했다. 이어 한층 크고 높아진 군악대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지면서 얼마 전 러시아 재무장관 일행이 올라탔던 객차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내렸다. 객차에 올랐던 러시아 관리들 외에 대여섯 명의 일본인들이 따라 내리는 게 이등박문도 그 속에 있는 듯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군악대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안중근은 그 일본인들을 살펴보았다.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아직은 누군지 알 수 없었으나, 그들 가운데 이등박문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자 이내 가슴이 터질 듯한 분노와 함께 삼천 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서 치솟는 듯했다.
'어째서 세상일이 이리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안중근은 더 참을 수 없었다. 환영 인파 사이에서 몸을 빼내 외국 사절들과 문관들이 모여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러시아 재무장관을 비롯한 관리들의 안내를 받은 일본인 고관들은 외국 사절들과 문관들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들과 악수하고 러시아 의장대 앞으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맨 앞에는 누런 얼굴에 휜 수염을 기른 늙은이 하나가 하늘과 땅 사이를 홀로 휘젓고 다닌다는 느낌을 줄 만큼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등박문일 것이다!"
그렇게 헤아린 안중근은 곧 러시아 의장병 뒷줄로 다가가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그 늙은이를 향해 세발을 쏘았다. 단총으로 맞히기에는 좀 먼 열 발자국 정도 거리였으나, 그동안 익힌 감각으로는 어지간히 맞힌 듯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 늙은이도 쓰러지지 않고, 군악 소리에 총소리가 묻힌 탓인지 요란한 환영행사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안중근은 일시 낭패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 늙은이를 맞히었다 해도 그게 이등박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안중근을 다급하게 했다. 그 바람에 안중근은 다시 단총을 들어 그 늙은이 곁에 선 세 일본인에게도 한발씩 쏘았다. 그러고 나니 그제야 처음 안중근이 세발을 쏜 늙은이가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이어 뒤늦게 총을 맞은 세 사람도 잇달아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게 보였다.
안중근이 쏜 처음 세 발의 총성은 워낙 힘차고 흥겨운 군악 소리에 묻혀 환영의 뜻을 나타내는 폭죽 소리 같은 것으로 무심코 지나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이어 세 발의 총성이 더 들리자 하얼빈 역두는 이내 불길한 느낌으로 그 소리를 알아들었고, 이어 사람이 풀썩풀썩 쓰러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태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먼저 성한 수행원이 쓰러진 이등박문을 부축하고, 러시아 헌병대가 재빨리 주변을 에워싸며 뒤늦은 경호조치에 들어갔다. 양쪽 모두 놀라 허둥거리는 게 안중근에게 거사의 성공을 짐작게 했다. 그제야 안중근은 자동으로 재장전된 한 발이 남은 권총을 내던지고 목청껏 소리쳤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세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노서아 말로 미리 준비해둔 만세였다. 그제야 가까이 있던 러시아 헌병 하나가 안중근을 덮쳐오며 소리쳤다.
"니폰스키? 카레스키?"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를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중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러시아 헌병 하사관이 안중근을 덮쳐 둘은 한 덩이가 되어 승강장 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거기에 몇 명의 러시아 장교들이 더 가세해 그들에게 둘러싸이게 되면서 안중근은 이후 두 번 다시 이등박문과 그 수행원들 쪽을 볼 수 없었다.
러시아 헌병대와 장교들은 안중근을 여럿의 힘으로 제압한 뒤, 먼저 주머니를 뒤져 안중근이 호신용으로 지니고 있던 단도와 함께 몇 가지 소지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포승으로 두 팔과 손을 묶어 하얼빈 역사(驛舍) 안에 있는 러시아 철도수비대 헌병 분견대 사무실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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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김지혁
러시아 헌병대는 포승에 묶인 안중근의 사진을 몇 장 찍더니 다시 역 구내에서 널찍한 사무실 하나를 빌려 그리로 데려갔다. 그 과정 모두 헌병대의 삼엄한 경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안중근은 한층 더 강하게 성공을 예감하였다. 심문이 시작되면서 조금 느슨해진 포승 덕분에 이마께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 손을 들어 성호를 그었다.
'천주 예수여, 뜻대로 하오시되, 무단히 십계(十戒)를 어긴 것이 아니거든, 제가 하고자 한 바를 이루게 해주시옵소서.'
그때 심문관인 러시아 장교가 한국인 역관을 통해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빌었는가?"
"내 거사가 성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그 한국인 역관이 고약했다. 거사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한 것처럼 안중근을 죄인 취급하며 멋대로 통역했다. 범죄의 성공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고 전해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도 심문관보다 제가 더 나서 안중근을 나무라고 따졌다.
그날 첫 번째 심문관은 직위가 그리 높지 않은 듯 주로 안중근의 이름과 주소, 직업 및 가족관계같이 신분에 관한 것과 안중근이 함경도 부령에서 출발했다고 둘러대자 그곳에서 하얼빈까지의 이동경로 따위 사실 관계만 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심문은 달랐다. 심문관이 더욱 고위직이고 또 일본인 입회하에 이루어진 탓인지, 이번에는 거사 동기나 신분 배경 같은 것을 제법 깊이 따져 물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려 두 번째 심문을 마쳤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심문을 끝내고 방을 나가면서 그 심문관이 알려주었다.
"이곳은 우리 러시아가 관할하는 지역이므로 범죄의 재판권은 원칙적으로 우리 러시아에 있다. 그러나 너희 조선은 지난 1905년의 조약으로 외교권과 재판권을 모두 일본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너는 오늘 24시 안으로 이곳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 넘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청나라 여순에 있는 일본 관동도독부의 재판 관할에 들게 될 것이니 그리 알라."
그 바람에 안중근은 저녁을 얻어먹고도 몇 시간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머물게 되면서 비로소 무엇에 취한 듯 보낸 하얼빈에서의 엿새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조선일보 2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