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문수원(78)
이 환경에서 내 마음이 이상적으로 달라지며는. 뭐, 수행에 의해서든 기도에 의해서든 공부에 의해서든 그렇게 달라지고 그러면 그 안목에 의해서 말하자면, 부처님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 淨國界三變土田
㈎ 變裟婆
㈏ 變八方二百萬億那由他之土
㈐ 變更八方二百萬億那由他之土
31.
爾時東方으로 釋迦牟尼所分之身의
이시동방 석가모니소분지신
석가모니의 나눈 바의 신(身). 분신(分身)이죠. 그런 분신(分身)이.
百千萬億 那由他 恒河沙等 國土中諸佛이 各各說法하야 來集於此할새
백천만억 나유타 항하사등 국토중제불 각각설법 내집어차
백이나 되고·천이나 되고·만이나 되고·억이나 되는 그런 나유타. 그렇게 많고 많은. 거기에 또 모자라서 항하강(恒河江)의 모래수와 같은 등(等). 그런 국토 중에 있는 모든 부처님이 각각 설법을 할려고. 전부 여기에 와서 모였더라. 바로 이 땅에 와서 그렇게 모여 있더라. 석가모니 부처님한테 석가모니 분신불들이 전부 한 곳으로 모여 왔더라.
32.
如是次第로 十方諸佛이 皆悉來集하야 坐於八方하니
여시차제 시방제불 개실래집 좌어팔방
이와 같이 차제(次第)로. 지금 동방 이야기를 했죠? 동방에서 그렇게 했으며는 서방·남방·북방··· 이렇게 차례대로 시방 모든 부처님들이 전~부전부 와서 모여 가지고서 팔방(八方)에 쭈욱, 이렇게 앉았다.
33.
爾時 一一方 四百萬億 那由他國土에
이시 일일방 사백만억 나유타국토
낱낱 방향, 낱낱 방향으로 4백만억 나유타나 되는 그런 국토에
諸佛如來도 徧滿其中이러라
제불여래 변만기중
또 많은 부처님이, 그 외에 많은 부처님이 그렇게 많이 모여 와 가지고서 꽈~악, 차 있더라. 그래, 완전히 부처의 세상이 됐다는 뜻입니다.
그래, 우리가 결국 일체 부처님이 와서 꽉 차며는 우리 있을 자리가 없죠.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처님이 왔다고 하는 것은. 그건 결국은 이 땅에 있는 우리 모두가 부처의 안목으로 변했다. 우리가 모두 석가모니 분신(分身)이지 딴 사람, 우리 내 놓고 석가모니 분신(分身)이 또 어디 따로 있을 텍이 없습니다. 그렇게 알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전부 석가모니 분신(分身)이고. 석가모니 분신(分身)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할려며는 우리 마음이 변해야 돼. 세 번, 네 번··· 아니라 뭐, 백 번·스무 번이라도 변해야 돼요.
그렇게 해서. 부처로 꽉 찼다, 하는 말은 ‘이 땅에 꽉 차 있는 사람은 그대로 부처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변만기중(徧滿其中). 그 안에 꽉 찼더라. 부처님으로.
사, 分身與欲開塔(1,說諸佛問訊與欲 2,釋迦開塔 3,四衆同見聞 4,二佛竝坐 5,四衆請佛力)
34.
是時諸佛이 各在寶樹下하사 坐師子座하며
시시제불 각재보수하 좌사자좌
이때 모든 부처님이 각각 보배로 된 나무 밑에 앉아서 사자좌에 앉았으며
皆遣侍者하야 問訊釋迦牟尼佛할새 各齎寶華하고 滿掬而告之言하사대
개견시자 문신석가모니불 각제보화 만국이고지언
다 시자(侍者)를 보내서. 시자(侍者)를 하나씩 데려왔다, 그랬죠. 석가모니 부처님한테 문신(問訊)한다. 안부를 묻는다, 이거예요. 부처님한테, 멀리서 왔으니까 묻죠.
이 ‘제[齎]’자(字)는 ‘쌀 [齎]’자(字). 또 ‘싸 가지고 오다.’ 그런 뜻으로 ‘제[齎]’잡[字]니다. 각각 보배로 된 꽃을 싸 가지고 와서. 만국(滿掬). 가득이 두 손으로 움켜잡고. 말하자면 한아름 꽃을 안고 와서 부처님께 올리면서 말하는 거예요. 부처님, 석가모니불에게 각각 문신(問訊)하려고 하는 그런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이. 분신 부처님이 시자(侍者)에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라, 가서. 부처님들은 전부 앉아 있고 시자(侍者)를 보내 가지고. 동격이니까, 결국은. 동격이니까 시자(侍者)를 보내 가지고 대신 안부를 전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35.
善男子야! 汝往詣耆闍崛山釋迦牟尼佛所하야
선남자 여왕예기사굴산석가모니불소
선남자야! 이게 시자(侍者)보고 하는 거예요. 네가 기사굴산중 석가모니불 처소에 가서. 왕예(往詣)해 가지고서.
如我辭曰
여아사왈
내 말과 똑같이 해라. 내가 누구예요? 그 부처님이 하는 소리예요. 분신 부처님이 하는 말이죠.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少病少惱하사 氣力安樂하시며
소병소뇌 기력안락
소병소뇌(少病少惱)라는 말은. 병도 없으시고 건강하시고. 아주 괴로움도 없으시고. 이, ‘소[少]’자(字)는 저기, ‘없다.’는 뜻입니다. 병도 없으시고 괴로움도 없으시고. 기력이 충만하시고 그리고 편안하시고. 안락하시며. 그리고 안락하십니까?
及菩薩聲聞衆도 悉安隱不잇가하며
급보살성문중 실안은부
그리고 딸려 있는 대중들. 보살과 성문 대중(聲聞大衆)들도 다 안온하십니까? 모두들 편안하십니까? 하며. 그렇게 말도 전하고
以此寶華로 散佛供養하고 而作是言하대
이차보화 산불공양 이작시언
이 보배꽃으로서 부처님께 뿌려서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이런 말을 해라.
彼某甲佛이 與欲開此寶塔이라하라
피모갑불 여욕개차보탑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 내가 모시고 온 저 부처님. 피모갑불(彼某甲佛). 내가 모시고 온 저 부처님이 이 보탑을 열고 싶어 합니다.
지금. 다보탑이 있는데 그 보탑이 아직 안 열렸어요. 안에서 다보 여래의 말씀만 한번 나왔었지. “이 보탑을 열고 싶어 합니다.”라고 하라.
그래, 분신 부처님이 자기 시자(侍者)들에게 일러주는 말이예요. 가서 석가모니에게 가서 전하고. 요렇게 안부 묻고. 꽃도 갖다 공양올리고. 그리고 나서는 내가 “이 보탑을 열어 보고 싶어 한다.”라고 하는 말을 꼭 전해라. 이렇게, 분신 부처님이 시자(侍者)에게 시켰죠.
36.
諸佛遣使도 亦復如是러라
제불견사 역부여시
그 한 부처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많은, 모든 부처님이 전부다 견사(遣使). 사신, 사자를 보내 가지고서. 보내노니 또 또한 다시 이와 같았다. 똑~같이 앞의 경우와 같이. 소병소뇌(少病少惱)하시며 기력이 안락하시며··· 이런 안부. 또 꽃 공양. 이걸 한결같이. 부처님 시자(侍者)마다 전부 똑같이 시자(侍者)에게 했더라, 이런 이야기죠.
37.
爾時 釋迦牟尼佛이 見所分身佛의 悉已來集하야 各各坐於師子之座하며
이시 석가모니불 견소분신불 실이래집 각각좌어사자지좌
그러니까. 그 때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견(見). 보았다. 뭘 보았는고 하니. 분신불이 전부 모여 가지고서 각각 사자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皆聞諸佛이 與欲同開寶塔하고
개문제불 여욕동개보탑
또 들어. 무얼 들었는고 하니. 모든 부처님들이 보탑(寶塔). 저 다보탑을 다같이 열고 싶어 하는 거야. 열고 싶어 하는 것을 들어서.
卽從座起하야 住虛空中커늘
즉종좌기 주허공중
그 자리로부터 일어나서. 그런 안부를 전해 듣고는 부처님이 자리로부터 떠억 일어나. 즉종좌기(卽從座起)해. 그러고는 허공에 문득 올라가. 주허공(住虛空). 여기서부터 이제. 2처 3회. 허공중에서 설해진다라고 하는 이야기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 부처님이 먼저 올라와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올라가고 대중들을 끌어올립니다. 그, 끌어올리는 모양도 곧 나와요. 부처님이 허공중에 올라가서 주(住)하거늘.
一切四衆이 起立合掌하야 一心觀佛하더니
일체사중 기립합장 일심관불
일체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이 기립합장(起立合掌)이라. 부처님이 저~ 높이 탑 중에. 저 위에 허공까지 올라가니까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이 깜짝 놀라 가지고 기립합장(起立合掌)이야. 전~부 서 가지고 합장을 하고 일심관불(一心觀佛)이야. 일심으로 그냥,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38.
於是釋迦牟尼佛이 以右指開七寶塔戶하니
어시석가모니불 이우지개칠보탑호
그러니 석가모니불이 오른 손가락으로서. 이우지(以右指)로. 오른 손가락으로 대중들. 당신들 대중은 저 밑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당신들 분신불은 허공에, 주변에 꽉 깔렸고. 다보탑은 공중에 있고. 다보 여래는 그 탑 안에 있고. 그런 상태죠. 그러니까 석가모니불이 오른 손가락으로서 칠보탑을 문을 떠억, 이렇게 열어요. 손가락 하나가지고 떠억, 이렇게 여는데. 뭐, 힘들여서 열겠어요?
出大音聲하대 如却關鑰하고 開大城門이러니
출대음성 여각관약 개대성문
하나로 여는데 큰~ 소리가 나. 큰 소리가 나는데 빗장을 제치고. 각관약(却關鑰)은 빗장을 제치고. 큰~ 성문이 열리는 것과 같더라. 아주 큰 성문. 나라의 성문을 열 때, 빗장을 제치고 열 때 “삐그덕~”하면서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납니까? 그런, 성문을 여는 것하고 똑같더라.
39.
卽時一切衆會가 皆見多寶如來호니
이시일체중회 개견다보여래
그 때 모였던 대중 중회가 다 다보 여래를 떠억, 이렇게 보니
於寶塔中에 坐師子座하대
어보탑중 좌사자좌
다보탑 안에 사자좌안에 떠억, 앉았어.
全身不散이 如入禪定하며
전신불산 여입선정
그리고 아주 하나도 흐트러진데 없이. 온몸이 흐트러진 데 없이 다 단정하게 앉아있어. 따~악, 앉아 가지고 좌선해 있는 모양 그대로. 선정에 든 것 같이 그렇게 모양이 보이는 거죠.
又聞其言호니
우문기언
그리고 그 말을 듣는데.
善哉善哉라 釋迦牟尼佛이 快說是法華經일새
선재선재 석가모니불 쾌설시법화경
아!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법화경>을 쾌설. 아주 명쾌하게 자알, 설하실새.
我爲聽是經故로 而來至此호라
아위청시경고 이래지차
내가 이 <법화경>을 설하는 것을 듣기 위한 까닭에. 들을려고 내가 여기까지 이렇게 왔노라. 바로, 다보 여래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문을 따악, 이렇게 열고.
대중들은 바라보고.
보니까. 다보 여래는 타악, 좌선하는 것 같이 앉아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너무 잘 설하기에 내가 그 경, 설하는 소리를 들을려고 여기까지 왔다.”라고 하는 그런 말을 다보 여래가 했습니다.
40.
爾時四衆等이 見過去無量千萬億劫滅度佛이 說如是言하고
이시사중등 견과거무량천만억겁멸도불 설여시언
그 때에 사부대중들이 과거무량천만억겁전에 멸도(滅度)하신 부처님이. 다보 여래가 저 앞에서 그랬어요. 과거 한량없는 천만억겁전에 열반하신 부처님이라. 그런데 그 부처님이 말하자면, 다보탑 안에 그대로 살아있다, 이거죠. 부처님이. 멸도(滅度)한 부처님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을 보고.
歎未曾有하야
탄미증유
아주 미증유하다,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라고 찬탄을 해서
以天寶華聚로 散多寶佛과 及釋迦牟尼佛上이라
이천보화취 산다보불 급석가모니불상
하늘의 아주, 보배로 된 꽃무더기로서 다보 부처님과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위에다가 흩었더라. 공양을 올렸다,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이게 이제. 과거 한량없는 세월 전에 열반한 부처님이다, 그런데 그 열반하신 부처님이 그대~로, 영원하게 살아 계시고, 이 보탑으로서 장엄된 그 안에 계신다, 라고 하는 이런 말은 진리의 영원성, 또는 우리 마음의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하는 바로 그러한 마음의 실상을 아주 제대로 보여 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설사 우리 마음이 어떤 선정에 들고 어떤 경전을 만나서 달라졌다 하더라도. 또 마음의 그런 근본자리, 그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우리는 그리 말하죠. “영원한 생명”. 절대 뭐, 육신 따라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육신이 죽는다고 죽는 것도 결코 아니예요. “영원한 생명”이라. 다보 여래는 바로 그 “영원한 생명”, 그 자체를 여기서 이렇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41.
爾時多寶佛이 於寶塔中에 分半座하사 與釋迦牟尼佛하시고
이시다보불 어보탑중 분반좌 여석가모니불
석가모니가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옆에 아마 서 있었던 모양이라. 그런데 대중들은 두 분에게다 꽃 공양을 일단 먼저 올렸습니다. 그러니까 다보 여래가 탑 안에서 반자리[半座]를. 자리 반(半)을 이렇게 물러나 앉으면서 나눠줬어요. 그래서 석가모니불에게 줬어. ‘여[與]’자(字), 이럴 때는 ‘준다’, 이런 뜻입니다. 석가모니불에게 여(與). 수여(授與). 주고. 주시고.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한 자리에 같이 앉은 거죠. 그래, “법(法)이 같다.” 그게 이제 지난 시간에 제가 설명했죠. 나란히 앉아 계시다.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계시다. ‘진리를 설한 사람은 그 자체와 똑같다.’라고 그런 의미다, 라고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진리 설한 사람은 누구죠? 석가모니고. 진리는? 여기서 다보 여래로 상징이 되는 거죠. 다보 여래인 진리나 진리를 설하는 석가모니나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죠, 뭐. 그리 돼야 되는 거죠. 그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한다고요, 그리 돼 있어.
而作是言하사대
이작시언
그래, 자리 반(半)을 나눠 가지고 석가모니에게 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釋迦牟尼佛은 可就此座하소서
석가모니불 가취차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자기, 그 반자리[半座],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했어요.
42.
卽時 釋迦牟尼佛이 入其塔中하사 坐其半座하사 結跏趺坐러시다
즉시 석가모니불 입기탑중 좌기반좌 결가부좌
석가모니불이 그 탑 안에 들어가서 그 반좌(半座), 그 반좌(半座)에 앉으사 가부좌를 맺고 떠억, 앉으시더라. 그러니까 다보 여래가 내준 그 반자리[半座]에 같이 앉았다, 나란히 앉았다,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부처님은 이미 올라갔어요, 공중에. 이, 대중이 올라가야 제대로. 허공 중에서 설해지는 제2회의 설법이 정식으로 된다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43.
爾時大衆이 見二如來가 在七寶塔中師子座上하사 結跏趺坐하고
이시대중 견이여래 재칠보탑중사자좌상 결가부좌
두 여래가 칠보탑 안에 사자좌 상에 떠억 앉아서 가부를 맺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各作是念하대
각작시념
각각 이런 생각을 해요. 저~ 까마득히 높은 데, 두 분만 앉아 계시니까. 그러니까 광명이 이만치 미치죠.
44.
佛座高遠이시니
불좌고원
부처님 자리가 너무 높아. 우리는 너무 아득해. 그러니까 우리가 있고 부처님 있고. 부처님 있고 우리가 있는데. 이래 가지고는 거래가 되겠나···
唯願如來는 以神通力하사 令我等輩로 俱處虛空케하소서
유원여래 이신통력 금아등배 구처허공
오직 원하옵나니 여래께서는 신통력으로서 우리 무리들로 하여금. 우리도 전~부. 부처님 내려 오라고 하면 미안코 하니까 우리가 올라 가도록 부처님 실력으로 그런 복덕으로 허공에도 함 올라가고. (대중 웃음) 그렇게 좀 같이, 허공에 좀 있도록, 해 주십시오. 구처(俱處). 허공에 함께 처하도록, 허공에 함께 있도록, 그렇게 좀 해 주십시오, 라고 이렇게 원을 했어요, 생각으로. 전부 그렇게 생각으로 한결같이 하게 됐습니다.
45.
卽時釋迦牟尼佛이 以神通力으로 接諸大衆하사 皆在虛空케하니라
즉시석가모니불 이신통력 접제대중 개재허공
그러니까 그걸 모를 석가가 아니죠. 대중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즉시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신통력으로서 여러 대중들을 제접을 해. 전부 데리고서 전부 허공에 앉게 했다. 허공에 있게 하고. 큰 음성으로서 사부대중에게다 고해 말하는 거야. 전부 여기서부터 정식으로 허공 중에서 법회가 이루어지는 그런 이야기가 되죠, 이제는.
그러니까 이제 <견보탑품(見寶塔品)> 안에 있는 이야기기 때문에 <견보탑품(見寶塔品)> 부분부터는 허공에서 법회가 된다, 이렇게 통칭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시험에 잘 나오는 거예요, 이런 거는. 정식으로 법회는. 여기 대중들이 다 올라간 뒤에 즉시 부처님이 탑 중에 앉은 뒤에. 대중들을 끌어올린 그 때부터 여기 45번부터, 그렇게 되겠죠. 45번. 즉시에 석가모니불이 신통력으로서 대중들을 전부 끌어올려가지고 허공에 있게 하고. 허공에서 이제 사부대중에게 한 말씀, 이제 하는 거죠.
이제 허공이라고 하는 데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고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저 앞에서 그랬죠. 현실의 차원에서 한 단계 높아진 차원을 허공이라고 하고. 다시 거기에서, 다시 현실로 내려와서 우리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제접하는 것. 교화하는 것. 이게 이제 불교의 나아가는 길이죠.
처음에는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내내 현실에 있는 게 아니고. 높은 차원의 경지에 올라가서 다시 그 경계를 마음속에 수용한 채, 현실 사람들을 제접하기 위해서 현실로 내려온다,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요건 이제 허공이라고 하는 것은 좀 더 다른 뜻으로 이해를 하며는. 그런 말씀도 드리기도 했어요. 많은 존재가 있다, 라고 하는 차원에 젖어 있다가. 그런 상식에 있다가. “없다”하는 그런 차원을 우리가 이해 해야 된다. 그게 뭐냐? 불교에서 공(空)이라 그러죠. 이 허공이라는 말은 그거는 공(空)의 경지다. 일체법이 전부 공(空)한 도리, 또 공(空)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한 도리다.
우리는 전부 차별합니다. 너·내··· 전부 나이가 차별하고 얼굴이 다르고 뭐, 마음 씀씀이가 다르고 지식 수준이 다르고 뭐, 생각이 다르고·소견이 다르고·주의주장이 다르고··· 사람마다 전~~부 달라요. 전부 다른 것 뿐입니다, 같은 거 하나도 없어요, 사실은. 그냥, 마지못해서 같은 척하고 뭐, 대충 같다고 생각을 해서 넘어가서 그렇지, 냉정하게 따지면 같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이고 뭐고 같은 거 없어요.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예요. 그런데 그, 차별되고 천차만별의 생각과 천차만별의 생활을 또 하나하나 분석해 보며는 뭐 하나도 내세울 건 없어. 하나도 내세울 건 없다고요. 딱 부러지게 요거다, 라고 고집할 게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 그게 다 변하니까. 안 변하고 그냥 있는 게 아니고전~부 변하고 나중에 있으나마나하고 없어지고 그렇게 내 고집이 옳다고 내세웠지마는 지내놓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걸 고집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은 뭐겠어요? 다~ 허망한 거죠. 공(空)이야, 그대로. 내가 그렇게 옳다고 생각했던 거, 지내놓고 보니 전부 공(空)이라고요. 공(空)이지, 그거 뭐, 아무 것도 아니야. 사실은. 그 순간! 괜히 아집에 가로막혀 가지고서 그렇게 주장했을 뿐이지 지내놓고 보면 있는 게 뭐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있는 거··· 지나고 나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을 살아가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도 역시 그래요. 이 차별된 현상은요, 뭐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전~부 변하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지고 그래서 남아 있는 거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전부 공(空)이다. 그게, 공(空)이 평등한 자리예요.
그래서 차별의 자리에서. 좀더 다른 눈을 뜨고 보면 평등한 자리로, 평등한 자리를 보게 되는 거야. 공(空)이다, 라고 하는 그런 입장을 우리가 이해하게 된다고요. 그건 다른 차원이야, 조금 높아. 공부 좀 하면 그런 것을 인식하게 된다고요. 그, 있다·없다··· 거, 까불어봤자 결국은 전부가 공(空)이야.
우리, 불교 공부를 한 불자(佛子)들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는 캄캄해서 잘 모르지마는. 일이 없고 가만~히 앉아서 혼자 그런 생각 하며는 거의 그런 상태가 돼요. 그거 이해한다고요. ‘아! 모두가 공(空)이다.’라고 하는 것. 뭐가 잘났다·못났다/있다·없다···, 하는 게 전부 ‘공(空)이다.’라고 하는 것을 어느 정도, 편안할 때는 이해가 돼요. 그러나 정작 자기 일이 닥쳐 놓으며는 그거는 공(空)이 아니지 그때는. 전부 있는 거고 그냥, 자기 아집, 자기 주장 세워야 되고. 그래서 그냥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고··· 이러면서 그냥 사는데. 그것도 세월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야. 전부 공(空)이라고요, 남는 게 하나 없어. 그 평소에 생각하듯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예는 그건 상당한 그런 공부죠, 사실. 그런 예후가 있어야 돼요.
공(空)이라고 하면 허공에 있다, 다른 차원이야. 다른 차원의 경지가 바로 우리는 현실을 바로 앞에, 눈앞에 두고 공(空)으로 볼 줄 아는 것. 현실을 공(空)으로 볼 줄 아는 것, 그런 차원이다.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다시 현실로 내려갔다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거친 다음에 다른 사람의 각각 차별된 것을 전부 또, 수용해 줘야 돼. 이해해 줘야 된다고요. 자기는 아니까 이미 공(空)을 거쳤으니까. 공(空)이란 사실을 너무 잘 아니까 다른 사람의 어떤 차별된 해석을 그대~로 수용해 줘야 돼. 니도 언젠가 공(空)이란 거를 알 거다···하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거야. 그래. 그 말도 옳다··· 그 말도 옳다··· 우리나라 언제, 황희 정승 같이 누구의 말도 다 옳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차별된 현실을 내가 수용해 주는 그런 자세, 그 정도의 포용력, 그런 마음가짐이 다시 말해서 나중에 허공의 설법이 끝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거든요. 세 번째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랬잖아요.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단 말이 그런 의미라.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현실의 모든 차별된 것을 그대~로 다 수용하고 이해하고 용납해 주고··· 그래서 내 마음의 그 포용력을 가지고 전부 감쌀 수 있는 그런 자비심. 그런 안목과 그런 자비심. 이것이 이제 동시에 갖춰진 상태. 이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그런 경지다. 그런 이야기고. 그렇게 될려면은요. 그렇게 될려면 상당한 수행이 필요하고 상당한 경험이 필요하고 그랬을 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공(空)의 경지다,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아이 보면, 아이들이 뭐, 그냥 별별소리 해 쌓는 것. 아, 어릴 땐 다 저런 거야, 하고 다 이해하거든요. 다 이해한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과정이라고 하는 것. 여기서 불교에서는 공(空)의 과정. 그걸 이제 여기서는, <법화경>에서는 허공이다, 라고 허공에 올라가서 설법을 하고 허공에 올라가서 법문(法門)을 듣든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로 여기서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인다, 이렇게들 고래(古來)로, 아주 뛰어난 <법화경> 해석자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의미가 있어요. 이건 또 여러분들이 각자 소견 따라서 또 보다 더 다른,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뭐, 해석,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못하란 법도 없고 하니까요. 마음대로, 거기다가 또 다른 해석을 붙여도 상관없고 좋은 일이죠, 그거는.
도대체 <법화경>이 왜 세 곳에서 이렇게 설해질까? 그리고 중간에 두 번째는 왜, 허공에서 설해진다는 의민가? 이건 뭘 의미하는가? 요런 것을 좀, 잘 생각을 해서 보다 더 새로운 발견을 하며는 바람직한 경전공부가 될 겁니다.
그 다음에 이제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올려놓고 허공 위에다 올려놓고.첫 말씀을 이제, 하시는 거예요. 요게 이제, 부처님이 두 번째 법회의 첫 말씀. 그리고 허공에서 듣는, 그런 말씀이다. 이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있어요.
③ 明釋迦唱募(1,唱募大衆 2,正言付囑時 3,示勸召意)
以大音聲으로 普告四衆하사대
46.
誰能於此娑婆國土에 廣說妙法華經이리오
수능어차사바국토 능설묘법화경
누가 능히 이 사바국토에서 이 <묘법화경>을 널리 설하겠는가?
今正是時라
금정시시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런 문제를 논할 때다.
如來不久에 當入涅槃일새
여래불구 당입열반
여래는 오래지 아니해서. 내 석가모니는 곧 열반에 들 것이다. 이건 저 앞에도 있었죠. 그리고 이 <법화경>은 열반에 들기 전에 모든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그 동안에 교화했던 모든 내용들을 총 정리하고 마지막에 이제, 말하자면 그, 강의가 끝날 때 요점정리 하잖아요? 요점정리야, 이 <법화경>이. 다시 말해서. 그러고는 강의가 끝나잖아요, 끝나죠. <법화경> 설하고 열반에 들거든요. 그, 당입열반(當入涅槃)이라. 당신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하거든요. 불구(不久). 얼마 있지 아니해서 마땅히 열반에 든다.
佛欲以此妙法華經으로 付囑有在니라
불욕이차묘법화경 부촉유재
부처는 이 <묘법화경>으로서 부촉해 두고자 한다. 부촉(付囑)이란 말은 누구에게 당부해 가지고 계속 이 <법화경>이 전해지고 이 땅에 계속 이 <법화경>이 설해지기를 내가 당부해 두고자 한다. 부촉유재란 말은 그걸 이제 <법화경> 부촉되기를 당부. 이 <법화경>이 계속 전해지기를, 내가 그렇게 당부해 둘려고 그렇게 한다. 그 말을 허공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하는 거예요.
요건, 이런 말은 저 앞에서 많이 있었어요. 많이 있었는데 허공에 올라가서 이런 말을··· 이게 이제 본뜻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계속 <법화경>을 부촉하는, 전하는 그런 이야기를 주로 많이 해요. 그래서 유통분이라 그랬죠, 유통분. 부촉유통이라고 해서 <법화경>을 많이 유통시키기를 바라는, 그래서 설해진 품이. <견보탑품>도 거기에 해당되죠.
언젠가 저기, 전체적인 도표를 가지고 이야기한 적이 있죠. 전부 이게 말하자면 부촉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요 말 속에, 요 세 줄 속에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법화경>을 설하고 열반에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경전. 뭐, <화엄경>을 전하겠다, <뭔경>을 전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 <법화경>을 어떻게 하더라도 좀, 이 땅에 많이 펴도록 도저히 좀 당부하고 싶다. 부촉하고 싶다. 그걸 내가 여러분들에게 꼭,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하는 그런··· 내용은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왜 <법화경>이냐? 또 왜 열반에 임해서 <법화경>을 가지고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느냐?, 하는 그런 것이 말하자면 <법화경>의 중요성이 거기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늘 이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고유한 불성(佛性), 저 깊은 마음속에 있는 그 위대한 불성(佛性). 이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잘 인식하고 그걸 보고. 그런 또 개발해서 그것을 한껏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부처님은 당부하는 거거든. 그걸 이제, 우리말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성불(成佛)이라. 불성(佛性)을 개발해서 성불(成佛)의 삶을 살아라, 하는 그런 뜻이고. 또 이제 <보탑품>에서는 상징적으로 보탑이 우리의 육신. 이 하잘것없는 육신 속에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을 땅에서 보탑이 솟아난 것으로 그렇게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이 <보탑품>이 참 어떻게보며는 그동안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보탑이 솟아나는 일로 해서 상징적으로 눈에 그리듯이. 환~하게 보여주는, 그런 경전이다, 그런 품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해도 좋은 그런 내용입니다.
오늘, <견보탑품>. 보탑을 보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
여기는 부처님이 광명을 놓았다라고 하는 것.
그 광명을 통해서 온갖 그런 상황들이 다 환하게 비춰졌고.
또 분신불이 올려고 하니까 이 땅 가지고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마음 가지고는 부처님을 볼 수 없다, 해서 삼변정토(三變淨土). 세 번이나 이 땅을 변화시켜서 정토로 바꾸는 그런 내용이 쭈욱, 이제 이야기가 됐죠.
그리고 드디어 부처님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다보 여래가 자리를 반을 내 줘 갖고 같이 앉게 되고.
그리고 대중들도 올라가고 싶어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대중들을 허공중으로 끌어올려서 허공에서의 설법이 시작이 되고. 그, 허공에서의 첫 설법은 이 <법화경>을 이 사바세계에서 널리 설하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때다. 지금이 가장, <법화경>을 이야기할 적절한 때다. 그리고 나는 얼마 있지 아니해서 열반에 들 것이다. 그래, 너희들은 이 <법화경>을 잘 펴고 열심히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펴도록 하라, 라고 하는 그런 당부의 말씀으로서 이제 여기까지 결론이죠.
다음다음주는 음력으로 초3일이거든요? 초3일은 아무래도 번거롭고 또 설거지할 것도 많을 거니까 그 날 하루는 좀, 쉬는 게 좋겠죠? 또 찾아볼 사람들도 있고 그럴 테니까. 그래서 다음 주 한 번은 아직 더 있습니다마는 또 다음주에 못 오는 분들은 또 뭣도 모르고 초3일에 헛걸음 하실까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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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 깊은 마음 속에 있는 위대한 佛性,,, 우리는 그것을 꺼내 쓰는 연습을 자주 해야만,,,!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佛性을 개발해서 成佛의 삶을 살아라...고맙습니다. 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_()()()_
가을햇살님 수고 하셨습니다,,_()()()_
감사합니다. _()()()_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의 총 결산---법화경! 가을햇살님, 수고많으셨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우리가 모두 석가모니 分身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 할려며는 우리 마음이 세 번, 네 번··· 백 번, 스무 번이라도 변해야 된다...가을햇살 님! 수고하셨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햇살님, 잘 읽고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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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以天寶華聚로 散多寶佛과 及釋迦牟尼佛上이라 ....
하늘의 아주, 보배로 된 꽃무더기로서 다보 부처님과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위에다가 흩었더라. 공양을 올렸다,
과거 한량없는 세월 전에 열반한 부처님이 그대~로, 영원하게 살아 계시고, 이 보탑으로서 장엄된 그 안에 계신다 라고 하는 이런 말은 진리의 영원성, 또는 우리 마음의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하는 바로 그러한 마음의 실상을 아주 제대로 보여 주는 그런 말.....
마음의 그런 근본자리, “영원한 생명”이라고 우리는 그리 말하죠. “영원한 생명”은 육신 따라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육신이 죽는다고 죽는 것도 결코 아니예요. 다보 여래는 바로 그 “영원한 생명”, 그 자체를 여기서 이렇게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
시방 세계의 무수한 부처님이 모였다
=깨달은 안목에서는 우리 모두가 부처다
=우리 모두가 부처인 줄 알려면 마음이 세번 이상 ,변해야 한다-三變淨土
諸佛如來 遍滿其中
=시방 세계가 여래로 가득찼다
=시방 세계의 우리 모두가 여래다
편안할 때는 空하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일이 닥치면 전부 있는 것이 되고 내 주장 내 고집이 나온다--그래서 상처 받고 상처 주다가 나중엔 다시 空한 줄 알게 된다
일이 닥쳤을 때도 空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空한 줄 알면서 다시 현실의 차별된 현상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용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중을 허공으로 끌어 올린 후 첫 설법
;나는 곧 열반에 들고 지금이 법화경을 설할 때다
--왜 하필 법화경인가?
--우리의 불성을 인식하고 개발하고 발휘하고 살 것을 부처님은 원하시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