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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피난기
관악산을 등지고
6.25날 정오 때다. 형님이 경영하는 자동차 부속품상회 점포를 여느 점원과 함께 돌보고 있었다.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간 형님이 돈을 못 찾고 왔다면서 걱정이 태산이다. 점포 위치가 서울 역전 우측 강생호텔 벽과 붙어 있는 적산 건물 일부를 점유하고 있어 거리 상황을 훤히 알 수 있다. 갈월동 갈림길이 보이는데, 육군 본부서 나왔다면서 지프가 외치고 다닌다.
“휴가 나온 장병에게 고한다. 이 방송을 듣는 대로 즉시 본대로 귀대하라.”
라는 명령이다.
그런가 하면 남대문 쪽에서 용산 쪽으로 트럭이 달려간다. 또 지나간다. 점포에 들어온 사람들의 얘기인데,
“유혈이 낭자한 부상병들이 실려가고 또 실려가고 하니 사변은 틀림없는 사변이 터졌어.”
남산 꼭대기인지 고사포 소리가 다 들려오고, 거리로 나와 하늘을 보니 북측 정찰긴지 소련제 미그 21인지 시커먼 비행기가 무지미하게 유유히 날아가는 광경을 내가 직접 본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거리엔 선무 반이라면서 지프가 쉴 사이 없이 다니며,
“우리 용감한 국군 용사들은 의정부, 동두천 방면에서 적과 용감히 싸우고 또한 격퇴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치 말고 일상생활에 충실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렇게 해서 첫날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27일이다. 그날 저녁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 라디오 소리는 계속, 우리 국군은 용감히 잘 싸우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동요 말고 생업에 충실하기를 바란다는 방송이다.
그런데 빗소리와 함께 멀리서 대포 소리인 듯 쿵쿵하는 소리를 느꼈다. 아이들은 자고 형님, 형수, 나는 맘이 바빴다. 배낭에 쌀, 밀가루, 감자 등 전쟁이 터지자 시장에 먹을 것이 동이났다. 넉넉히 못 산 것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밤이 새도록 잠이 안 온다. 비바람 소리만 유난히도 쓸쓸하고 불안하다.
새벽녘이다. 갑자기 푸릇한 섬광이 번쩍하더니 굉음이 “쾅”했다. 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을 연상했다. 순간적인 고요가 지나가고 홀연히 밖에서 들리는건, 피난민 소리다.
-우리도 나가야겠구나. 형님! 어쩌겠소? 응. 나가자.
업고, 지고, 매고, 걸었다. 상도동 개울가를 따라 저 아래쪽에서 남부여대하고 상류 쪽으로 올라간다. 들려오는바, 한강 대교가 폭파됐고, 서울 시내는 인민군이 벌써 점령했다는 등 사람들이 모두 관악산을 향해서 갔다. 왼편으론 저 아래로 한강이 보인다. 날은 밝아오고 피난민 대열에는 강을 건넜는지 몸이 젖어 팬티만 입은 채 허리엔 권총을 찬 경찰관인듯한 이도 함께 하고 있었다. 멀리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더니 불현 듯 카빈총인지 엠원 총소리인지 “피융!” 하고 내 앞을 스쳐가는 듯, 오른편 논두렁에 퍽 박힌 듯하다. 머리가 쑹긋했다. 그래도 사람하나 안 다치고 소리만 지나갔다.
“아! 사람이란 그리 쉽게 총에 맞는 것이 아니구나”
대중이 가는 데로 따라간다. 한낮이 돼 가는데, 지칠 대로 지쳤다. 그래도 총소리가 멀어지니 좀 마음이 놓인다. 이윽고 내리막길이다. 왼편으론 한강이 안 보이고 산이 막혀서 살 것 같다. 이른 새벽에 나와서 이제껏 걸었으니 밥 생각이 간절했다. 관악산 중턱쯤에서 서남쪽으로 얼마를 걸었는지 같이 온 피난민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느 밭두렁에서 요기했으면 싶어서 륙색을 밭 언덕에 내리고 무언가를 먹었다. 산을 등지고 내려오니 총소리 대포 소리가 멀어져 안심은 됐지만 그래도 남이 가니 우리도 따라나선다. 그날 결국 수원까지 왔다.
수원서 안성으로
수원 성문 위에는 무장 국군이 경계가 엄중하다. 성문 바로 앞에는 가게가 열려 있었다. 건어물 상회였다. 눈에 띈 것이 새우 마른 것이다. 먹을거리라곤 그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한 보따리 사서 가슴에 안고 먹어가며 수원역에 당도했다. 마침 화물차가 길게 뻗어 있다. 아이고, 이제 살았구나 하며 식구들과 함께 탔다. 얼마나 타는지, 콩나물시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얼마나 밀고 들어오는지 숨이 막힌다. 발과 몸과는 위치가 다르다. 내 엉덩이 옆엔 아기를 안은 아줌마가 아기 숨 못 쉰다고 비명을 외친다. 더위는 고사하고 숨이 막힌다. 형수도 애를 업고 보듬고 도저히 못 참겠다. 일단 내리자 플랫폼에 내려서니 기차 지붕이고 화물차 안이고 사람사태다. 시간은 어둠살이 깔리고 거기에다 공습경보다. 역원이 폼에 나와서 외친다. 흠에 있지 말고 피난들 하시오. 일단 역 대합실로 들어갈 수밖에. 여기는 위험성은? 안정치가 못하니 나가자.
이렇게 역사를 빠져나왔다. 걷고 보니 성벽을 오른쪽으로 끼고 가다 보니 도심을 벗어났다. 밭 가에 집이 있어 들어가니 식구들은 피난 갔다면서 노인 혼자다. 하룻밤 묵게 해 주시오, 하고 사정했더니 쾌히 승낙해 주었다. 비로소 륙색을 풀고 밥을 어떻게 익혀 먹었는지... 다음날 29일 아침이다. 전세가 어떨까 알아볼 길이 없다. 아침은 큰 부엌을 이용해서 무짠지도 얻어먹었다. 전세가 좋으면 곧 돌아갈 수도 있겠지 하고 수원서 광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동북으로 향해서 가는데, 앗! 어느 동리인지 갑자기 피난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이젠 용인을 향해 가는 것 같다. 추측건대 수원, 광주, 용인 이 근처를 맴돌고 헤매는 기분이다. 포 소리, 총 소리가 멀어져야 되겠는데 어떤 곳에선 도로 싸움터로 접근하는듯 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형님과 의논해서 남쪽으로만 가기로 했다. 그리고 작은 길로만 따라갔다. 안성으로 왔구나. 그래도 멀리 대포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안성은 몇 달 전까지 하숙하고 교편생활을 좀 한 곳이다. 그래서 안청중학교 김태영 교장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기꺼이 반가이 맞아 주셨다. 집도 크고 방도 여유 있어 우리 식구는 편히 하루를 쉴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6월30일 미군이 꽉 들어왔다. 안성여고 교정인 것 같은데, 김태영 교장이 내게 미군부대 통역을 하라고 권유를 하는데,
“이 전쟁통에 통역이라니요? 집엔 부모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나혼자 떨어져 있겠습니까? 요즘이었다면 생각이 다를까. 그런 것 생각할 겨를 없이 식구들과 함께 떠나야했다. 들리는바 안성도 오늘쯤 소개령이 내려질 거라고 했다. 전세는 계속 밀리고만 있다. 오늘은 진천으로 왔다. 중로 길이 험한 데는 전혀 없고 평탄했다.
어지간히도 남으로 내려왔는데도 포 소리는 늘 따라오는 것 같다. 증평 어느 산모퉁이에 있는 제법 큰 기와집에 들러 비도 피하고 요기도 해야겠기에 들렀다. 외양간엔 감자가 그득히 쌓여 있다. 노인에게 감자 좀 팔아주세요 하니, 기꺼이 그러시오 하며, 두 바가지를 담아주어 그곳에서 당장 긁어 삶았다. 서울서 여기까지 오면서 제일 배불리 먹었다. 비는 점점 굵게 쏟아지고 큰길에는 국군 장교 지프와 지에무시도 매우 분주히 오가고 전세가 늘 걱정이었다.
비가 개어 또 걷는다.
문경 새재를 넘어
어떻게 왔는지 음성역에 당도했다. 요즘 같았으면 이렇게 걷는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 더군다나 7세 어린 유치원생이고, 다섯 살배기고, 아이들도 겁이 나는 듯 싶었다. 늘 포소리와 총소리가 가까이 들릴 때마다 걷는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연풍에 왔는데 단양을 가면 기차가 있겠는데, 하면서도 안전을 택하여 새재를 넘는다. 내내 신작로를 걷다보니 군인들 왕래도 이젠 여사다. 소문에는 인민군이 국군으로 변장해서 넘어와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활동을 많이 한다 하고, 이젠 피난민도 많이 줄었는데 마침내 빈 트럭이 연풍서 문경으로 간다는 것. 번쩍 손을 들어 애걸하다시피 좀 태워 주오, 하고 사정을 했다. 타라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구세주다. 시간은 해질녘이다. 서울을 떠나서 처음 차라는 것을 탔다. 날아가는 듯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대뜸 느낀바 여기 경상도는 무릉촌과도 같구나. 전쟁 기분이 안 난다. 어느 여인숙을 찾아 방 두 칸을 얻어 밥도 해먹고 내일을 위해 버스부(버스정류소)를 미리 알아 놓았다. 아직 버스가 다닌다는 것이다. 꼭 거짓말 같다. 안심하고, 하룻밤이 자못 길다. 영주행 버스를 타고 보니 평상시와 같았다. 영주에 내렸다. 그러나 문경 점촌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이곳은 전쟁터다. 봉화서는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말은 없지만, 내심 불안에 떨고 있다. 풍기 가는 버스는 없다. 왜? 죽령 넘어 단양 만하강서 대치 상태. 풍기가 지척인데 걸어서 가자. 줄포 안정을 무사통과, 남원 다리를 국군이 지키고 있다. 검문검색도 처음이다. 적이 아님을 알았는지, 빨리 가시오 한다.
읍내가 와글와글 떠나야 할지 있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풍기도 적굴이 되고
이윽고 집에 들어왔다. 맨발이다. 식구들이 이제야 합쳐졌다. 그 환희, 감격. 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금계동 윗마을 동 하인이 와서, “약국 어른요, 소개령이 내렸으니 피란들 가라이더.” 하고 집집이 외치고 사라졌다. 서울을 떠나 닷새 엿새째 겨우 집에 당도하자마자 선 채로 떠나야 한다니. 하룻밤도 못 자고 아버진 무엇을 싸시는지 등에 걸빼를 준비하시고 농에 무엇을 찾는지 바쁘다. 여기 금계동 성줏들에서 남쪽을 보면 풍기역 기관고 물탱크가 둥글게 보이고 지금은 남으로 가는 환물차가 길게 뻗고 있다. 그 위에 하얗게 사람들이 타고 있다. 지난 수원역을 연상했다. 화물차 타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 또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앞장서신다. 아랫마을 서부동서 누가 왔다. 어디로 가십니껴? 산어실(산법동)로 가세. 역시 이고 지고 걸리고 산법동, 산어실로 왔다. 아버진 도를 믿고 있기에 풍기에 도 꾼들이 그리로 모이는 것 같다. 그 집은 이웃 딴 집으로 갔다. 우린 권 생원 집이다. 저녁 해 먹기가 바빴다. 집 뒤엔 언덕이 있어 굴을 팠다. 총알과 포탄만은 피하자는 것. 우리 형제가 부지런히 팠다. 언덕이 꽤 높으니 든든하다. 8~9명은 쪼그리고 앉을 수 있겠다. 그런데 모기가 원수다. 그날 저녁은 수제빈지 감잔지 끼니를 치렀다. 불빛은 금물이고 대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조그만 단지에 정화수를 떠놓고 절하고 주문을 외웠다. 어른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을일불일삼록사 을일불일삼록사” 약 10분 정도 계속했다. 밤사이 세상은 달라졌다. 아군은 안정과 영주 사이에 포진하고(짐작에) 인민군은 풍기를 완전히 점령했고 자정이 지나 새벽3시쯤인지 포격전과 총격전이 함께 벌어졌다. 여기 산법동은 완전히 진중에 갇혀 있다. 남쪽 국군 측 포성은 “쉑쉑”하며 지붕 위를 지나가고 집 바로 위에서는 따발총 소리가 약 두시간 계속 했다. 잠이 올 까닭이 없다. 굴 안에서는 모기의 습격을 피하려고 연신 부채질이다. 아마 4시쯤 됐을까? 좀 멀리서 카빈총 소리가 한방 나더니 그것이 신호인 듯 피아간의 열전으로 약 한시간 이상 계속 이어졌다. 날이 밝으니 너무 조용하다. 아침은 또 어떻게 하냐? 연기를 피울 수도 없고, 쥐 죽은 듯 세상이 고요하다. 애들도 겁나는지 기척이 없다. 한낮이 되어가는 무렵 굴에서 대청마루 뒷문으로 시야가 훤히 보인다. 왼편으로 노인봉 산등성이 보이는데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띈다. 가만 보니 군인이다. 저편 남쪽을 향해 겨누는 것 같기도 하고 땅을 파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히 인민군이다. 또 그런데 이집 사립문으로 인기척이 난다. 인민군관과 병사 한명이 어깨총을 하고 함께 들어온다.
“이 집주인 없소?”
“아, 예.”
집주인 권 노인이 맞아준다.
“여기 당신밖에 없소?”
“아, 얘, 타동네에서 온 피난민이 있습니다.”
“어디 그 사람들 좀 봅시다.”
그러더니 뒤꼍으로 들어온다. 드디어 우리 앞에 섰다.
“동무들 수고들 하오.”
“아, 예. 수고들 하십니다.”
“동무들 여태껏 고생들 많이 했습니다. 이젠 해방입니다. 돌아가셔서 마음껏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우리 김일성 장군께서 남조선 인민 여러분을 해방하려 여태껏 노심초사 많이 해왔습니다. 그동안 토지 사업, 도로 공사, 교창 철도 전기 사업 등 끝없이 해 왔습니다. 그러니 남조선 여러분도 이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입니다.”
하고 정치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따라온 병사는,
“이 집 주인 누귀요? 아, 할아버지요? 우린 제일선 선발부대로 왔습니다. 보급부대가 아직 당도 안했으니 우선 먹을 식량 좀 이 마을에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 그러겠습니다.”하고 곧 쌀자루를 가져 나와 이 집 것 담고 그리고 함께 나갔다. 우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가자마자 부랴부랴 점심을 때웠다. 오후 2시쯤인가. 아까 그 군관이 또 왔다.
“동무들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미군 정찰기가 왔다 갔어요. 곧 공습이 올 겁니다.”
이 소리 듣자 잠시도 못 있겠다. 어디로 갈 거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짐부터 챙기고 아버지께서 한학자셨기에 육갑을 짚어 보신 것 같다. 동북방으로 가자. 한 시간 내로 벗어나 순흥 쪽으로 가다가 우금동을 향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황주 서 어른댁을 갔다. 빈방을 치우고 그날을 보냈다. 다음날 삼가동을 갔다. 아버지께선 일구월심 자손지계를 신조로 삼아왔다. 6.25 일주일 전에 서울로 올라오셔서 우리 형제를 앞에 불러 결판을 지으려 하셨다. 시국이 매우 수상하니 서울 생활을 이제 정리하여라. 집, 점포, 상품 모두 빨리빨리 정리하여 풍기 와서 살도록 해라. 급하다. 곧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 그리 결심하여라. 우선 급한 대로 손자는 내가 데려가겠다. 그리 알아라. 그때 형님이 내게 묻는다.
“너 생각은 어떠냐?”
그렇지만, 내 생각은 아주 거리가 멀었다. 그건 서울서 공부하겠다는 욕심으로……. 아버진 수차 이렇게 우릴 타이르셨다. 그러니 피난 차 걸으면서 나 혼자 속으로 아버지는 신이다! 하고 주문을 외웠다. “내 몸에 위험이 범접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다시 서울로
삼가동 윗동네에 안 생원 집에 거처를 얻었다. 커다란 밤나무가 있어 하늘이 잘 안 보인다. 저 아래로 우금을 지나 영주, 안동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들리는바 예천, 안동도 점령했다고 소문이 돌아 정치 공작 대원들의 선전술이겠다. 삼가동 와서 이삼일 됐는데 구진호라는 내 친구 한 사람은 벌써 풍기면 인민위원회 직원으로 활동하기 시작, 그 사람 어른은 경남 김해인으로 아버지 연배다. 피난도 먼저 말한 산어실 같은 집에서 했다. 그분이 내게 교원 직업 동맹에 가입하라고 내게 권유해왔다. 그럴까 하고 신중 고려 중인데 북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이용군을 강제 모집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들렸다. 저 아랫마을 우금서 개울을 따라 안 보던 사람 둘이 이쪽으로 올라온다. 안 생원 댁 아주머니가 어서 좀 피해 있으소 하며 싸리나무로 엮은 둥근 독에 들어가 그 위에 마다리로 덮고 마른 소깝 한 단 세워 놓았다. 그 사람들이 집집이 힐끔 살치다가 그냥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삼가동서 한 주일 남짓이 살아보니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답답기가 기가 막힌다. 형님, 형수 다 평생 촌이라곤 모르다가 감자, 밀떡, 수제비, 좁쌀 등. 쌀은 드문드문 흠식으로만 끼니를 이어가니 서울 생각이 간절하다. 자동차 부속품 여기저기 외상 깔아놔, 또 은행거래도 적잖게 하는 처지인데 세상이 이렇게 됐으니 답답할 지경 아니겠는가. 두 손 놓고 여기서 종정까지 어떻게 기다리기만 하겠는가. 올라가서 수습을 해야겠어요 하고 대책을 말하니 아버지는 신중히 생각한 결과.
“방법이 없구나. 그러면 가거라. 단 최대한 빨리 수습, 정리해서 내려오도록 해라. 네 동생을 데려가거라.”
결국 젖먹이를 업고 내외 동생 넷이 떠났다. 소백산을 넘었다. 단양 하일이던가. 만하강을 건너려는데 그곳 빨갱이 한 사람과 정치공작대원 둘이 무기미하게 우리에게 접근해왔다.
“동무! 어딜 가오? 또 어디서 왔소?”
“풍기서 왔소. 왜 그러오?”
“보아하니 당신 경찰 아니요?”
“뭐요, 경찰? 놀리지 마오.”
나루터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려는 참인데 강 하류 쪽에서 남녀 두 사람이 왔다. 남자 왈,
“동무 수고하오. 그 동무 뭐요?”
“이 사람들 풍기서 나와 서울로 간다는데 수상 쩍해서 그러오.”
“난 학생이고 형님은 상인이요. 난 박헌영 선생을 따르고 있고, 우리 형님은 여운형 선생의 근로 인민 당원이요. 그리고 평소 마르크시즘 신봉자요.”
하니까
“그 동무래 의심없는 사람이외다.”
그래서 의심을 풀었다. 나룻배는 5시에 뜬다니 자유로워졌다. 이 날 숙박 목표를 봉양으로 정하고 곧장 큰길 따라갔다. 봉양엔 내 처가가 있기 때문이다. 봉양 역전을 지나려는데, 인민 보안대라면서 우릴 붙든다.
“어디서 어디까지 가오?”
질문에 응해줬다. 금일 잘 곳은 봉양면 팔송리 강길수 씨 집이오. 하고 응하고 있는데, 안쪽 구치실에서 포승줄에 묶인 사람을 끌고 나와 바로 밖으로 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는데,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뇌리를 스쳐갔다. 우린 가도 좋다 해서 나와 팔송을 향해 가는데 역 건너편 냇가에서 탕, 탕 총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아까 그 사람 총살이지 싶었다. 뒤에 들으니 봉현면장을 지낸 박모 면장이라고 들었다.
팔송리 처가에서 자고 다음다음 7월18일 오후에야 상도동 집으로 들어갔다. 20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이웃에 눈에 띌세라 겁이 나고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다. 숨을 죽이고 살아야한다. 왜냐하면, 어느 집에 젊은 사람 있는 걸 알면 의용군으로 잡아가기 바빴다. 형님은 부속품 거래 정리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고 나는 형님을 도와서 조흥은행에 가봤으나 아직 폐쇄상태다. 돌아와서 상회를 지키고 있을 뿐 간간이 피스톤 링 브레이크와이어 샤프트 등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돈하고 거래되는건 못 봤다. 상품정리, 금전정리 목표야 뻔하지만, 단시일 달성될 까닭이 없다.
공습은 나를 자유롭게
서울 온 지 나흘만이다. 시내서 상도동으로 가는 도중, 청파동 입구에서 민청 여명원들이 나와 “동무, 잠시 여기 좀 들어갑시다.”라면서 다짜고짜 사람들 붙들어 실내로 들여보낸다.
하마 실내가 가득 찼다. 한 군관 동무 일장 연설
“지금 우리 인민군대는 호남은 거의 점령을 다하고 남은 곳은 대구, 부산뿐입니다. 후속 부대가 가야만 우리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통일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열렬한 애국정신을 발취하여 의용군에 지원합니다.”
하면서 용지를 다부지게 나누어 준다. 쓰고 나면 곧바로 용산구청으로 가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훈련 받습니다 하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 주소, 성명 쓰자마자 “줄 서 주십시오. 용산구청으로 갑니다.” 우물딱 주물딱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벌써 밖에 대열에 서 있다. 생각건데 너무 어리석다. 어쩌려고? 이때다. 윙……. 공습경보다. “여러분, 들어오십시오.” 한 대 건물 벽에 딱 붙어 몇 발짝 나가니까 그 옆에 건물하고 사이에 공간에는 휴지고 쓰레기고 버려져 있는 좁은 곳을 쓱 안으로 들어가니 블록 담이 있어 의지할 벽돌을 딛고 뛰어넘었다. 풀밭이고 바로 하수로 시궁창이다. 하수로는 용산역으로 뻗어갔다. 경보는 계속되고 멀리서 호각소리가 들리지만 아랑곳없다. 용산 역전 광장 변두리에서 상황을 보고 있는데, 폭격이다. 꽝 소리와 함께 엎드렸더니 배가 땅에 닿아 덜덜 울렸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살피니 역 기관고에서인지, 새까만 연기인지 먼지인지 사방을 휩쓴다. 손수건에 침을 뱉어 코와 입을 막고 벽에 붙어 가다가 대로도 눈치 봐가며 쏜살같이 가로질러 뛰었다. 어디서 봤는지 호각 소리가 요란타. 내가 아니겠지 하고 숨어버렸다. 이번 공습경보는 유달리 오래간다. 반 시간이 훨씬 넘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한남동 어느 오르막길인 듯 뛰며, 쉬며, 숨으며 갈림길이 나왔다. 맞은편에 큰 느티나무 밑에 굴이 있고, 굴 속에는 인민군과 여자 노무원이 더러 섞여 있다. 나를 봤는지 “동무! 빨리 들어가오.” 소리 지르니 그곳 앞쪽에 창고가 있어 뛰어 들어갔다. 역시 여기도 인민군 사병들과 여성 노무자인 듯한데, 내가 뛰어드니 모두 내게 시선이 집중 놀란 듯 표정이다. 갑자기 기총소사 소리가 땃땃땃 요란히 들린다. 폭격소리도 뒤섞였다.
묵묵히 해제되기만을 대기하고 있다가 마침내 사리엔 소리다. 모두 반가운 듯 움직였다. 나는 그곳을 나와 한강 쪽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백사장이 나왔다. 나룻배를 타려고 가는데 난데없이 쾅! 소리 공습도 아닌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사한폭탄 터지는 소리였다. 나룻배를 타고 흑석동을 가로질러 언덕길을 넘으니 상도동이다. 집에 당도했다. 형수는 빨래하느라 바쁘다. 사람이 반갑지 않은 세상. 그날 저녁에 형님이 자전거를 몰고 왔다. 야야! 넌 내일 풍기로 먼저 내려가거라. 난 뒤에 가마. 하고 돈도 좀 마련해 왔다. 그러죠. 여기서 의용군에 붙들려 가기보다는 집으로 가야지 하고 책과 옷이랑 고리짝에 넣어 자전거에 실었다. 아침 먹자 곧 떠났다. 이것이 형, 형수, 조카 만국과의 영 이별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전거 덕에 고깃국에 잇밥.
전쟁이 터진 이 땅에 보행으로 피난 다니는 것도 수월치가 않은데, 자전거로 피난간다니. 해학 같은 얘기다. 하지만, 현실로 내게 왔으니 이 난중에 호강을 맛보기도 하는 것 같다. 남한산성 고갯마루를 지나 쏜살같이 광주읍을 지나려는데, 인민군 총 멘 병사 둘이 딱 버티고 나를 세운다.
“동무, 어디가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난 경상도 풍기까지 가는 사람이오.”
“이 자전거 우리 군에서 징집 좀 하겠수다.”
“그럼 난 어떻게 갑니까?”
“여하튼 저기 막사에 가서 얘기합시다.”
막사로 들어갔다. 군과 동무라면서 내게 해명 겸 설득이다.
“이 자전거 완전 몰수가 아니고, 급하게 전령갈 일이 생겼으니 몇 시간만 기다리면 돌려드리겠소.”
“그래요? 그렇다면.”
하고 고리짝을 내려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마당에는 천막이 쳐 있고 그 옆에는 눈썹 마루가 있다.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해는 한낮이고, 점심이 시작됐다. 방엔 군관 동무들 누런 견장 단 사람들이 상머리에 앉으며, “동무도 이리 오시오. 같이 먹읍시다.”, “예, 고맙소.”하고 먹었다. 잇밥에 고깃국이다. 그동안 피난 다니며 먹세는 말이 아니었다. 감자밥, 국수, 수제비, 잡곡밥을 면치 못했는데, 오늘 여기 인민군 막사에서 잇밥에 고깃국이다. 얼마나 맛이 있는지 배추김치도, 깍두기도 있을 건 다 있다. 고깃국이 진국이었다. 또 후식도 있었다. 이곳 광주는 사과곳 이기도 했다. 군막에서 음식 먹어 보기란 처음이었다.
지루하게 기다렸다. 4시가 되니 초조했다. 속징이 날 지경이다. 왔다. 동무! 가시오! 예, 고맙수다. 하고 고리짝 단단히 묶고 달렸다. 이천을 지나려는데 이게 뭐야, 또 이천군 인민위원회 또 붙잡는다. 그래. 누가 날 붙드느냐? 담판이다.
서울서 민주사업 하다가 이제 부모 계신 곳에 가서 민주 사업, 통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려는데, 날 여기서 붙들면 어떡하오? 따지고 좀 덤볐더니 예, 알겠소. 가시오. 무사통과할 요령을 터득했다. 백운면 방아다리 마을에 와서 권순성을 물어 들어갔다. 처고종이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박달재를 넘어 봉양 팔송와서 점심 먹고 바로 나섰다. 죽령재를 넘어 희방골을 미끄러지다시피 오는데 뜻밖에 부역군을 만났다. 이 전쟁 중에 어떤 젊은이가 자전거를 타고오니 이상한 눈치다. 그러나 금계동 부게밭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처음에는 정치 공작 대원쯤으로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순수 피난민이더라.
집에 들어왔다. 빈집이다. 아직도 삼가동 안 생원집에 계실 거로 생각하고 자전거는 헛간에 노세워 가마 댁으로 가려놓고 식량이나 좀 가져갈까 하고 부엌과 방방이 다 잠겨 있으니 방법이 없구나. 설마 굶기야 하겠나 하고 빈 몸으로 올라갔다. 어둠 살이 깔리고 고요가 왔다. 갑자기 형님, 형수 생각이 간절하다. 혼자 왔으니 아버지께 어떻게 여쭐꼬. 생각하는 중에 다 왔다. 코딱지만한 호롱불 켜놓고 그마저 밖에 비칠세라 까만 보로 가리고 수일간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네 형은?” 전쟁을 생각해보세요. 그리 빨리 와지겠습니까? 아버지 말씀이 더는 하시지를 않았다. 저녁은 수제비다. 어제 광주서 먹은 잇밥과 고깃국이 홀연히 생각났다.
며칠이 지나고 양식이 다 됐다. 금계동 성주덜집으로 양식 가지러 왔다갔다해야 했다. 쌀은 줄어가고 식구는 여섯. 삼가동에 전쟁 끝날 때까지 있기로 하나 언제 끝날는지. 이 무렵 전황은 어떤가. 대구, 부산만 남아있다는 소문. 때는 1950년 9월 12일경. 의용군대 아닌 노력동원에 걸려 동원에 응하면 식량군을 준다는 소문에 남과 같이 따라나섰다. 평은면 냇가에 숨겨놓은 탄약을 평은 역으로 밤새도록 운반하는 일인데, 봉현면에 사는 천 선생이라는 분과 친해져서 탄약을 함께 날랐다. 평은 역에 무무는 고빼차에 실어다 주는 일이다. 중로에는 총 멘 인민군이 일정 간격으로 지키고 있고, 동원된 사람이 수백명이다. 천 선생과 나는 꼭 붙어 다니는데, 새벽 4시쯤이다. 고빼차가 남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북으로 간다는 걸 알았다.
“여보, 천선생, 우리 요령껏 빠져나갑시다.”
그렇게 뜻을 합쳤다. 동틀 무렵인데 아직은 어둡다. 역에서 빠져 나와 마을 뒷길로 문수, 영주를 향했지만, 북향인지 서향인지. 새벽인데 영주 서천교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
안정, 봉현 와서 “우리 인연 있으면 또 만납시다.” 하고 헤어졌다. 곧바로 집으로. 거리가 너무 고요하다. 인민군, 민청 연맹이니 교문직, 보안대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저 남쪽 예천, 안동 방면에서 대포소리 쿵쿵 가까워진다. 크게 들리는 것이 너무 빠르다. 직감했다. 인민군 총퇴각이다.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총퇴각하듯이 북괴 인민군도 그 용맹성을 어지간히 자랑하더니 들판엔 가을이라 황금빛 바람이 나부끼는데 최후의 패잔병 숨을 헐떡거리며 이곳 금계동 성줏들을 지나가고 있다. 약 한시간 정도 너무 고요하다.
돌연 부고밭(금중 앞마을) 앞길에서 팡! 귀를 째는듯한 총소리다. 모처럼만에 듣는 소리 나더니 저 아래 참나무배기 서부동 입구에서도 카빈총 소리다. 딱 한방 났다. 그러더니 외치는 소리 “해방이요!” 이윽고 사람소리, 뭐라뭐라 중얼거리는 소리, 논둑길을 지나가며 웃는 소리도 들린다. 나중에 알았는데 UN군 복장을 한 군인들이다. 내 집은 논들 한가운데 5, 6가옥 밖에 없는 마을이다. 사방 논두락 길이다. 그날 앙침에 서부동 사는 친구 구진호(전에 언급)군이 당분간 좀 피해있자고 뒷집 다락방에 올라가 숨어 있는 참이다. 선발대는 피해야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군 수복이 됐다. 국군은 북진 중이고, 풍기읍에는 대한 청년단 경찰이 오고 치안이 확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으로 피난을 못 간 사람은 공연히 겁을 집어먹고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우리 국군이 추수를 앞세워 수복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추수를 하고 겨울이 왔다. 국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운산 혜산진도 점령하려는데 이게 웬 말이냐! 중공군이 대거 침입이라니. 1.4후퇴다. 서울이 거덜나고 원주도 빼앗겼다는 소식. 평창과 제천서 싸우고 있으니 단양, 풍기가 매우 불안하다.
아이들과 선생님
1951년 2월이다.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원주, 제천이란다. 뺏고, 뺏기고. 단양이 흐느적거리고 마나강을 사이에 두고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 마침내 UN군이 풍기에 들어왔다. 5, 6집 밖에 없는 내 집 바로 뒤 채소밭에 탱크 2대가 왔다. 그날 밤엔 또 피난 갈 생각하니 잠이 안온다. 문풍지가 바람에 윙윙거리고 몸을 움츠리고 폈다가, 구부렸다 하며 이 어린 조카들 데리고 어른들 모시고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결에 글자가 나타났다. “杞憂” 다. 공연한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불안하지만 피난 보따리는 더 이상 안 쌌다. 몇 주 뒤다. 전선은 북쪽으로 멀리 가고 풍기는 평온을 찾았다. 구진호는 경찰에 또 대한청년단에 불려다니다가 부산으로 피신차 가버렸다. 이러할 때 계삼정씨 금계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놓고 하루는 집에 오셨다.
"약국 어른댁에 자제분 계시죠. 집에 가만있으면 뭐합니까. 바람도 쐬고 우리 학교에 보내세요.“
사람 보기를 꺼리는 편인데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운데 방에서 나타났다.
“예, 나가고 말고요. 그러죠.”
月과 日은 전혀 기억이 없다. 즐거웠다.
교실 바닥이 아직 매우 차다. 가마때기를 깔고 흑판이 희끄므레하다. 그래도 글자를 쓸 수 있으니 재미를 느낀다. 아이들이 처음이니까. 4~50명은 됐을까. 영어도 가르치고 공민도 가르치고 닥치는 대로 맡았다. 시험 때가 되니 종이가 질이 말이 아니다. 그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첫째, 차병태 씨. 국어도 맡고 서무도 봤다. 이종우 씨. 한문, 수학을 많이 했고 선비다. 송지향 씨. 한문과 동양사를 가르쳤고 지조가 곧고 평생 양복이란 모르고 수염도 안깎았다. 한진원 씨. 이분은 평양 출신으로 의지가 강했다. 김상규 씨. 이분은 거인형 몸매인데 말소리는 비단결 같다. 부통령 지낸 김성수 씨의 조카분이다. 그분의 어른 김재수 씨가 일제 말에 이곳 금계동을 찾아 자리를 잡으셨다. 김진우 씨. 제일 나이 적은 하이칼라 신사로 자유주의 의지가 굳다. 이 밖에 조영주 씨. 김승옥 씨. 심명렬 씨. 다 좋은 분들…….
이듬해엔 중학교로 인가가 났다. 아직도 전쟁은 끝이 안 나고 밀락 당기락하고 맥아더 UN군 최고 사령관이 물러나고 벤프리트 장군이 그 뒤를 이었다. 평화 협상이 판문점에서 협상중이다.
고공생은 다 중학생으로 편입되고 고공고공 하는 야유도 이제 안 듣게 되니 마냥 기쁘다. 성적도 차츰 우수생이 나오고 이범우 같은 학생은 도내 우수 웅변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재학생들은 교사가 아직 부실해서 보충 분실, 교실을 짓기 위해 석가래등을 학생들 노력동원으로 삼가동 뒷산 당골등에 올라가서 해오게 하기도 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엔 2, 3학년 학생들 모두 정돈해서 권기호 등 학생을 뽑아내 책임을 단단히 지워 보내곤 했다.
평소에도 그는 시험지는 물론이고 출석부 정리도 도맡아 해 주었다. 때로는 수업도 “야, 기호야 니 내없는 동안에 좀 맡아다고” 하고 부탁도 여러 번 했다. 그 밖에 정봉강, 강신호, 송문호 등도 몹시 생각이 난다.
덧글
내가 이렇게 평생 글이라곤 써보지 않던 내가 일전 금계중학교 19회 박근식 군과 25회 서상호 군이 와서 동창회 소식 전해주니 도저히 거절이 안되어 근근이 과거를 더듬어 적었음을 양지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2010.4.5 영주시 휴천동 허윤
첫댓글 허윤 선생님의 글 단숨에 읽었습니다만 선생님의 놀라운 기억력에 실로 감탄을 금할 수 없네요.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6,25당시 전 13살이었는데 저희 가족도 피난을 못가고 허선생님이 풍기에서 껶으신 비슷한 일들을 직접 목격했기에 대부분의 광경들이 눈에 선합니다.다만 본문 마지막 줄의 "강신호"는 1회 "강신용" 동문의 착오인듯 하군요.또 본문 끝에서 3번째,5번째 줄의 "권기호"가 4회 "권기호" 동문이라면, 4회는 1954년 봄에 입학해서 1957년에 졸업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중심 시기와 잘 맞지않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
(예컨데 교실 지을 석가래를 해오게 한 일은 3회 이후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음) 선생님께 한번 확인드려보는 것도 가할듯 하군요.
허윤 선생님의 귀한 글! 잘 보았습니다! 대단한 기억력이십니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듯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요!!!
허윤 선생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1955년 1학년에 입학하여 선생님으로부터 공민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선생님의 조카 허만우와는 1.2학년 때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였던 김광수입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세요.
귀한글 접하고 감히 댓글을 올리지도 못하겠습니다.
교육이 백년지대계임을 일찍깨달으신 선생님들 덕분으로 오늘같은 부흥이 있는줄 압니다.
허나 그 어려운시기에 추운겨울에 씨앗을 뿌리시고
움직이신 선생님들
감히 존경하옵는다는 말씀 올립니다.
허윤선생님, 선생님의 피난시절과 금계고등공민학교의 인연을 엮은 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6.25때 서울서 중2년 학생으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처지에서 피난을 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이 더욱 현실감있게 와 닿았습니다. 저도 서울서 UN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한달 후 쯤 제천으로 피난을 왔다가 1.4후퇴를 당하여 풍기로 다시 피난을 와서 금계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학, 중학교로 승격되는 바람에 금계중학교 1회 졸업생이되었습니다. 3학년때 허윤선생님은 저희 담임이었습니다. 지금껏 저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선생님 무어라 감사해야할 지 모르겠슴디다. 60주년행사에 참석하여 선생님을 뵙게습니다. 검서합니다.
삼가동 뒷산에서 석가래용 쪽 곧은 낙엽송 들을 무거워서 밑둥을 끈으로 묶어 어깨에 울러메고 질질 끌고 오며 쉴때 떠들 던 추억의 그 장면이 파노라마 처럼 스처 갑니다..허윤선생임의 난중일기(?)인민군 점령하의 지역을 무사히 오갈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느 책에서도 읽지 못한 쇼킹 스토리 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