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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강.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롬 3장 23-28절).
들어가는 말
역사상 최대의 신앙 논쟁은 바로 의가 무엇인가라는 논쟁이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다루는 의와 교회에서 다루는 의가 성격이 다릅니다. 세상에서의 의는 한 마디로 분배의 의입니다. 어떻게 한정된 권력과 재물등을 의롭게 분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 세상의 의를 다루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다룹니다.즉 세상의 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분배의 의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입니다. 또한 이 땅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이 본문을 통하여 큰 은혜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23절)
23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소환해서 하늘에 있는 법정에 세웁니다.
2.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24-25절)
24-25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시온산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이 일년에 3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올라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삼대 절기 외에도 7월 10일 대속죄일에도 예루살렘에 와야 했습니다. 대속죄일은 히-욤 키프림(화목제의 날)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속죄소는 영원한 속죄주를 고대하게 하였다.
성전은 세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마당, 성소, 지성소입니다. 성소는 사람으로 치면 거실과 같습니다. 안방과 같은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 나무 상자가 하나가 있습니다. 이 나무 상자가 바로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 안에 언약의 두 돌판이 있습니다. 언약의 두 돌판이 있기 때문에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의 뚜껑, 커버가 바로 속죄소입니다. 이 언약궤 뚜껑위, 곧 속죄소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곳을 속죄소라고 하지만, 신약에서는 은혜의 보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시은좌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입니다. 이 힐라스테리온이 바로 속죄소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장 5절에서도 속죄소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속죄소를 지지합니다. 속죄소, 시은좌는 매년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붓는 곳입니다. 대속죄일은 일년 중에 지성소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거룩한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부정한 대제사장이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 밖에 없었습니다. 언약궤는 언약의 비석을 담고 있는 상자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원래 물건이 세 가지인데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 때 보니 한 가지 물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비석입니다. 언약의 비석은 돌판으로 만들어져서 그곳에 율법의 핵심요약인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뚜껑 이름이 바로 속죄소입니다. 이 속죄소에 언약의 피를 뿌립니다. 언약의 피가 뿌려지는 이 언약궤의 뚜껑위를 속죄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성전 중에서 가장 거룩한 곳을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돌판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언약의 비석이 있습니다. 또한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 하는데 이 속죄소 위에 언약의 피를 뿌립니다. 이 언약의 피가 뿌려지는 뚜껑위 곧 속죄소 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이 언약궤를 통하여 우리는 율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크게 도덕법과 제사법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언약궤 안의 십계명이 기록되어 돌판은 언약의 비석입니다. 이 언약의 비석은 도덕법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도덕법을 지킬 수가 있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 중에 이 도덕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신약성경을 보면 율법을 지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참고하지 않고도 우리는 구약시대에 도덕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7월 10일 대속죄일에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성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속죄제사를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지 않으면 저주받게 됨을 선포합니다. 만약 도덕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이 있다면 안 와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다 오라고 명령하시고 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범죄한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까불지 말고 의인인 척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와서 죄인됨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언약의 비석에 기록된 도덕법을 우리는 완전히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에게 언약궤 뚜껑위 곧 속죄소에 언약의 피를 뿌리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속죄소 위에 뿌리는 언약의 피는 흠없는 수염소의 피입니다. 이 피가 뿌려질 때 하나님께는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피가 뿌려질 때 이스라엘은 큰 축제가 벌어지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함성으로 가득 찹니다.
짐승의 피는 인간의 죄사함을 위하여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속죄일인 7월 10일은 죄가 용서받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지은 죄는 어떻게 될까하는 문제입니다. 어제의 대속죄제의 피가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짐승의 피의 한계입니다. 과거의 죄는 용서받아도 미래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다시 죄를 지으면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기 까지는 죄사함을 받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혼자 회개해도, 혼자 선행의 공로를 쌓아도 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지은 죄에 대해서 짐승의 피로 인한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의 한계는 바로 시간적으로 과거의 죄만을 위한 속죄제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죄일이 끝난 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 또 다시 일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을 통하여 세 가지를 교육하십니다. 첫 번째는 죄는 피를 통하여 속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공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죄는 피의 댓가를 치러야만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미래의 속죄를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대속죄일을 기다리면서 죄사함을 기대하였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속죄를 간구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피가 고작 하루밖에 효과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한 속죄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매년마다 다시 오고 다시 오고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겁니다. 용서받았지만 또 가면서도 또 약간 좀 슬픔과 기다림이 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도덕법과 제사법을 세우면서 무엇을 가르치길 원하셨을까요? 바로 진정한 화목제물이신 메시아를 바라보게 했던 것입니다. 훈련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화목제물 영원한 속죄주를 사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부정하고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부수고, 언약궤를 숨겨버렸습니다. 언약궤가 없으므로 속죄소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차가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인 죄사함의 축복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오직 뜨거운 지옥불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살아있으나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헤롯 성전에는 이 언약궤와 속죄소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또한 두 번째는 이 땅의 모형인 언약궤와 속죄소를 숨기시므로써 참된 언약이시며, 속죄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언약궤와 성전의 실체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주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언약궤 위 속죄소 위에 뿌려지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진정한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옛언약의 피와 언약의 비석은 모두 일시적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언약궤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언약궤 뚜껑인 속죄소도 없습니다. 또한 언약의 비석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성전과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실 짐승의 피는 부족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이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배상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귀에게 인간이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값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화목제물, 즉 무름이 필요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에게 그 죄에 대한 철저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인간은 그 죄에 대한 값을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피로써 우리의 공로로 절대 그 죄값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와서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을 천사나 사람들이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다 치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 커서 천사들도 하나님의 분노를 담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이 무한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진노도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존재는 이 온 우주상에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신성과 의로우심을 갖고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세우셨다”는 단어는 프로티데나이는 미리 확정하다, 미리 정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신데,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화목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인 예수님을 그의 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그러기 위해 예수께서 성육신하시는 것이 필요했습니다.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의 구속주로 정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속자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어야 했다는 것이 필연적입니다.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고, 친히 육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입니다.”인간이 지은 죄로 인한 하나님께 대한 속죄제물은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표적이었던 것이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에게 노하신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하자마자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게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며, 저주가 제거되며, 형벌을 완전히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속죄에 의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야 할 배상과 제물을 드렸고,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케 하셨다.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화해를 이루셨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취하셔서 이 땅에 33년 동안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완전한 순종을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순종을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서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저주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이 잘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 잘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피로 속량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하는데, 우리가 과연 죄값을 치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얼마를 값아야 죄값을 다 치를 수 있을까요? 이 죄값은 사실 죄인인 인간이 영원토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피”라는 단어 안에 구속의 전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속죄 전체를 함축하는 중요한 한 마디의 단어입니다.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풀 수 있습니까?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하나님의 진노가 풀린다.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제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의 순종으로 만족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화목제물로 제거됩니다.
여기서 “속량(Ransom, Redeem)”은 ‘아폴뤼트로시스’로서 값을 지불한 결과로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속전(헥사고라센)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애굽을 속량물로 삼으셨습니다(사 43:3-4). 대속(ransom, Redeem)은 노예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대신 지불하는 값이다(레 19:20). 구속(redemption)은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범죄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하나님께 배상(무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완전한 무름을 하였습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중보자는 불순종은 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배상(satisfacio)으로 하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속죄제사로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 그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배상을 다 치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속죄의 제물로서의 죽음을 아버지께 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육체로 보내시고 피를 흘려서 우리 대신에 그 죄값을 치루게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값없이 거저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갑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공로를 해서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속량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속량하셨습니까?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의 댓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값진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피는 미래의 죄도 용서하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천주교와 오늘날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신칭의의 법정적 칭의를 멸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막말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했으니까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받지 못했고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값을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겁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값을 완전히 치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짓는 죄가 더 큽니다. 믿지 않았을 때는 모르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는 알면서 짓습니다. 비교를 해보면 신자들의 죄는 알면서 짓는 죄이기 때문에 더 큰 죄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노바투스 같은 이단들은 예수 믿은 이후에 알고 지은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미래적인 죄까지도 그 다음 해를 또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예배 끝나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짓는 죄에 대한 그 죄의 값도 예수님께서 다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과 예수님의 피의 가치가 짐승의 피, 사람의 피를 훨씬 능가한 하나님의 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피이기 때문에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죄값까지도 다 용서하는 넘치는 죄사함의 은혜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로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써 철저하게 완전한 죄의 형벌. 죄에 대한 대가를 철저하게 100% 이상 넘치게 은혜로 이 모든 것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거기까지도 넘치게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알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도직을 없애지 않습니다. 끝까지 용서하시고 다시 불러주시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풍성하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다
화목제물로 번역된 힐라스테리온은 속죄소(NIV는 atonement cover)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라고도 부릅니다. 원래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덮다라는 뜻을 가진 카파르에서 나온 카포레트입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소에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무시무시한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이 존재합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 앞에 우리는 한 없이 낮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언약궤의 뚜껑이 그 율법을 덮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속죄의 피를 뿌리므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십니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는 단지 정죄받고 저주받아야만 할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위하여 그 율법을 속죄소로 덮고, 속죄의 피로 덮으십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한마디로 죄를 덮어주는 장소가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이 이 곳에 앉아 계십니다. 속죄소에 앉아서 무엇을 하십니까? 죄인인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합니다. 즉 속죄소는 시은소, 시은좌, 은혜의 보좌입니다. 왜 속죄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합니까?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를 덮어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소에 앉아 계시면서 죄인의 죄를 덮어주십니다. 그래서 속죄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죄인인 우리를 향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되 넘치게 풍성하게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이 예수님께 전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의 값이 예수님께 옮겨지고 예수님이 죄의 짐을 지셨습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그리고 우리에게 의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덮어주십니다.
0.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았습니다. 은혜라는 단어도 헬라어로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조건적인 선물이 아니라 값없는 선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값없는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조건적인 선물이 아니라 값없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값없이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은 값없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은 값없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에 어떤 공로나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값없이 얻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없으니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이 의롭다 하심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의의 효력을 가장 잘 설명한 곳입니다.
3.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의 법이다(26-30절)
26절을 보겠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의 진노를 그의 아들에게 다 쏟으셨습니다.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을 통하여 확실히 해결하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의로움의 뿌리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진노하실 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그의 모든 진노를 퍼부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게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니고 몇 대를 걸치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면 자기가 의롭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경 읽고, 어릴 때부터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마시고, 주일날 꼬박꼬박 예배 드리고 헌금하고, 나는 세상 노래도 안 부르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의롭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담배 피우고 술 먹고 가요 부르고 춤추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의롭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빠질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각에 빠지냐면 다른 사람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저 사람은 안 돼 나는 조금 했는데도 믿었는데 저 사람은 술을 먹고, 저 사람은 절대 안 되는 사람이야! 저렇게 죄많은 죄인은 절대 안 바뀌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예배생활하는 것을 공로로 생각하며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우리가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의 공로로 얻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법도 행위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 의를 얻는 것입니다. 믿음의 법은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어떠한 사람도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그런데 천주교회와 온갖 이단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또한 그들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그 의를 유지하는 방법은 또 다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처음도 믿음이요, 나중도 믿음입니다.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도 용서받는 것은 오직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피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 자체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이 행위로 지탱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며,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죄사함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특별히 유대인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시적으로 유대인에게 은혜를 한정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신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은 그 은혜를 유대인에게 한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저 야만인 것 같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할례자인 유대인도 믿음으로 의롭다하십니다. 또한 무할례자인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4. 우리는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굳게 세운다(31절)
31절을 보겠습니다.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율법을 파기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오히려 굳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어떻게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일까요? 율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은 크게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구별됩니다. 도덕법은 매우 좋은 법이지만, 우리가 지키지 못하므로 죄인인 우리를 정죄할 뿐입니다. 도덕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제사법이 필요합니다. 제사법을 통하여 사람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법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사법의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제사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굳게 세우셨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법이 파기되었습니다. 완전히 성취하였기 때문에 파기된 것입니다. 그냥 파기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는 오직 죄인인 사람을 정죄하는 기능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사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도덕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유한 양심으로 이 도덕법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키게 됩니다.
제사법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리스도가 완전히 성취하셨으므로 중단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분으로 말미암아 확증됩니다.여기서 세우느니라는 ‘히스타노멘’으로서 현재능동태 복수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3장의 결론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반면에 천주교회와 온갖 이단들은 은혜보다는 율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개혁주의 교회들은 은혜와 믿음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더 부도덕하고, 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희안하게 역사는 개혁주의 교회들은 청교도적이고 오히려 더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회와 이단들은 율법을 그렇게 강조하였는데, 오히려 더 악한 열매를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가 행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카리스입니다. 기쁨은 카라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감사로서 유카리스티아입니다. 카리스, 은혜를 받으면 카라, 기뻐지고 유카리스티아, 감사가 넘치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억지로 위선적으로가 아닌 기쁨과 감사로 인하여 자발적인 헌신과 봉사로 섬깁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율법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우리는 율법의 계명들이 달콤합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율법이 무섭지 않고, 아버지의 달콤한 사람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넘칠수록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넘치고, 이웃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 행위의 실천의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였을 때,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공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데 어떻게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율법을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의 실천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으므로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그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가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근본 정신은 자발성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무엇보다 싫어하십니다. 이러한 행위를 뭐라고 그럽니까? 위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싫어하는데 지키는 척하는 것이 바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위선적인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비록 적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중보사역은 감격하는 신앙생활의 근거입니다.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완전한 순종을 하시고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