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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18 이승만 외/ 고은
이승만
나라의 불행을 잘 썼다
나라의 모순을 잘 쓰고 남겼다
이겼다
벗어나지 못한 봉건
망명지 하와이의 임종 침대
거기서 평생의 의식을 놓았다
남은 헛소리
어린 시절
고향 황해도 두메 사투리였다
날래 오라우 날래 오라우
두번째 양자가 서 있었다
이윤 상사
1950년 6월 28일 낮
중앙청과
서울 시청에 인공기가 올라갔다
잠시 비가 멈췄다
싱거운 전투가 있었다
국군 이용문 대령의 마지막 명령
각자 해산하라
그때 일등상사 이윤이 남았다
제 가슴을 권총으로 쐈다
쓰러지며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부모도 없다 아내도 묻어줄 전우도 하나 없었다
옥례 남편
조선
만주
아라사
세 국경이 만나는 하싼
뿌질로프까 마을
조선 농투성이들 몰래 건너가
마적떼
아직 없는 두메
건너가
납작집 지어 비바람 가렸다
하루에 세 나라 풀 뜯어먹는
소와 염소 기르며
두만강 기슭
새 잡으며
고라니 잡으며
씨도 뿌리고 사냥도 하며 살아갔다
사냥꾼 장길성이 딸 옥례
개울가 빨래하다가
말 탄 사람 만났다
굶어
눈이 푹 꺼져 있었다
말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옥례가 젖은 손 털고 내려주었다
집에 가서
찬밥 가져다 먹였다
일본군에 쫓겨온 의병이었다
죽은 의병장의 말을 타고
쫓겨
쫓겨
강을 건넜다
사람은 낙배 타고
말은 헤엄쳤다
사흘을 굶었다
옥례는 그를 데리고 갔다
사냥에서 돌아온 아버지한테 간청했다
이 사람을 제 낭군으로 허락해주셔요
아버지의 딸이
이 사람의 각시 되게 해주셔요
아버지
아버지 장길성이 잡아온
장끼 두 마리를
낯선 의병 앞에 던졌다
완주 봉동명 총소리
점령지역 각 시군에
인민군이 파견되었다
전북 완주군 봉동면
인민군 한 명이 왔다
늘 웃는 풋내기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마을 처녀와 마셨다 함께 콩밭으로 갔다
이 사실이 알려졌다
동료 인민군이 달려와
총살했다 이렇다 할 재판도 없이
그뒤 봉동면 인민군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 주재했다
그뒤 두 명이 곧 떠났다
한 명이
인공 2개월을 주제하다 떠났다
공술은커녕
잎담배 한 대도 받지 않았다
그 풋내기 인민군이
따발총 공포 쏘아대며 떠났다
마을 흙담들 삭은 울바자들
어느 놈이 가든 말든
그 밑에
봉선화 잘 자라고 있다
김종호
어머니
누이동생
두 동생이
떠나는 인민위원장에게 붙잡혀 죽었다
도망쳐 살아난 김종호
도망간 인민위원장 딸 잡아다가
빈집에 끌고 가
강간한 뒤 죽였다
또다른 빨갱이 여편네 잡아다가
강간한 뒤 죽였다
세번인가
네번인가
다섯번인가
그렇게 죽이고 나서
보름달 뜬 밤
산꼭대기에 올라가 울부짖었다
그뒤 날마다 술이었다
술집 유리창 산산조각났다
술집 아낙 머리끄덩이 잡아 휘둘렀다
동네 남정네들이
그를 번쩍 들어 갔다
들려
팔다리를 퍼덕였다
어디로 떠났다 그의 집이 팔렸다
지나가는 여인
저게 누구?
저게 누구 마누라?
세모시적삼 속 살결
백옥
낭자머리 비녀
청옥
저게 누구?
헌병대장 사택으로 들어간다
허리 곧다
한달 전 빨갱이 마누라로 체포되었을 때
죽음 대신
대장의 세번째 네번째가 되었다
곧 양품점도 차린다 한다
심주식
유골이 왔다
동작동 국군묘지에 묻혔다
하얀 푯말이 섰다
육군하사 신주식
1932년~1953년
동부전선 대성산전투에서 산화하다
일주일째
열한번이나
빼앗고
빼앗던 고지
빼앗겼다
빼앗은 고지
그 고지 전사자 수습은 막막했다
적군의 시체인지
아군의 시신인지
아군 누구의 시신인지
군번도 뭣도 없어져버린 시체토막들
누구의 시체인지 몰랐다
누가 나인가
석낙구
이승만옹 도망가는 데는 신속했다
미국 대사 무초보다
하루 먼저
서울을 몰래 떠났다
대전
충남지사 관사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메밀국수를 먹었다
안면근육을 떨어댔다
수원이 위태롭자
대전을 버리고
대구로 갔다
국민을 서울에 놔두고 혼자 왔다
아직 대통령 서울에 있다고
국민을 속이고 왔다
독립운동도 그렇게 했는가
불안한 시베리아
만주
중국이 싫었다
안전하고 부유한 미국으로 갔다
이런 소리 함부로 지껄이면
술집 주인이 빨갱이로 신고한다
방첩대에 끌려가
허리를 못 쓴다
술꾼 석낙구
징역 3년 언도받았다
항소심도 3년
대법원 최종심 2년 6개월
다된 딸 취직도 안되었다
딸 약혼도 파혼
밤비가 밖에서 구시렁
신낙구가 안에서 구시렁
하와이 막일꾼 동포들의 돈을 마구 걷어들였다
명문대학 학위도 척척 받으며
이승만 옹 가는 데마다 동포들 당파를 만들었다 갈라섰다 그놈의 영감땡감
따발총알
허벅다리에 따발총알 들어 있다
뼈 사이에 끼어
그대로 둔 채 봉합수술한 것
내 몸에는 따발총알 들어 있다
그것이 자랑이었다
상이기장 둘
가슴에 달고
나일론 남방셔츠
단추 끼우지 않고 자랑이었다
별명이 따발총알
1년 전 결혼했다
도 위수사령관 중령이 주례를 섰다
그의 새각시
남편이 술 취하면
주먹맛을 보았다
이년
갈보년
처녀막도 없이 시집온 년
이런 똥갈보년
돈 한푼 안 가지고
시집온 년
다음날도 거리에 나가 떠벌였다
내 몸에는 따발총알 박혀 있다
서울역전
서울역전 기차시간 훤하다
호남선
경부선
경남선 상행시간 훤하다
머리 볶은 아줌마
펨푸 아줌마
입술 붉다
눈썹그림 천할수록 좋았다
모가지는 누렇고
낯바닥은 분칠해 밀가루 썼다
나바론의 건포도
벼랑 가슴팍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멀쩡한 사내녀석 낚아올리는 재주
기막혀라
순진한 놈
촌놈
봉지 떼지 않은 놈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놈 없다
대학생인지
계장인지
과장인지 다 안다
제대 뒤 1년 되었는지 2년 되었는지 안다
서울역전의 밤
가볍게 이끈다
사근사근 말이 빛난다
조근조근 말이 어둡다
끌고가
길 건너 도동여인숙에 인도한다
손님 왔다 어서 모셔라
탱자만한 5촉 전구 비추는 방
베니어판 벽
목단꽃 벽지
담뱃불 지져댄 곰보자국
비닐 꽃장판
그대 김수길 군
이것이 서울의 첫날밤이다 시작하거라
강신재
아직 충무로 1가 벽돌조각 다 치워지지 않았는데
아직 계성여중 부근
쓰러진 전봇대 그대로 누워 있는데
누비이불처럼 뒤덮여
밀려온 중공군
가까스로 38선쯤 밀어냈는데
아직도 시가전 자취 역력한 명동인데
그 폐허에 강신재가 왔다
서른몇살
바바리코트라니
불란서 크리스천 디오르 향수 냄새라니
촉촉한 살결
흑진주 박힌 눈빛 호수
조용조용하게 서투르게 젖어드는 음성의 그녀가 왔다
전후
비누냄새가 귀족이었다
「젊은 느티나무」
가슴 갈비가 울렸다
돌체다방 「시인과 농부」를 듣고
홍차 마시고 조용조용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가 참았던 가슴 북받치며
침 튀기며
사랑하고 싶다 쫓아가고 싶다는 말을
무지막지하게 바꿔버렸다
썅년 쏴죽이겠다
김매자
화북마을 숨은 샘물
밀물에 숨은 샘물
어김없이
썰물에 나타납니다
밀물 때
밀물에 덮여 잠들어 있다가
썰물 때 나타나
비바리 물허벅에 가득 채워줍니다
스무살 김매자가
물허벅 지고 돌담길 돌아옵니다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
센 바람에도 일어날 줄 모릅니다
입속에는 무슨 웃음이 담겨 있는지
좀 들썩일 듯합니다
한라산이 뚜렷한 목소리가 다가옵니다
밀물 수평선 넘어 해조음도
우르르 달려옵니다
매자 혼잣말
인석씨는 잘 있는지……
조소앙
상해 망명생활
배갈 술 한잔
객수를 달랬다
43세
객수의 밤
대동사상이 왔다
대동세상!
공자
단군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
마호멧
여섯 성현을 동시에 받드는
육성교(六聖敎)를 만들었다
서로 원수 되지 않고
서로 삼키지 않고
서로 약육강식하지 않는
만국 종교 문화 조화의 세상!
그러다가
사회민주주의 삼균(三均)사상도 꿈꾸었다
작은 나라
빼앗긴 나라 떠나
커다란 포부가
그 가슴에 들어 있었다
객수의 밤
잠 깨어
다시 잠들지 않았다
펀치볼 혈전 전야
너무나 큰 공간
너무나 큰 전투였다 펀치볼
저쪽 미국놈들 드럽게 굼벵이들이야
밀어붙이면
한 방에 끝나는데
저건 공격도 아니고 방어도 아냐
썅 바람난 마누라 두고
새끼들 두고
바다 건너온 놈들이
뭣 땜에 바쁘겠냐
저놈들은 저놈들이고
대한민국 국군 체면도 말이 아니야
아직도 저 능선에
인민군 새끼들 나팔 불고 있다 이거야
이상은
국군 000부대 본부부대 쫄병
유도순 강시철 고병무 세 놈이서
오전 전투 뒤
건빵 먹으며 까대는 노가리였다
노가리 이어진다
씨팔 인제 읍내 대대장 계집년
한번만 더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
고년
대대장 심부름 갔더니
국수 먹고 가요
저 집 막국수 그만이야요 어쩌고
그 옥 구르는 소리 미치겠더라
야 임마 너 자신을 알라
야 한코 먹고 싶다 할머니라도 좋다
야 임마 너만 그러냐 니기미 씨팔
이런 된소리
이런 진한 노가리가
산 자의 힘이었다
영섭이 엄마
대지는 대지의 아낙을 여분으로 남겨둔다
전란
좌익과 우익의 학살
피도가니에서
살아남은 자들 그대들
잿더미에서 거적 두르고
생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솥단지를 걸어야 한다
매운 연기
울음같이 피워올려야 한다
솥단지는 몇천년 여자의 것
뽕나무도 몇천년 여자의 것
여자가 있어야 한다
여자가 있어야
죽은 사람의 빈곳
갓난아이로 이어간다
여자가 있어야
사나운 세상 지쳐 돌아온
먹통 같은 사내들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얻는다
윤성수 마누라는 남편 잃은 뒤
삼년상 앞두고 재혼
황영모 마누라가 되었다
바로 아기 낳았다
전실자식
민구
상구
그리고 새 아기 낳아
영섭이 엄마가 되었다
젖은 가난 속에서 늘 넘쳤다
얼마나 다행이더냐
영섭이 돌 지나자
바로
아기가 섰다
진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밭에 있고
보리방아 찧고
뽕잎 따러 가야 한다
뽕잎 따다가
오디도 따다가 영섭이 주었다
20리 장에 나가 남새도 팔았다
민구
상구의 신발도 샀다
돌아오는 길
젖 탱탱 불어 걸음 재촉한다
우리 새끼 배고프겠다
온몸 땀이 홍건
웬 눈썹은 그리 검노
금방 참숯 같다
뒤쪽에서 동행의 아낙이 흰소리친다
서방 안고 싶어
그리 걸음이 노새걸음이여
앞쪽에서 영섭이 엄마 한마디 보탠다
새끼 젖먹이고 나서야
서방을 안든지 삼키든지 하지
남신동이 마누라
처마에서 노래기 소리없이 떨어진다
나무절구에
나무메로 강냉이 네 바가지 찧는다
두 집 아낙
가슴 젖 드러내 출렁이며
도굿대 치게 올려 내리며 찧는다
툇마루에서
아이들 용케 떨어지지 않고 논다
문종이 다 해어져
문풍지 울어줄 것도 없다
이놈의 산천은
왜 난리를 좋아하는지
이놈의 시절은
왜 죽이고 죽이는 것 좋아하시는지
이런 소리도
아낙의 입에서 함부로 나오며
강냉이알이
강냉이가루가 되도록 찧고 찧는다
오늘 저녁 강냉이죽으로
일곱식구 헛배 채우고
이웃집 다섯식구 배를 채우리라
남신동이 마누라
가슴은
뭐하러 그리도 큰지
궁둥짝은
또 뭣하러 그리도 큰지
이웃집 마누라
홀쭉한 가슴 이따금 기가 죽었다
인민군 두 번 왔다 갔다
국군 두 번 왔다
인민군이 왔을 때는 인공기를 그려 붙였다
국군이 왔을 때는 태극기를 꽂았다
동네사람 3분의 1이 죽었다
그 중에 살아남아
강냉이 방아를 찧는다
초저녁부터 내내 소쩍새가 울어준다
쥐
폭격 뒤
삐쩍 마른 쥐가 왔다
반가웠다
너도
나도 얼마나 배고프냐
다리 없는 기철이가 목침을 던져
녀석을 잡아 구워먹었다
죽을 때 내지른
녀석의 비명을 구워 먹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정인욱
상공부 석탄과장 정인욱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부역했다
9․28수복 후
도강파에게 곤욕을 치렀다
석탄에 관한 한
그가 없어서는 안되었다
1950년 11월 부산에서
대한석탄공사 창립이사가 되었다
태백산 개발과
산업철도 건설을 역설했다
어림없었다
그는 다음해 맨주먹으로
강원도 산골 철암으로 달려갔다
탄광을 개척했다
사변 전
대통령이 부를 때도
양복이 없어
일본군 작업복을 입고 갔다
그는 삶은 감자 옥수수로 점심을 먹고
해발 1천미터 이상의 산줄기를 헤매어
탄맥을 붙잡았다
1952년 11월 풍부한 탄맥을 발견
시꺼먼 탄더미가 쏟아져 나왔다
광부들과 함께 살았다
DDT가 없어
밤새 이 때문에 잠을 설쳤다
일제시대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그도 이상향 건설이 꿈이 되었다
광부 사택에서
피아노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싶다
이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
이로부터 휴전선 이남에는
산야에 숲이 우거졌고
수많은 민둥산이 사라졌다
이로부터 서민의 온돌은 얼지 않았다
전쟁은 끝나갔다 산에서 포소리가 멀어져갔다
명단이
다친 호랑이
엉금
엉금 기어
굴을 찾는다
굴 속 열하루
꿈쩍 않고 엎드려
다친 곳 절로 낫는다
막 아침 햇덩이 오를 때
그 부챗살 햇발 속
어흥!
하고 호랑이 일어난다
어흥!
이런 호랑이 같은 사내 하나 없느냐고
삼척 산골처녀 명단이
화전밭
마른 옥수숫대 우지끈 분지른다
전쟁 뒤
죽어라고 적막해진 산골 저녁
(2008년 1월 25일 오후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 17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시들을 삼가 초록하여 역사에 낙인함으로써, 이 나라 이 땅 금수강산에서 목숨 살다 원통하게 죽은 모든 생물들을 위령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