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지도. 칼날에 새겨진 글은 백제가 왜국보다 상위의 국가임을 보여 준다. |
칠지도로 본 일본과의 관계
일본 텐리시 동쪽에 위치한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칠지도라는 칼이 있었습니다. 현재 나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칼은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74.9 ㎝의 곧은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날이 3 개씩 뻗어 나와 있는 모양입니다. 철을 두들겨 만든 칠지도 앞면에는 34 글자가, 뒷면에는 27 글자가 새겨져 있답니다. 글씨가 있는 부분을 금으로 덮어 글자를 돋보이게 만들었지요.
이 칼은 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스카마사도모라는 사람이 칼에 묻은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글자를 읽어내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칠지도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왕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일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요약하면 백제의 왕세자인 근구수가 369년에 제후에 해당하는 왜왕에게 특별히 '칠지도'라는 칼을 만들어 하사하니, 잘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임금에게 바침)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칠지도에 새겨진 글은 그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입니다.
백제 왕이 제후에 해당하는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부여군 군수리 절터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 칠지도는 백제를 상징하는 물건이지요. 백제는 왜국에 칠지도를 내려 주어 왜국을 백제에 협력하는 나라로 삼았던 것입니다.
왜국은 백제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용병을 제공했습니다.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에서 협력한 것이었지요.
백제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당시 뒤떨어진 왜국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왜국을 백제의 또 하나의 힘이 되도록 했습니다.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가 보인다
백제 13대 근초고왕은 비밀의 왕국 백제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매우 중요한 왕이다.
지금 우리는 그가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며, 백제 최초의 역사서도 만들었고, 이때부터 백제가 비로소 중국과 교류하게 되었다고 배웠다.
따라서 그가 백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까지도 근초고왕에 대하여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고, 그와 관련된 거의 모두가 논란 중에 있다.
즉 근초고왕의 이름이 무엇이고, 왕비는 누구이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의 업적이 왜 20년 간이나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았고, 앞 왕이었던 계왕과는 무슨 관계이며, 중국으로부터 받은 작위는 무엇이며, 백제가 한 때 차지한 적이 있다는 요서 진평현과는 무슨 관계이며, 그가 옮긴 도읍 한산은 어디를 말하며, 서기가 과연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지, 또 8대 고이왕부터 시작되는 혼란스런 백제 왕실의 이상한 왕위 계승과는 무슨 관계이며, 그의 시호를 왜 선왕인 5대 초고왕의 시호에 "근(近)" 자를 붙여 정했는지 등이다.
그렇다면 하나 하나 근초고왕에 대하여 밝혀보면 의문으로 가득 차 있는 백제 역사의 비밀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근초고왕의 이름은 "부여구",
작위는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백제왕"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13대 근초고왕에 대하여,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했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죽어 왕위를 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의 이름은 삼국사기에 밝혀져 있지 않은데,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A.D.372) 조에,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6월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에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의 작위를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는 백제왕실의 성씨를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실제 근초고왕의 이름은 "부여구(扶餘句)"였고, 그가 동진 간문제 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작위는 백제왕들 중 중국으로부터 최초로 받은 작위였다.
백제가 이때부터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교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작위를 임명장 성격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은 어느 지역의 소유권을 국가 간에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고 하여 이때의 백제가 동진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백제와 동진이 이때부터 교류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백제 왕위계승의 비밀
13대 근초고왕은 백제 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아버지 비류왕이 죽은 후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혈통이 다른 12대 계왕이 죽은 후에야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은 약 80세 정도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적어도 40세쯤은 되었을 부여구(후일의 근초고왕)는 왜 그 아버지 비류왕의 뒤를 이어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2대 계왕이 죽은 후에야 왕위에 올랐을까?
근초고왕과 계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이는 온조왕으로 거슬러 올라가 따져 내려와야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왕은 73-74세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아들은 이미 죽은 때였다. 그리하여 온조왕은 큰손자인 다루왕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밖에 없었고, 다루왕은 장자인 기루왕에게 왕위를 전했는데, 이 기루왕은 약 110세까지 오래 살았다. 그리하여 그 아들은 아버지인 기루왕보다 일찍 죽었고, 그 손자 역시 할아버지인 기루왕 보다 일찍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다루왕을 온조왕의 아들, 개루왕을 기루왕의 아들, 사반왕을 구수왕의 아들, 고이왕을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틀렸으므로 필자가 바로 잡았다.
그리하여 기루왕이 죽자 증손자인 개루왕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이 개루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초고왕이었고, 작은 아들은 구태였는데, 백제의 왕위는 초고왕의 장자인 구수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다시 구수왕이 오래 살아 그 아들은 일찍 죽고 손자인 사반왕으로 왕위가 전해지게 되는데, 이때 구태의 손자인 고이왕이 어린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게 되어 이때부터 백제는 장자파인 초고왕파와 차자파인 구태파로 나누어져 왕위찬탈로 얼룩지게 된다.
즉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은 차자파이고, 11대 비류왕은 장자파로서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이었는데, 자라서 장자파로 왕위를 찾아오게 된다.
그런데 차자파이며 10대 분서왕의 장자였던 12대 계왕이 다시 차자파로 왕위를 되돌리게 되었으나 11대 비류왕의 아들로서 장자파였던 13대 근초고왕이 다시 장자파로 왕위를 되돌리게 되는 것이다.
백제의 왕위 계승에는 장자파와 차자파라는 파벌이 작용함으로써 왕위찬탈로 얼룩져 있었으나 우리는 지금까지 백제 왕위 계승 속에 숨겨진 비밀을 풀지 못해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위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자
2대 다루왕
↓장자
3대 기루왕
↓자
?(실명)
↓자
?(실명)
↓자
4대 개루왕
↓
[장자파] ↓장자 ↓차자 [차자파]
5대 초고왕 ?(구태)
↓장자 ↓자
6대 구수왕 ?(실명)
↓자 ↓자
?(실명) 8대 고이왕
↓장자 ↓2자 ↓자
7대 사반왕 ? 9대 책계왕
↓자 ↓장자
11대 비류왕 10대 분서왕
↓2자 ↓장자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자 ↓ 자
14대 근구수왕 ?(무광왕) :반도백제시조
근초고왕의 왕비는 진(眞)씨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A.D.347)조를 보면,
"봄 정월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다. 진정을 임명하여 조정좌평을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매우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며, 일에 대해서는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으며,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하니 백성들이 그를 미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초고왕의 왕비는 진씨였음을 알 수 있는데, 역사 기록을 보면 백제의 왕비는 진씨와 해씨 두 성씨에서만 간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유추해 보면,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졸본을 떠나 진번 땅으로 온 후 그 지방의 토호였던 진씨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한산 부근 진씨 가문의 처녀와 온조를 혼인시키게 되었고, 부여에서 같이 온 해씨가문의 처녀와 비류를 혼인시켰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가 기원전 18년에 비류의 백제와 온조의 십제가 건국되었으나 얼마 후 비류가 일찍 죽고 비류의 백제가 온조의 십제에 병합되자 그때부터 해씨들은 침체하고 진씨들이 대를 이어 왕비를 배출하는 가문으로 자리잡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17대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자 그 왕위를 되찾기 위해 해씨가문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아들 전지를 낳게 되고, 해씨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해씨여인 소생인 전지를 태자로 봉하게 됨으로써 해씨들도 다시 왕비를 배출하는 가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서기 405년 전지왕 즉위 때부터 이후 479년 삼근왕이 죽을 때까지 약 70여 년 간 해씨들이 백제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다가 동성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해씨들은 권력을 잃게 되었고, 왕비는 다시 진씨가문에서 간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의 업적은 왜 20년 간 비어 있을까?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에 있어 특별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에 오른 초기 업적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재위 21년(A.D.366) 조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의 업적이 전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누락된 것일까?
이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임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근초고왕은 장자파로서 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비류왕은 약 80세쯤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이때 비류왕의 장자는 일찍 죽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비류왕이 죽었을 때 그는 바로 왕위에 오를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2대 계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때 백제는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왕위를 놓고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346년에 12대 계왕을 제거하고 백제 13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문제는 이때 계왕에게도 성장한 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왕의 아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올라야할 왕위를 근초고왕에게 빼앗겼으니 그 역시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으려 했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광왕(武廣王)의 신분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하고 30대 무왕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있으나 그것은 틀린 것이고, 무광왕은 백제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백제의 건국지를 한반도 서울부근으로 이해하나 이는 옛 기록을 아주 잘못 해석한 것으로서 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일원이고, 신라는 진황도 산해관 부근이며, 가야의 건국지는 진황도 창려 부근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부근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이다.
이는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소위 한사군 중의 한 군인 낙랑군의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 바로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라 기록하고 있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부근이 바로 낙랑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으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고,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백제, 신라,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왕위 다툼을 했을 것인데, 20여 년의 내란 끝에 결국 무광왕이 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패한 무광왕은 어디론가 도망쳐야 했을 것인데, 관세음응험기에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바로 대륙에서 패한 무광왕이 도망쳐 지모밀지에 도읍을 정하고 다시 백제를 건국하는 상황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과 무광왕이 대륙에서 20여 년에 걸쳐 왕위다툼을 벌였으므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조에 그의 20년 간의 업적이 기록될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설령 왕위다툼에 관한 옛 기록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빼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위다툼을 했던 기록을 남겨 놓을 경우 고려의 왕실 사람들이 백제의 기록을 보게되어 왕위다툼이 가속화 될 우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광왕이 곧 백제 30대 무왕과 동일인으로 이해했으나 무광왕과 무왕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어찌되었든 무광왕은 대륙에서 근초고왕 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후 지모밀지라는 곳으로 도망쳐 그곳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는데, 그 흔적인 왕궁터와 제석사지, 왕궁리 오층석탑 등이 한반도의 익산 금마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무광왕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백제를 다시 건국했다는 말이 되고,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백제 유물은 4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보면 4세기 중반에야 백제가 한반도로 진출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의 왕위쟁탈전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계왕의 아들이고 그가 바로 무광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근초고왕의 업적이 본격적으로 기록되는 시점이 바로 서기 366년부터이므로 무광왕이 한반도로 도망쳐와 반도백제를 새로 건국한 시점은 서기 365-366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반도에서 4세기 중반 백제 유물부터 출토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 어느 학자는 한반도에서 백제의 유물이 4세기 중반부터 나타나자 백제 초기 역사를 완전 부정하고 백제가 4세기 중반에야 건국되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백제가 4세기 중반에야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엉터리 주장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주장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는 바보다.
그렇게 대륙에서는 근초고왕의 대륙백제가 이어지게 되고, 한반도에서는 무광왕의 반도백제가 이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들은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면서 이후 약 100여 년 간 상호 교류를 하지 않고, 별개로 존속하다가 대륙백제의 개로왕과 반도백제의 모도왕 때 이르러 두 백제의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해 결국 문주왕 대를 지나 삼근왕 때에 이르러 외척인 진씨들이 해씨들과 삼근왕을 제거함으로써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되어, 다시 통합백제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모두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손들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동성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이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동성왕 때인 488년 490년에 북위와 백제와의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아니라 대륙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으로서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서기 660년에 멸망했던 백제 역시 대륙백제였지 한반도에 위치했던 반도백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백제에 서기라는 역사서는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A.D.375) 조 말미를 보면,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이 기록을 보고는 이때 백제 최초로 서기라는 역사서가 만들어졌다고 해석한 후 지금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 해석이 유효한 모양인지 지금도 백제 최초의 역사서가 서기였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엉터리 중에도 정말 엉터리 같은 해석이다.
이 글을 보고 어떻게 서기라는 역사서가 느닷없이 튀어나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중·고등학교의 그 수많은 국사 선생이라 하는 사람들도 누구하나 나서서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그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앵무새 마냥 백제 최초의 역사서가 "서기"라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런 국사교사 수준이라 하겠다.
이 글을 해석해보면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로 문자로 일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백제가 개국한 이후 근초고왕 이전까지 정부의 크고 작은 일을 문자로 기록해 보관하지 않았었는데, 이때부터 박사 고흥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의 각종 일을 문자로 기록하게 하여 보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즉 이때부터 백제에서 일어난 모든 일 즉 정부문서가 문자로 기록되어 합리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역사서인 서기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백제에 서기(書記)라는 역사서는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모두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는 근초고왕 때 만들어진 "서기(書記)"라고 함으로써 고흥을 졸지에 백제의 역사학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하루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 삼국사기에는 "고흥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일이 없으니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광주목 인물 조에는, 고흥이 그 고을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은 요동 낙랑 땅과 요서 진평현 땅을 동시에 차지했었다
양직공도 백제국사를 보면,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略 有遼東樂浪 亦 有遼西晉平縣 自晉已來常修蕃貢
(백제는 옛날에 왔던 마한의 속국이었다. [백제는]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를 쳐서 요동 낙랑과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진나라 이래 항상 번국으로서 조공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 기록의 진위여부를 가지고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백제가 서해 바다를 건너가 요서에 진평현을 설치할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백제가 대륙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가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일단 소멸하고 그 땅은 고구려의 소유가 된다. 그러자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다시 그 낙랑 땅을 침공하여 살수 이남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아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는데, 필자는 이를 후한 낙랑군이라 부르고,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으로서 서기 313년까지 존속했다.
고구려 미천왕은 서기 311년에 요동 서안평을 쳐서 빼앗고, 313년에는 후한 낙랑군을 쳐서 그 땅을 고구려의 강역으로 편입시키게 되며, 314년에는 대방군을 고구려 땅으로 편입시킨 후 현토군과 요동군을 수시로 공격하다가 331년에 죽고, 그 아들인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데, 이때는 서진이 쇠약해져 동진과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던 때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중국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도읍을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옮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했던 연나라 역시 남쪽의 중국 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후방의 고구려가 있어 마음놓고 남하할 수가 없게 되자 연나라는 먼저 고구려를 쳐 약화 시켜 놓은 후 남하할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는 연나라의 기만전술에 속아 도읍인 환도성을 함락 당하게 되어 도읍을 급히 평양 동황성으로 옮기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이때 대륙백제는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내란으로 번져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서기 369년에 이르러 내란을 승리로 이끈 근초고왕의 대륙백제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직접 보기병 2만을 이끌고 침공하게 되는데, 근초고왕은 태자인 수(후일의 근구수왕)를 보내 그를 맞받아쳐 승리하게 되고,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 오자 근초고왕이 직접 출전하여 패수가에 군사들을 매복 시켜 놓았다가 갑자기 나아가 쳐 승리하게 된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10월에 이르러 군사 3만을 몰아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어 백제가 승리하게 되고, 백제는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대륙백제의 원래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일원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이었고, 옛 후한 낙랑군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곳은 당산 바로 북쪽인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었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와 대륙백제는 지금의 만리장성인 황애관장성, 상관장성, 나문욕장성, 반가구수하장성 등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을 것인데,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바로 도읍을 북쪽으로 전진 배치한다는 것은 이때 대륙백제가 옛 후한 낙랑군 땅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다는 말이 된다.
즉 대륙백제는 이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쪽으로 지금의 무령산 부근까지 강역을 넓히고 도읍을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천서(한성)로부터 서북쪽 준화(한산성) 부근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내친 김에 요서로도 진출하여 그 땅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고 기록하여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동진은 420년에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대륙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로부터 옛 후한낙랑군 땅을 빼앗은 시기는 서기 371년이었을 것이고, 진나라의 말기에 해당하므로 백제가 고구려를 쳐서 요동의 낙랑과 요서의 진평현을 빼앗아 차지했다는 기록은 바로 근초고왕 때가 틀림없고, 근초고왕은 백제 최초로 동진 간문제 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왕이다.
따라서 양직공도 백제국사의 기록 중 "백제가 진나라 말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 낙랑과 요서 진평현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이때 대륙백제가 옛 후한낙랑 땅과 요서의 진평현 지역을 동시에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했다는 기록이고, 이때 대륙백제가 요서지역을 실제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요동 낙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 진평현이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후대 동성왕 때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백제를 침공했고, 동성왕이 장수들을 보내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 역시 대륙백제와 북위가 대륙의 북경 부근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근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 북위가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했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시호에 붙인 "근(近)"자의 비밀
백제의 왕 중에 시호에 근자를 붙인 왕은 세 명인데,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개로왕)이 바로 이들이다.
13대 근초고왕은 5대 초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것이고,
14대 근구수왕은 6대 구수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였으며,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은 4대 개루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시호로 정한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이 왜 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시호로 정하게 되었는지 그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그 "근" 자가 바로 백제의 왕들이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누어져 왕위 다툼을 벌였던 흔적이었음을 필자가 밝혀냈던 것이다.
☆ 서울 석촌동 적석총을 백제 근초고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그것은 백제의 건국지를 한반도 서울부근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아무 근거없이 그냥 추정한 것일 뿐이고, 돌을 쌓아 피라밋 형태로 쌓아 만든 무덤형태는 고구려식이지 백제식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대륙백제)의 건국지는 옛 진번군 땅이었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일원이었고, 근초고왕은 바로 그 대륙백제의 왕이었다. 따라서 근초고왕의 능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준화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즉 근초고왕이 무광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후 고구려 평양성(현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을 쳐 고국원왕을 죽이고, 옛 후한낙랑 땅과 요서 진평현을 빼앗아 차지하여 대륙백제를 대제국으로 키워 놓고 죽자 대륙백제의 대신들은 그가 장자파 초고왕의 후예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의 시호를 근초고왕(近肖古王)이라 했던 것이고, 근구수왕 역시 장자파 초고왕의 아들이었던 구수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그 역시 장차파의 맥을 이은 왕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근개루왕(개로왕)은 그와는 다른 의미로 4대 개루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였는데, 이는 이때 개로왕이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통합을 제안한 왕이었고, 실제로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어 잡혀 죽었다.
그러자 대륙백제의 대신들은 그가 두 백제가 모두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누어지기 전 왕이었던 4대 개루왕의 후손임을 표방하며 통합을 추진했기 때문에 그가 죽자 그의 시호를 근개루왕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두 백제가 완전한 통합을 이룬 때는 동성왕 때였다.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고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다시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자 그에 반대하는 해씨들이 문주왕과 반도백제의 태자였던 곤지를 죽여버리고 삼근왕을 왕위에 올리자 반도백제 모도왕은 화가 났고, 대륙백제 해씨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자 외척인 진씨들이 해씨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대륙백제 삼근왕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모도왕은 자신의 둘째 손자이며, 죽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었던 모대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리는데 이가 곧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 24대 동성왕이고, 이로써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되는 것이다.
☆ 모도왕은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인 무광왕의 고손자로 보이는 사람인데, 지금 공주 근교에 백제왕릉이 있었고, 옛날에는 그 앞에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곳이 정말로 백제왕릉이라면 우리는 머지 않은 후일 공주 근교에서 무광왕의 아들, 손자, 증손자의 능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모도왕의 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최대의 강역을 이룬 때는 근초고왕 때가 아니라 사실은 반도백제와 대륙백제가 통합을 이룬 동성왕 때인 것이다.
그리하여 동성왕 때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대륙백제를 침공했으나 백제는 통합된 힘으로 그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초고왕의 알면 백제가 보인다. 출처 : http://blog.daum.net/3002kumsukangsan/
위키백과에 기록되어 있는 근초고왕
탄생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근초고왕은 사방으로 백제의 영토 확장에 힘썼다. 먼저 369년 마한을 정복하여 전라도 영산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고, 가야와 일본에까지 세력을 미쳤다.[출처 필요]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에 쳐들어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왕태자인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371년에는 왕태자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동강에서 물리치고 옛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또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까지 차지하여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부자 세습 제도를 확립했다.
근초고왕은 외교력도 대단히 뛰어났다. 중국대륙의 동진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양자강 이남의 남조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편, 아직기와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의 왕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쳐주고 선진 문물을 전하도록 하였다. 또 《천자문》과 《논어》를 함께 보내고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였다.
또한 근초고왕은 백제의 위대함을 알리고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백제의 역사책인 《서기》를 저술하게 하였다
가계
두산 세계 대백과의 근초고왕
백제 13대 왕으로서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비류왕(比流王; 재위304-334년)의 둘째아들이다. 고이왕 계의 후손인 10대 분서왕(汾西王;재위298-304년)의 맏아들인 계왕(;재위344-346년)이 재위 3년 만인 346년에 죽으면서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체구와 용모가 남달리 잘생겼으며, 세상을 널리 살필 줄 알았다.
347년 정월,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진정(眞淨)을 조정 좌평으로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여 일을 까다롭게 처리했으며, 세력을 믿고 일을 제 마음대로 처리하니 백성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366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368년 3월 초하루 정사에 일식이 있었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369년경 마한(馬韓)과 대방(帶方)을 병합했다.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고국원왕의 이름임)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뒤에 근구수왕]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 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371년 국왕이 친히 태자를 이끌고 3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고구려 군사를 대동강(大同江)에서 무찌르고 평양성(平壤城)을 점령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 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 사람으로 왕의 말의 말굽을 상하게 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 온 사기(斯紀)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인 적기부대(赤旗部隊)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서북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 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의 전부와 강원, 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고대국가(古代國家)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한산(漢山: 서울)으로 천도하였다.
372년 동진(東晋)에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지진이 일어났다.
373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禿山城)의 성주가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신라로 달아났다.
375년 7월에 고구려가 북쪽의 수곡성(水谷城)을 쳐서 빼앗았다. 왕이 장수를 보내어 막게 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했지만 흉년이 들어 할 수 없었다.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 11월에 왕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가 근구수왕이 되었다.
그리고 남조문화(南朝文化)를 수입하여 일본에 전하였다.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해서 학문을 전파하는 등 외교적 수완도 발휘하였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 하였다. 그의 여러 차례에 걸친 영토 확장으로 백제의 왕권(王權)은 점차 전제화(專制化)되었으며, 그 결과 부족연맹의 세력을 누르고 부자상속(父子相續)에 의한 왕위계승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遼西)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고, 또 일본열도에도 진출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상업의 중심부를 이룩하게 되었다.
다음은 근초고왕 시대의 영토라고 알려져 있는 사진들입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릅니다. ㅎㅎ 너무 지나친 과대망상같아 보이는 사진은 제외 하였습니다.
앞선 왕 계왕 |
제 13 대 346년 - 375년 |
다음 왕 근구수왕 |
백제의 역대 국왕 |
---|
온조왕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 초고왕 · 구수왕 · 사반왕 ·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비류왕 · 계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 · 의자왕 |
위 내용은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이 자료를 믿고 믿지 않는건 여러분의 판단입니다.
보다 확실히 이게 역사가 아니다. 란 증거를 가져 오시면 수정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타당한 증거를 가져오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위 내요은 99.% 확률로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첫댓글 근초고왕 자료를 많이도 수집하여 올려놨네! 수고에 감사해~
나도 공부를 많이해야겠네
근초고왕의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네. 역사에 꽤 흥미를 느끼는 나지만서도 뒤에서는 약간의 피를를 느꼈네. 그만큼 자네의 자료수집이 대단하였다는것을 말해주네.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