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17-2 20040419 167P-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강설:
또 취암이라는 처사가 자기가 쓴 "영원한 대자유인"이란 책 가운데 마치 자기가 스스로 선지식임을 차칭하고 "행주좌와일여→ 어묵동정일여→ 오매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차례를 두었으니 참으로 웃을 일이니 오매일여가 곧 행주좌와일여, 어묵동정일여와, 몽중일여, 숙면일여와 하나임을 모르는 소견인 것을 스스로 모르고 분별하고 있으며.
"화두가 오매일여 하다"면서 "오매일여를 감지하고 안다"하면 벌써 오매일여가 아닌 것임을 모르는 말 장난인 것임을 바로 알아야할 것이다.
또 자성이 내외명철함을 요달했으면 이것이 곧 견성성불이거늘, 성불이 목적의 구경이라면 내외명철도 견성도 돈오도 수행의 과정이나 방편이 아니라 성불과 둘 아닌 같은 구경임을 모르고 이같은 차별과 분별을 스스로 지어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으니 이런 말들에 속지 말고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위(역대 불조)로 부터 내려 오면서 먼저 無念을 세워 宗을 삼고 無相으로 體(바탕)를 삼으며 無住(머묾 없음, 곧 집착 없음)로 근본을 삼나니, 무상이란 것은 현상(계)에 있으면서 현상을 여읨이요, 무념이란 것은 생각하되 생각(끄달려 집착함)이 없음이요, 무주란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과 악, 좋은 것과 더러움 내지 원수와 더불어 친한 이와 말을 주고 받고 공박하고 속이고 다투게 될 때에도 아울러 공(비어 실답지 않음)함을 삼아서, 갚음이나 해칠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생각 생각 가운데에 지나간 일들(앞의 허물)을 생각지 않는 것이니라.
만일 앞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 생각에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얽매임이요, 모든 법(것들) 위에 생각 생각 머물지(집착하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른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밖으로 모든 상을 여읨을 이름하여 무상이니 능히 상을 여의면 곧 법체(본성체)가 맑아 깨끗함이라, 이것이 바른 무상으로써 체를 삼음이니라.
선지식이여!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물들지(끄달리지) 않음을 일러 무념이라 하나니, 스스로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여의어서 경계 위(일체 현상)에 마음을 내지(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만일 다만 백가지 만물(만사)을 생각지 않는다 하여 생각을 (모두)다 없애려고만 한다면 첫째로 생각이 끊어지면 곧 죽은 것이어서 다른 곳에 받아나는 것이니 이것은 크게 그르침이 되는 것이니라.
도를 배우는 자는 사유해야 하느니라.
만일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기의 그르침은 오히려 可할지라도 다시 다른 사람까지 따르게(勸)해서 스스로 미혹케 하여 보지(깨닫지) 못하게 하고 또 부처님의 말씀을 비방하게 되나니 이런 까닭으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은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어떤 것을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다고 하는가?
다만 입으로만 견성이라 말하는 연고로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경계를 봄에) 생각이 있고(끄달려 집착함이) 생각 위에 문득 삿된 소견을 일으키게 되서 일체 번뇌망상이 이로부터 나느니라.
자성은 본래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니(眞空) 만일 얻을 것이 있다고 하며 망령되이 재화와 복을 말하면 곧 이것이 번뇌의 삿된 소견이 되니 그러므로 이 법문으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無라는 것은 무슨 일이 없다(無爲)는 것이며
념이란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하면 無란 두가지 상이 없음(無相, 상대가 없으니 空)이니 모든 번뇌의 마음이 없는 것이요, 념은 진여본성이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는 곧 이 念의 바탕(體)이요 念은 곧 이 진여의 (작)用이니라.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요 눈, 귀, 코, 입이 (생각하는 것) 아니니, 능히 생각은 진여의 자성이 있는 까닭으로 생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거니와 진여가 만약 없다면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과 형상과 소리가 그때(當時) 곧 무너질(없을)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라서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의 뿌리)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능히 모든 것들(法相)을 잘 분별(실상을 명료하게 가려 앎)하되 제일의(구경의 진리: 언어와 사량을 초월한 절대의 眞際의 理 = 진여자성)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니라"
강설:
위(역대佛祖)로부터 내려옴이란 六祖 자신의 소견이 아닌 모든 깨달은 이들의 異說이 아닌 진실한 실상의 법리임을 주지하신 말씀인 것이다.
無相으로 바탕(體)을 삼음은 상 가운데 있으되 상에(집착함을 떠나) 여여함이요,
無住(머묾 없음, 곧 집착 없음)로써 근본을 삼음은 본성이 세간의 차별경계에 있되 일체의 선악과 좋고 나쁘고 원한과 친한 것에 끄달려서 분별 집착함을 여의고 시비하고 속이고 할지라도 허망한 것이라 공함(비어 실답지 않음)을 알아 관계치 않으며,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생각하되 번뇌로 산란하지 않음이 항상하여 두루함이며, 이 망념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 스스로 얽매임이 되는 것이니 따라서 밖으로 일체상에 집착(머묾)하는 생각을 떠나면 無相의 마음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이 바탕인 본성체(法體)인 것이다.
또한 일체 나타난 상(現狀)에 집착하는 생각(끄달려 집착함)을 내지 않으면 無念이 되며 상견으로 집착하게 되면 물들어 무념이 되지 않음으로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앞 생각, 지금 생각, 뒷 생각에 염념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얽매임"이라 하신 것은 경계 따라 옳고 그름, 좋고 싫고 하는 등이 生할지라도 곧 놓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전념에 끄달리게 되어 이어지면 그에 얽매임(집착)이 된다하신 뜻이다.
그렇다고 백가지 만물(만사)을 생각을 않음으로 잘못 알아 모든 사유함을 없애버리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되면 한 생각 마저 끊어진 단멸공에 떨어져 크게 그르치게 됨을 경계하신 것이외다.
법문의 뜻을 잘못 알고 자기 소견으로 그릇 행하게 되면 자기 혼자 그르침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여러 다른 이들까지 미혹케 만들어 견성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그르다고 비방하게 되는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니 병가운데 가장 큰 병이 되는 것이다.
경계(일체 나타난 狀態)에 있으면서 바르게 보고 바른 생각을 하게 되면 본성의 대원경지이나, 바른 뜻을 모르고 국집하는 생각이 삿된 소견(相見)을 일으켜 이로부터 모든 번뇌망상(無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법성이 본래 진공이라 한 법(한가지)도 가질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환화같은 것에 집착하여 상견으로 재화와 복을 말하면(본래 그러한 것이 없는 一切空) 이것이 번뇌이며 삿된 소견을 이루게 되는 것이므로 무념을 宗으로 삼는 뜻이 여기에 있다하신 것이다.
無는 두가지 상이 없음(無相=상대가 없음=眞空)으로 번뇌 망상도, 보리라는 것까지도 없는 마음이요, 念은 진여본성의 생각함인 것이니, 眞如(定=不動)는 곧 이 생각(작用)의 體(바탕)요, 생각은 이 진여의 用이기 때문에 체인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用)는 것이다.
눈, 귀, 코, 입이 생각해 아는 것이 아니라, 진여자성이 작용할 줄 아는 반야성품이 있어 생각을 일으켜(用) 보고 아는 것이라 안, 이, 비, 설, 신, 의인 6근(뿌리)이 알고 보고 듣고 하는 것(見聞覺知: 알음알이로 분별하는 5관작용) 같으나 근본은 이 진여자성이니, 이 진여(本性)가 없다면 이 모든 것도 없고, 진여가 본성대로 작용하면 집착할 것이 없어 임의자재하여 일체법상을 잘 분별(실상을 명료하게 가려 앎)해서 알면서도 구경의 진여자성은 물듦(산란함)이 없이 여여부동한 것을 이르신 것이다.
현상(계)에 물들어 지나간 일들(앞의 허물)에 생각이 물들지(끄달리지) 않아 머물지(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본성인 진여인 것이다.
모두 다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경계 위에서 경계를 봄에 생각이 끄달려 집착함이 없어 얻을 것이 없음(眞空)을 깨달으면, 무슨 일이 없는(無爲) 念의 바탕(體)이 청정하여 모든 것들(法相)을 잘 분별하되 제일의(구경의 진리: 언어와 사량을 초월한 절대의 眞際의 理 = 진여자성=覺)에 계합하여 일체종지를 증득하여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제일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제일의는 곧 본성 體인 진여라 부동한 가운데 다만 반야작용이 움직여 나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