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거장이 떠난 후, 사람들은 생전 앙드레김이 누구보다 소박하고 순수했으며, 외아들과 손자 손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고 입을 모은다. 가슴으로 낳은 아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는 사연은 훈훈함을 더한다.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지키느라 정작 스스로는 굉장히 고독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고인은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자신의 병세를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병실에 누워 있을 때도 늘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의료진과 만나길 원했다.
고인의 30년 지기 친구는“앙드레김이라는 이름과 그 이미지 때문에 생긴 묵직한 갑옷을 입고 사느라 누구보다 힘들었을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가족과 최측근들은 앙드레김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사랑했다는 말 못해 드려 후회한다”
지난 8월 17일, 기자는 앙드레김이 잠든 충남 천안의 묘원에서 아들 김중도씨와 만났다. 이날은 고인의 삼우제가 열린 날이었다. 삼우제는 그와 아내, 아이들, 의상실 직원 몇 명만 참석한 채 소박하게 치러졌다.
김중도씨는 지난 1982년 생후 5개월 때 고인이 입양한 외아들이다. 비록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앙드레김의 아들 사랑은 유별났다. 어릴 때는 늘 공식 석상에 데리고 다녔고 초등학생 아들이 누구와 싸우기라고 하면 득달같이 학교로 달려간 열혈 아빠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엄마 대신 급식 당번으로도 나섰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직접 절을 찾아 몇날 며칠씩 기도를 올렸고 장가보내던 날 밤 집으로 돌아와 아들의 빈방을 보며 혼자서 한없이 울었다. 매일 밤 머리맡에 앉아 이솝 우화를 들려주며 ‘바르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며 키웠던 아들. 김중도씨는 아버지와 둘이 살다가 지난 2004년 앙드레김 의상실 디자이너 출신 유은숙씨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았다, 이 다섯 식구가 고인 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이다.
그의 올해 다섯 살 된 쌍둥이 남매와 세 살 배기 막내 딸은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듯, 묘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장난치기에 바빴다. 김중도씨는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아버지의 영전에 음료수를 한잔 올린 다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뭐랄까, 아직 안 돌아가신 것 같은 기분이네요. 실감이 잘 나지 않고, 그냥 얼떨떨하고 멍한 기분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나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마음을 잘 추슬러야죠.”
아버지와의 이별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겠어요 “저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눈감으신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어요. 5년 넘게 아프셨지만 그래도 벌떡 일어나실 거라고 믿었거든요. 워낙 강하신 분이었고 병마와도 잘 싸우고 계셨으니까 당연히 훌훌 털어내실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이번만은 그게 아니었나 봐요.”
최근 몇 년 동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다면서요 “5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에 많이 나빠지셨죠. 술 담배를 전혀 안 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셨는데도 평소에 몸을 많이 혹사해 건강을 해치신 거예요. 옛날 분이라 그런지 단 음식을 좋아하셔서 불량 식품도 많이 드셨고, 기름진 고기나 햄버거, 떡볶이 같은 음식도 굉장히 좋아하셨거든요. 오늘도 약주 안 하시니까 사이다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아버지 산소에 사이다를 올리려니까 참 어색하지만 그래도 좋아하셨으면 좋겠네요.”
일을 조금만 덜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제발 일 좀 줄이시라고, 조금만 내려놓으시라고 그렇게 말렸어요. 쉬셔야 한다고요. 그런데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들으시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아버지랑 많이 싸웠어요. 최근에 파리 출장을 다녀오셨는데 아버지가 주치의 선생님한테 유럽 가야 된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절대 안 된다고 하셨대요. 그런데도 나는 곧 죽어도 가야 된다고 고집 부려서 결국 다녀오셨거든요. 그러고는 또 힘들어서 앓아 눕고 그러셨어요.”
병세를 전혀 알리지 않으셨잖아요. 많이 심각했었나요 “암이라는 게 완치가 없는 병이잖아요. 반나절 입원해서 3시간 동안 항암 주사를 맞으신 분이 오후에 바로 퇴원하고 다음날 TV 인터뷰하고 그러셨어요. 몸도 안 좋으신 양반이 그렇게 무리하는데 건강이 회복될 리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아무리 말려도 당신은 그래야 직성이 풀리셨나봐요. 아픈 티 절대 안 내고, 늘 주위에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죠.”
병실에서 의사와 만날 때도 늘 단정한 모습이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새벽 5시에 일어난다고 기사에 많이 나왔잖아요. 신문을 열 몇 개씩 보신다는 뉴스 말이에요. 항암 치료 받느라 기운 떨어졌을 때도 항상 그러셨어요. 심지어 병원에서도 건강이 좀 괜찮을 때는 의사들 회진 돌기 전에 꼭 깨끗이 씻고 몸단장을 하셨어요. 항상 정돈되고 깨끗한, 말하자면 앙드레김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셨죠. 그만큼 자기한테 늘 철저하셨어요. 물론 존경할 만한 의지죠. 하지만 건강 면에서 보면 결국 그런 성격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마지막에 남기신 말은 없었나요 “중환자실에 있긴 했지만 위독하시지는 않았는데 그날 급격히 증세가 악화됐어요. 소식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겨우 임종만 지켰을 정도로 급하게 가셨어요. 아쉽게도 별다른 말씀은 듣지 못했네요. 의식 없는 상태로 계속 주무시던 와중에 눈을 감으셨거든요. 비록 마지막 인사는 못 나눴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가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아드님을 유난히 아끼셨다고 들었어요 “평소에 잔정이 많은 성격이신 데다 저한테는 정말 굉장히 자상하셨어요. 주무시기 전에 항상 제 방에 와서 제가 자는지 확인하셨고, 제가 어쩌다 감기라도 걸리면 여기저기 전화하셔서 우리 중도 아프다고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어보고 그러셨어요. 다른 아버지에 비하면 극성스럽게 보일 정도로 아끼셨죠.”
부자지간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사이인데 정말 대단하다고요. 하지만 그건 저랑 아버지에게 정말 당연한 일이었어요. 남들이랑 똑같은 부자지간인 데다 가족이라고는 둘이 전부였잖아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하루에 열 통도 넘게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밥 잘 챙겨 먹었니, 어디쯤 오고 있느냐, 차 조심해라 그런 얘기요.”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면서 후회도 많이 할 것 같아요 “제가 아버지랑은 다르게 쑥스러움을 좀 타는 성격이거든요. 그런 성격 때문에 30년 동안 아버지한테 한 번도 못해 드린 말이 있어요. 정말 존경하고, 또 굉장히 많이 사랑했다는 말이요. 살아계실 때 그 얘기를 직접 해드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어요.”
고인께 마지막으로 해드리고 싶은 말은 없나요 “여기가 할아버지 묘소 근처예요. 원래 자리가 없다고 해서 다른 곳 알아봤는데 이곳 이사장님이 소식 듣고 자리를 마련해 주셨어요. 이런 걸 보면 가시는 순간까지 인복이 참 많으신 것 같아요. 가족이라고는 우리뿐이지만, 그래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편하게 가셨네요. 스스로에 대한 원칙을 너무 철저하게 지키면서 사신 분이라 정작 본인은 많이 지치셨을 텐데, 이제는 좀 편하게 누워 계셨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참 예뻐요. 손자 손녀의 재롱 더 오래 보시면 좋았을 텐데요 “최근까지 애들 옷 만들어주시는 게 취미였어요. 특히 막내를 무척 예뻐하셨는데 저 아이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가셨을까 싶네요. 아이들은 어려서 아직 뭐가 뭔지 잘 몰라요. 아까도 할아버지가 여기 누워 있는 거냐고 물어보더니 무덤에 풀을 어떻게 붙였느냐면서 그것만 신기해하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옆에 없다는 걸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줘야죠.”
의상실은 어떻게 운영하나요. 아내가 디자이너잖아요 “제가 작년부터 회사에 나가서 차근차근 배우고 있는 중이기는 해요. 하지만 그 문제는 우선 아버지 먼저 잘 보내드리고 주변이 전부 정리되면 그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비석도 못 세우고 유품도 정리하지 못했거든요. 시간이 좀 지나면 말씀드릴게요.”
치열한 일상 이제는 편히 내려놓길…
고인은 유명 스타들이나 각국 대사 부부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워낙 바쁘게 지냈고 한 분야의 거장으로만 살다 보니 한편으로는 소소하게 속정 나누는 보통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고인의 철저함이 때로는 스스로를 옥죄기도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들 입장에서야 조금 더 유들유들하게, 가끔씩 요령이라도 좀 부리면 좋으련만, 정작 고인은 늘 철저하게 스스로를 내몰았다. 고인의 지인들은 이 부분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30년 넘게 앙드레김과 인연을 맺었던 탤런트 엄앵란은 “늘 완벽하게 포장하고 일에 매인 채 힘들게 살았으니 하늘에서라도 좀 훌훌 털고 지냈으면 좋겠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고인과 30년째 인연을 이어온 친구가 있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김창근・민정준씨 부부다. 두 사람은 수원 우만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단골손님이었던 앙드레김과 속정 나누는 친구가 됐다. 친척이 없는 김중도씨는 민정준씨를 ‘이모’라고 부른다. 장례식이 끝난 날 밤, 눈물을 펑펑 쏟던 그를 달래준 사람도 이들 부부였다.
“그날 밤늦게 중도한테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해야 잠들 수 있겠느냐면서 울더라고요. 돌아가신 첫날 빈소에서도 우리 애 아버지 붙잡고 한참을 울었거든요. 형제도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 더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사람들은 중도가 의연하게 잘 견딘다면서 대견해 하는데 사실은 아니에요.”
고인은 병원에 입원하기 3일 전, 이들 집을 찾아 식사를 함께했다. 그날 역시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막내 손녀 밥 먹이느라 정작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셨어요. 워낙 바쁜 양반이라 몇 숟갈 뜨지도 못했는데 가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든든히 잡숫고 가라고 했더니 다음에 와서 먹겠다며 일어났는데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죠. 투병 중이긴 했지만 그래도 건강한 편이었거든요. 합병증 때문에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서 그렇게 가셨네요.”
고인은 30년 넘게 이들 부부와 만났는데도 두 사람의 딸들과 사위에게까지 늘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30년 지기로서 사석에서는 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법도 하지만 늘 TV 속 그 말투와 복장으로 친구들 앞에 나섰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법도, 시시한 농담을 던지는 법도 없이 늘 그런 모습. 때로는 서운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솔직하게 아픈 내색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내 앞에서는 조금 진솔해져도 괜찮은데 늘 완벽해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어요.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죠. 모르긴 해도, 병세가 그렇게 심각한데 스스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그걸 아무한테도 내색하지 않고 혼자서 짊어지고 갔잖아요.”
고인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면 늘 작고 하얀 찻잔에 홍차를 담아 내왔다. 언제 가도 늘 똑같은 잔에 같은 차였다. 거실의 가구와 물건들은 항상 제자리에 있고, 늘 깨끗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깔끔하고 정돈된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암과 싸우느라 스스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단다.
민씨는 “흐트러진 모습 보이기 싫어하면서 평생을 살았으니 이제는 어깨에 힘 빼고 편히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늘 한결같은 모습만 보여온 앙드레김의 치열한 일상이 최측근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고인이 평생 가꿔온 의상실은 아들 김중도씨와 디자이너 출신 며느리 유은숙씨가 힘을 합쳐 이끌어갈 계획이다. 아버지가 평생 땀방울을 흘린 곳에서 이제는 아들 내외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취재_이한 기자 사진_하지영, 이민희(studio lamp),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