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가슴 속을 헤집고 심장을 움켜쥐는 차가운 손처럼 그것은 무겁게 일행의 심장을 두드리고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듀리엘은 천천히 돌무더기에서 거대한 전갈과도 같은 몸을 돌렸다. 여섯 개의 다리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하얀 빛무리는 동굴 벽에 듀리엘의 몸을 터무니없이 거대한 크기의 그림자로 비추며 어른거렸다.
네 사람은 모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완전한 압도.
인간도 짐승도 몬스터도 아닌 신과 맞서는 유일한 존재, 시간이 존재할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오며 어두움의 세력을 이끌어온 존재. 그들의 앞에 선 것은 어두움에 이끌려 영혼의 자유를 박탈당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두움의 근원이자 그 자체, 악마였다.
탈 라샤의 무덤 어느 깊숙한 곳에서 네 명의 인간은 지상에 임한 지옥의 악마와 조우한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군주 듀리엘 (Duriel)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 앞에 선 네 명의 인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차갑고 무거운 울림이 네 사람의 가슴을 두드렸다.
-- 바알을 찾는가? (Looking for Baal?)
차가운 한기.
-- 그를 찾는 자 (who looks for Baal...)
그 아래 흐르는 정적.
-- 죽음을 찾으리니 (looks for death)
목젖의 울림 그리고...
" 카가가가가가가!!! "
듀리엘이 상반신을 들어올리며 네 사람의 귀청을 찢어놓을 듯이 울부짖었다. 그의 몸 아래 하얀 빛무리가 환하게 빛난 순간 네 명의 인간과 하나의 악마가 서있는 넓지 않은 공간은 서리를 맞은 듯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 위에 서있는 인간들까지.
" 홀리 프리즈... 이것으로...확실해졌군. "
료겐은 피부에 달라붙은 얼음 덩어리들이 주는 느낌, 사막 아래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지독한 냉기를 참느라 이빨을 부딪히며 내뱉었다.
" 파이어 볼! "
베라미스의 손에서 화염의 구체가 세차게 떠나갔다.
넓지 않은 공간에 급작스럽게 파동치기 시작하는 마나의 흐름, 베라미스는 그 흐름으로 그녀의 상대가 조금 전의 공격에 상처를 입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파이어 볼이 듀리엘에 충돌하며 일어난 연기가 갑자기 두 쪽으로 갈라졌다.
" 카가가가가! "
희뿌연 연기에 비친 듀리엘의 그림자가 흔들린 순간 그의 거대한 몸체는 일행의 앞에 육박해왔다. 베라미스는 텔레포트로, 두 전사는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좌우로 갈라졌다. 거대한 낫과 같은 듀리엘의 앞발이 움직이지 않는 목표물, 료겐을 향해 쇄도했다.
" 료겐! "
쿠오 듀크가 부르짖은 순간 료겐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 얄보지마, 악마. 서몬, 클레이 골렘! "
료겐의 오른손이 허공에 궤적을 그려내자 그의 앞에서 누런 빛깔의 형체가 솟아났다. 듀리엘의 거체가 피부를 에는 돌풍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클레이 골렘을 덮쳤다. 료겐이 빠른 속도로 두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 모두 돌려주마. 내 살을 취하는 자, 네 뼈를 내줄지니, 아이언 메이든! (Iron Maiden) "
료겐의 손에서 떠나간 주황색 기류가 듀리엘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듀리엘이 벼락이 떨어지듯 클레이 골렘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치 북을 찢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듀리엘의 앞발은 클레이 골렘의 머리부터 두 쪽으로 갈라버리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일격에 클레이 골렘을 갈라버리고 금방이라도 그 소환사를 덮칠 듯 하던 듀리엘이 갑자기 멈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료겐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떠올랐다.
" 더러운 악마, 그대로 돌려받은... "
료겐의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네크로맨서는 그의 머리를 향해 덮쳐오는 거대한 낫을 피해 옆으로 굴러야했다. 바닥에 몸을 던진 료겐의 등위로 돌더미가 우수수 쏟아졌다. 듀리엘이 그런 료겐을 향해 오른쪽 앞발을 내리찍었다.
" 이런 골치 덩어리! "
허공에 쳐들은 듀리엘의 앞발을 향해 검은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쿠오 듀크는 단숨에 5~6 미터를 뛰어넘으며 도약하여 막 아래를 향해 꽂히려는 듀리엘의 앞발을 비껴쳤다. 듀리엘의 낫의 가장 날카로운 끝부분은 료겐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나 그 옆의 바닥을 부수고 들어갔다.
듀리엘의 상체가 놀랍도록 빠르게 옆으로 빙글 돌아갔다. 동시에 듀리엘의 왼쪽 앞발 또한 매섭게 바람을 일으키며 마침 그의 앞에 떨어져내린 쿠오 듀크를 거세게 올려쳤다. 그리고 지옥의 악마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동작을 취했던 쿠오 듀크는 자신이 도약한 만큼의 높이 만큼 그리고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허공에 솟구쳤다가 벽을 무너뜨릴 듯이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 쿠오 듀크! "
료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 때 누군가 그의 멱살을 거머쥐더니 거칠게 뒤로 잡아끌었다. 듀리엘은 료겐의 멱살을 잡고 뒤로 끌어당기고 있는 데브란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또 다시 꿈틀거리며 돌격하려는 순간 듀리엘은 갑자기 멈칫하였다. 료겐 역시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좁은 공간에 사납게 소용돌이치던 마나의 흐름이 한 곳으로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이 향하는 곳에 양손에 스태프를 쥐고 있는 베라미스가 서있었다. 빠른 속도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그녀의 몸 주위로 햐얀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료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 저, 저것은... "
듀리엘은 목표를 바꿔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서있는 베라미스를 향해 돌격했다.
" 모두 엎드려! "
동시에 베라미스는 캐스팅을 끝냈다.
베라미스의 앞에서 마치 칼로 그은 듯이 십자로 공간이 갈라지며 작은 틈이 생겨났다. 그녀의 몸 주위를 맴돌던 하얀 기류가 빨려들듯이 그 틈으로 몰려들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하얀 기류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직경 30 센티 가량의 구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구체가 소용돌이를 끊고 떠나갔다.
구체가 움직이자 데브란트는 마치 빨려들듯이 다리가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고 중심을 잡았다. 료겐의 하얀 백발은 갑작스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마구 휘날렸다. 두 사람 모두 일순간에 폐를 얼려버릴 만한 지독하게 차가운 냉기에 호흡을 멈췄다.
새하얀 구체는 무섭도록 빠르게 회전하며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를 삼켜버리고 목표물인 듀리엘과 조우했다. 수축됐던 공기가 일순간에 폭발하듯이 터져나오며 그와 함께 수도 없이 많은 얼음의 화살 아이스 볼트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료겐의 앞에 엎드린 데브란트의 등위로 수많은 아이스 볼트가 화살처럼 스쳐가 벽에 부딪히며 마치 연달아 유리잔을 깨뜨리는 듯한 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아이스 볼트의 폭풍이 멈추자 데브란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듀리엘의 홀리 프리즈로 하얗게 변했던 동굴 안은 이제 시릴 정도로 온통 푸른 빛의 얼음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안개와 같이 새하얀 기류가 천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프로즌 오브 (Frozen Orb)... 어떻게 그런... "
데브란트의 뒤에서 막 몸을 일으킨 료겐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료겐은 한 쪽 구석에 굳은 듯이 서있는 베라미스를 힐끗 쳐다봤다.
" 이런 지형에서는 미친 짓이었어. 다행히 동굴이 붕괴되지 않았지만. "
베라미스는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양손의 스태프로 몸을 지탱한 채 그녀의 정면에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료겐은 웬지 모를 싸늘한 냉소를 띄운 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엄청난 걸 숨겨두고 있었군, 소서리스. 조디악의...? "
-- 쾅!
료겐의 얼굴에서 갑자기 당혹과 경악이 떠오른 순간, 폭발처럼 터져나온 굉음과 함께 동굴 전체가 무너질듯이 흔들렸다. 데브란트와 료겐이 갑작스런 진동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그들의 옆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베라미스가 나타났다. 베라미스가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무릎을 꺾으며 쓰러지려고 하자 데브란트가 재빨리 그녀를 붙들었다.
베라미스는 데브란트의 한 팔에 기댄 채 조금 전 프로즌 오브를 캐스팅 하며 서있던 위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럴 리가... 분명 캐스팅에 성공했는데... "
동굴 중심을 메운 하얀 안개 너머 돌더미가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미 익숙해진 지축울 울리는 육중한 소리와 하얀 빛무리와 함께 안개 사이로 고통의 군주, 듀리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료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저럴 수가, 어떻게 프로즌 오브를... "
듀리엘의 거무틱틱한 몸체는 온통 짙은 푸른빛 얼음에 뒤덮혀 있었다. 데브란트는 그의 팔에 기댄 베라미스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형형한 눈빛으로 듀리엘을 응시했다. 그리고 롱소드를 바닥에 꽂더니 두 손을 내밀어 료겐과 베라미스의 손을 잡았다. 료겐은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뿌리치려는데 데브란트의 손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기운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베라미스 또한 놀라며 데브란트를 올려다보았다.
" 화염계의 마법, 부탁합니다. "
료겐과 베라미스의 발 밑으로 푸른 기류의 오오라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데브란트는 정면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 카가가가가가! "
듀리엘이 괴성과 함께 상반신을 들어올리자 그의 몸을 겹겹이 감싸고있던 얼음 덩어리들이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데브란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듀리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그 빛 아래 선 종을 성벽처럼 굳게 보호할지니, 홀리 쉴드. (Holy Shield) "
데브란트의 방패가 반짝거리더니 눈부신 빛이 방패를 감싸며 한 가운데에 십자 문양이 생겨났다.
데브란트는 천천히 듀리엘의 앞에 마주 섰다.
어둠을 사이에 두고 악마의 앞에 마주 선 인간은 존재의 다름과 존재로써의 권능과 역사를 자각하기도 전에 그 거대함 앞에서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 데브란트... 설마... "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베라미스의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듀리엘은 또 다시 그의 거대한 낫을 들어올렸다.
" 데브란트! "
베라미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굉음 뒤에 곧이어 들려온 료겐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 막아냈어... 저럴 수가. "
데브란트는 자세를 낮춘 채 두 팔을 붙여 방패를 들고 서있었다. 길게 뻗은 한 쪽 다리는 옆으로 밀려나며 바닥에 길게 파인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듀리엘의 거대한 낫은 데브란트의 몸을 꿰뚫은 대신 방패 위에 달라붙은 듯이 머물러 있었다.
듀리엘이 또 다시 귀청을 찢을 듯이 울부짖으며 거대한 낫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데브란트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목을 밀어내듯이 움켜쥐며 무릎을 굽힌 채 방패를 앞으로 뻗었다. 굉음과 함께 데브란트의 뒤로 뻗은 한 쪽 다리가 바닥을 파헤치며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듀리엘의 앞발은 그의 방패 앞에 가로막혔다.
" 데브란트! "
베라미스는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데 료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 기다려. "
" 무슨...? 그를 저렇게 놔두면... "
" 홀리 프리즈를 쓰는 걸 보고 알았어야 했다. 아이스 계열의 마법은 통하지 않아. "
" 아... "
또 한 차례 데브란트의 방패와 듀리엘의 앞발이 맞부딪치는 굉음이 들려왔다. 료겐은 사납게 그쪽을 돌아보더니 다시 베라미스를 보며 재빨리 말했다.
" 화염계의 스펠, 그것도 고급 스펠을 준비해. 이 오오라가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느끼고 있겠지? "
베라미스는 그녀의 발 밑으로 형성된 푸른 기류의 오오라를 내려다보았다. 료겐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 팔라딘을 죽이기 싫다면 서둘러.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니까. "
데브란트는 입술을 깨물며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삼켰다. 홀리 쉴드를 발현한 그의 몸과 방패는 이미 십여 차례나 듀리엘이 휘두르는 거대한 낫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이미 마비된 왼팔과 후들거리며 억지로 그것을 들어올리고 있는 오른팔, 아니 그의 몸 전체가 이제는 한계에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 쾅!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 데브란트는 하마터면 방패를 놓칠 뻔했다. 듀리엘이 그의 거대한 낫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저 높이에서 내려치는 수직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데브란트는 이를 악물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듀리엘은 치켜든 앞발을 내려치지 않았다. 데브란트는 고개를 들어 듀리엘을 올려봤다. 굳건한 성채처럼 쉴새 없이 일행을 압박해오던 듀리엘이 굳은 듯이 멈춰서 있었다. 데브란트는 듀리엘의 머리 위에 맴돌고 있는 주황색의 기류를 보았다. 아이언 메이든, 상대가 가한 물리적 데미지를 몇 배로 되돌려주는 커쓰 계열의 마법이었다.
" 기왕 맞아줄 거라면 조금은 효과가 있겠지. 골렘보다 오래 버텨준다면. "
등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뒤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듀리엘은 무섭게 울부짖으며 그 거대한 낫을 내리쳤다.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 데브란트는 바닥에 달라붙은 얼음 덩어리를 부수며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듀리엘이 꿈틀거리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데브란트의 무릎과 다리 아래 황금색 빛줄기의 오오라, 쏜즈 (Thorns)가 발현되어 있었다.
" 타아앗! "
데브란트가 기합과 함께 듀리엘을 향해 달려들자 듀리엘은 오른쪽 앞발을 내리쳤다. 데브란트는 아예 방패에 몸을 바짝 붙이고 덮쳐오는 거대한 낫을 향해 몸을 날렸다. 또 한번의 굉음 그리고 듀리엘이 다시금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언 메이든과 쏜즈에 의해 듀리엘이 데브란트에게 가한 데미지가 그 자신에게 몇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굴 구석에서 베라미스와 료겐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발 밑으로 형성된 푸른 기류의 오오라가 반짝거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고갈된 줄 알았던 마나의 흐름이 다시 흐르는 가운데 오오라의 회전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두 사람은 지금 고통의 군주보다 데브란트에 의해 주어진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 조금만, 조금만 더... '
-- 콰광!
데브란트는 방패와 함께 주르륵 옆으로 밀려났다. 그가 밀려난 거리만큼 듀리엘 또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고통의 군주와 한 명의 인간의 전투는 지극히 단순해 보였다. 달군 쇠덩이를 두들기는 대장장이처럼, 처음 무기를 다루는 병사들의 훈련처럼 하나는 일방적으로 내려치고 있고 또 하나는 방패에 몸을 맡기고 막고 있었다. 고통의 군주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주황색 기류와 인간이 들고있는 빛나는 십자 문양의 방패와 발 밑으로 형성된 황금빛 오오라만 없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됐을 것이다.
아이언 메이든과 쏜즈에 의해 듀리엘은 계속 보이지 않는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타격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매개체 역시 타격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지금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 하아, 하아... "
데브란트는 목구멍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릿한 내음을 삼키며 마비된 왼팔을 들어올렸다. 또 다시 다가올 듀리엘의 공격을 대비하려고 할 때 문득 그는 듀리엘과 그 사이의 거리가 이제까지와 달리 더 멀다는 것을 눈치챘다.
듀리엘은 잔뜩 도사린 뱀처럼 철갑으로 뒤덮힌 듯한 거대한 상반신을 숙였다. 짧은 순간 데브란트는 자신을 향해 죄어오며 바늘처럼 파고드는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듀리엘의 수그린 몸체가 꿈틀거리더니 그 거대한 몸체가 범람하는 강물처럼 데브란트를 덮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데브란트의 몸은 훌쩍 뒤로 날아가 벽을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 크르르르.... "
되돌려 받은 데미지 때문인지 듀리엘은 처음으로 비틀거리며 광포한 울부짖음이 아닌 낮은 소리를 흘리더니 갑자기 쓰러진 데브란트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데브란트를 향해 덮쳐오던 듀리엘의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 이야야압! "
쿠오 듀크는 듀리엘의 다리를 향해 파고들듯이 몸을 숙이며 자이언트 소드를 찔러 넣었다. 땅속을 비스듬히 파고들은 자이언트 소드에 쇄도하는 듀리엘의 몸체가 걸리며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 순간 쿠오 듀크는 기합을 토해내며 자이언트 소드를 들어올렸다. 듀리엘의 거체는 돌격하던 기세와 함께 옆으로 튕겨나 벽을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 지렛대의 원리라고 하지, 크크... "
쿠오 듀크는 자이언트 소드를 뽑아내고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료겐과 베라미스에 시선이 닿은 순간 쿠오 듀크의 눈이 커졌다.
눈을 감고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의 주변에는 전문적으로 마나를 수련하지 않는 쿠오 듀크의 눈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베라미스의 두 손은 불에 달군 쇠처럼 빨갛게 변해있었고 이마에는 온통 얼음투성이인 주변과 대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료겐의 주위에는 희뿌연 기류가 부유하고 있었다.
" 너희들...? "
-- 쿠구구구구...
동굴 내부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방을 두텁게 덮고있던 검푸른 얼음조각들이 진동에 의해 갈라지더니 하나 둘씩 조각나며 떨어졌다.
그리고 벽면 한 구석의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듀리엘이 꿈틀거리며 거체를 일으켰다.
다시금 일행의 마음 속으로 차갑고 무거운 울림이 들려왔다.
-- 인간...인간...
-- 조잡한 무기물과 유기물의 조합으로 이뤄진 하찮은 존재들
-- 도구를 들어야 할 손에 검을 쥐고
-- 문명을 꿈꿔야 할 두뇌에 마나를 채운 교만한 존재들
-- 감히 신에게 맞서려 하는가
-- 죽어라
-- 예속된 운명대로
-- 예정된 결말대로
-- 죽어라
-- 죽어라!
쿠오 듀크는 얼굴 한 쪽을 채운 문신과 그 위를 덮고있는 핏자국 사이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선택의 존재라고 하더군. 내가 선택한 건 네 놈을 죽이고 이 지겨운 사막에서 살아나가겠다는 것이다! Wuaaaaaa!! "
쿠오 듀크는 두 팔을 들어올리며 고통의 군주만큼 광포할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꺽이지 않는 의지와 극강에 도전하는 바바리안의 자긍심이 담긴 고함을 내질렀다.
쿠오 듀크는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쇄도해 오는 듀리엘을 향해 달려갔다.
" 아리앗의 혼은 죽지 않는다! Arurururu! "
쿠오 듀크는 듀리엘의 거체가 돌격하며 일으키는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정면으로 내리치는 듀리엘의 앞발을 피하여 그 옆으로 뛰어들었다. 상체를 숙인 그의 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원반 형의 하반신 아래 보이는 짧은 다리, 그와 데브란트가 번갈아 상처를 냈던 곳이었다. 쿠오 듀크는 장작이라도 패듯이 사정없이 자이언트 소드를 내리쳤다. 단단한 철갑에라도 둘러싸인 듯한 듀리엘의 외피는 이번에도 쿠오 듀크의 공격을 튕겨냈다. 그러나 헛된 공격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굵직한 자국과 함께 듀리엘이 괴성을 토했다.
듀리엘의 상반신이 빙글 회전하더니 거대한 낫 두개가 동시에 쿠오 듀크를 내리찍었다. 쿠오 듀크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오히려 듀리엘의 몸체에 달라붙듯이 뛰어들며 두개의 낫과 몸체가 그려내는 삼각형의 궤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바닥이 부서지는 충격을 발꿈치에서 느끼며 쿠오 듀크는 듀리엘의 울퉁불퉁한 거체를 계단처럼 밟아 오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듀리엘의 머리 바로 앞까지 솟구친 쿠오 듀크의 몸이 자이언트 소드와 함께 회오리로 변하였다.
" 훨 윈드-스톰! (Whirl Wind-Storm) "
-- 콰과과과곽!
찰나의 순간에 연달아 터져나온 둔탁한 타격음, 쿠오 듀크는 회전하는 그대로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그가 가격한 목표물을 올려보았다.
하늘로 치솟은 뿔 아래로 가면처럼 기괴하게 보이던 듀리엘의 머리에 어둠 속에서도 뚜렷히 보일 만큼 일그러지고 파인 자국이 생겨나 있었다. 쿠오 듀크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으르렁거리듯이 내뱉었다.
" 인간을 얕보지마, 악마. "
듀리엘은 그 자리에서 굳은 듯이 멈춰있다가 옆으로 기우뚱거렸다. 쿠오 듀크가 다시 자이언트 소드를 지쳐들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그는 귓등이 서늘해지며 무엇인가 급속하게 빨려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듀리엘은 상반신을 숙이더니 천천히 뒤로 제쳤다. 그것은 마치 길게 숨을 들이쉬는 것 같았다.
듀리엘은 뒤로 젖힌 상반신을 별안간 용수철처럼 앞으로 튕겨내며 이제껏 닫혀있던 입을 왈칵 열었다.
" 크악! "
쿠오 듀크는 자신도 모르게 자이언트 소드를 떨어뜨리며 양 손으로 귀를 움켜잡았다. 칼날처럼 귀속을 파고들며 고막을 찢고 단숨에 온몸을 갈라놓는 듯한 울림이 듀리엘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울림은 강력한 충격파를 더하여 쿠오 듀크는 귀를 움켜잡은 자세 그대로 뒤로 굴러갔다.
" 크흐으... 크으... 크아아아아! "
쿠오 듀크는 두 귀를 움켜잡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은 단순한 괴성이 아니었다. 귀속을 파고들어 고막에 도달하고 신경을 타고 흘러 세포 하나 하나를 불태우고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실은 울림이었다.
듀리엘은 천천히 쿠오 듀크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가 돌연 그 자리에서 굳은 듯이 멈췄다. 듀리엘은 으르렁 거리는 듯한 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돌아섰다.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손에는 롱소드를 비스듬히 내린 데브란트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데브란트의 뒤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나왔다.
인간이었다면 놀라는 모습이었을까, 듀리엘은 멈칫하더니 상반신을 숙이며 마치 심지를 당기면 폭발할 것 같은 모습으로 잔뜩 도사리기 시작했다.
데브란트는 눈부신 빛 한 가운데 천천히 듀리엘을 향해 걸어갔다. 빛은 점점 더 밝아져서 동굴 안을 대낮처럼 밝히고 그 중심에 선 데브란트의 모습까지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듀리엘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몸을 도사리다가 앞으로 돌격하려는 찰나, 료겐 하데스는 눈을 떴다.
눈을 뜬 료겐이 본 것은 군데군데 무너지고 얼음이 녹아 질퍽해진 어두운 동굴 한 가운데 마주 선 듀리엘과 데브란트였다. 료겐은 불꽃을 뿜을 듯한 눈으로 듀리엘을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 지옥으로 돌려보내주마, 고통의 군주. "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놓듯 료겐의 손이 빠르게 허공에 궤적을 그려내며 그의 입술이 열렸다.
" 죽음이 있는 곳에 한 줄기 섬광이 있으니, 본 스피어! (Bone Spear) "
료겐의 앞에서 하얀 기류가 빠르게 맺히더니 대 여섯개의 본스피어가 한꺼번에 듀리엘을 향해 날아갔다.
-- 콰과과곽!
연달아 본 스피어에 적중당한 듀리엘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옆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 묻혀진 자여, 일어나 내 적을 가두라! 본 프리즌! (Bone Prison) "
료겐의 손을 떠나간 희뿌연 기류가 듀리엘의 몸 주위에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더니 회색빛의 울퉁불퉁한 뼈조각들의 벽이 순식간에 듀리엘의 거체를 조이며 감아버렸다.
베라미스가 눈을 뜬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 붉은 기류와 함께 흐릿하게 아지랭이가 피어올랐다.
베라미스는 빨갛게 달구어진 듯한 두 손으로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 엘덴의 수호자여, 그 종의 부름에 응하여 존엄의 불길을 보이소서. 써몬, 하이드라! (Hydra) "
듀리엘을 가둔 본 프리즌 주변의 땅이 들썩거리더니 폭발하듯이 솟구쳤다. 용암과 같이 붉고 뜨거운 기운이 치솟으며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세개의 머리를 가진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존엄과 자비의 여신 엘덴의 수호자, 화룡 하이드라의 현신이었다.
하이드라는 맹렬한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세개의 머리를 땅 위로 내밀고 본 프리즌 안의 듀리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료겐이 또 다시 완드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 로워 레지스트! (Lower Resist) "
듀리엘의 머리 위로 보라빛 기류가 내려앉았다. 모든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낮추는 네크로맨서의 커쓰, 로워 레지스트였다.
" 카아아아아아아! "
듀리엘이 무시무시하게 울부짖으며 자신을 가두고 있는 본 프리즌에 맹렬히 부딪힌 순간, 화룡 하이드라는 세개의 머리에서 화염의 구체들을 토해냈다.
파파파파파팟!
듀리엘의 거체 위로 소나처럼 화염의 구체들이 작렬했다. 본 프리즌의 중심부분에서 연달아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오며 듀리엘의 거체는 순식간에 붉은 화염과 열기에 휩싸였다. 그 위로 료겐의 본 스피어가 연달아 쏟아지고 베라미스의 인페르노가 더했다.
동굴 안이 무섭게 진동하며 사막의 바람보다 뜨거운 열풍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료겐이 베라미스를 돌아도며 재빨리 소리쳤다.
" 지금이다! 다시 프로즌 오브를! "
우웅... 베라미스의 주위에 또 다시 하얀 기류가 회전하기 시작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세게 휘날렸다.
" The fury of El-Den... Frozen Orb! "
베라미스의 앞에서 하얀 불꽃이 튀며 또 다시 공간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빨려들어간 냉기의 기류가 커다란 구체를 형성하더니 이내 동굴 중심에 피어오른 불꽃의 정화를 향해 날아갔다.
수축됐던 냉기가 화염의 기운과 부딪쳐 폭발하며 귓가를 멍멍하게 하는 뻥!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오브가 터지며 아이스 볼트의 폭풍이 화염의 기운과 합쳐지더니 쿠오 듀크의 훨 윈드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맹렬하게 회전하여 본 프리즌마저 휘감아버렸다. 붉은 화염의 기운과 흰 냉기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회오리가 동굴 중심에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눈을 뜰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동굴 전체가 무섭게 진동하며 내부를 덮고있던 얼음조각들과 모래, 돌무더기들이 거대한 회오리로 빨려들어갔다. 네 사람은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여 금방이라도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몸을 지탱했다. 엎드린 그들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아 어지럽게 휘날리며 모래들이 칼날처럼 그들의 뺨을 스쳐가며 솟구쳐 회오리에 휩싸였다.
그리고 고통의 군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 카아아아아아아!
얼마나 지났을까... 베라미스는 문득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느끼며 땅속을 파고들듯이 움켜쥐고 있던 두 손에 힘을 뺐다. 그녀는 두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바닥에 이마를 부딪히며 쓰러졌다.
두번의 프로즌 오브... 처음 프로즌 오브를 캐스트한 후 그녀의 체력과 마나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이끄는 것을 돕는 데브란트의 오오라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두번의 프로즌 오브는 무리였었다. 무엇보다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이끌어 내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조디악이었다면... 아리스의 죽음 이후 두번째로 베라미스의 머리 속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그녀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백발의 왜소한 남자가 그녀와 같은 자세로 땅에 얼굴을 맞대고 엎드려 있었다. 데브란트와 쿠오 듀크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는 처음으로 조우한 지옥의 악마를 상대로 시전한 최강의 스펠이 무력해진 뒤 고갈된 마나의 흐름과 더불어 절망감에 쓰러진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을 잡고 데브란트의 오오라를 통해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이끌어 내는 것을 도와준 것도 그였다.
료겐이 눈을 떴다. 바닥에 귀를 대고 엎드린 그의 시선이 같은 자세로 있던 베라미스와 마주쳤다.
베라미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무 작은 소리여서 그녀 자신도 듣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고마워요...
료겐은 분명히 들었다. 극한을 넘어선 네크로맨서의 청력으로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입술을 읽은 것인지 엉망이 된 그의 감각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닿을 수 없었던 완성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제자, 과거에 자신을 쓰러뜨렸던 극강의 스펠을 사용하여 당혹함과 함께 절망감을 느끼게 했던 그녀는 분명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료겐은 갑자기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후후...후후후후...크하하하하! "
쿠오 듀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분 나쁜 웃음 소리에 눈을 떴다.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은 사라졌지만 그 잔재는 아직 쿠오 듀크의 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극강에 도전하는 바바리안, 쓰러져 있는 것은 그의 자긍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고향의 누군가를 닮은 듯한 저 웃음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고통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 망할 자식, 네 웃음소리는 정말... "
쿠오 듀크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오른팔에 힘을 주어 몸을 뒤집어 상체를 세웠다. 그의 눈앞에 자이언트 소드의 손잡이가 들어왔다. 손잡이의 위쪽을 잡고있는 손이 있었다.
쿠오 듀크는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데브란트가 서있었다.
쿠오 듀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고맙군. 남의 무기를 챙기기 전에 그 팔부터 돌보는 건 어떤가? "
데브란트는 문득 자신의 축 늘어진 왼팔을 돌아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부러졌다. "
" 큭큭... 몇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자네 표정과 말투는 여전하군. 크크크... "
쿠오 듀크는 데브란트의 등뒤로 폭풍같은 소용돌이가 몰아쳤던 동굴의 중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닥은 쟁기로 갈아엎은 듯이 파헤쳐 진 자국이 겹겹이 원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검붉은 빛깔이 사라지고 짙은 회색빛으로 변한 듀리엘의 거체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철갑같던 그의 외피는 군데군데 찢기고 부서져 나가서 오래된 가죽신처럼 너덜거렸고 이제껏 일행 모두를 죽음에 몰아넣던 거대한 앞발 하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 크크크... 죽은 모습은 영락없이 벌레 같은데... 크크크... 하하하하! "
쿠오 듀크는 고개를 젖히고 광소를 터뜨리다가 료겐과 베라미스를 돌아보았다.
" 어이, 마법사 친구들. 괜찮은가? "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베라미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네. 괜찮은 것 같군요. "
" 하하, 그거 참 다행이오. 하하하! "
쿠오 듀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다가 아직도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료겐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 이 자식아, 그만 좀 웃어라! 네 놈의 기분 나쁜 웃음 소리는 정말이지... "
료겐의 웃음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쿠오 듀크의 항의 때문에 멈춘 것이 아니다.
네크로맨서는 자신의 웃음 소리 사이로 들려온 기분 나쁜 소리,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와 날카로운 것이 바위로 된 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 저, 저건... "
고통의 군주 듀리엘의 삭아버린 거체가 다시 일어섰다.
네 사람 모두 경악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듀리엘의 거체가 꿈틀거리더니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는 데브란트를 향해 무섭게 쇄도했다.
" 데브란트! "
베라미스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린 순간, 데브란트의 몸은 듀리엘의 거체와 충돌하며 분수처럼 솟구치는 선혈과 둔탁한 굉음과 함께 쿠오 듀크의 옆을 지나쳐 뒤로 굴러갔다.
쿠오 듀크는 짧은 찰나 데브란트의 손이 그의 어깨를 스쳐간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 이 자식이! "
쿠오 듀크는 바닥에 비스듬히 꽂혀있는 자이언트 소드를 움켜잡으며 바닥을 차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허공에 치솟은 그의 발 밑으로 푸른빛과 흰빛의 테두리가 겹친 컨선트레이션 오오라가 발현되었다.
" 리프 어택! "
쿠오 듀크의 거구가 바닥을 파고들듯이 내려앉으며 그의 자이언트 소드가 듀리엘의 머리를 내리쳤다. 듀리엘의 머리가 갈라지며 파편이 흩어졌다.
쿠오 듀크는 듀리엘이 휘두르는 거대한 낫을 피해 반대쪽으로 파고들며 자이언트 소드를 움켜쥔 두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핏줄 속을 줄달음치는 급박한 혈액과 팽팽 당겨지는 근육의 요동.
" 훨 윈드-회오리! "
이제까지와는 다른 가죽을 가르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터져나오며 회오리로 변한 쿠오 듀크의 자이언트 소드가 듀리엘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에 막힌 순간, 쿠오 듀크는 회전하는 힘을 더하여 두 팔에 힘을 주어 자이언트 소드를 들어올렸다.
" 카가가가가가! "
그것은 괴성도 함성도 아니었다. 괴롭고 끔직한 고통스런 비명이 듀리엘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쿠오 듀크의 자이언트 소드가 듀리엘의 몸체를 뚫고 나왔다.
" 카아아아아악!! "
-- 인간... 인간...
-- 감히... 감히...
-- 심판을... 심판을...
고통의 군주 듀리엘의 거체가 갈라지더니 그 틈새에서 뜨거운 연기가 솟구쳤다. 그리고 쿠오 듀크가 그의 몸을 가르며 돌파한 쪽으로 기우뚱거리더니 무너졌다.
신과 맞서는 유일한 존재 악마는 지상의 여느 하잖은 짐승처럼 괴롭게 울부짖으며 천천히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