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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내전 전쟁 개요
| 전쟁주체 | 1단계: 마리우스파 vs 술라파 2단계: 카이사르(평민파) vs 폼페이우스 (귀족파) 3단계: 옥타비아누스 v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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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시기 | 기원전 91~기원전 31 |
| 전쟁터 | 이탈리아 반도, 시칠리아, 히스파니아(에스파냐), 그리스, 북아프리카 |
| 주요전투 | 콜리나 관문 전투, 일레르다 전투, 디라키움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 문다 전투, 빌립보 전투, 악티움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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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향하여 –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목을 이야기하면서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여우의 꾀와 늑대들을 벌벌 떨게 하는 사자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우의 꾀’와 ‘사자의 힘’의 출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아니라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정치가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가 동맹전쟁 이후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집권한 술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적고 있다. (카르보가) 자신은 술라와 겨루면서 여우와 사자를 동시에 상대하여야 했다고 하는데 ‘사자’보다는 ‘여우’가 오히려 더 싸우기가 힘들었다고 하고 있다. 즉 술라는 장수로서의 힘을 지님과 함께 모략에도 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단한 인물이었던 술라조차 ‘이 카이사르라는 젊은이에게서 마리우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하고 있다. 술라는 정계에 제대로 진출하지도 않은 젊은이에게서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술라는 1만명에 가까운 정적들을 죽이던 대숙청 과정에서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유력가문들이 카이사르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바람에 죽이지 못하였는데 이후 죽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술라의 예언은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카이사르의 집권과정은 비록 군대의 힘과 때로는 민중의 폭력을 권력획득에 이용하는 당시 로마정치의 패턴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얼핏 보면 술라의 집권과정과 비슷하다. 외지에 대한 정복전쟁을 통하여 명성을 획득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것도 그러하고 그의 정적들에 의하여 ‘공적’으로 규정된 것도 같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그의 정적들을 내어 쫓은 것도 닮아있다. 그러나 술라와 카이사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술라가 비록 전권을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독재관으로서 할 것을 다하였다고 여기는 순간 권력을 내려놓고 로마의 정치를 이전의 집정관/의회중심체제로 돌려놓았다. 비록 독재를 행하기는 하였지만 의회중심의 합의정치를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로마 정치인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술라가 예언하였듯이 야심이 남달랐다. 카이사르 역시 이후 독재관이 되기는 하였지만 권력을 내려놓을 마음이 없었다. 수에토니우스의 [12황제 열전]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술라가 권력을 내려놓은 것을 두고 ‘A, B, C’도 모르는 행동이라며 마구 비웃고 있다. 카이사르는 단순히 권력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권력이 다른 형태로서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재관으로서의 임기를 무시하고 이후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된 것만 해도 그러하다. 이러한 야심은 로마에 대격변을 불러왔으며 이후의 로마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카이사르 vs 폼페이우스
술라의 퇴임 후에도 로마 정치의 혼돈은 계속되었지만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로마의 팽창 역시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술라의 미트리다테스 정벌로 로마는 터키와 아시아방면으로 본격적인 진출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역을 영향권으로 확보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지금 스위스에 살고 있던 헬베티족의 갈리아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갔다. 이후 십여 년간 벌어진 갈리아 원정에서 수에비족, 벨게이족, 그리고 아베르니족이 주축이 된 갈리아족의 대동맹을 모두 격파하고 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로마의 판도로 확실히 편입시킨다. 이후 브리타니아로 원정군을 이끌고 지금의 영국 남부에 친 로마파 군장을 세우고 귀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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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좌)와 폼페이우스(우)의 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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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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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살루스 전투에서의 양군(兩軍) 배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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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사망 당시(BC 44년)의 로마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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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레옹 제롬므(Jean-Leon Gerome)의 ‘카이사르의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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