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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7권 / 묘지(墓誌)
■장유(張維)
[생년] 1588년 1월 22일(음력 1587년 12월 25일)
[졸년] 1638년 4월 30일(음력 3월 17일) / 향년 52세
계곡 장 상공의 묘지[谿谷張相公墓誌] - 정두경(鄭斗卿)
숭정(崇禎) 무인년(1638, 인조 16) 3월 17일에 우상(右相) 장공(張公)이 졸하였다. 그해 5월에 안산(安山) 월곡촌(月谷村)에 있는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갑오년(1654, 효종 5)에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가 졸하여 공의 묘소 오른쪽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뒤인 갑진년(1664, 현종 5)에 또다시 안산(安山) 신산리(新山里)에 새로이 유향(酉向)의 언덕을 묏자리로 잡아 두 분을 천장(遷葬)하였는데, 맏아들인 선징(善澂)이 나 두경(斗卿)에게 묘지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은 덕수인(德水人)으로, 휘는 유(維)이고, 자는 지국(持國)이며, 호는 계곡(谿谷)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시조인 순룡(舜龍)은 원(元)나라 때 선무장군(宣武將軍) 진변 총관(鎭邊摠管)으로서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따라 고려로 나왔다가 그대로 벼슬하여 관직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으며,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분이 있는데, 휘가 핵(翮)이다. 또 문장에 능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분이 있는데, 휘가 옥(玉)이다.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임중(任重)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휘 일(逸)은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운익(雲翼)은 문장에 능하고 큰 재주가 있어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순충적덕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영의정(領議政)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박숭원(朴崇元)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정해년(1587, 선조 20) 12월 25일에 태어났다. 공을 임신하였을 때 모부인께서 해가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태어남에 미쳐서는 기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총명하기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백씨(伯氏 장륜(張綸))가 배우는 것을 곁에서 듣고는 번번이 기억하자, 판서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7세 때 비로소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 시서(詩書)를 외웠다.
13세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상을 치르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15세 때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에게서 《서경(書經)》을 배웠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경(禮經)》을 배웠는데, 사계가 매우 중하게 여겼다. 그 뒤에 백가(百家)의 서책을 보아 명성이 날로 진동하였다. 19세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장원하였으며, 20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23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임하였다. 괴원에 있을 때 신방(新榜)을 선발하게 되었는데, 방(榜)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고관의 친속이거나 권귀(權貴)의 자제들이 많이 있었다. 이에 동료 관원이 마음속으로는 옳지 않게 여기면서도 입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정색하고 배척하였다가 끝내는 선발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에 선발되어 주서(注書)로 옮겨졌다. 임자년(1612) 봄에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황혁(黃赫)을 무고(誣告)하였는데, 공의 매서(妹壻)인 황상(黃裳) 역시 그 옥사에 죽었다. 공은 그 일에 연좌되어 관직에서 파직되고 안산(安山)에 있는 전사(田舍)로 내려가 12년 동안 은거해 살았다.
당시에 간사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므로 공은 연좌되어 파직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고는 종일토록 문을 닫고 들어앉아 성현들이 남긴 여러 책을 읽었다. 공은 재주가 본디 절륜하기는 하였으나, 문장이 성취되어 우뚝 높아서 미칠 수 없는 점이 있게 된 것은 이때 12년 동안 곤궁 속에서 고생한 덕분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 1)의 반정(反正) 때에는 비밀리에 곁에서 도운 바가 많았다. 다시 한림(翰林)에 들어갔으며, 성균관 전적, 예조 좌랑으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이조 정랑으로 옮겨져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상께서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팔도에 선유(宣諭)하게 하였는데, 공은 호남 지방을 맡았다.
이에 크고 작은 폐단을 모두 조목별로 나열하여 올렸는데, 복명(復命)하자, 상께서 이르기를 “어사의 서계 가운데 장유의 것이 가장 좋았다.” 하였다. 그러자 정경세(鄭經世)가 상께 아뢰기를 “장유의 학식은 지금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의당 노상 수신(盧相守愼)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순서에 구애하지 말고 특별히 임용하는 것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하니, 상께서 그러라고 하였다.
이에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으며, 녹훈되어 분충찬모입기정사 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는데, 2등에 책훈(策勳)되었다. 공은 상소를 올려 훈작(勳爵)과 자급(資級)을 사양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대신의 천거에 의해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에 제수되어 군국(軍國)에 관한 모든 일이 공에게 속하게 되었다.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께서 공주(公州)로 행행하자 어가(御駕)를 호위해 가다가 천안(天安)에 이르러서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는데, 무신들 가운데 머뭇거린 자나 조사들 가운데 도망쳐 숨은 자들에 대해 공은 권세가 있거나 친분이 있거나를 막론하고 일체 논핵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호종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고 신풍군(新豐君)에 봉해졌다.
이때 가뭄의 재앙이 있었다. 공은 차자를 올려 날마다 세 번씩 경연을 열어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하고, 사변(事變)을 재결(裁決)하여 하늘을 감동시키고 덕을 닦는 실제로 삼으라고 하였으며, 또 일찌감치 세자(世子)를 정하고 신중하게 궁료(宮僚)를 뽑아 세자를 보도하는 직임을 다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께서 가납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 3)에 재변으로 인하여 구언(求言)하자, 공은 전지에 응해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럽게 되는 것은 참으로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큰 근본은 모두 임금의 한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임금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버려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고는, 임금의 뜻을 세우고, 임금의 도량을 넓히고, 임금의 마음을 공평히 하는 세 가지 일에 대해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정직하였으므로, 상께서 가납하였다. 병인년(1626)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9월에 크게 우레가 쳤다. 공은 차자를 올려 주시(周詩)의 〈시월지교(十月之交)〉 장을 거론하면서 경계로 삼게 하였는데, 상께서 가납하였다.
정묘년(1627) 봄에 후금(後金)의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상께서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는데, 공은 대사성으로서 어가를 수행하였다. 후금의 차인(差人) 유해(劉海)가 나와서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유해는 본시 중국 사람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한 자로, 사람됨이 교활하고 또 글을 알았다.
이에 상께서는 공 및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에게 명하여 함께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접빈(接賓)하게 하였다. 유해가 약조(約條) 몇 건을 내놓았는데, 첫 번째 조항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 조정과 절교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은 큰소리로 거절하였다. 그러자 유해가 말하기를 “옛날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이자 소홀(召忽)은 죽고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는데, 공자가 관중에 대해 인(仁)하다고 하였다.” 하면서, 이것으로 꾀고 협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공은 일찍이 《사성통해(四聲通解)》를 보았으며, 또한 말뜻을 추측하여 관중과 소홀의 일을 거론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곧바로 응답하기를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신의가 없으면 발붙일 수가 없다.” 하니, 유해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해가 굳이 상을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상께서 어탑(御榻)에 앉아서 그를 만나 보았다. 그러자 유해가 노하여 그 자리에 서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눈으로 한참 동안 째려보았다. 이에 공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유해가 몹시 무례하게 구니, 밖으로 내쫓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유해가 뭇 신하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예를 행하고서 나갔다. 유해가 또 우리나라로 하여금 주고받는 글에 명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공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사대(事大)하는 도리는 연호보다 막중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를 한번 잘못하게 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오랑캐들은 군사들이 늙었고 또 피로한 상태이니 필시 이것을 가지고서 다투어 화의(和議)를 깨뜨릴 리는 없습니다. 설령 성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큰 예법(禮法)이 있는 바는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드디어 공의 말을 써서 기어이 명나라의 연호를 썼다.
강화의 약조가 이미 정해진 뒤에 유해가 상께서 친히 맹세하는 단에 임하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바야흐로 계운궁(啓運宮)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이를 걱정스럽게 여겼다. 이에 공이 이경직과 더불어 유해를 찾아가서 극력 다투자, 유해가 이에 따랐으므로 대신을 보내어 맹세하는 단에 임하게 하였다.
그 뒤에 유해가 돌아가 피도(皮島 가도(椵島)에 있으면서 매번 그 일에 대해 말하면서 체모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또 승지 최유해(崔有海)가 일찍이 군문(軍門) 원숭환(袁崇煥)에게 문안하자, 원숭환 역시 그때의 일을 칭찬하면서 공의 안부를 묻고는 서로 만나 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상께서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자 공은 이조 참판으로서 어가를 호종하였다. 9월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어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세 번 차자를 올려 고사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으며, 덕도 있고 행실도 있기에 이와 같이 장려하고 유시하는 것이다.” 하고는, 친히 청탁하는 것을 막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억누르는 등의 일을 써 주었는데, 이를 벽 위에 붙여 놓았다.
공은 인사행정을 함에 있어서 승진이 막혀 있는 자들을 진작시키고 인재를 구하는 것을 긴요하게 여기는 것을 요무로 삼아, 한결같이 공심으로 처리하면서 사심을 없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청탁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이조 판서 집의 문정(門庭)이 빈한한 선비의 집보다도 더 적막하였다.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제수되자, 고사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소식이 있어서 원접사(遠接使)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중국 사신이 나오지 않았다. 후금 사람들이 포로로 잡힌 이들의 쇄환을 요청하자, 조정에서는 쇄환하자니 차마 못하겠고, 쇄환 안 하자니 저들이 노여워할까 걱정되어, 질질 끌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은 차자를 올려 쇄환해서는 안 됨에 대해 극력 간쟁하면서 아뢰기를, “옛날에 평원군(平原君)은 일개 공자(公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제(魏齊)가 그의 집에 찾아와 숨었을 때 평원군 자신이 진(秦)나라 조정에 붙잡혀 있는 처지이면서도 오히려 진왕(秦王)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서 위제를 조나라로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차마 추악한 오랑캐가 한마디 하였다고 하여 우리의 적자(赤子)를 가볍게 던져 주어 호랑이 입속에 밀어 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즈음 중외(中外)의 인심을 살펴보건대, 흉흉하고 참담하여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민심이 이미 떠나가고 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어찌 오랑캐의 말이 남쪽 지방에서 풀을 뜯기를 기다리겠습니까.”하니, 상께서 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가 매우 좋다.
그러나 영부사(領府使) 이원익(李元翼)의 헌의(獻議)에 따라서 이미 쇄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였다. 이에 공은 강개한 마음으로 다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것은 국가의 큰 계책으로, 존망이 달린 바이니, 아마도 노신(老臣)의 한마디 말 때문에 결단을 내려 행해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이 올린 이 차자를 가지고 다시금 묘당(廟堂)에 물어서 충분히 강구하여 처리해서 후회가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께서 회보하지 않으니,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공은 조정에서 자강(自强)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오랑캐들의 말만 따를 경우, 그 폐단이 차마 말할 수 없게 될까 걱정하였다.
그러므로 재차 차자를 올려 그 이해를 극론하였는데, 병자년(1636, 인조 14)에 이르러 과연 사실로 징험되었다. 상께서 한재(旱災)로 말미암아 구언(求言)하자, 공은 차자를 올려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다. 그 요지는 먼저 뜻을 세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공은 그 차자에서 아뢰기를, “다스려진 시대의 뒤를 이은 임금과 어지러운 시대의 뒤를 이은 임금은 같지 않습니다.
다스려진 시대의 뒤를 이은 임금은 공손한 자세로 아무 말 없이 있으면서 허물이 적게만 하더라도 오히려 수성(守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시대의 뒤를 이은 임금의 경우에는 큰일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뜻을 분발하지 않으면 다스릴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은 혼모하고 포악한 다스림의 뒤끝이라서 백성이 소생하지 않았으며, 바깥에는 강한 오랑캐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바, 나라가 망할 날이 머지않습니다. 형세로서 논해 본다면 절검(節儉)하기를 위(衛)나라 문공(文公)과 같이 하고,고생하기를 월(越)나라 구천(句踐)과 같이 하더라도 오히려 다스려 나갈 수 없을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난날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 답습하면서 다스리는 데이겠습니까.”하였다. 공은 위에서 무언가 큰일을 해보려고 하는 뜻이 없기 때문에 나랏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을축년(1625, 인조 3)에 올린 상소에서 임금의 뜻을 가지고 말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또다시 언급한 것인데, 상께서 좋게 여겼다. 원래의 차자는 문집 속에 실려 있다.
공은 이 세상에 드문 알아줌을 입어 신하로서 임금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은 오직 간언하여 아뢰는 데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국가의 득실에 관계되는 일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앞장서서 나아가 힘껏 간쟁하였다. 당시에 흥양 현감(興陽縣監) 정홍임(鄭弘任)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 내수사(內需司)의 하인을 잡아 가두자, 인목왕후(仁穆王后)께서 진노하니, 상께서 정홍임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필부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도 오히려 차분하게 말씀드려 잘 인도해서 어버이로 하여금 허물이 없도록 하는 것이지, 어버이의 명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제왕의 효에 있어서 어찌 올바른 도리로 깨우쳐 드리지 않고, 한갓 뜻을 받들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내수사의 폐해와 정홍임의 죄가 없음에 대해 극력 진달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겼다.
기사년(1629, 인조 7) 가을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나만갑(羅萬甲)이 논의를 주동하여 이조 판서를 뒤흔들었다고 진계하자, 상께서 나만갑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은 차자를 올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진달하였는데, 차자를 궁중으로 들이자 안에 머물러 두었으며, 며칠이 지난 뒤에 공을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공은 중신(重臣)으로서 수령이 되어 나갔으며, 또 평소에 공의 맑은 덕에 감복하고 있었으므로, 완악한 아전들이 감히 공을 속이지 못하여 온 경내가 저절로 잘 다스려졌다. 공이 떠나온 뒤에 아전과 백성이 공을 그리워하여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당시에 도수(島帥)가 동강(東江)에 부(府)를 열어 공문서가 아주 빈번하게 오갔는데, 모두 문형(文衡)이 지어야 했으며, 한마디 말의 득실에 이해가 달려 있었다. 상께서는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경연에 임하여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지난날에 장유가 있을 적에는 사명(辭命)이 자못 볼만하였다.” 하였는바, 상께서 공을 불러들일 뜻이 있었던 것이다. 월사(月沙) 이 상공(李相公)이 이를 인하여 공의 문장을 칭찬하였다.
경오년(1630, 인조 8) 가을에 특별히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12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때 추숭(追崇)하는 데 관한 논의가 일어난 뒤로 삼사(三司)에서 극력 간쟁하였으나, 상께서 듣지 않았는데, 말투가 거칠었다. 공은 이에 경전(經傳)에 나오는 명문(明文)과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을 널리 상고하여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차자와 함께 올려, 상께서 느껴 깨우치는 바가 있기를 기대하였는데, 상께서 차자를 안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대부들이 참고하여 증거로 삼을 바가 있게 되어 이것으로 바른 논의를 하는 데 도움을 받았으며, 이론(異論)을 주장하던 자들 가운데에도 지난날의 잘못된 견해를 고치는 자가 있었다. 당초에 계운궁(啓運宮)의 상을 당하여 뭇 신하들이 상의 복제(服制)에 대해 논의할 적에 정경세(鄭經世)가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어머니가 부인이 아니면 시복을 입는다.〔君之母 非夫人 服緦〕’라고 하였다.” 하면서, 이 글에 의거하여 예법을 정하려고 하자, 최명길(崔鳴吉)이 매우 그럴 듯하게 여겼다.
이에 공은 최명길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어머니가 부인이 아니라는 것은 임금의 첩(妾)을 두고 이른 것이다. 이 말은 서자(庶子)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을 경우, 자기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첩인 만큼, 예법에 있어서는 의당 시복(緦服)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는 이 경우와는 같지 않다. 따라서 먼저 대원군(大院君)에 대한 복제(服制)를 논해 보면, 계운궁에 대한 예법은 거기에 따라서 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복을 입는다는 글을 대원군에 대한 복제에도 적용해 쓸 수가 있겠는가.”하니, 정경세와 최명길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크게 깨달아 드디어 장기(杖期)의 복을 입는 것으로 예를 정하였다.
그런데도 공이 종시토록 추숭하는 데 대해 반대한 것은 시복을 입을 경우에는 또 추숭을 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공이 예에 있어서 절충(折衷)을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신미년(1631, 인조 9) 4월에 다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추숭하는 데 대한 의론이 이미 정해졌는데, 공은 차자를 올려 ‘마음과 일이 모순되어 진퇴가 낭패스럽다.’라는 뜻을 아뢰자, 즉시 체차해 주었다. 이로부터 산관(散官)으로 한가로이 지냈다. 그 뒤에 좌참찬과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 10) 봄에 상소를 올려 문형의 직을 사임하면서 ‘추숭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자는 쫓겨나는 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며, 또 대례(大禮)를 올릴 때의 글이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마땅치 않다.’라는 뜻을 스스로 진달하면서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상께서 성균관을 돌아보고자 하니, 정원에서 계청하여 공을 명초(命招)함에 따라 드디어 조정으로 나아갔다.
인목왕후(仁穆王后)께서 승하하여 애책문(哀冊文)을 찬하고 또 지문(誌文)을 찬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고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8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당시에 풍질(風疾)에 걸려 있어 어깨와 목이 땅기고 뻣뻣하였는데, 나라에 큰 우환이 있어 억지로 출사하였다.
12월에 재차 상소하여 체직시켜 병을 요양하게 해 주기를 청하자, 이조 판서에서 체차해 주었다. 이로부터 잇달아 글을 올려 겸대한 직까지 아울러 사직하였다. 계유년(1633) 3월에 겸대하고 있던 여러 직에서 모두 체차되고는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은 것이 5년이었다.
병자년(1636) 봄에 후금(後金)이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고는 우리나라에 통고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의(大義)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공은 국사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상소 1통을 기초하여 미리 강도(江都)로 들어가기를 청하고자 올리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해창부원군(海昌府院君) 윤방(尹昉)이 입시하여 역시 이런 내용으로 진달하였는데, 승지로 있던 김경징(金慶徵)이 상 앞에서 면절(面折)하였다. 이에 공은 그 계책이 시행되지 않을 것을 알고는 올리지 않았다. 12월 14일에 후금의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상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차하였으므로 공은 어가를 따라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성이 포위되고, 적들이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을 보내라고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판서 심집(沈諿)과 능봉군(綾峯君)을 내보냈다. 적들이 의심하여 그들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묻자, 사실대로 답하니, 적들이 더욱 노하였다. 다음 날에 다시 좌상 홍서봉(洪瑞鳳),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동지중추부사 이경직(李景稷)을 보내어 적의 군영으로 가서 사과하게 하고, 진짜 왕자와 대신을 보내겠다고 허락하였다.
그러자 적들이 “다시는 그런 말을 말라. 오직 세자가 나와야만 화약(和約)이 성사될 것이다. 너희는 네 나라의 고사(故事)를 듣지 못하였는가?”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고려조 때 세자를 원(元)나라에 들여보낸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복명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경악하면서 모두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상께서도 역시 “적들의 뜻은 실제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우리를 시험해 보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평소에 우리나라의 병력이 극히 약하고 군율이 엄하지 않아 위급할 때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급히 산성으로 들어와서 성안에 보유한 곡식이 아주 적고, 게다가 날씨마저 눈비가 내리는 탓에 성첩을 지키는 군사들이 밤낮없이 바깥에 거처하여 얼굴빛이 모두 사색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형세상 오래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적장(賊將)은 십왕(十王)인데, 한 사람이 외로운 군대로 깊이 들어와 우리의 국도(國都)를 습격하였는바, 그 마음은 반드시 군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홀로 큰일을 판가름해서 자신이 모든 공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쳐들어온 것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척화(斥和)하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인질을 잡아가고 세폐(歲幣)를 더 늘리며, 겸하여 지난날의 분을 풀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그들의 말을 따라 주면 화친하는 일이 거의 성사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외로운 성이 포위되어 안과 밖이 단절된 상태에서 여러 날 동안 서로 버틸 경우, 곡식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 고갈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도의 근왕병(勤王兵)들도 반드시 올 것이라고 보장하기 힘든데, 적들이 더욱더 많이 나온다면,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
그럴 경우 양궁(兩宮)을 장차 어디로 모시겠는가. 무릇 저군(儲君)을 인질로 보내는 것은 참으로 신하 된 자로서 차마 못 할 말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저들의 말을 따라 주면 양궁께서 모두 안전할 것이고, 따라 주지 않으면 양궁께서 모두 위험할 것이다. 화(禍)를 택할 경우에는 가벼운 쪽을 택하느니만 못한 법이니,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은 없다.’라고 여겼다.
이에 드디어 묘당에서 이런 의론을 발하였다. 그러자 묘당에 있던 제공들이 모두 그 말이 그럴 듯하다고 여겨, 드디어 입대(入對)하기로 의론을 정하였다. 이날 밤에 영상 김류(金瑬), 좌상 홍서봉(洪瑞鳳),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 참찬 한여직(韓汝稷), 동지중추부사 이경직(李景稷). 홍방(洪霶) 및 공 모두 아홉 사람이 함께 면대를 요청하였다.
영상이 먼저 그 의론을 끄집어내었는데, 기운이 위축되어 말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상께서도 역시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이에 제공들이 대부분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조 판서가 다음으로 말하였고, 공이 그다음으로 말하였는데, 기운이 격렬하고 말투가 자못 간절하였으나, 상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제공이 모두 물러나고, 상께서 홀로 이조 판서만 남게 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뜻이 아주 비통하고 애절하였다.
이에 공은 곧바로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은 사세가 비록 급박하기는 하지만, 전하께서는 스스로 지나치게 기가 꺾여서는 안 됩니다. 의당 뜻을 넓고 크게 가져서 장사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준엄한 의론이 벌 떼처럼 일어나 등대(登對)하였던 사람들을 온갖 말로 욕하였다.
성안에서는 밤낮없이 근왕병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군사들이 모두 머뭇대면서 감히 산성 쪽으로 전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들이 근왕병이 모여들지 않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심양(瀋陽)에 있던 군사를 청하니, 심양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처음에 포위되었을 적에는 청나라 군사들의 숫자가 아주 적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철기(鐵騎)가 성 아래에 온통 꽉 찼다.
성이 포위된 지 수십 일이 지난 뒤라서 전사들이 모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어 힘이 다하였다. 적들이 화포로 성을 공격하자 포성이 천지에 진동하였다. 이에 성안의 인심이 흉흉하고 불안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무너져, 일이 드디어 몹시 낭패스럽게 되었다.
당초에 공은 이런 걱정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발론(發論)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심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서는 모두 공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 1월 30일에 상께서 도성으로 돌아왔는데, 공은 예조 판서로서 어가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2월 3일에 대부인(大夫人)의 부음(訃音)이 강도로부터 왔다. 공은 평소에 고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대부인의 상을 당함에 미쳐서 애통해한 탓에 병이 더 도져 기력이 다 떨어졌다. 그런데도 조석으로 곡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직접 자리로 나아가 곡하였다. 7월에 상께서 특명을 내려 기복(起復)하게 하고는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하였는데, 이는 최명길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공은 사정을 진달하고 죽기로써 체차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드디어 병든 몸을 이끌고 안산(安山)에 있는 묘소 아래로 갔다. 이때 상께서 근신(近臣)을 집에 보내어 유시한 것이 네 차례였으며, 안산에 보내어 유시한 것이 두 차례였다.
그런데도 끝내 조정으로 나아가지 않고는 19차례나 차자를 올렸다. 그러자 상께서도 공의 지극한 정을 알고는 차마 효심을 빼앗을 수가 없어 드디어 체차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자급은 그대로 두었다. 공은 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예제보다 지나치게 하였고, 또 나랏일에 대한 걱정과 울분으로 인해 다음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마침내 경성(京城)의 정침(正寢)에서 졸하였는데, 춘추는 52세였다.
이날 긴 무지개가 정침의 지붕 위에 뻗쳐 있었으므로 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고, 부의를 규례보다 더 내렸으며, 공을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탄식하면서 애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부인네나 노복들까지도 모두 “어진 재상이 돌아가셨다.” 하였다.
공은 천품이 충담(沖澹)하고 허정(虛靜)하여 정욕(情欲)에 조금도 더럽혀짐이 없었다. 이에 공을 마주 대하면 마치 빙호(氷壺)와도 같아 비루하고 인색함이 저절로 소멸되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어려서부터 이미 그 큰 요지를 알았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더욱더 함양하여 나아간 바가 아주 높았다. 또 현묘한 이치에도 통달하여 약관의 나이에 《음부경(陰符經)》에 대한 주석을 내었는데, 앞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많이 발현해 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상촌(象村) 신흠(申欽)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공을 중하게 여기면서 “지금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백사는 일찍이 말하기를 “장유는 공문(孔門)에 놓아둔다면 안연(顔淵)이나 민자건(閔子騫)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남들로부터 허여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은 취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리로써 취하였는바, 참으로 의리에 맞지 않으면 티끌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또 대부인을 섬김에 있어서 매우 효성스러웠고, 홀로 된 형수를 섬김에 있어서 아주 삼갔으며, 조카들을 한결같이 자신의 자식과 똑같이 하였다. 친척들을 두터이 돌보아 주어 빈궁한 자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녹봉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늘 양식을 꾸어다가 밥을 지었다.
또 붕우들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기를 기갈이 들린 것보다 더 심하게 하였으며, 큰일이 아니면 버리지 않았으므로, 한 사람도 교제하는 도리를 손상하지 않았다. 또 교육시킬 만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잘 이끌어 주어 성취시켜 주었다. 이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 공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공의 문(文)은 육경(六經)에 근본을 두었고 진한(秦漢)의 문장을 참작하였다. 박학함은 천하의 서책 가운데 꿰뚫지 못한 것이 없어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복(醫卜), 율려(律呂), 병가(兵家), 내전(內典), 단경(丹經)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통달하였다. 축적한 것이 이미 많았으므로 그것을 발휘하여 글로 엮어 낸 것은 웅장하고 깊으며 드넓고 커서 혼혼(渾渾)하기가 마치 강물과 같아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에 송(宋)나라에 있어서는 구양영숙(歐陽永叔)과 나란히 내달릴 수가 있었다. 시(詩) 역시 고아하고 굳건하며 섬부하고 아름다워 크게 두소릉(杜少陵)의 풍격(風格)이 있었다. 필법(筆法) 역시 굳세고 강하였다. 저서로는 문집(文集) 16권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었다.
부인은 상국(相國) 선원공(仙源公) 김상용(金尙容)의 딸인데 온 집안에서 어진 덕을 칭송하였다. 강도의 변에 선원공께서는 의리상 치욕을 당할 수가 없어서 뜨거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런즉 부인의 어짊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공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선징(善澂)은 과거에 급제하여 현재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있다. 딸은 바로 효종(孝宗)의 왕후(王后 인선왕후(仁善王后)이다. 이분이 성군(聖君 현종(顯宗)을 탄생하여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이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을 왕후(王后 명성왕후(明聖王后))로 삼았는데, 이분 역시 원자(元子 숙종(肅宗))를 낳았다.
그러니 국가의 만대토록 끝이 없을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공주는 다섯을 두었다. 첫째는 숙안(淑安)으로,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숙명(淑明)으로, 청평위(淸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숙휘(淑徽)로,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顯)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숙정(淑靜)으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시집갔고, 다섯째는 숙경(淑敬)으로,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에게 시집갔다. 선징의 초취는 현감 윤종(尹宗)의 딸로, 1남을 낳았는데, 훤(楦)이며, 재취는 이승효(李承孝)의 딸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덕수 장씨 선대 근원 따져 보면은 / 張氏之先
그 근원은 중국에서 유래하였네 / 本乎中國
우리 대동 건너와서 벼슬살이해 / 仕我大東
덕수 고을 식읍으로 받으시었네 / 德水食邑
공의 대에 미쳐 더욱 창성했거니 / 逮公益彰
그 명성이 혁혁하지 아니했던가 / 厥聲不赫
공께서는 영예 복록 안 구했거니 / 公不榮祿
만난 운세 행실 바르지 않은 이였네 / 運際匪人
공께서는 성스러운 임금 만나서 / 公遭聖明
그제서야 경륜을 다 펼 수 있었네 / 始展經綸
숨었을 땐 봉황새와 같았었으며 / 其隱如鳳
폈을 때는 자벌레와 같이 하였네 / 其伸如蠖
시초에다 거북과도 같았었으며 / 如蓍如龜
금에다가 또한 옥과 같았었다네 / 如金如玉
산과 같이 우뚝하게 치솟았으며 / 如嶽之峙
솔과 같이 곧고도 또 곧았었다네 / 如松之直
이에 인문 아주 크게 떨치어서는 / 大振人文
나라 문장 아름답게 꾸미었다네 / 以賁王國
공께서 첨 태어나던 그 당시에는 / 公之始生
해를 안는 길한 조짐 꿈을 꾸었고 / 吉夢惟日
공께서 막 졸하여서 돌아갈 적엔 / 公之化去
긴 무지개 침실 위에 뻗어 있었네 / 虹亘寢室
이인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 異人之生
실로 천지 운수와도 관계된다네 / 實關天地
이 세상에 오실 때와 떠나가실 때 / 其去其來
그 징조를 보면 역시 기이하였네 / 亦徵其異
공의 무덤 천장하여 옮기게 된 건 / 公葬之遷
길한 자리 택하느라 그런 것이네 / 吉地是擇
이런 내용 모두 담아 묘지명 지어 / 作此墓銘
돌아가서 편히 쉬는 곳에 들이네 / 納于眞宅
<끝>
[주01] 제국공주(齊國公主) : 고려 충렬왕의 비이다. 원성공주(元成公主)에 책립되었다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에 추봉되었다.
[주02] 임자년 …… 죽었다 : 황혁(黃赫, 1551~1612)은 1612년(광해군 4)에 이이첨(李爾瞻)을 시로써 풍자한 일 때문에 미움을 받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신율에 의해 순화군(順和君)의 아들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무고를 받
고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황상(黃裳)은 황혁의 손자이다.
[주03] 공은 …… 하였는데 : 이때 장유는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에 나오는 “번쩍번쩍 천둥 번개, 불길하고 불안하다.〔爗爗震電
不寧不令〕”라는 대목을 들어 인조를 경계시켰는데, 이 시는 주나라 유왕(幽王) 때 지어진 것으로, 공자(孔子)가 후대의 임금들로
하여금 거울로 삼아 경계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수록한 시이다.
[주04] 계운궁(啓運宮) : 인조의 생모(生母)이며, 원종(元宗)의 비인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를 가리킨다. 성은 구씨(具氏)이
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좌찬성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사맹(思孟)의 딸이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과 혼인
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으로 봉하여졌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고 궁호(宮號)를
계운궁이라 하였다. 인조와 능원대군(綾原大君), 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능호는 장릉(章陵)으로 김포에 있다.
[주05] 옛날에 …… 내보냈습니다 : 평원군(平原君)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의 아들 조승(趙勝)이다. 위 소왕(魏昭王) 때
재상으로 있던 위제(魏齊)가 범수(范睢)가 제(齊)나라에서 뇌물을 받은 것을 구실로 범수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거적에 말아 변소
에 놔둔 뒤 사람들에게 오줌을 누게 하였다. 그 뒤에 범수가 진(秦)나라로 도망쳐 진나라의 정승이 되어 위제에게 복수하려고 하였
다.
그러자 위제가 두려워 평원군의 집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범수의 부탁을 받은 진나라 소왕(昭王)이 평원군을 불러와 위제를 내놓
게 하였는데, 평원군은 끝까지 위제를 내놓지 않았다. 그 뒤에 위제는 다시 도망쳐 초(楚)나라 신릉군(信陵君)을 찾아갔는데, 신릉
군에게 예우받지 못하자, 화를 내면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주06] 절검(節儉)하기를 …… 하고 : 전국 시대 때 위(衛)나라가 적(狄)에 멸망되어 문공(文公)은 조읍(漕邑)에 거처하며 거친 베옷을 입
고 거친 비단 관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재물을 모으고 백성을 가르쳐 마침내 위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閔公2年》
[주07] 고생하기를 …… 하더라도 :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말한다. 춘추 시대 때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 부차(夫差)
와 싸워 패하였는데, 구천은 치욕을 참고서 화친을 맺었다. 구천은 오나라에서 풀려나 월나라로 돌아온 뒤 밤낮없이 복수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혹시라도 자신의 뜻이 해이해질까 걱정스러워 낮에는 쓸개를 매달아 놓고 이를 맛보고 밤에는 섶에 누워서 자며, 여
름에는 화로를 껴안고 있고, 겨울에는 얼음을 껴안고 있는 등 각고면려하면서 원한을 잊지 않았으며, 길을 가다가 개구리가 노한 모
습을 보고는 경례를 하는 등 무(武)를 숭상하고 군사들을 격려해 마침내 부차를 쳐서 이겨 그 원한을 씻었다. 《史記 卷41 越王句踐
世家》
[주08] 당시에 …… 열어 : 도수(島帥)는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 있는 가도(椵島)에 와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가리키고, 동강(東江)은 모문룡이 세운 진(鎭)의 이름이다. 1621년(광해군13)에 청나라 태종이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
자, 명나라의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있던 모문룡이 의주(義州)로 쫓겨 들어왔다가 이듬해에 가도에 진을 세우고는 동강진(東江
鎭)이라고 칭한 다음, 철산. 사량(蛇梁). 신미도(新彌島) 등에 분진(分鎭)을 두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그에게 크게 기대를 걸고 청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모문룡이 청군(淸軍)의 배후를 자주
기습하였으므로 청나라 태종이 1627년(인조5)에 조선을 침입함과 동시에 가도를 습격하여 모문룡을 신미도로 몰아내었다.
그 뒤 청군이 철병하자 모문룡은 다시 가도로 들어가 웅거해 있으면서 군량이 떨어지면 우리나라로 나와 약탈을 자행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점차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모문룡을 신임하여 총병 좌도독(總兵左都督)이라는 직함을 주어
청나라를 치게 하였으나, 요동으로 출전하였다가 패하여 역효과가 났다.
이에 요동 경략(遼東經略)으로 있던 원숭환(袁崇煥)을 시켜 1629년에 그를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유인해 죽였다. 그 뒤 모
문룡의 부하로 있던 진계성(陳繼盛)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해 있다가 유흥치(劉興治)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이후로
는 유흥치가 이곳에 주둔하였다.
[주09] 임금의 …… 입는다 : 《예기》 〈복문(服問)〉에 “임금의 어머니가 부인이 아니면, 신하들은 복을 입지 않는다.〔君之母 非夫人 則群
臣無服〕”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이는 서자(庶子)가 후사로 되어 임금이 된 경우로서, 그 어미를 위해 시복(緦服)을 입는다.”
하였다. 여기에서 서자는 중자(衆子)를 의미하며, 시복은 3개월 동안 입는 상복이다.
[주10] 추숭하는 …… 의론 : 인조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으로서 반정(反正)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뒤, 생부 정원
군에 대해 인조가 어떻게 호칭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조정의 의론은 대략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박지계(朴知誡)
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인조와는 부자 관계로서 칭해야 한다는 설을 주장하였고, 김장생(金長生)은 인조는 선조의 뒤를 이은
것이므로 정원군과는 숙질 관계로서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정경세는 부자 관계로 칭하되, 일반적인 부자 관계로 칭하는 것
은 옳지 않으니 ‘고(考)라고 칭하되 현고(顯考)라고는 하지 않으며, 자(子)라고 칭하되 효자(孝子)라고는 칭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에 인조의 뜻에 따라 1632년(인조 10)에 드디어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하고 능호
(陵號)를 장릉(章陵)이라고 하였다.
[주11] 다음 …… 날 : 장유는 1638년(인조16) 3월 17일에 졸하였다. 《宋子大全 卷156 谿谷張公神道碑銘》
[주12] 빙호(氷壺) : 얼음이 담긴 옥으로 만든 그릇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인품과 덕성이 청백하고 개결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13] 진한(秦漢)의 문장 : 중국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문으로, 일반적으로 고문(古文)을 가리킨다.
[주14] 구양영숙(歐陽永叔) : 송나라 사람인 구양수(歐陽脩)로, 영숙은 그의 자이다.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추
밀부사(樞密府使)ㆍ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군서(群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으로 유명하여 당송팔대가(唐宋
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조정에 있으면서 한기(韓琦)와 함께 정사에 힘쓰다가 여러 소인배의 모함을 받자, 만년에는 조정에
서 물러나기를 힘껏 구하였다. 《宋史 卷319 歐陽脩列傳》
[주15] 두소릉(杜少陵) : 당(唐)나라의 시인(詩人)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소릉은 호이다. 두보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주16] 만난 …… 이였네 : 장유가 광해군 시대에 파직되고서 안산(安山)에서 숨어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바르지 않은 이는 광해군을 가리
킨다.
[주17] 시초에다 거북과도 같았었으며 : 시초(蓍草)와 거북은 모두 길흉을 판단하기 위하여 점을 칠 때 사용하는 것인데, 전하여 조정의 원
로대신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진달하는 계책마다 적절하였다는 뜻으로 쓰였다.
[주18] 금에다가 …… 같았었다네 : 금이나 옥과 같이 진귀한 것으로, 전하여 임금께 무척 보배로운 가르침이나 권고를 올린 것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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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