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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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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대마도)을 정벌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위(朴葳)가 이끌었으며,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 1년)에 이종무(李從茂)가 이끈 정벌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일본어: 応永の外寇)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糠嶽戰爭)이라고 하였다.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있어 중개를 맡는 특수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그 토지가 협소척박(狹小瘠薄)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米穀)을 받아갔다. 또 조선에서도 쓰시마 섬을 우대하였으며 쓰시마는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 때에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
1389년(창왕 2년) 음력 2월에 박위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구출하였다.
1396년(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1418년(태종 18)에 대마도는 큰 흉년이 들었다.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종정무(宗貞茂, 일본어: 소 사다시게[*]) 또는 종정아(宗貞芽)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 일본어: 소 사다모리[*])가 뒤를 잇게 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크게 들고 일어나 명나라의 해안 지역으로 가던 도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 지역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새 도주인 종정성이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쓰시마 섬을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명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쓰시마 섬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이 된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중외(中外)에 교유하였다.[1]
당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아직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하고 있었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로, 의정부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 | 선지(宣旨)하노라.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종정성(宗貞盛)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功)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 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종정성은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 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고 말 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 이제 선지(宣旨)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잘 생각하라. |
” |
— 세종대왕실록 4권 1년 7월 17일 (경신) |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 | 사자(使者)가 서신을 전해 너의 항복의 뜻을 알았노라. 본도인(本島人)을 돌려보내는 것과 인신(印信)을 내려달라는 것이 가상하다. 너희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굴혈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는 바 이는 하늘이 내려 준 재성(才性)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작은 섬은 대개 다 돌산이므로 토성이 교박(磽薄)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사세가 그것들을 대기에 어렵고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니 나는 이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노라. 이제 너희들의 소원에 따라 비옥한 땅에 배치해 주고 하나하나에 농사짓는 차비를 차려 주어 농경의 이득을 얻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마음을 돌려 순종하고 농상(農桑)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섬의 행정을 관리할 자를 나에게 보내와 내 지휘를 받도록 할지니라. |
” |
— 세종대왕실록 5권 1년 10월 18일 (기축) |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2]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009년 3월 19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 발표회에서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발표하는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선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꼽는다. 고려말부터 태종 초기까지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입은 태종 9년(1409)부터 크게 감소했다. 10년 만의 왜구 피해에, 그것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명의 병력을 준비한 대목도 이전부터 대마도 정벌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뜸했던 때, 왜구의 주요 활동 무대는 명나라 연안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 쇼군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원도의에 이어 등극한 원의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일본 정벌을 계획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 명나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온 태종으로선 이에 개입하지 않을 명분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으려면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이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강사는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해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대외 목표인 북방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파악한다. 왜구를 제어한 공로로 여진 지역의 실력행사에 대한 명나라의 암묵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3]
이종무(李從茂,1360년 ~ 1425년)는 조선 초기의 무신이다. 이을진의 아들로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으며 세종 때 쓰시마 섬을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고,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찬성사에 이르렀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가 장천군으로 개봉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고려 공민왕 9년 1360년에 장천 부원군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1]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정안대군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 그 뒤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를 거쳐 의정부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한다.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정복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여 1419년 음력 6월 12일 주원방포(현 추봉도)를 기착지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원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다시 쓰시마 섬으로 향하였다.[2] 당시 총 227척의 규모로 출정을 하였으며, 6월 17일 출발하여 바람(마파람) 때문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6월 20일 오시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여,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하였다.[3]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4] 그러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5]
그러나 같은 해 11월 9일 죄를 사하기 위해 종군하려는 김훈과 노이를 추천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당한다. 김훈과 노이는 무재가 뛰어나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하려 하였고, 이종무는 이를 세종에게 간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 등은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고 하여 이종무와 김훈, 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간하였으나 세종이 거부를 하였고, 이종무는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며 탄식을 했다.[6] 그 후 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1420년 6월 5일 풀려나 서울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출발하여,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425년 음력 6월 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6월 17일 내린 교서에서 세종은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는 표현으로 비통함을 표시하였다.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5년 5월 18일 1200톤급의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국산 잠수함 이종무함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수중 최고 속도는 22KN이며, 어뢰와 기뢰를 장착하고 2개월 이상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이종무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조 마지막 네명의 왕을 경험하였고,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신 무인이었다. 66세의 일기동안 모두 8대에 걸친 왕을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안정된 대일관계를 마련하였다.
이종무(李從茂,1360년 ~ 1425년)는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고려 공민왕 9년 1360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정복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여 1419년 음력 6월 12일 주원방포(현 추봉도)를 기착지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원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 [2]당시 총 227척의 규모로 출정을 하였으며, 6월 17일 출발하여 바람(마파람) 때문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6월 20일 오시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하였다. [3]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4] 그러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5] 그러나 같은 해 11월 9일 죄를 사하기 위해 종군하려는 김훈과 노이을 추천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당한다. 김훈과 노이는 무재가 뛰어나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하려 하였고, 이종무는 이를 세종에게 간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 등은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고 하여 이종무와 김훈, 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간하였으나 세종이 거부를 하였고, 이종무는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며 탄식을 했다.[6] 그 후 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1420년 6월 5일 풀려나 서울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를 출발하여,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1425년 음력 6월 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6월 17일 내린 교서에서 세종은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는 표현으로 비통함을 표시하였다.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5년 5월 18일 1200톤급의 대한민국의 다섯번째 국산 잠수함 이종무함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수중 최고 속도는 22KN이며, 어뢰와 기뢰를 장착하고 2개월 이상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이종무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조 마지막 네명의 왕을 경험하였고,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신 무인이었다. 66세의 일기동안 모두 8대에 걸친 왕을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안정된 대일관계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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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무장군묘 -투어가이드
튼튼한 국방력 없이 국가의 안녕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 시대의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종 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30년의 격차를 두고서 이종무는 세종 전반기 , 김종서는 후반기의 국방을 도맡았다. 이종무는 1360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무인으로 등용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왜구 격퇴에 앞장섰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이 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 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해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종무가 휘하에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오른 것은 한 달 뒤인 1419년 6월 19일이었다. 이 때 동원된 병 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 7천여 명이었고, 식량은 65일분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종무 부대는 이튿날 대마도에 진입하여 129척의 선박을 노획하여 쓸 만한 20여 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으며, 가 호 약 2천 호를 소각하고, 적군의 수급 114급을 참수했다. 정벌 과정에서 좌군절제사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복병을 만나 한 때 고전하기도 했으나 왜구측의 평화협정 제의로 그 해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 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 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종무는 대마도 정벌 후 찬성사로 승진하였다. 한 때 대간들에게 탄핵되어 유배되기도 했지만 복관되었고, 이 후 부원군에 진봉되었다가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이종무 (李從茂 ; 1360~1425)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서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시호는 양후(良厚)이다.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고 1397년(태조 6) 옹진만호(甕津萬戶) 때 왜구가 침입, 성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이듬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아버지인 문신 이을진에 이어 장천부원군의 작위에 습봉[7]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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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한반도 국가와 일본열도 국가 사이의 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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