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의 영원한 ‘효자종목’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함’과 ‘스릴’을 느낄 수 있고 결승 지점에 도착하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매력적 스포츠인데요. 국민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는 유독 쇼트트랙을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에도 동계올림픽만 다가오면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92 알베르빌과 94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김기훈 선수(現 대표팀 감독)의 플레이에 푹 빠져 있었는데요. 이후에도 채지훈, 김동성, 안현수 등 ‘국민적 영웅'이 계속 배출돼 4년마다 기쁨을 누릴 수 있었죠.
여자 선수 중에서도 대단한 선수가 많았는데요. 우리나라 사상 첫 올림픽 2연속 2관왕의 대기록을 달성한 전이경 선수와 토리노 3관왕 진선유 선수를 비롯 김소희, 최민경, 주민진, 고기현 등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선수들이 온 국민을 열광시키기도 했었습니다.
이밖에 양양A, 양양S, 라다노바 등 우리와 경쟁했던 추억의 선수들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역적’ 반칙왕 안톤오노 또한 빼놓을 수 없겠죠. 지금까지도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오심사건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또 하나의 억울한 일이 있었는데요. 여자 계주 3,000m에서 세계신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석연찮은 판정으로 실격 처리가 된 겁니다. 동계올림픽 여자계주 6연패 달성의 기쁨도 잠시 8년 전 악몽이 재현된 건데요.
심판은 비디오판독 결과 김민정 선수가 코너를 돌다 중국 선수를 건드렸단 데 문제를 삼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 반칙상황이라 보기는 힘든 상황이었는데요. 판정 번복은 없었고 여자 선수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죠? 오늘 만나볼 선수는 당시 방송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해 화제가 됐던 김민정(27.용인시청) 선수입니다. 지난 24일 서울시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요. 지금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올림픽 ‘恨’ 동계체전 3관왕으로 풀다
“여자계주가 6연패에 도전했던 상황이라 밴쿠버를 앞두고 더욱 열심히 훈련했었어요. 그래서 실력도 월등하게 세계신기록까지 내며 1위로 들어왔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오니까 많이 분했던 것 같아요. 정말 아쉬워요.”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김민정 선수는 억울함을 한 가득 쏟아냈습니다.
“심판에 의해 우리가 피해를 입은 거에요. 가장 억울한 건 심판이 직접 와서 실격 사유에 대한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그래도 당시 그녀의 한 섞인 인터뷰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수많은 네티즌들이 응원과 격려를 이끌어 냈습니다. 올림픽 직후 미니홈피 일촌신청만 무려 9천 건이나 들어와 인기를 실감했다고 하는데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인 이번 동계체전에서 김 선수는 그간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1,500m, 3,000m와 계주에서 연달아 금메달을 따내며 3관왕에 올랐습니다. 쇼트트랙 일반부에서 남자부 이정수 선수와 함께 유일하게 금메달 세 개를 목에 건 김 선수는 이번 결과를 집중력의 승리라고 말했는데요.
“체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집중을 많이 했죠.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집중 많이 했던 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동계체전 경기도 10연패 달성에 힘을 보탠 김민정 선수. 그녀의 삶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체능 만능소녀, 스케이트 신더니 ‘훨훨’
1985년 3월 20일 서울 출생! 아버지 김준성(56)씨와 어머니 김정해(55)씨의 사이에서 오빠 김남훈(28)씨에 이어 태어난 김민정 선수는 어릴 때부터 “오빠 공부 방해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검도, 태권도, 수영, 서예, 미술 등 각종 예체능을 섭렵합니다.
육상 소년체전에 도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남다른 운동신경을 자랑한 그녀는 활발한 성격에 학교 임원을 도맡아 선생님들에게 인기 독차지! 그 때부터 이미 리더 기질을 발휘했는데요. 그래서 일까요. 현재도 여자 쇼트트랙 선수 중 최고령!
어린시절 오빠와 함께
스케이트와의 인연은 오빠 덕에 예체능을 섭렵하던 중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특강에서 스케이트 재능을 발견. 대회만 나갔다 하면 1등! 내로라하던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자 쇼트트랙 계가 발칵 뒤집어 지는데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국체전에 나가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더니 중2 때 비로소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히게 됩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김 선수는 고1 때 주니어대표, 고2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각종 세계대회를 휩씁니다.
8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밴쿠버 동계올림픽,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등에 국제대회에 출전한 그녀는 욕심쟁이 우훗!
<무릎팍도사>의 건방진 도사 컨셉을 잠시 빌려봤습니다. 김민정 선수는 취미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는데요. 지금은 성시백 선수가 속해있는 용인시청에서 활약 중입니다.
독서광 그녀, “운동선수 무식하다는 편견 깨고 싶어”
김민정 선수는 어릴 때부터 워낙 활동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의외로 시끄러운 곳 보다는 집에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합니다. TV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집에서는 주로 책을 읽는다고 하는데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후배들에게도 항상 책을 읽어야 한다고 얘기를 해요.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저도 많이 읽지만 후배들에게도 책을 권하는 편이죠. 저와 같은 방 쓰는 선수들은 다들 많이 읽게 돼요.”
책을 많이 읽어 인터뷰도 도맡아 한다는 김 선수. 그녀는 글 쓰는 것도 좋아한다는데요. 운동을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매일 썼다고 합니다. 힘들 때 일기를 보면 극복이 돼 지금까지 큰 슬럼프는 없었다고 하네요.
독서 외에 김 선수가 좋아하는 게 또 있습니다. 다른 종목 운동경기인데요. 볼링, 수영, 당구 등 거의 전 종목에 대해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타고난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그녀. 만약 스케이트를 안탔다면? 놀랍게도 그녀의 대답은 격투기입니다. 승부욕 때문이라는 군요.
매년 룰 바뀌어도 최강일 수밖에 없는 이유
이쯤에서 우리나라 쇼트트랙 선수들의 세계에 대해 살짝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른 종목도 그렇겠지만 쇼트트랙 훈련은 고되기로 유명한데요. 보통 하루 일과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무조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7시부터 9시까지 스케이트를 타요.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지상훈련(웨이트 트레이닝 등)을 하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또 스케이트를 타는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 돼요.”
김 선수에 따르면 쇼트트랙 선수에게 휴가는 없다고 합니다. 하루라도 쉬면 감이 떨어져서 못 타기 때문이라는데요. 특히 태릉선수촌에 들어가게 되면 훈련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는데, 겨울에 대비하기 위한 여름 훈련은 지옥 같다고 하네요.
쇼트트랙이 유독 많은 훈련량을 보이는 이유는 전신을 강화시켜야 하기 때문인데요. 가장 많이 하는 훈련은 런닝과 복근, 기술훈련 등 기초체력을 높이기 위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옥훈련과도 같은 준비과정이 있기 때문에 편파판정에다 매년 룰을 바꿔가면서 까지 막으려 해도 최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에서 외국에 비해 한 수 앞서는 것도 큰 작용을 하지만 기본 정신무장부터가 달라서 우리나라는 언제나 넘버원입니다.
경기장에서만 경쟁관계, 밖에서는 모두가 친구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파벌, 승부조작 등 여러 잡음 때문에 쇼트트랙이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선수들이 위축되지는 않았을지 그 분위기가 궁금했습니다.
“제 생각에 선수들 분위기가 다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다들 친해요. 정작 선수들은 분위기도 좋고 사이도 좋은데 팬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추긴 게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이정수 선수와 곽윤기 선수 둘 다 친하거든요.”
김 선수는 또, 다른 종목에 비해 승부조작이나 그런 것은 정말 없는 건데 어쩌다 한 번 부각 되서 안 좋게 알려진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국가대표는 실력이 없다면 될 수도 없고 그 과정까지 많은 것이 있어 승부조작을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라는 겁니다.
학교나 다른 이해관계를 떠나 선수들끼리는 모두 잘 지낸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인데요. 경기장 안에서는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지만 밖에 나오면 다들 친하게 지낸다고 하네요. 그러니 너무 염려 안하셔도 되겠습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어떨까.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대회 때는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펼치지만 평소에 연락도 많이 하고 사이좋게 지낸답니다. 김민정 선수는 특히 일본 선수와 친하다고 하는데요. 재미난 일도 있었다고.
“일본 유꼬라는 선수와 굉장히 친해요. 그 선수가 한국에 와서 함께 훈련하면서 저희 집에서 지냈거든요. 그런데 동대문에 제 옷을 사러 갔다가 옷가게 직원이랑 눈이 맞은 거에요. 다음 달 12일에 이태원에서 결혼한다고 하네요. 어쩌다 보니 제가 만들어 준 인연이죠.”
얼떨결에 국제연애 사업에도 손을 덴 김민정 선수. 우리나라 선수들 중에서는 누구와 친한지 궁금했는데요. ‘밴쿠버의 스타’ 곽윤기 선수와 ‘새로운 기대주’ 박승희 선수라고 합니다.
국내 최장수 선수로 다음 올림픽에도 도전
여기까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녀의 꿈과 도전 등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어릴 때부터 누구 가르치는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장애인 운동처방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번 겨울 시즌이 끝나면 확실히 정할 계획이에요. 나중에는 대표팀 코치도 해보고 싶고, 남들 하는 거 다 해보고 싶어요.”
다음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살이 넘지만,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도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대표 선발전이 목표에요. 다시 대표팀에 들어가 다음 올림픽 때 다시 한 번 나가서 그 때는 꼭 금메달을 따고 싶습니다. 개인전이 아니라 계주 멤버로 들어가서라도 딴다면 영광일 것 같아요.”
경기도민 여러분께도 관심과 응원을 부탁했는데요.
“현재 용인시청 소속으로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응원과 성원 감사하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적으로 보답해서 TV에도 많이 나오도록 노력할테니 보시면 응원해 주시고 관심 가져주시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쇼트트랙 선수로서 노장이지만 전국동계체전에서 당당히 3관왕을 차지한 김민정 선수. 지금처럼 자기관리 잘해서 경기도를 빛내주길 바라며, 다음 올림픽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김민정, 쇼트트랙 레전드로 영원하라!
글·사진 인사이드경기 박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