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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하여 요즘 방영되고 있는 KBS2 <바람의 나라>를 해부해 본다.
역사에 알려진 내용 이외의 소소한 일들이야 작가가 꾸미고 각색하는것까지는 아무도 이의삼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명명백백한 역사의 기록을 고치고 맘대로 뜯어고처 마치 시청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맹문이인양 방영하는 태도는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횡포요 오만이라 나는 주장 한다.
그럴양이면 후한서,당서,위서,사기,십팔사략 등등 어느 사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는 식의 자막설명을 넣어야 마땅 할것이다.왜냐 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 도 김부식 선생이 잘못 지은 부분이 있기때문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 삼국사기를 능가할 우리의 고대사를 다룬 사서(史書)가 전무 하기때문이다.
여기서 필자의 주장은 사기의 내용을 참작하여 녹색으로 표기 하였다.
유리왕(瑠璃王)이 서기전 1년에 즉위하니 이름은 유리(類利)혹은 유류(孺留)라 하는데 주몽(朱蒙)의 원자(元子)로서 어머니는 예씨(禮氏)다. - 이하생략 -
왕 2년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맞아 비로 삼았다. 9월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10월에 신작(神雀)이 왕정(王庭)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백제시조(百濟始祖) 온조(溫祚)가 즉위 하였다. -이하생략-
14년 정월(正月)에 부여왕 대소(扶餘王帶素)가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하며 볼모를 교환 하자고 청하므로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 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고자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하여 가지 아니하자 대소가 5만대군을 일으켜 침입 하였다.. - 이하생략 -
22년 10월에 왕은 국내성(國內城:만주 안동성)으로 천도하고 12월에 왕은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 하느라 5일동안 돌아오지 아니 하였는데 대보(大輔) 협보(협父)가 간하기를 < 대왕께선 새로 도읍(都邑)을 옮긴이래 아직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마땅히 형정(刑政)에 힘쓰실 일인데 이를 생각지 안으시고 사냥만 하고 오래도록 왕성을 비우시니 만약 이 과오를 고치지 아니하면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이반될까 두렵사오매 선왕의 창업은 그만 땅에 떨어질까 두렵사옵니다 > 하며 극간을 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협보의 벼슬을 거두고 관원(官園)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니 협보는 분격하여 남한(南韓:漢江以南)으로 가 버렸다.
여시서 협보는 일찌기 고구려 시조 동명성제 주몽 임금을 도와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이며 남한으로 갔다함은 혹 백제로 간것이 아닌가 한다. -강촌의 추측 -
22년에 왕자 해명(解明)을 세워 태자로 삼고 국내의 죄수를 대사(大赦) 하였다. - 이하생략 -
27년 정월에 태자 해명은 고도(古都:졸본)에 있었는데 힘이세고 무용(武勇)이 뛰어났다.
때에 이르러 황룡국왕(黃龍國王)이 이 말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강궁(强弓)을 그에게 보내 주니 해명(解明)은 그 사자를 만나보고
그 앞에서 활을 당겨 꺽으며 말하기를 < 내 힘이 좋은게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하다 > 하였다.
황룡국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대로(大怒)하여 황룡왕에게 알리기를 < 해명은 사람의 자식이 되어 불효하니 청컨대 과인을 위해 그를 죽여 달라> 고 하여 황룡왕이 태자 해명을 만나 죽이고져 하였으나 해명의 인품을 보고는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예로써 대할뿐이었다.
28년 3월에 왕은 태자 해명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 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의 기업(基業)을 굳게 하고자
하는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의 굳셈을 믿고 인접국과 원한을 맺으니 사람의 아들된 도리로 어찌 이와 같을수 있겠느냐 > 하면서 칼을 내려 스스로 자결하라 하였다.
이에 태자의 모사가 극구 달아나라 권하였으나 태자가 이르기를 <전자에 황룔국왕이 나에게 강궁을 보낸 뜻은 장차 고구려와 나의 강건함을 시험하려 했던것이다, 하여 나는 그 활을 꺽어 우리나라를 가벼히 보지 안겠끔 본을 보인것인데 안타깝게도 부왕의 진노를 사게 되었으니 부왕의 명을 피할수는 없구나 > 하며
곧 여진동원(礖津東原)으로 가서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달려와 창에 찔려 죽으니 그때 나이 21세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태자의 예로써 동원(東原)에 장사하고 사당을 세우고 그 땅을 창원(槍原)이라 이름하였다.
나는 아직도 이 대목을 이해 할수가 없다, 어찌 비정한 아비라 하지 안겠는가? ...애당초 주몽 임금이 일찍 승하한 대목도(혹시 구데타,아니면 독살) 유리왕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으며(소서노,비류,온조등 결별시기와 때를 같이하므로) 고굉지신 협보를 내친것만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현명치 못한 군주라 할것이다. - 강촌생각 -
그해 8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자를 파견하여 유리왕을 꾸짖기를 < 대저 나라에는 대소(大小)가 있고 사람에는 장유(長幼)가 있어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것이 예의고 유자(幼者)는 장자(長者)에게 순종 하는게 마땅하다, 지금 왕이 만약 예의와 순종으로써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이를 도와 국운이 오랠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사직을 보전키 어려울것이다> 하였다.
이에 유리왕은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고 백성과 군사가 모두 약하니 부여왕에게 회보 하기를 <어찌 감히 가르침을 좆지 않으리요 > 하였다.그런데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연소 하였으나 왕이 부여(扶餘)에 회보 한다는 말을 듣고 홀로 그 사자를 보고 말 하기를 그 옛날 대소가 주몽의 재주 많음을 질투하여 그 부왕 금와에게 참소하고 욕보인 까닭에 만부득 신변의 위태함을 염려하여 따로히 나온것이데 지금 대왕은 전자의 허물은 생각지 않고 다만 군사의 많음만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가 라며 꾸짖었다. - 이하생략 -
KBS 2 " 바람의 나라 " 드라마는 역사를 왜곡해 시청자들을 현혹 시키고 있다.
즉 유리왕이 당초의 태자 도절을 폐한 이유를 달지 않았을뿐더러 왕자 무휼(無恤) 을 대신관의 예언에 따라 형제부모를 죽이고 나라를 망칠 운명이라며 죽여야 한다고 하여 유리왕이 무휼을 상자에 넣어 죽이는척 하여 태자 해명에게 맡겨 비밀리에 길러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이렇듯 왕궁에서 고구려의 정사에 어린 나이지만 관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을 KBS 는 시청자들에게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야만 한다. 아니면 공개 사과를 해야만 한다.
어찌 공영국영 방송이 허위날조된 사극을 스스럼 없이 방영한단 말이며 일개 만화작가가 쓴 내용이 역사학자가 기록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보다 우월하단 말인가?,하면 역사를 어찌 공부해야 하는가?
31년 한(漢)의 왕망(王莽)이 우리군사를 징발 하려 하였다. -이라생략-
32년 부여(扶餘)에서 군사를 일으켜 침입 하므로 왕은 왕자 무휼(無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방어 하게 하였다.
무휼은 학반령(鶴盤嶺)에 매복하여 부여군을 전멸 시켰다.
33년 정월에 왕은 왕자 무휼을 세워 태자로 삼고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8월에 왕은 오이(烏伊),마리(摩離)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서쪽 양맥(梁貊:만주 혼강유역)을 정벌하고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격 하였다.
37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해 10월에 왕이 두곡(豆谷)의 이궁(離宮)에서 승하 하여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왕자 무휼은 애초부터 유리왕의 슬하에서 컷으며 국가의 대소사에 관여를 했다.
어찌 상서롭지 못한 탄생이라 하여 버림을 당했단 말인가?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즉위하니 서기 18년이다.
왕의 이름은 무휼(無恤)이니 유리왕의 세째 아들이다.
왕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롭고 장하고 인품이 뛰어나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 33년 갑술(서기 14년)에 태자가 되었고 즉위할 때는 그 나이 11세였다.그 어머니는 송씨(松氏)로서 다물국왕 송양(多勿國王松讓)의 딸이다.
<원문>
大武神王 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이렇듯 이미 무휼은 나이 11세에 고구려의 태자가 되어 있는데 어찌 태자 해명을 따라 부여국에 잠입하여 부여의 왕녀에게 현혹되어 그를 따라 갈것이며 ...나이 11세도 안된 어린 나이에 또 어찌 남녀간의 정분을 느낄것인가? 그러므로 드라마는 모두 맹랑한 이야기다.
왕 4년에 부여를 정벌 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하생략-
왕이 이물림(利勿林)에서 길을 떠나고자 함에 한 사나이가 왕의 앞으로 나타 났는데 키가 9척쯤되고 낮은 희고 눈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하며 이르기를 <신은 북명(北溟)사람 괴유(怪由)라 하옵는데 대왕께서 북쪽의 부여를 정벌 하신다는 말을 듣고
왔사오니 청컨대 신으로 하여금 종군하게 하시오면 부여왕의 머리를 잘라 오겠나이다> 하므로 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니 또 한사람이 나와 말 하기를 신은 적곡(赤谷)사람 마로(麻盧)인데 청컨대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 할까 하나이다 하므로 왕은 또 이를 허락 하였다. - 이하생략 -
이 대목에서 알수 있듯이 괴유(怪由)는 무휼이 왕이 된 이후 부여를 정벌 하러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데 바람의 나라 드라마에서는 무휼은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 신분에 반해 이미 괴유는 고구려의 장수가 되어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이야긴가? 역시 사기를 깔아뭉개는 발상 아닌가?
방송은 어찌 그리된건지, 어디에 그런 근거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할것이다.
왕 5년 2월에 부여국의 남쪽으로 진격하였는데 그 땅은 진흙이 많았다.
왕은 평지를 가려서 영채를 세우고 말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부여왕(扶餘王)은 나라를 들어 출전하여 그 불비한 틈에 습격하려 하였고 말을 채찍질하여 그 앞에 이르렀으나 진흙에 빠져서
잘 행동할 수가 없었다.
이때에 괴유(怪由)가 칼을 빼어 휘둘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돌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무너지면서 지탱하지 못하는 가운데 괴유는 곧 진격하여 부여왕의 목을 베었다. -이하생략 -
그 옛날 부여왕 금와의 아들 대소와 주몽의 대결은 대를 거듭하며 이어져 오다 결국 주몽의 손자인 대무신왕에게 부여왕 대소가 죽게되니 이것이 부여국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 지방을 유람 하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순행하다 보고 묻기를 <군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혹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왕자가 아닌가?> 하고 드디어 함께 돌아와 사위로 삼았다.
그후 호동은 환국하여 몰래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만약 그대 나라의 무고(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을 베어 부순다면 나는 예로써 그대를 비로 맞아 들일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만 두겠소>
낙랑국에는 적군이 처들어 오면 저절로 울리는 북 즉,자명고(自鳴鼓)가 있었다, 호동이 이것을 낙랑공주에게 찢어 달라는 이야기다.
대무신의 아들 호동왕자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호동왕자와 낙랑국(평양지경) 왕 최이(崔理)의 딸 낙랑공주와의 에틋한 사랑이야기는 오늘에까지 전해오는 전설인데 공주는 왕자 호동과 혼인했고 사랑을 위하여 자국의 자명고(自鳴鼓)를 찢고 조국을 배반 고구려는 그 틈을 타서 낙랑을 정벌하니 최이는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했다.
후에 호동은 환국하여 만백성의 신망이 두텁고 왕의 사랑이 크게 미치자 원비가 혹 태자의 자리가 자신의 소생이 아닌 호동에게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허구헌날 대무신왕에게 자신의 몸을 넘본다며 호동왕자를 모함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으로서 애비가 아끼는 여인을 탐낸다는 말에는 용서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처음에는 괜한 헛소리 한다며 일축 하던 그 총명하던 왕도 열번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식으로 그만 호동왕자를 의심하고 처벌하려 하였다.
호동왕자에게도 역시 충신이 있어 이를 부왕께 해명하라 극구 일렀건만
<내가 만약 이를 해명하면 이는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부왕의 근심거리를 만들게 되는것이니 이 어찌 효도라 말하겠는가>
하고 곧 칼을 물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왕이 참소의 말을 믿어 무고한 애자(愛子)를 죽였으므로 그 어질지 못함은 족히 말할 것도 없으나 호동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식으로서 아비의 꾸지람이 있을 때에는 마땅히 순(舜)임금이 고수에게 대하듯 작은 매는 맞고 큰 매는 달아나 아버지를 불의(不義)에 빠뜨리지 않아야 하는것이다.
호동이 이를 알지 못하고 죽지 않을곳에서 죽었으니 소근(小謹)에 고집하여 대의(大義)에 어두웠다 할 수 있다.
공자신생(公子申生:진나라 문공의 형)에 비할 만 하다.
유리왕도 대무신왕도 처음에는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운 왕재(王材)였다.
그런데 어찌 대를 이어가며 그 강건한 아들들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였던가?
유리왕은 해명을 죽이고 그 아들 대무신왕은 호동왕자를 죽였으니 고구려 국초(國初)에 나라에 크게 쓰여질 왕의 재목들 아니였던가?...모두 운명이라 돌리기엔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들이었다.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로 세웠다.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光武帝)는 다시 그 왕호(王號)를 쓰게 하였는데 이때가 입무(立武 =建武) 8년이다.
20년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없앴다. 24년 봄 3월에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물을 죽였다. 8월에 매화가 피었다.
27년 가을 9월에 한(韓)의 광무제(光武帝)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으며 살수(薩水) 이남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니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다.
<원문>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遺使入漢朝貢 光武帝復其王號 是立武八年也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二十四年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二十七年秋九月 漢光武帝遺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 號爲大武神王
여기에 등장하는 저 중국 한나라의 광무황제는 왕망을 평정하고 후한(後漢)의 황제가 된 사람이다.
광무제와 옛 친구 엄자릉과의 우정이라던가 분수를 건너며 읊은 저 유명한 추풍사(秋風辭) 는 일찌기 소개 한바 있으므로 생략 하면서 아무쪼록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이 누군가에 의해서 왜곡되고 바뀌어지지 않기를 비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면서 혹시라도 독자의 이의(異議)가 있다면 기꺼이 가르침을 받을것이다.
< 참고문헌 : 三國史記 高句麗本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