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서 서해까지'
정찬열의 최전방 지역 도보횡단
<2> 강원도 대진항 . 인제군 황태마을
입력일자: 2011-09-16 (금)
어부들은 “갈수록 명태 씨 말라...” 걱정
진부령 내려서자 펼쳐진 황태덕장 ‘진풍경’
** 둘째 날 - 횡단 시작(5월 3일- 맑음) - 통일 전망대 출발, 인제군 백담사 입구 도착
횡단 시작 날이다. 일찍 일어나 동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나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옛날이면 이정도 아침에 마을 공동 우물터엔 여자들이 붐볐고 들판에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었다. 일찍 일어나신 어른들이 골목을 쓸기도 했다.
‘명파 돌봄공부방’이 보인다. 어린이를 돌보아주는 공간이다. 번듯한 2층 건물에 ‘명파복지회관, 명파경로당’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2011년 농한기 어르신 건강운동교실 운영” 배너가 펄럭인다. 다목적 건물이다. ‘마을 공동 농산물 저장창고 지원시설’이라는 큰 건물도 있다.
골목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가 보니 여남은 채 되는 동네가 나타난다. 흔히 볼 수 있는 시골마을이다. 평화롭다. 다시 한길 쪽으로 나오니 명파 보건진료소가 보인다. 작은 마을에 웬만한 시설은 다 갖추고 있다. 2002년 새농어촌 건설운동 최우수마을이라고 돌에 새겨져있고, 한독약품 자매마을이라는 현판도 함께 서있다.
할머니가 텃밭에 나와 마늘밭을 메고 계신다. 새벽 일찍 밭에 나오셨냐고 인사를 했더니, “잠도 안 오는데 뭘 해” 답이 돌아온다. 혼자 사는 분이다. 연세를 물었더니 80이 넘었다고 하신다. 그동안 공공근로를 해서 매달 20만원씩 받아 먹고 살았는데, 요사이 나이 든 사람은 사고 위험이 있으니 나오지 말라고 해서, 그 수입마저 끊어졌단다. 사는 게 힘이 든다고 한숨이다. 아이들이 좀 도와 주냐고 물었더니, 제 놈들도 살기 힘든데 무슨,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아침밥을 먹으로 이봉기씨와 함께 가까운 대진항으로 나갔다.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어항이다. 생선매운탕을 시켰다. 갓 잡아온 싱싱한 물고기로 만든 음식이라 맛이 쌈박하다. 아침을 먹은 다음 이봉기씨는 마을 고사리 공동작업이 있다고 먼저 떠났다.
횡단 시작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어 근처 어판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기를 시멘트 바닥에 쏟아 놓고 경매를 하고 있다. 고기들이 퍼덕거린다. 왁자지껄하다. 경매인이 무어라 손가락 암호로 가격을 제시하면 사려는 사람이 소리치며 손을 흔든다. 그것으로 거래가 끝난다.
한 쪽에서는 밤 새 잡아온 고기를 어부들이 배 밑창 저장고에서 뜰망으로 퍼서 대기하고 있는 작은 트럭에 옮기고 있다. 그물 속에 팔뚝만한 고기들이 퍼덕인다. 작업복을 입은 어부의 구릿빛 얼굴에 건강미가 넘친다. 햇볕에 탄 농부의 주름진 얼굴이나 바닷바람에 씻긴 뱃사람의 저런 모습을 보면 삶에 대한 경건함이 느껴온다.
어판장 귀퉁이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쉴 틈 없이 회를 뜨고 있다. 어창에 구경 나온 사람들이 고기를 사서 맡기면 비늘을 벗기고 등을 타서 먹기 좋게 잘라주는 일이다. 칼이 한 번 지나가면 고기가 깨끗이 다듬어진다. 두 번 칼질은 없다. 달인이다. 저만치 한 쪽에서는 그물을 사리며 어구를 정리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선창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바다는 잔잔하다. 지금은 저렇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파도가 성이 나면 바다는 순간에 악마의 얼굴이 되어 할퀴러 달려든다. 그래서 뱃사람들에게는 ‘판자 한 장 밑이 지옥’이다. 그들은 닻을 올리는 순간부터 지옥 문턱에서 삶을 낚아 올리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 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촌에는 오래전부터 무속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울긋불긋 지붕 위에 펄럭이는 깃발이 그것을 증명한다. 뱃사람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빈다는 데 시비할 명분이란 애당초 없다.
항구를 한 바퀴 둘러본다. 메여있는 배가 많다. 밤 새워 작업을 하고 사람과 함께 배도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다. 정박해 있는 배에 ‘민간 자율구조선’이라는 팻말이 선명하다. 유사시 구조 활동을 위해 지정된 배다. 연안 유자망(4.57톤), KW 16-960707 이라고 고유번호가 붙어있다. 유자망. 명태잡이 그물로 고기 떼가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띄워 놓았다가 그물코에 걸리는 고기를 잡아 올리는 방식이다. 어부들은 그물을 쳐놓은 다음 하루쯤 있다가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당겨 올린다. 그물 속 고기들은 속절없이 따라 올라온다. 명태를 잡는 계절은 추운 겨울이다. 명태잡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가운데 “... 손발이 시러워 / 내 못하겠네 / 에야 / 에야 / 청실홍실을 / 목에 걸고 / 소나무 고개를 / 넘어온다”는 대목이 있다. ‘청실홍실을 목에 걸고’라는 구절은 목에 그물이 걸린 채 올라오는 명태를 묘사한 부분이다. 그물 당길 때 도르레 역할을 하는 ‘망께’가 소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나무 고개를 넘어온다’,고 표현한다. 최상일이 쓴, 사라져가는 옛 삶을 기록해 놓은 ‘백두대간 민속기행’에 나오는 이야기다.
손발이 시러워 / 내 못하겠네, 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내 마음도 함께 시리다. 고무장갑도 없던 그 시절, 매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영하의 온도에서 물 묻은 손으로 그물을 당겨 올리는데 얼마나 손이 시렸을까. 그들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 온다. 출렁이는 뱃전에 서서 칼바람을 노래로 삭여가며 차가운 바다에서 명태를 잡아 올리던 어부들의 모습이 눈에 환하다.
선창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와 어디가시냐고 말을 걸어온다. 배낭을 메고 있는 내 모습이 생뚱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오늘부터 국토 횡단을 시작한다고 말했더니, 숭어 한 마리 잡수시겠냐고 묻는다. 금방 아침을 먹었다고 사양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숭어 한 마리를 다듬더니 초고추장까지 앞집 식당에서 얻어 일회용 접시에 담아서 가져온다. 갓 잡아온 숭어다. 숭어는 영산강 상류에 자리 잡은 내 고향 영암의 명물이다.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지금은 강을 막아 그 넓은 뻘등이 모두 논으로 변해버렸지만 갯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나오는 물고기라 맛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횡단 첫 날 싱싱한 숭어 한 마리를 먹게 되었다.
명함을 한 장 청했다. 어판장 경매인 ‘대진수산물 대표 전순관’씨라 적혀있다. 요즈음 명태가 잡히느냐고 물었더니, 온난화로 인해 명태가 북쪽으로 옮겨간 다음부터 소련에서 사 온다고 했다. 이북으로부터 어업권을 얻은 중국인들이 코가 촘촘한 그물로 고기를 잡아가기 때문에 물고기 씨가 말라가고 있다고 덧붙인다.
옛날에는 명태가 흔했다. 서해바다의 조기와 쌍벽을 이루는 어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서해바다의 조기를 두고 ‘마치 동해바다의 명태와 같다’고 기록한 내용이 있다. 서해바다에서 조기가 많이 잡히기 전부터 동해바다에서는 명태가 많이 잡혔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은 서해바다 조기도 동해의 명태와 같은 운명이다.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 인근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 어획량이 많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사다가 말려 ‘영광굴비’를 만들어 판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홉시 반에 기자들과 만나기로 했으니 아직도 시간이 좀 남아있다. 송림이 무성한 작은 섬 무송정. 모랫길로 육지와 이어진, 바닷물이 불으면 섬에 들어갈 수 없으며 파도가 치면 모래 스치는 소리가 난다는, 그 섬에 들어갔다.
금강산 콘도 뒤쪽으로 모래사장에 들어가는 문이 있다. 아무도 없다. 고운 모래 위에 맑은 물이 출렁인다. 멀리 거진 등대가 보인다. 모래 위에 발자국이 찍혔다. 내가 걸어온 흔적이다. 손을 씻었다. 서해 바다에서 손을 씻는 날 횡단이 끝나게 될 것이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연합뉴스 이종건기자를 만났다. 2년만의 반가운 재회다. KBS TV 강능 방송에서도 취재진이 나왔다. 출입신고소에 사람들이 붐빈다. 학생들을 비롯 관광차 온 사람들이다. 출입신고소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민간인은 걸어 들어갈 수가 없다. 김창천씨 차를 타고 통일 전망대를 향해 올라간다.
차 안에서 이종건 기자가 “조나단 모올스라는 미국인이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인천에서 쪽배를 몰고 이곳 대진항 까지 왔었다”고 말해준다. 대진 해경에 배를 맡겨놓고 갔는데, 언젠가는 북한으로 그 배를 몰고 가겠노라고 했단다. 2003년 10월 30일의 일이다. 미국인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소식은 처음 들었다. 놀랍다.
전망대 입구 부대 정문에 “현장에서 승리로! 우리는 하나다” 구호가 걸려있다. 앳되어 보이는 군인 둘이 보초를 서고 있다.
통일전망대 도착. 두 해 전에는 국토종단 종착점이었지만 이제 국토횡단 시발점이 되었다. 종단 때,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북녘 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말무리 반도. 바다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섬들이 말이 무리 지어 달리는 모양을 이루었다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해안선을 따라 길이 뚫려있다. 저 길은 한 때 남북화해의 상징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저 길을 따라 금강산을 다녀왔다. 지금은 적막하다. 거친 파도만 몰려왔다 몰려간다. 길은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닫혀있는 저 길도 다시 열리고야 말것이다. 주인을 태우고 달리는 말무리 반도의 말처럼, 저 길은 제 등을 타고 지나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성모상이 두 손을 모으고 휴전선을 내려다보고 있다. 밤 낮 가리지 않고 말무리 반도를 내려다보면서 저 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성모님 앞에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천천히 국토횡단의 첫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딸랑딸랑 워낭소리와 함께 걷기 시작한다. TV 카메라맨이 이런저런 자세를 요구한다. TV 앞에 선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다시 실감한다.
전망대에서 나오는 길도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민통선 안의 농부들은 모심을 준비들을 하고 있다. 농기구 들이 널려있다.
동해선철도 남북출입사무소 건물에 들렸다. 건물은 번듯한데 썰렁하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제진역’이라는 간판이 혼자 외롭다. 언제쯤이나 저 건물이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일까. ‘감호역’ 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철길을 따라 북녘땅으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역이다. .
말 짓기 노래가 생각난다. “원숭이 똥구멍은 빠알개 - 빨가면 사과-사과는 달드라-달면 엿-엿은 길다- 길면 기차-기차는 빠르다- 빠르면 비행기-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우리 어릴 적, 폴짝폴짝 뛰며 고무줄놀이를 할 때나 손뼉치기를 하며 부르던 노래다. 말 짓기 놀이처럼 기차가 제진역을 떠나 감호역을 통과해 반도 끝까지 갈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대대로 이어나갈 우리 삼천만 / 복 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아이들의 말 짓기 노래가 현실화 될 때는 언제쯤일까.
동해안쪽 아름다운 바다가 철조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언제 저 가시망이 철거되어 아름다운 경치를 맘껏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철조망 앞 감자밭에 감자순이 파랗게 돋아난다. 감자순은 매년 저렇게 싹을 틔우는데 철조망은 해마다 녹슬어 가고있다.
화진포 가는 길, 이라는 이정표가 서있다. 화진포 해수욕장과 화진포 호수가 있는 곳. 바다와 호수가 만나는 동해안의 몇 안 되는 석호로 호숫가의 갈대와 수천마리의 철새, 100년이 넘은 소나무들로 천혜의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에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별장, 그리고 이기붕별장이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 김일성이 그의 아들 김정일과 함께 찾아오곤 했던 곳이다. 지난번 국토종단 때 들렸었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간다.
대대 삼거리에서 차를 내려 걷기 시작한다. 통일전망대부터 여기까지는 종단 때 걸었던 길이다. 진부령을 향해 걷는다. 김창천 사장이 저만치 서서 멀어져 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여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이번에도 김사장 신세를 많이 졌다.
이곳 사람들은 정이 많다. 남에게 무엇을 주지 못해 안달이다. 엊저녁 차주호씨는 만 원 한 장을 기어이 호주머니에 찔러 주더니, 이봉기씨는 술 대접에 잠자리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오늘 아침에는 전순관씨로부터 싱싱한 숭어 한 마리를 대접 받았다. 가슴 따스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혼자다. 혼자서 걸어간다.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생각한다. 며칠이나 걸려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하기나 할까. 한 발짝 걸으면 한 발짝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가는 셈이다. 길은 걷는 만큼 줄어들 것이다.
지난번 국토 종단 때 세 번씩이나 차에 치일 뻔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노랑색 깃발을 배낭에 꽂고 가기로 했다. 깃발에 '국토횡단'이라고 써 넣었다. 바람이 불면 깃발이 펄럭인다.
‘1 킬로를 줄이면 10 킬로 더 간다.’ 전문 산악인이 짐을 꾸릴 때 떠 올리는 말이다. 갈아입을 속옷 한 벌, 비옷, 양말 한 컬레, 비상식량, 비상약품 등, 줄일 만큼 줄인 배낭이라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걷다보면 물병하나의 무게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짐을 줄이면서도 꼭 필요한 건 빠짐없이 들어있어야 한다. 무겁다는 생각까지도 버리면 발걸음이 더 가벼울 터이다.
“봉축, 부처님 오신 날” 배너가 길가에 길게 걸려있다. 그러고 보니 초파일이 멀지 않았다. 지난 국토종단 때는 초파일날 결승점을 향해 걸어갔었는데 이번에는 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횡단 시작을 하고 있다.
고성안내도 및 고성 팔경을 설명하는 큰 입간판이 서 있다. 고성팔경은 어제 방문했던 건봉사를 1경으로 치고, 천학정, 화진포, 청간정, 울산바위, 통일전망대, 송지호, 마산봉설경 까지를 8경으로 정해서 홍보하고 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각 지역이 독특한 경치와 축제를 선전하고 있다.
‘화랑사단 전적비’가 서 있다. 단기 4292년 11월 30일에 세워졌다. 사단장, 중대장, 공병중대장 이름이 적혀있다. 서기로 몇 년일까 따져보니 1959년이다. 지금부터 52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흔적이 차디찬 한 덩이 돌로 남아있다.
길가 농가에 닭장이 보인다. 마당 꽤 넓은 면적에 철망을 둘러 쳐 놓고, 그 안에 비닐하우스로 닭장을 만들었다. 가로수 그늘에 앉아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마당에 나온 암탉들이 흙을 헤집고 있다. 통통하게 살들이 쪘다. 닭장 문이 열려있어 안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이 보인다. 알 낳는 장소인 삼태기도 보이고, 닭들이 올라 앉아 잠을 자는 횃대도 희미하게 보인다. 화려한 볏을 자랑하며 수탉이 암탉을 희롱한다. 암탉은 못이긴 척 수탉의 장단에 맞춰준다. 암컷과 수컷의 하는 짓이 사람과 흡사하다. 살아있는 것들은 저렇게 제각기의 방법으로 종족을 이어간다. 창조주의 신비다.
진부령 17킬로 표지판이 보인다. 눈 들어 앞을 보니 첩첩이 산이다. 아득하다. 나무숲을 둘러 보니 푸르름이 제각각이다. 새로 돋아나는 연초록 어린잎들이 바람이 팔랑인다. 검은 바위를 타고 뻗어가는 담쟁이 넝쿨의 부드러운 푸르름과 늙은 소나무의 검푸른 색이 다르다. 서로 다른 푸르름이 조화를 이루어 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언덕 위의 흰 철쭉이 곱다, 차암 예쁘다. 찰칵, 한 컷 찍었다. 나뭇와 꽃과 바위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 옆 장면도 좋아 또 찍었다. 옛날처럼 종이 필름을 쓰는 시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대를 선도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기계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잘 만든 한 개의 스마트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라면서, 새로운 세상은 IT 분야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것은 OO대학 정치과가 아니라 OO대학 기계과, 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이야기 인 듯싶다.
한 참을 걸어가는데, 앞 쪽에서 나와 비슷한 차림을 한 젊은이가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온다. 국토종단 중이란다. 내가 걸어왔던 것처럼, 해남 땅끝 마을에서 출발하여 고성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라 했다. 희곡을 쓴다고 했다. 정해성작가다. 어제와 그제는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글을 쓰고 있는 선배집에서 쉬고 오늘은 고성에서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한 달을 꼬박 걸어와 마지막 목적지 고성을 향해 걸어가던 때의 두근 거리던 내 심장, 마주보고 웃는 우리의 조용한 웃음속에 그런 공감이 들어있다.
혹시 오늘 저녁 숙박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만해 마을 사는 선배의 전화번호를 적어 준다. 반가워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헤어지고 나서야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
같은 처지의 길동무를 만나면 진정 반갑다. 그래서 한하운도 ‘전라도’라는 시에서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주었는데 일정이 바빠서 만나지 못하고 미국에 들어왔다.
여든 살 정도 보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보퉁이를 이고 걸어가시기에 “할머니 어디가세요” 물었더니, “차 타러 저기 정류소까지 걸어가는 중”이라고 답변하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이를 물었더니, 할머니께서 “아, 여자에게 나이를 왜 묻는 거야, 그런 건 실례야” 하고 되받으신다. 깜짝 놀랬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얼른 사과 드렸다.
‘터박골 샘마을’ 앞을 지난다. 동네 이름이 참 예쁘다. 마을 앞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나란히 서 있다. ‘거진 어린이집’이라고 쓴 노랑색 미니버스가 아이들을 싣고 와 동네 앞에 내려준다. 유치원생들이다. 저렇게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데려가 교육시키고 방과 후에 데려다 주는가 보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광경이다. 미국도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방과후에 다시 부모가 데려온다. 내 경우도 아이들이 어릴 때,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느라 꽤 힘들었었다.
‘진부령 10킬로’ 사인이 보인다. 한참을 걸어가다 쳐다보니 ‘진부령 10킬로’ 사인이 또 보인다. 어느 게 옳은 건지 혼란스럽다. 지난 종단 때는 전북 순창을 걸어가다 이렇게 같은 표기가 두 번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군청에 전화를 걸어 말해주었는데, 고쳤는지 모르겠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주민들은 관청의 행정능력을 평가한다. 하찮은 것 같지만 이런 것들이 그 지방에 대한 느낌을 좌우할 수 있다.
이경진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낮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얘기다. 시간을 만들어 보자고 답을 드렸다. 이 분은 5,6년 전에 알게 된 분이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강원도 지역 방언 연구’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지은이가 강원도청 농정국장 이라 했다. 책 한권 보내주실 수 있냐고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드렸다. 책을 보내 왔고, 책값을 보내드리기 위해 가격을 물었다. 그랬더니 ‘책값은 무슨 책 값, 그냥 책 잘 봐주시는 것으로 됐습니다”며 끝내 책값을 받지 않으셨다. 이번 횡단 때 강원도 인제를 거쳐 간다 했더니 꼭 연락을 하라 해서 이제 만나게 되었다.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
골짜기 따라 물이 흐르고, 물 따라 길도 흐른다. 길이 산모퉁이를 휘감아 돈다. 돌고 또 돌아도 골짜기만 깊어갈 뿐,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숲을 비추면 나무는 수 천 가지 녹색 빛을 뿜어낸다. 나뭇잎에 반사된 빛들이 숲을 더욱 환하게 만든다. 이제 햇빛은 사위어 가고 나뭇잎에 내리는 산 그림자가 점점 짙어가고 있다. 햇빛이 깊은 골짜기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중간쯤에 머물고 있다. 연초록 숲 속에 묻혀있는 몇 그루 산 벚꽃이 물 위에 피어있는 수련 같다.
'소똥령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저 길을 따라가면 소똥령이라는 고개로 가는가 보다. 그런데 하필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소를 많이 키우는 지역이었을까. 관광 안내도를 보니 ‘소똥령 농촌체험 마을’이라 써있다. 소달구지, 물레방아 찧기, 손 벼베기, 천렵, 천연염색, 감자떡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진부리를 지나자 동물이 지나다니도록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지난번 종단 때 월정사를 지나 진고개를 올라가면서도 보았던 모습이다. 그런데 이 넓디넓은 산에 나 있는 저 좁은 통로를 짐승들이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진부령 정상이 눈에 보인다. 눈에 빤히 보이는 데도 몇 구비를 더 돌고 돌았다. 언덕을 올라와 보니 저 아래 동물통로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눈에 쉽게 띄는 저런 곳을 짐승들이 건너가기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두대간 진부령’ 표지석 앞에 섰다. 고성군 간성읍 홀리라고 자그마하게 쓰여 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등뼈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금강산, 그리고 바로 이곳 진부령을 거쳐, 설악산 오대산 대관령, 그리고 태백산 죽령 덕유산 등을 빠져나가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데 며칠이나 걸릴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한 번 계획을 세워 보아야겠다.
“여기는 진부령 정상입니다. - 해발 520미터.” 드디어 진부령을 넘었다. 진부령 미술관이 보이고 ‘스 키 렌탈’ 집도 눈에 띈다. 적설량 측정기가 세워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스키장이 있는가 보다.
날이 저물었다. 다섯 시까지만 걷겠다는 계획을 첫날부터 어겼다. 정해성 작가가 소개해준 백담마을 선배라는 분에게 전화를 했더니 치과 예약이 있어 서울에 올라가는 중이라 했다.
시내버스가 있는 데 이미 끊겼단다.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손을 드는데 눈도 주지 않고 모두 지나친다. 30분 넘게 서 있었더니 맘씨 좋은 젊은 분이 차를 태워주었다. 백담사 입구까지 왔다. 민박집이 즐비하다.
백담사 쪽으로 한참 걸어 올라가는데 KBS, MBC, SBS에 방영되었다는 식당이 보인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밥을 먹은 다음 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황태해장국을 주문했다. 맛이 담백하다. 밥을 먹었더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식당 주인에게 잘 곳을 물어보았다. 민박도 겸한다고 한다. 이 댁에 머물기로 했다.
깜깜해 졌다. 양말, 속옷 빨아 널었다. 주인댁 아들 컴퓨터 빌려서 오늘 일정 정리했다. 오늘 하루 좀 무리했다.
** 오늘 경비
아침식사 - 생선매운탕 2만원
점심 - 된장국 6천원
저녁식사 - 황태해장국 7천원.
민박 - 3만원.
합계= 6만 3천원
** 셋째 날 - (5월 4일 -맑음) - 인제군 북면 용대리, 황태마을 이야기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밖에 나와 보니 제법 쌀쌀하다. 잘 쉬었다 간다고 주인에게 인사라도 하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도 집안이 조용하다. 배낭을 메고 한길 쪽으로 내려오는데 식당이 보인다. 손님들이 붐빈다. 식당에 손님이 많으면 맛이 괜찮다는 신호다. 백담 순두부 집이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어서 오시라고 반갑게 맞아준다. 주인인 모양이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불가의 비법을 전수한 집’ 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있다. 종이 색깔이 누렇게 변한 것으로 보아 오래된 기사인 듯 싶다. 날자는 보이지 않고 주간조선 ‘맛집기행’ #183이라는 번호만 나와 있다. 이 댁에서 특별한 순두부를 만들게 된 유래와 만드는 방법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밥이 나왔다. 맛이 순하고 깊다. 미국 서부지역 모뉴먼 벨리를 배경으로 중년여자가 웃고 있는 큰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몇 년 전에 내가 다녀왔던 곳이다. 아내 사진이냐고 묻자, 20 년 전 어머님이 미국 여행 가셨을 때 찍은 사진인데 벌써 돌아가셨다고 한다. 밥값은 6천원이다. 팁을 내지 않고 나오려니 좀 어색하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밥을 먹고 팀을 따로 내야한다는 게 잘 이해 되지 않았다.
주인에게 진부령 올라가는 시내버스가 몇 시에 있냐고 물었더니, 시간표를 보면서 지금 첫 차가 올 시간이란다. 바삐 내려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가 온다. 승객은 나 혼자다. 어제 멈췄던 진부령 정상까지 왔다.
7시30분, 아침 산기운이 서늘하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간다. 물 흐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골짜기에 진달래 한 송이 곱다. ‘천하무적 향로봉대대’ 앞을 지났다.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에게 손을 흔들었더니 웃으며 경례를 한다.
여기서 부터 강원도 인제군 북면이다. 긴 나무를 가로 세로로 엮어 놓은 황태덕장이 보인다. 덕장을 철거하는 모습도 보이고 덕장에 쓰였던 나무 기둥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도 했다. 파장 풍경을 닮았다. 황태 직판장이 보인다. 노가리 산나물 명란 창란 등을 파는 집이다. 황태 주산지 용대리 마을이다.
명태는 갓 잡아 올리면 생태, 얼리면 동태.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면 황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완전히 건조시키면 복어. 이외에도 불리는 이름이 참 많다.
나는 생태매운탕을 좋아한다. 직장에 근무하던 시절의 눈 오던 날, 퇴근 후 어깨에 쌓인 눈을 탈탈 털며 주막집에 들어서면 주인 할머니가 생태국을 내왔다. 무를 어슥어슥 썰어 넣어 끓인 시원한 생태국 맛이라니. 거기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였다. 코다리를 찢어가며 여름날 저녁 평상 위에 앉아 술잔을 기우리던 추억도, 북어국을 마시며 전날의 술독을 풀던 일도 나만의 기억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 같은 명태라도 동해바다에서 잡은 명태를 말린 북어라야 해독제 효과가 있다고 했다. 동의보감에 나온 말이다. 요즈음 국민 가수, 국민 시인, 국민 여동생 등,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명태야 말로 국민 생선이 될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길가 큰 황태 모형이 눈길을 끈다. ‘용바위 황태덕장’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 분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아침은 먹었으니 물이나 한 잔 얻어먹고 가자고 인사를 했다. 계산대 앞 벽에 시 몇 편이 붙어있다. 누가 쓴 시냐고 물으니 아주머니가 썼단다. 등단 시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황태'라는 제목의 시를 비롯 몇 편의 시가 걸려있다. 당선소감을 보니 전북 익산군 함열면 성내리 출신, 이라고 적혀있다, 두고 온 친정동네를 꼭 밝혀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황태는 해독을 하고 피를 맑게 한다고 설명한다. 황태를 만드는 작업은 12월 말경 시작하여 이듬해 3월 말이면 끝난다. 이 고장에서 황태를 만들기 시작한지 50년 정도 되었단다. 15년 전 까지만 해도 인근에서 명태가 잡혔는데 지금은 원양에서 잡아오거나 소련에서 사온 명태로 황태를 만든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35년 전 황태일을 시작했단다. 시집온 후 울기도 많이 울었다. 식량이 없어 약초를 캐다 먹고 살았다. 황태 일이란 게 겨울에는 말리고 봄에는 걷워 들이는 일인데, 지금은 부자마을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식당에서는 황태구이 해장국 청국장 전골 황태찜 등을 판다. 음식을 만들다 보니 솜씨가 늘어 황태국 잘 끓이는 명인이 되었단다. 전국에 음식 명인이 30 명 정도인데 그 중 한 명이다. 본인이 끊인 황태국 맛 좀 보시라면서 한 사발 가져온다. 입안에 부드럽게 감겨오는 맛, 그리고 속을 시원하게 하는 맛이 일품이다,
황태 10개들이 한 묶음에 2만원에 판매한다고 했다. 1년 매출이 얼마정도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기만 한다. 1남 1녀인데 손자가 다섯이란다. 아이들도 다들 시집 장가가서 잘 살고 있어 걱정이 없단다. 얘기를 하면서도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복은 웃음을 따라 다니는 모양이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니 ‘제 13회 용대리 황태축제’ 라는 큰 에드벌룬이 떠 있다. 황태 크기의 모형을 플라스틱 등으로 만들어 길을 따라 길게 걸어놓았다. 골짜기가 황태 덕장으로 가득하다.
이곳 용대리에서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라진다. 미시령으로 가면 속초가 나오고 진부령을 넘으면 간성이다. 옛날에는 속초를 넘어 가려면 구불구불 산을 타고 여러 시간을 넘어가야 했는데 요즘은 터널을 뚫어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서울에서 당일 관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길가에 원조황태전문식당, 간판이 보인다. KBS 인간극장(5부작) '우리는 황태 3대' 출연 업소라는 선전문과 잘 보이도록 얹혀 놓은 사람 머리 둘이 눈길을 끈다. 그 아래 KBS MBC SBS에서 방영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3대가 황태를 만들어 왔으면 원조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 는 생각을 하며 간판을 읽고 있는데 주인장이 나와 인사를 한다. 산골황태덕장 이종구 사장이다.
들어와 차 한 잔하고 가시라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따뜻한 차를 끓여 내온다. 둥그런 탁자 위 유리판 아래 이 댁을 다녀간 유명 인사들의 간단한 인사말이 보인다. 나에게도 몇 마디 써달라고 해서 한 자 써 넣었다.
어떻게 3대가 황태작업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45년 전에 아버지가 황태 일을 시작했고 본인은 20년 전부터 이 일을 배웠단다. 그리고 지금 조카랑 함께 일한다고 했다. 족발집이나 설렁탕집까지도 원조라는 이름이 즐비하다 보니 어느 게 정말 원조인지 종잡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지방에서 처음 황태를 시작했던 아버지 대 부터이라니 이 식당은 명실상부한 원조가 아닐까 싶다.
용대리 황태매출이 2010년 기준으로 400억쯤 된다고 했다. 상당한 규모다. 좀 전에 용바위 황태덕장 아주머니가 매출액을 얘기하면서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만하다. 이곳 용대리에서 만드는 황태가 전국 물량의 70프로 정도고 대관령 지역에서 30프로 정도가 나온다고 했다. 주인 내외가 젊다. 큰 아들은 군에 갔고, 딸은 고3, 중1이라고 했다.
이 지방이 황태고장이 된 것은 지리적 요인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지역 용대리가 설악산 북부 끝자락 협곡이라서 골짜기 바람이 쎄서 농사가 안 되는 곳이었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나물을 뜯거나 약초를 캐어 살아갔는데,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 황태말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부촌이 되었지만 그동안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자재를 공동 구입하거나 빌려 쓰는 일, 공동 저장과 판매 등, 함께 힘을 모아야 할 일이 많단다. 회원들끼리 협조가 잘 되는 셈이라했다. 앞장서 일하는 사람의 노력 없이 그냥 이루어 질 리가 없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이 집 사장이 그런 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태사업이 좀 된다는 소문이 나사 외지인들이 들어와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바로 옆집에 어떤 분이 땅을 사고 집을 짓더니 판자 울타리를 세워 이쪽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버렸다면서, 마을이 점차 삭막해져 간다고 푸념이다. 손님 발길이 많아져야 함께 잘 살게 되는데 기본을 모르는 장사꾼이라며 한숨을 쉰다. 조심해 잘 가시라,며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의 미소가 넉넉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바람이 세긴 센 모양이다. 세어보니 4개다. 숫자가 많아지면 저런 모습도 관광 상품이 될 수 있겠다. 미국에도 바람이 센 곳에 저런 풍력발전기를 수백 개씩 세워 전력을 생산한다. 그 풍경이 볼만하다. 사막지역은 뜨거운 햇볕을 이용해 전력을 생산을 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게 세워놓은 집열판 역시 상당한 볼거리다. 집열판이 해를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길가에 황토로 지은 집이 예쁘다. 돌을 이어 만든 지붕도 특별하지만 작은 항아리를 포개 올린 굴뚝도 독특하다. 처마 밑에 장작을 그득 채워놓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오른다. 아침밥을 짓고 있을까. 군불을 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어릴 적 새벽 풍경이 생각난다. 어둑어둑한 겨울철 새벽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있으면 토독 톡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밥 짓는 소리였다. 그리고 가만가만 아랫목이 따스워 왔다. 밥 재지는 냄새가 코를 간지를 무렵이면 어머니는 “그만들 일어나그라 잉” 하며 우리를 깨우셨다. 우리 꼬맹이들은 못 들은 척 누워있었다. “아그들아 학교늦겄다 이-o” 몇 번이나 불러도 기척이 없으면 어머니는 방에 들어와 이불을 활짝 벗겨버렸다. 눈을 말똥거리며 병아리처럼 서로 보듬고 오불오불 한 이불 속에 누어있는 우리 남매들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 때쯤 햇살이 창문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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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최북단에 위치한 대진항에서 이른 아침 어부들이 밤새 잡은 싱싱한 활어들을 내려놓고 있다. / 황태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인제군 용대리가 주산지다. 황태 축제를 알리기 위해 걸어 놓은 황태 모양의 전등들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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