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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孝子) 건계공(建溪公) 나안세(羅安世)는 모친병환에 주야시탕(晝夜侍湯)하고 천명(天命)이 다하매 상장제례(喪葬祭禮)를 준례(遵禮)하고 여묘(廬墓) 3年을 다한후 유시(幼時)에 선친(先親) 미상복(未喪服)에 애통(哀痛)하여 추복(推服)하고 시묘(侍墓)하는데 산에 심은 소나무를 송충(松蟲)이 먹으매 잡아깨물며 앙천애곡(仰天哀哭)하니 뢰성(雷聲)과 풍우(風雨)가 크게일어 낙충진멸(落충盡滅)하니 송목(松木)이 독청(獨靑)하다. 효제충신(孝悌忠信) 4字를 유명(遺命)하니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존경(尊敬)받고 효행(孝行)을 향천(鄕薦)하여 명천(命薦)되다.
효자(孝子) 내빈거사(耐貧居士) 나안인(羅安仁)은 효행이 조정(朝廷)에 알려저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했으나 불응(不應)하고 부모께 고기를 잡아 봉양(奉養)하고 하절(夏節)에는 부채로 시원하게 한 효행이있다 선어설(扇魚說)과 구문도조어가(驅蚊圖釣魚歌)를 저시문(著詩文)하였다.
효자(孝子) 낙선공(樂善公) 나안의(羅安義)는 그 효가 저정(朝廷)에 알려저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고 증(贈)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하다.
효자(孝子) 행정공(杏亭公) 나응허(羅應虛)는 부모 타계(他界)함에 시묘(侍墓)3年에 뜰의 연못에 연꽃이 피지 않고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지 않았는데 상제(喪制)를 다하매 꽃이 피고 열매가 여니 효에 감동(感動)함이라 칭하다. 효성이 지극(至極)하여 효자(孝子)로 천명(薦命)하다.
효자(孝子) 이이당(怡怡堂) 나응삼(羅應參)은 임금이 중국(中國) 6효자와 동방(東方) 6효자를 병풍(屛風)에 그리는데 구산(龜山)의 상(像)과 성명을 기입(記入)하여 하사(下賜)하였다. 부모병화(父母病患)에 지형화약(指血和藥)하고 3年 시묘(侍墓)하다. 1553년에 효자정려(孝子旌閭)하고 임금이 구산처사(龜山處士)란 호(號)를 내렸다.
효자(孝子) 행음공(杏陰公) 나의(羅의)는 효성(孝誠)이 출천(出天)하여 6세때 모친(母親)이 심병(沈病)하매 그의 머리를 모친의 머리에 대기를 매일(每日) 수차(數次)하니 물은즉 어머니 머리에 이가 많으니 이를 내머리에 나누어지면 어머니 머리 이가 적어진다 하였다. 어머니가 책(冊)읽음을 좋아하시매 여묘중(廬墓中)에도 소학효경(小學孝經)을 매독(每讀)하였다. 선조조(宣祖朝) 효자(孝子)로 천계(薦啓)되다
효자(孝子) 계이당(繼怡堂) 나표(羅表)는 친환(親患)에 주야(晝夜)로 하늘에 빌었고 여묘3년중(廬墓3年中) 야화(野火)가 묘근(墓近)에 타오매 앙천호읍(仰天號泣)하니 반풍(反風)이불어 꺼젔으며 물이 없어 탄식(歎息)하니 여묘좌편(廬墓左便)에 용천출수(湧泉出水)하였다. 향인(鄕人)이 칭송(稱頌)하고 절효선생(節孝先生)이라 칭하다. 효종(孝宗)께서 명경(命旌)했고 숙종조(肅宗朝)에 조령(朝令)으로 정려중수(旌閭重修)하였으며(영조정묘 英祖丁卯)에 재중수(再重修)하였다.
효자(孝子) 월봉공(月峯公) 나계(羅계))는 천품(天稟)이 인후하고 효도가 지극하였다. 공이 아우로 더불어 길에서 범을 만났는데 범이 피하여 범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범도 효자를 알아본다고 하다 부친병환(父親病患)에 지혈(指血)을 약에 타서 드리고 거상(居喪)에 여묘(廬墓)를 3년하고 조석(朝夕)으로 성묘(省墓)함에 한번도 결(缺)하지 않았다 선조(先祖)가 공의 효를 듣고 복호사미(復戶賜米)의 은전(恩典)을 내렸다.
효자(孝子) 영이당(永怡堂) 나한명(羅漢明)은 가훈(家訓)을 따라 효우돈행(孝友篤行)하고 모친병환에 지혈로 화약하고 시묘(侍墓) 3年하다. 순조(純祖)가 명정(命旌)하다. 공이 팔효사(八孝祠)에 추배(追配)된것은 흩어진 자료(資料)를 모아 팔효집(八孝集)을 완성한 공(功)이다.
나주나씨 친척이라고 했더니 관리인께서 직접 신줏단지를 열어주시며
며칠전에 제향이 있었다며, 마을의 유림들이 많이 참석하셨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팔효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5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6m, 둘레 3.65m로
팔효사 경내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팔효사의 주벽(사당에서 주장이 되는 위패)
나안세의 부친 나난중이 어려서 심었다고 전하며
또한 나씨 문중에 장원급제 등 경사가 있을 때 이 나무에 큰북을 매달아 쳤다고 하며,
3대에 걸쳐 효자가 날 적에는 잎만 피고 3년이 지난 후에 열매를 맺었다고 하며
懸鼓亭/현고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팔효사 입구에는 예쁜 마음을 담은 명자꽃이 ....
입구에 축 늘어진 (처진만 홍도)꽃도 효자문과 어울리게 피고있다
효자(孝子) 영이당(永怡堂) 나한명(羅漢明)은 가훈(家訓)을 따라 효우돈행(孝友篤行)하고 모친병환에 지혈로 화약하고 시묘(侍墓) 3年하다. 순조(純祖)가 명정(命旌)하다. 공이 팔효사(八孝祠)에 추배(追配)된것은 흩어진 자료(資料)를 모아 팔효집(八孝集)을 완성한 공(功)이다. 나한명(漢明) 號 永怡堂 1759~1834)금양군파 구산공 후손으로 2007년 팔효사에 추배되었음 (신보 5권 p90)
금양군파 나한명公이 저희 선대 할머니가 장수하여 93세 때 국가로부터 壽직 (정三品)벼슬을 받고 잔치를 벌릴 때 永怡堂께서 축詩를 보낸 글이 泥亝유고에 실려 있다. 宗人 한명(漢明)의 글 원문 移記와 번역 / 나천수 婦德之純壽百春(부덕지순수백춘)/순수한 부덕으로 나이 백 살까지 먹었는데 信乎天授也非人 (신호천수야비인)/(장수는) 정말로 하늘이 준 것이니 사람이 아니로다. 竟將花誥登風雅(경장화고등풍아)/마침내 임금의 고명이 내려 詩로서 높은 곳에 오르니 爭說阿孫善養親(쟁열아손선양친)/손자들이 다투어 말하면서 착하게 어버이를 봉양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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