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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동초등학교 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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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곳 스크랩 고재붕(高在鵬, 1869~1936)의 <유서석기(遊瑞石記)>
수선화(유선희) 추천 0 조회 20 10.11.17 17: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주와 전남의 3고을을 품고 있는 무등을 옛 선현의 글로 대하니 감회가 새로워 이곳에 옮겨 적는다.

특히 우리 마을에 사신 분이라서 더욱 애정이 간다고나 할까???

이 글을 통해 삿갓 쓰고 가마타고 유유자적하게 즐겼던 서석산의 풍광을 떠올려 보시기를.....

 

고재붕(高在鵬, 1869~1936) <유서석기(遊瑞石記)>


  을미년(1895년)나는 창평 정곡리에 살고 있었다. 그해 여름 4월 정자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권7. 『서(書)』에 <여정자앙해린(與鄭子仰海隣)이 있다.)과 함께 서석산에 오르기로 약속했었다. 자앙은 서석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달관(達觀)의 논의를 들은 바 있네. 산수가 수려하며 깊고 그윽하여 마치 페르시아(옛날에는 페르시아에서 진귀한 보물이 난다고 인식하였다)에 들어간 것과 같고 금빛과 옥빛의 규벽(奎璧,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 소지하던 구슬)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감상하고자 하는 것이 마치 임과 헤어진 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은, 서석산이 금강산만 못하네. 그러나 웅걸하고 고요하게 자리 잡았고 하늘이 때에 맞춰 비를 내리고 구름이 맑게 둘러쌓아 바라보면 마치 덕을 지닌 대신(大臣)이 띠를 늘어뜨리고 홀을 바로 쥐고 조정에 서서 조화롭게 종사를 다스리는 것과 같으며, 맑게 개인 상쾌한 아침은 마치 신선이 아름다운 못에서 목욕을 하고 구름 모자를 똑바로 쓴 것과 같은 것은 금강산이라도 서석산에 미치지 못하네. 중국 사람들이 산하의 장관이 무려(‘의무려(醫巫閭)’는 만주(滿洲) 요영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에 있는 산) 동편에 모여 있다고들 말한 것은, 진실로 금강산과 서석산이 있기 때문일 것이네. 나는 모든 산봉우리를 두루 밟아 보았고 돌 비탈길을 모두 구경했었네. 서호(서호는 호수의 이름이로, 이처럼 불리는 호스는 절강성 항주시, 광동성 혜주시, 하남성 허창현, 복건성 복주시, 안쉬성 부양현 등 여러 곳에 있는 바, 일반적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진망(절강성 항주시 남서쪽에 있는 산이름. 진시황이 동쪽 지방을 순행할 때 이 산에 올라 남해를 바라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의 유람 같은 것을 한 달에 서 너 번 했더니 이처럼 가까워졌네. 그대는 이제껏 올라 바라본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내가 말했다.

  “집에서 40여리 떨어져 있지만 하루하루의 삶을 서석산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한의 풍류라도 얻지 않았겠습니까? 산행을 하는데도 도(道)라는 것이 있으니, 만약 땔나무하는 아이나 목동이 보는 것처럼 평범한 경치라면, 어찌 사람들이 이 산을 찾아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마음이 크게 어그러져 먼 경치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선생의 높은 안목을 빌려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19일이 되자, 자앙이 산행 준비를 마쳤다. 또한 나는  김안중(金晏仲)과 먼저 원효암(元曉庵)에 이르러 멀리서 오는 가마를 기다렸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풍암정(楓岩亭)에 오르니, 성긴 소나무가 그림자를 옮기었고 새들은 울어대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임관해(林觀海)와 정기암(鄭畸庵)등 여러 현인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었는데, 글자가 닳아 없어져 너무도 아쉬웠다. 얇은 봄옷이라 한 순간 한기(寒氣)가 스며들어 오래 쉴 수가 없었다. 곧 바로 어사암(御史巖)을 지나 초연루(超然樓)에 들어가 쉬었다. 한 스님이 나와서 맞이하고선 연방(蓮房)에 자리를 정해주었다. 대개 ‘어사’는 암행어사 민달용(閔達龍)이 새긴 것인데, 뒷사람이 ‘어사암’이라 이름 하였다. 고경좌(高敬佐) · 김선명(金善鳴) · 김찬인(金贊引)등의 벗들은 저녁 무렵에야 이르러, 함께 잠을 잤다. 밤이 깊었는데, 다시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렸고 천둥소리가 방안까지 크게 울리었다. 객들이 자다가 깨어나니, 영선 스님은 독경(讀經)을 다하고 경쇠 소리를 그치고 앉아 말했다. “사찰의 유람은 즐길 만하나, 내일 산행은 이미 어려울 것 같소.” 내가 웃으며 말했다. “조화옹이 산을 유람하는 객을 희롱하려는 것이니 구름과 흙비가 씻기면 상쾌하지 않겠는가?” 영선 스님은 내 말을 믿지 못했고 여러 벗들 또한 과연 그럴까 하였다.

  목탁 치는 소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해가 이미 높이 떠 있었다. 잠시 후 자앙이 정희경(鄭晦景) · 박경심(朴景心)등의 벗들과 술을 가지고 왔다. 곧바로 산에 오르고자 했다. 자앙이 말했다. “박우서(朴禹瑞) · 고경률(高敬律)이 아직 오지 않았네. 벗들과 산에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기다리지 않고 산에 오르는 것은 안 될 일이네.”

  그리하여 초연루에 머물면서 술을 기울이니, 서글픈 구름과 불법(佛法)같은 단비, 향기로운 박달나무와 늙은 회나무의 그윽한 경치에 마음이 감동하여 흥취가 어느새 일었다. 절반 쯤 술을 마시자 두 스님이 삿갓을 벗고 가사를 걸어 놓고 앞으로 나와서는 “풍류가 자못 쓸쓸하니, 한바탕 신나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고는 일어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니, 진정 볼만했다. 잠시 후 고문경(高文卿)이 옷소매에서 그 형 방서(邦瑞)의 서찰을 전해 주었는데, 그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과 인연이 유난히 박하여, 건강이 좋지 않아 장차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이네. 산행에 대한 한 부의 기록으로 서석. 입석. 광석대의 승경을 형용하여 산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풀어주시기 바라네.”

  어찌 조급히 그림을 빌어 직접 보지 못한 마음을 위로하려고 할까. 세속에서 이런 유람은 사람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진대. 여러 벗들과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뭇 새들도 숲으로 돌아갔으며, 잔나비도 보금자리를 찾아갔다. 우서와 경률만이 끝내 기다림을 저버렸다.

 

 다음날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길을 나서면서 영선 스님을 길잡이로 험한 골짜리와 으슥한 산길로 안양(安陽)을 끼고 무암(巫岩)을 지나 병암(炳암)과 작봉(작봉)을 통과했다. 남쪽으로 나와 가파른 바위를 모두 지나니 우물 안에 앉아 있는 듯 답답한 마음이 한 걸음 옮기기도 전에 저만치 물러났다. 밀고 당기면서 저 서석산에 올라보니, 용같이 구불구불한 강과 물고기 같은 산굴들이 모두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어버이를 그리워한 적공(狄公)의 흰 구름(적인걸(狄仁傑, 607~700 또는 630~700). 당(唐) 병주(幷州)태원(太原)사람. 자는 회영(懷英). 시호는 문혜(文惠). 측전무후에게 직간을 했고 요숭(姚崇)등의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조야(朝野)의 존경을 받았으며, 무삼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는 등 황실의 회복과 수호에 힘썼다. 연국공(燕國公)으로 봉해지고 뒤에 양국공(梁國公)으로 추봉되었다. 그가 병주(幷州)로 부임하다가 태항산(太行山)에 올라서 멀리 흰 구름을 바라보고, “우리 어버이가 저 밑에 계실 것이다.”하였다.)과 고향을 그리는 유종원의 산봉우리에 오르고자 하는1) 그런 마음이 적이 위로가 되니, 새장 속에 든 학이 구름 낀 하늘을 높이 나는 듯, 커다란 날개의 붕새가 남쪽 바다에서 바람을 치는 듯하였다. 거령(巨靈)(당나라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 그는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고문(古文)부흥 운동을 한유(韓兪)와 더불어 제창하였다. 전원시에 뛰어나 왕유. 맹호연. 위응물과 나란히 칭송되었다.)이 갈라놓았고 우(禹)임금이 뚫어 아래로는 대지와 끊어졌고 위로는 하늘을 가로막아, 아찔하고 두려워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손으로 땅을 짚으니 팽조(彭祖)(전설상의 인물. 800세를 살았다고 한다.)가 웃옷을 벗고 우물을 살피는 형상이었다. 잠시 후에 따르는 종이 와서 바위에 걸터앉아 술잔을 돌리어 목을 축이었다.

  둥지에 짓든 매가 사람을 위협하는 듯, 수레 쓰는 학이 신선을 맞이하는 듯했다. 벼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입석대로 향하니, 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것이 마치 성도(成都)의 석순산(石?山)(중국의 사천성 성도시에 있는 석순산. 봉우리가 우뚝 솟은 모습이 봄의 죽순)이 점점 가까이 비치는 듯했고 곤륜산(崑崙山)의 여덟 기둥(팔주(八柱) : 전설상의 땅에 있다는 여덟 개의 기둥 하늘을 떠받친다고 한다.)처럼 올려다보면 두루두루 살필 수 있고 다가서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래 부분은 하나이면서 윗부분이 나누어진 것은 마치 수비가 견고한 성문에 길고 커다란 창이 빽빽이 서 있는 것과 같았다. 홀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을 사람이 더러워 아득히 홀로 떠나가는 것과 같았다. 갈고 자른 듯한 모서리는 노반(魯般)(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유명한 장인(匠人))의 먹줄보다도 정확했으니, 영장(?匠)(영(?)나라의 뛰어난 장인. ‘영장근(?匠斤)’ 또는 영장휘근은. 고도로 숙련된 기예를 비유하는 말로, 초나라 영 땅의 장신 석(石)이 사람의 코 끝에 달라붙은 백토를 지귀를 휘둘러 코는 조금도 상하지 않고 깎아내었다는 장자(莊子)장자의 우언(寓言)에서 유래.)의 도끼로도 더 공교로움을 보탤 것이 없었다. 혼돈의 기운이 가득 맺혀 있어 기이한 형상을 이룬 것인가? 아니면 화공(化工)(하늘의 조화로 자연히 이루어진 묘한 재주.)과 신장(神匠)이 우레와 바람을 마음대로 부리는 신통한 능력으로 재주를 부린 것인가? 제멋대로 포기와 떼를 지어 나온 것인데, 어떤 것은 넘어져 있기도 했다. 사람들은 “지진이 유감스럽다.”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이치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어찌 선교(仙橋 : 선경(仙境)으로 통하는 다리. 또는 선경에 있는 다리)에서 소동파의 흥겨움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마땅한 사람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오른편에 입석대를 끼고 반야봉과 비로봉 두 봉우리 사이로 들어가니, 개암나무와 무궁화나무 철쭉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고 바위굴은 어떤 것은 한 척, 어떤 것은 한 장이나 되어 한겨울의 눈보라도 막아 주는 듯했다. 모두 깃발처럼 남으로 기울어 있었다. 위험한 비탈 사이 길은 주왕(周王)의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가는 것 같았으며, 사공(謝公)의 나막신이 뚫어지는 듯했다.(사공지극(謝公之?) : 중국 남조(南朝)시대 송(宋)나라 사령운(謝靈運)이 산에 올라 노닐기를 좋아하여 항상 나막신을 신고 등산을 하였는데, 사나에 오를 적아ㅔ는 나막신 앞굽을 빼고, 내려올 적에는 뛰쪽 굽을 뺀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극치(?齒)는 나막신의 굽.) 암벽을 잡고 넘어지고 몸을 구부리면서 비로봉으로 나아가니 고향집이 아주 가까이에 보였다. 뜰의 홰나무와 울타리의 대나무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물었다. “요즘 어머님의 안부는 어떠하실까? 어찌하면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커다란 날개가 생겨나 집으로 날아가서 한 번 찾아뵐 수 있을까?” 그 정상은 천리를 가는 준마의 안장 위 같이 우뚝하여 긴 바람이 거대한 파도를 때리는 것 같았다. 천왕봉 옆 한 장(丈) 쯤 떨어진 곳에 들쑥날쑥한 봉우리가 마치 형과 동생처럼 우뚝 솟아 있는데, 사람들은 약암(躍巖)이라 불렀다. 그 바위에 발걸음을 옮길 만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시험삼아 발길을 옮겨보려 하니, 급히 가로막았다. 노닐고 서성이면서 위아래를 우러러 굽어보니, 산이 높은 까닭과 물이 흐르는 까닭과 별들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이치가 그 안에 있었다. 크도다! 서석산이 진산(鎭山)으로 남쪽 고을에 자리 잡으니, 월출산이나 방장산 같은 높은 산들이 마치 개밋둑 같이 땅에 붙어서 감히 일어서질 못하누나! 자앙이 말했다. “창해의 저녁노을이 장관을 이룰 조짐이 있으니 잘 볼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선 하나의 둥근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중년에 일출을 보면서 불을 피웠던 곳일세.” 한 사람이 말했다. “구름이 걷혀 하늘이 열리면, 태백산과 한라산도 또한 시야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에 산허리로 내려오니 점차 땅이 드넓어졌다. 천왕봉과 비로봉이 마치 병풍처럼 바라다 보여 현포(玄圃)(곤륜산에 있다는 신선의 거처. 기이한 풀과 괴이한 모양의 암석이 많다고 함.)의 신선을 만날 수도 있을 듯하여 흔쾌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옹달샘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원효암에서 아침에 싸온 밥이 이미 차가워졌기에 모두 다 가까운 곳에 사찰이 없는 것을 흠으로 여겼다. 방조(傍助)인 제봉(霽峯)공의 『유서석록』가운데에는 옛날에 월대와 금탑 두 암자가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없다. 또한 모든 암자에도 사람들이 없어 거처했던 곳을 살펴보니, 삼백여 년 사이의 성패와 존망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샘도 막히고 물도 더러워 차마 마실 수가 없었다. 자앙이 말했다. “반야봉 남쪽에 샘이 있는데, 마실 만 하네.” 찾아보니 광석대 가는 길 옆에 있어 표주박으로 떠 마셨더니 시원한 샘물이 온 몸에 두루 퍼져 오장육부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아니겠는가?

  

반야봉을 돌아 동쪽으로 꺾어 도니 산은 높고 바람은 차가웠으며, 나뭇잎이 활짝 피어나지 못했고 산살구는 반쯤 떨어졌으며, 철쭉은 짙어지려 했다. 오솔길 따라서 바위가 모두 닳아 마치 평평하게 자리를 편듯해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보고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었기에, 기이하고 남다른 곳이라 여겨 아낌없이 술을 마시었다. 정면으로는 네다섯의 봉우리가 층층이 쌓이고 겹쳐 공중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형세가 마치 화악(華樂, 중국 5악중 서악)의 전괄봉(箭括峯)같았고 그 모습은 도성의 쌍궐(雙闕)과 같았다. 자앙이 말했다. “이곳은 풍혈대로 경관이 기막히다네.” 석벽이 깎아 놓은 듯 모여 천 길의 높이를 지탱하고 있는데, 꼭대기 부분은 넷으로 나누어져 있고 조금씩 기울다가 허리 부분에서는 하나가 되어, 우뚝하기는 조잔(鳥棧, 날아가는 새에 닿을 정도로 높은 사다리)같고 넓기는 반영(繁纓, 말의 뱃대끈과 가슴걸이)같았다. 조금씩 넓어지다가 마침내 꼭대기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모든 바위의 가운데를 꿰뚫어 위로 뚫려 있었다. 간신히 몸 하나 들어갈 수 있어서 풀을 헤치며 들어가서는 너무 좁아 몸을 꼬았다. 모든 사람들이 관과 도포를 벗고 개미가 줄지어 가듯, 물고리를 꿴 듯 한 줄로 서서 올라갔다. 나는 못가겠다고 하며 사양하였고 자앙 또한 그곳에 갔다 온 적이 있다고 하면서 사양하여 함께 돌아와 광석에서 기다렸다.

  대에 오르니 마침 한 사람이 호기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아득하기가 마치 신선이 곡조로 요대(瑤臺, 신선의 궁궐)에서 내려온 듯했다, 잠시 후에 여러 사람들이 이르러 말했다.

  “꼭대기는 백여명이 앉을 만큼 넓다네. 누가 만들어 놓았나, 그 누가 배치한 것일까? 아미산(중국 사천선 남서쪽의 산, 중국 불고 4대 명산)의 바둑판이 이 땅에 솟아 있는 것이 아니리요? 광석의 네 모서리는 반듯하고 평탄하니, 마땅히 이리저리 노닐며 바람쐬고 노래할 만한 곳이라네. 예전의 암자터가 아직도 있으며, 돌 사이로 솟는 샘물은 맑고 시원해 마실 만하고 깊이와 넓이가 수 척(尺)이라서 비록 가뭄과 장마에도 더 불어나거나 줄지 않는다네.”

  규봉은 풍혈대와 붙어서 나란히 서 있어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우뚝하여 입석대와 서로 견줄만하였다. 그러나 자리가 넓고도 아름다우며 묵직하여 입석대와 같지는 않았다. 구름이 맑고 안개가 흩어지면 우뚝하기가 마치 옥정(玉井)의 흰 연뿌리 같고 석양이 벼랑에 비치면 반짝이는 것이 높이 솟은 천태(天台, 중국 절강성 동쪽의 명산)와 같았다. 푸른 하늘에 금빛 연꽃이  깎아 놓은 듯 우뚝 솟았으니, 어떤 말로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신기하였다. 바위의 형세는 날개를 펴고 빙도는 듯했다. 암자가 그 한 가운데 자리했으며, 앞쪽으로는 수백 리가 활짝 열려 있으니, 신호(莘湖) 김공(金公)이 새로 지은 것으로 광석과의 거리가 일장(一匠)정도이다. 근처에 작은 못이 있는데, 돌 가운데서 물이 솟아올랐다. 차갑기는 도솔에 미치지 못하지만, 달콤하고 시원하기는 그보다 낫다. 자앙이 말했다. “여기에서 하루 밤 묵어 갈 만하니, 아름다운 밤 풍경과 시원한 아침 경치를 세상 사람들은 금강에 견준다네.” 이에 어떤 이는 시조를 읊조리고 어떤 이는 즐겁게 노래했다. 고비를 꺾어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연하고 부드러워 먹을 만했다. 이에 노래를 지었다.

  “봄 산에 고비 있으니, 배고픔 달랠 만하네. 캐서는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 백이숙제 같은 사람 없는데.”

  잠시 후 먼 숲에서 어둠이 밀려들었고 밥 짓는 연기가 허공에 길게 올랐다. 이때에 내일 하루를 생각했는데, 봉우리에는 달이 둥실 걸리었고 들판에는 안개가 흐릿하여 눈앞의 상전(桑田)이 한 순간 벽해(碧海)로 변했다. 가깝고 먼 마을의 불빛이 반짝이는데, 마치 뭇별들이 강물에 비치는 것 같아, 양대의 신녀와 동정호의 선녀가 마치 서로 만나는 듯했다. 동편이 희미하게 밝아오자 구름과 안개가 천만 가지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잠시 후 달이 바다 위로 비쳐 들었고 은하수가 지나며 반짝반짝 밝게 비쳤다. 가까이 있는 산은 마치 오나라와 초나라의 큰 배가 안개 낀 물가에 정박해 있는 것 같았고 먼데 있는 산은 마치 호랑이와 표범이 안개로 변한 듯 그 무늬가 선명하고 화려했다. 자앙과 함께 뚫어지게 이곳저곳을 구경 해보니, 그 운치가 대단했는데 잠도 그 즐거움을 뺏을 수 없어서 시 한 편을읊조렸다. 모든 벗들은 천둥소리마냥 코를 골며 잠을 자기에 돌아보며 소리쳐 말했다. “산행이 진실로 힘들긴 하구나.” 인하여 반초은(反招隱)(진(晉)의 왕강거(王康?)가 지은 시제(詩題))여산고(廬山高)(송(宋)의 문인. 구양수(歐陽脩)의 시제(詩題))를 노래했다.

  

  동이 터 오는데, 계곡에는 구름이 아직도 가득했고 티끌 바람도 불어 오지 않았다. 천만의 봉우리와 골짜기, 수많은 나무들의 머리가 푸르게 드러나, 한 순간 푸른 바다의 물결처럼 보였다. 구름 파도는 일렁이지 않았고 보이는 것은 여러 섬뿐이었다. 그 누가 서석산에는 바다와 같은 경관이 없다고 했는가? 이는 실제 경험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금강산이 비록 최고라고 하지만, 어찌 능히 이 서석산에 미치겠는가? 참으로 천하의 장관이다. 자앙이 말했다.

  “서석산의 아름다움은 모두 세 바위에 있네. 이 대(臺)는 또한 세 바위의 아름다움을 다 갖추었지. 연재(淵齎) 송선생이 서석산에 올라 이곳에 도착하고선 감탄하며 ‘내가 금강산에 두 번 가 보았지만, 입석과 광석의 승경은 얻지 못했네.’라고 했지. 이 어른의 말을 징험하기에 족하구려.” 자언이 이에 자리를 광석의 높은 대로 옮겨 멀리  바라다보니 숲 끝은 마치 남가새 같았고 철쭉꽃이 휘날리는 그윽한 흥취는 어제와 한가지였다.

  삼존석은 대의 서남쪽에 줄지어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서리어 있으며 높이는 오륙 길이요, 둘레는 열 아름이니 대의 장관에 보탬이 될 만 하였다. 예로부터 태수(太守)나 자사(刺史)들의 기록도 많다. 여러 벗들이 말하기를, “이곳은 그 이름들을 영원히 남길 수 있을 것일세.” 하니 내가 말했다. “어찌 다만 그렇기만 하겠는가? 장차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지목하여 평을 정하여 말하기를, ‘아무개는 어질고 청렴했으며, 누구는 어질지도 않고 청렴하지도 않았다.’고 할 걸세. 만약 그 어짊이 진실로 미사(美事)가 아니라면, 이것은 악명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흰 흙비가 가득하고 하늘이 누렇게 변해 허공에 먼지가 가득하여 멀리 바라다보는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근처에 옛 선사(禪師)가 설법하던 석굴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 가서 구경하지 못했다. 이에 의견이 돌아가자는 것으로 정해져서, 돌 고개를 지나고 소나무와 삼나무 숲을 헤쳐 삽치(?峙)에 이르렀다. 자앙은 장차 벗인 선명(善鳴) 조문경(曺文卿)을 방문하려 하고, 모든 벗들은 모두 제 갈길로 흩어졌다. 나는 조문경을 알지 못하지만, 자앙에게 이끌려 조문경의 집에 가서 쉬었다. 정오에 옷깃을 나란히 하고 누대로 돌아왔다. 조금 지나자 자앙 또한 나를 부추겨 가자고 하여 돌아왔다.

  며칠을 지냈는데, 어머님 생각이 예전보다 줄어들지 않았기에, 서석산 천만 봉우리의 꼭대기에 망향대를 세워 마음의 묵은 빚을 덜고자 했으나 그리하지 못했다. 마침 자앙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마음 맞는 네 다섯 사람과 연속해서 적벽에서 노닐어 보세.”라 하니 내가 대답했다. “이 적벽에서 선생의 문장과 풍류를 얻어 이로써 크게 떨쳐 쓸쓸함을 몰아내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속히 도모한다면 나는 마땅히 그 뒤를 따라서, 장강의 파도에 가슴 속의 울적함을 씻어내겠습니다.” 저 황강(黃岡)(隋代(수대)에 남안현(南安縣)을 고쳐서 둔 현. 호북성(湖北省) 신주현(新洲縣)에 있었다.)적벽(赤壁)(湖北省 황주(黃州)에 있는 명승지로, 송 소식(蘇軾)이 배 띄워 노닐면서 적벽부를 지은 곳이다. 소식은 유배지인 황주에서 유람하며 이곳이 예전의 적벽대전을 치른 곳과 이름이 같은데 연유하여 적벽대전의 영웅호걸의 고사를 회고하게 된 것이다.)은 멀고 황량한 변방이나 동파의 두 적벽루를 얻어 그 이름이 고금에 통하고 그 빛이 악독(岳瀆)(오악과 사독의 병칭. 오악은 泰山(태산). 華山(화산). 衡山(형산) 恒山(항산), 嵩山(숭산)을 이른다. 사독은 네 개의 큰 강으로, 장강,황하. 淮水 (회수), 濟水(제수))에 더했으니 만약 동파 같은 사람을 얻으면 어느 곳이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때는 이르고 늦음이 있으며 운도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태원이 적벽을 칭송하였는데, 마침내 잃어 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슬퍼할 만하다. 마침내 글을 지어 그 뜻을 잊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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