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전에서 3루타를 치고 득점에까지 성공한 류현진. 투수인데, 타격으로 더 부각됐다며 쑥스러워하는 류현진이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어제 애리조나와의 3차전을 마치고 곧장 피츠버그 원정 숙소로 향했습니다. 호텔 도착하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점심 이후에 눈이 떠지네요. 아시다시피 여기가 LA보다 3시간이나 시차가 빠르다보니 점심 때 일어났는데도 계속 피곤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오늘 올라온 기사들을 보니까 투수 류현진보다는 타자 류현진에 대한 기사들이 더 많았어요. 제가 그만큼 못 던졌다는 얘기가 되겠죠?^^
어제 경기는 이미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볼 스피드가 떨어지면서 가운데로 몰리는 공이 많았습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볼 스피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앞선 두 경기에서 95마일이 나온 터라 구속이 떨어진 데 대해 이런저런 해석이 분분하시더라고요. 매 경기 좋은 컨디션으로 최고의 피칭을 선보인다면 정말 ‘대박’이겠죠.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고 땅볼아웃이 병살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컨디션’이란 게 매 경기 같을 수가 없다는 함정이 종종 제 발목을 잡곤 합니다. 어제도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몸이 무겁다는 걸 느꼈고, 그런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가면 어김없이 ‘털리는’ 장면들이 속출합니다.
어제 6이닝 동안 11피안타 2볼넷 2탈삼진 3실점하면서 실망스런 피칭이 이어졌지만 그나마 4번의 병살타가 나오는 바람에 시즌 10번째 퀄리티 스타트(선발 6이닝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 병살타들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주 초박살 났을 거예요.
푸이그의 류현진 사랑? 류현진이 좋은 피칭을 선보일때, 류현진이 3루타를 치고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포옹을 했던 푸이그이다.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때부터 류현진과 푸이그는 친하게 지냈는데 푸이그가 빅리그로 올라오면서 그 관계가 더욱 진해졌다(?)고.(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저를 좋아하는 팬들은 다저스 선수들의 수비 실책과 불펜투수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나타내시지만, 제가 더 잘 던졌더라면 수비수들도 좀 더 편안하게 경기에 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즉 수비수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나, 제가 그들을 보는 시선이나 같은 마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기 결과를 놓고 누구를 탓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다저스에는 저를 만만하게 보는 친구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야시엘 푸이그라는 선수죠. 푸이그는 애리조나 캠프 때부터 유독 저한테 살갑게 대했어요. 저도 당시에는 다저스의 낯선 환경이 어색하기만 했는데 푸이그의 다소 ‘과한’ 친밀감 전파에 고마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친구가 빅리그로 올라와서 연일 불방망이 쇼를 보여주며 자신의 존재감을 200% 이상 과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입이 절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치는 선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잘하는 선수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투수 입장에서는 그렇게 뻥뻥 터트려주는 선수가 있다는 게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단, 저를 너무 귀찮게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툭툭 건드리면서 장난을 치니까 아주 힘들어요. 무엇보다 제가 등판하는 날은 장난 좀 안 쳤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참으로 매력적인, 그래서 가까이 하고 싶은 동생입니다.
그런데 요즘 푸이그와 저를 신인왕 후보에 올려놓고 두 선수를 비교하는 기사들이 많더라고요. 솔직히 저로서는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같은 팀 선수이고, 저랑 아주 친한 동료인 터라 신인왕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처럼 비춰지기 보다는 좋은 동료애를 선보이며 푸이그는 타석에서 저는 마운드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을 뿐입니다. 그 다음 결과는 운명에 맡겨야 되겠죠.
클레이튼 커쇼의 애리조나 선발 등판 때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류현진, 잭 그레인키의 진지한 표정. 그레인키는 다음날 등판에서 자신의 머리로 향하는 볼에 또다시 벤치클리어링 상황을 맞이했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그리고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습니다. 이번 애리조나전에서 벌어진 벤치클리어링 이후 마지막 3차전에 제가 선발등판했잖아요. 만약 선수들의 동의가 있었다면 전 보복성 투구를 했을 겁니다.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날 당시 저는 클럽하우스 안에서 치료를 받으며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투수 그레인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애리조나의 이안 케네디가 그레인키의 머리를 향해 던진 공은 명백한 빈볼이었습니다. 그레인키는 지난 4월 샌디에이고전, 사구에 이은 벤치클리어링 과정에서 쇄골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트라우마가 있는 터라 감독님, 코치님을 비롯해 선수들이 더 흥분할 수밖에 없었어요. 치료를 받던 저 또한 화가 나서 경기장으로 뛰어나가려 했다가 트레이너가 만류하는 바람에 주저않았지만, 애리조나의 비신사적인 매너에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인이 있었더라면 저 또한 가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푸이그가 빈볼을 맞고 그레인키가 상대 포수 몬테로의 등을 맞힌 건 일반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1차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을 때 선수들이 조용히 나갔다 들어왔던 것이죠. 그러나 케네디가 그레인키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진 부분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정신 나간 행동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매팅리 감독과 맥과이어 코치가 그런 과격한 행동을 벌였을까요.
야구의 동업자 정신을 강조한 류현진. 투수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진 이안 케네디에 대해 류현진은 '정신 나간 행동이었다'라고 말한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물론 아이들이 보는 야구장에서 볼썽사나운 장면이 펼쳐진 부분은 다저스 선수단 모두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동업자 정신을 망각한 빈볼성 투구는 선수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애리조나의 이안 케네디는 ‘고의가 없었다’며 뒤로 숨기 보다는 정식으로 사과하고 악수를 청했어야 합니다.
피츠버그전을 마치면 뉴욕으로 원정을 떠납니다. 아마 오는 19일 양키스 스타디움에 오를 예정인데요, 음…, 양키스 스타디움은 제가 야구를 시작하면서, 아니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게 되면서, 꼭 한 번쯤은 서보고 싶었던 마운드였습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제가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야구를 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 ‘꿈의 무대’인 뉴욕 양키스전의 선발등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재미있기도, 실감나지 않기도, 그리고 꼭 잘해 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한 구, 한 구, 최선을 다해서, 잘 던지고 싶습니다. 포수 미트만을 향해서요^^.
*이 일기는 류현진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류현진한테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은 '꿈의 무대'이다. 오는 19일, 뉴욕 양키스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하게 되는 류현진은 한 구 한 구 최선을 다해 던지겠다고 다짐한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