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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학대학원2006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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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자료 스크랩 서울의 성곽/4대문, 4소문
소망 추천 0 조회 6 10.03.20 16: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 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1394)만에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궁궐과 종묘·사직을 먼저 조성한 뒤에 도성축조도감을 열어 성 쌓기에 착수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태조로서는 성곽이 수도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태조는 강조한 바 있다.
성안과 성밖을 구별하여 쌓은 한성의 성벽은 돌이나 흙으로 북악산등을 타고 낙산·동대문·남산을 거쳐서 인왕산 산등성이를 둘리는 총연장 18,1km로 쌓아졌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간에 걸쳐 19만 7천여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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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 지도>

낙산코스 
 
낙산코스의 출발점은 동대문. 지하철 동대문역에서 나오면 이대부속병원 옆으로 난 ‘창신성곽길’이 서울성곽을 안내한다.

동대문의 시끌벅적 소음이 사라질 즈음 걷기 쉽게 포장된 산책로가 시작된다. 곳곳에 설치된 벤치, 정자와 가로등 등이 성벽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성벽 중간 중간에는 창신동과 충신동을 잇는 쪽문이 나있어 두 동네를 비교하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석축의 단을 세며 쉬엄쉬엄 오르길 20분, 어느덧 낙산의 정상 낙산공원이다. 옛 시민아파트를 헐고 조성한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트언덕’. 도봉산, 북한산, 인왕산, 남산까지 도심의 산과 사대문안의 빌딩숲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성북동코스

성북동코스는 돼지갈비, 돈까스, 칼국수 등 맛집들이 즐비한 성북동 성북초등학교앞 삼거리의 서울과학고 뒤편에서 시작된다. 이곳 산책로도 잘 정돈됐지만 낙산코스 보다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많아 걸음을 자주 멈추게 한다. 성벽 너머의 저택들이 즐비한 성북동 풍경이 볼만하다.

한 10여분 목덜미에 땀이 배일 즈음, 성벽 너머와 연결되는 쪽문이 나타난다. 문밖을 나서면 마치 시골을 옮겨놓은 듯한 딴 세상이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게 성벽 밖 좁은 터에 오밀조밀 밭들이 일구어져 있다. 허름한 달동네 우리 이웃의 터전이다.

다시 산책길로 되돌아와 잠시 오르다 보면 군 부대 때문에 길이 끊긴다. 대신 성벽 너머로 산길이 시작되는데 성북동 성곽답사의 진미는 이제부터다. 산길 입구는 곧 숨막힐 듯한 향을 뿜어낼 아카시아 숲이다.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면 성벽에 기대 소나무가 솔잎 터널을 이룬다. 산 위에 쌓은 성곽이라 석축 돌덩이가 작아 몽글몽글 성벽의 선이 곱다. 군사보호구역에 막혀 성북동 약수터쪽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 인왕산코스 
 
인왕산 코스는 산책이라기 보다는 산행이 적절하다. 출발지는 사직공원. 경사가 급한 인왕산길(인왕스카이웨이)을 한 10~15분쯤 허덕허덕 오르다 보면 무악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난다. 무악동쪽 길을 따라 100m 가량 가면 성벽과 함께하는 인왕산등산로가 시작된다.

인왕의 기암괴석을 감상하며 200m를 오르면 성곽의 성가퀴(성벽 윗부분에 쌓는 지붕이 있는 낮은 담)가 없는 성벽 위를 걷게 된다. 복원이 아직 덜 된 탓이라지만 오히려 성벽이 더욱 성벽다워 보인다. 복원해놓은 성벽의 상당 부분이 세월의 더께로 시커먼 석축 위에 반듯하고 새하얀 돌지붕이 얹혀져 있어 부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석축을 디디며 30분 오르면 인왕산 정상이다. 낙산에서 본 서울이 정겹다면 인왕에서의 전경은 호쾌하다. 발아래 경복궁, 청와대는 물론 한강 너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청운동으로의 하산길은 성벽 원형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답사의 절정. 성벽은 물론 성가퀴도 일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시간에 마모돼 둔탁해진 돌지붕이 정겹다. 인왕산 등산로는 공휴일ㆍ일요일의 다음날은 입산휴식일로 등산이 통제된다.


▲ 남산코스

남산의 서울성곽 답사는 동대문운동장 인근의 광희문에서 시작한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으로 불리는 곳이다. 서울성곽의 위용은 장충체육관 뒤편에서 이어진다. 체육관과 신라호텔 뒤로 성벽은 오밀조밀한 집들을 끼고 남산으로 힘차게 올라간다. 타워호텔 뒤편까지 이어진 성벽은 잠시 끊어졌다가 남산정상에서 순환로를 따라 내려 오는 산책길에 다시 만난다.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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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의 성곽>



서울의 4大門, 4小門

서울 성곽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4소문으로는 동북에 동소문[혜화문(惠化門),흥화문(興化門 )], 동남에 [광희문(光熙門),시구문(屍口門)], 서북에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서남에 [소의문(昭義門),소덕문(昭德門 )]을 두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기본설계가 마련된 서울의 성벽은 둘레가 40리 남짓 되고, 그 후 세종 4년(1422)과 성종 10년(1479) 등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성문과 성벽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렸다.

현재 대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정문(1976년 복원)이며, 소문으로는 창의문과 광희문(1975년 복원), 혜화문(1994년 복원)이며, 성벽으로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남산·인왕산 일대이다.   (서울시)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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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6가 69번지에 있다.
한양 도서의 정동(正東)에 위치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운다. 이 문루는 태조 5년(1396)에 중수(重修)되었으나, 현존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개축된 것이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중앙부에 홍예문(虹 門)을 만들고 그 위에 중층(重層)의 문루를 세운 점 등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며 문밖으로 반월형의 옹성(甕城)을 돌린 것은 고종 6년에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옹성 상부에는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다포계(多包系)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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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인지문(동대문)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북대문

성북동 계곡 막바지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도성 4대문의 하나인 속칭 북문이라 하는 숙정문이 나온다. 이문은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문으로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과 함께 양주와 고양으로 왕래하는 통로로서 태조때 다른 성문과 함께 축성되었으나 연산10년(1504)에 원래 위치에서 얼마간 동쪽으로 이전되었다.이문은 건립된지 18년뒤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 두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시켰다한다. 다만 가뭄이 심할때만 비를 오게 하기 위하여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다한다. 이 풍속은 태종16년(1416)부터 있었다하는데 이는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외에도 오주연문장전산교란 책자에 따르면 이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행이 음란해 지기때문에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도 아울러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음력정월대보름때가 되면 민가의 부녀자들이 대보름전 숙정문에 3번 가서놀다오면 그해의 재앙을 면할수 있다하여 많은 부녀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그리고 또 오래토록 비가 오면 국가에서 4대문에 나아가 영라는 비를 그치게 하는 기청제를 거행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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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청문(북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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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정문과 성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옛서울 도성의 서쪽에 있던 서대문의 속칭.
조선 태조가 서울 도성을 창축할때 사대문의 하나로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웠던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 명명하였는데 1413년(태종13년)에 풍수학생 최양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패쇄하고 새로 전 서울 고등학교 본관 서쪽에 문을 내어 서전문이라 하였다. 그후 22년(세종4)도성을 수축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그 남쪽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워 이름을 옛날의 돈의문으로 고쳤으며 거기에 연유하여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이 새문안으로 불리었고 지금의 신문로도 여기에 유래한다. 1711년(숙종37)에 예조판서 민진원의 건의로 광화문을 개건할 때, 목재를 준비하여 돈의문의 문루를 개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기사가 숙종실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때 돈의문도 개건이 된 듯하다. 그러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돈의문은 철거되어 지금은 그 형태를 볼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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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문터(서대문)>


혜화문(惠化門), 동소문

조선시대 도성에 설치된 동북방 성문.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지을 때, 동서남북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을 세웠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본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고쳐졌고,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하였다. 양주(楊州)·포천(抱川)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성문 모양은 아래쪽에 아치형 출입구가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전형적인 성문 형태였다.

1928년 도로확장를 위하여 철거되었다가 1994년 원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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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화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

종로구(鍾路區) 청운동(淸雲洞)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城門).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북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 창의문의 위치가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폐쇄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국가적 공역(工役) 등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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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문(자하문)>

광희문 (光熙門)

중구 광희동(光熙洞)에 위치한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에 창건되었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체의 성외(城外) 반출(搬出)이 허용된 문이다.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으며, 1717년 석축(石築) 위에 문루(門樓)를 짓고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1975년 도성(都城)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있던 것을 남쪽으로 15m 옮겨 석문을 복원하고 문루를 다시 세웠다.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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