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심보선
1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 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 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쌓이고 녹는다
그뿐이다
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
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오래 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한쪽 눈이 먼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
이쪽으로 뒤뚱대며 다가온다
지저귐, 새의 발랄한 언어가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늘 속에서 맴도는 검은 얼룩이었겠지만
3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가을의 햇빛 속에서
다친 새들과 나와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 숙고할 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고요해진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자살자는
몸을 던지는 순간에 점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직전까지
디디덤 디디덤 엇박자로 명랑하게 뛰었겠지만
그늘 속에 버려진 타인의 물건들
그 흔해빠진 손바닥과 손등들
냉기가 뚜렷이 번져가는 여생을 어색하게 견디고 있다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4
내게 인간과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알려다오
거기 머물며 남아 있는 모든 계절이란 계절을 보낼 테다
그러나 애절하고 애통하고 애틋하여라,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구나
아아, 발밑에 검은 얼룩이 오고야 말았다
햇빛 속에서든 그늘 속에서든
나는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기에
지금으로서는
오늘 나는 /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年度)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종교에 관하여 / 심보선
1
세기말을 지나 휘황한 봄날이다
귀를 틀어막은 청소부가 실패한 비유들을 쓸어 담고 있는데
꽃가루들은 사방에서 속수무책으로 흩날린다
눈물을 획책하고 있는 저 미세한 말씀들, 지금은
알레르기가 종교를 능가하는 시대라서
파멸과 구원이 참으로 용이해졌다
2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니
난 너무 외로워서 아무 병에라도 전염되었으면 하다가
어제는 느지막이 강변에 나가 놀다 들어왔다
니가 돌려보낸 편지봉투 속에 편지지처럼
잘게 찢긴 달빛들이 물결 위로 흐르고
밤하늘에 빼곡하게 뜬 별자리들
그 하나하나에 일일이 귀의하고 싶더라
너를 잊기 위해 나 그간 여러 번 개종하였다
3
아침에 가출한 탕아가
저녁밥 먹으려고 귀가하고 있다
방랑의 증거로 꽃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사막에 나가면 눈이 너무 따끔거려요, 아버지
얘야, 거긴 사막이 아니라 그냥 공원 놀이터란다
어쨌든 내일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요
필요한 것은 단단한 다짐이 아니라 신용카드 몇 장
4
꽃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생의 신비여
십자가 위에서 으아, 기지개 피는 낙담한 신성이여
이제 내 몸엔 구석구석마다 가지각색의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
다들 사소해서 다들 무고하다
아내의 마술 / 심보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 밖에 길을 쏟아 버리자
미망(迷妄)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실향(失鄕) / 심보선
설 전날, 엄마랑 고모랑, 허름한 동네 식당에서 아구찜을 먹다, 남편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이 날을 명절이라 하기에는 처량하도다. 아버지, 하고속으로 부르니 슬픔이 미더덕처럼 터져 맘 한구석이 크게 데이다. 식당안쪽 골방을 보니 말로만 듣던 하우스라, 고향이 철천지 원수가 된 사내들, 거나한 도박판이라, 과묵한 패가망신의 영토라, 그들의 비루한 나날이 고모랑 엄마의 청승과 도무지, 상관 없는 듯도 하고, 있는 듯도 하여라, 생선가시를 퉤퉤, 발라가며 수다꽃을 피우는 두 여인네 사이에, 나는 한 마리 어색한 남정네, 후식이랍시고, 그것도 명절 선심이랍시고, 자판기 커피 홀짝이며, 문틈으로 엿보이는 힘줄 돋은 손아귀들, 휙휙 뒤집혀 착착 붙는 화투패들에게로, 생선뼈처럼 의뭉스런 눈길을 보내네. 밥 다먹고 기억 아득한, 골목길 되짚어 고모댁네 들러, 설 전날이라, 까치설날이라, 명란젖이며, 만두며, 곶감이며, 점점이, 알알이, 주거나 받거니, 엄마랑 고모는 지극한 맛의 꽃패를 마루 위에 펼쳐 보이시네. 바리바리 싸들고 집에 오는 길, 교통방송이 전하는 지혜의 말씀, 고향 가는 길은 돌아가는 길이 없습니다, 직진, 오로지 직진입니다. 엄마랑 나, 직진으로 경부선 타다 판교 인터체인지에서 분당으로 빠지는데, 이것은 영락없는 실향의 길이라, 남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할아버지도 없고, 할머니도 없는, 실향의 나라로, 엄마랑 나는 뛰뛰빵빵 뛰뛰빵빵, 오늘도
내일도, 하염없이 달려가네
심보선
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그리고 컬럼비아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