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문학 기행(1)
-심산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南園 申露雨
글쓰기 토론 모임인 "다섯의 숲" 문우들에게 글감을 찾기
위하여 일탈을 제안했다. '월드컵축구 한국4강 진입' 의 보너스로 얻은 공짜 휴일날 대구교대 문예대학21기 문우이자 서예의 대가이신 深山 선생의 고향인 합천으로 문학 기행을 나섰다.
우리들의 마음은 찌푸린 하늘과는 달리 기대감으로 가슴
가득했다. 차창밖 도로변의 꽃길에 눈길을 빼앗기다 어느새 해인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커다 란 예식장 건물이 나타나자 심산 선생은 여기서 차 한잔하고 가자 권하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에 全紙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힘찬
기개,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한 느낌을 주는 한폭의 王竹 그림이다. 알고 보니 심산 선생의 작품이다. 王竹그림을 20년
간이나 연구한 집념이 대단하신 분이다. 작금에 팔뚝보다
더 큰 대필로 竹을 칠 수 있는 사람은 肯農 임기순 선생과
심산 선생 두 분이라고 하는데 긍농 선생이 몇 년 전에 작고하셨으니 지금은 유일하게 심산 선생 한 분 뿐이라고 한다.
그림에 넋을 놓고 있는데 단아한 모습의 중년 여인이 심산 선생을 반가이 맞았다. 심산 선생과는 서로 말을 트는
소꼽 친구다. 녹차를 주문하고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목단그림을 보노라니 여인이 다가와 자기의 그림이라며 요즘
그림공부에 열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친정아버지가
계명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도예분야의 거목 土偶 김종희 교수라고 소개한다.
녹차를 따른 후에 서책을 한 권 펼쳐놓고 설명을 한다. 심산 선생이 지난해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의 길잡이로 발간하였다는데 글씨가 각체별로 체계적으로 꾸며져 있어 서예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좋은 지침서였다.
3번째 따르는 차맛이 가장 좋다며 친구는 차를 따르며 이야기를 자꾸 하자시데 심산 선생은 갈 길이 바쁘다며 나의
옷소매를 끈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淸園 陶藝院"이다. 화가이자 도예연구가인 청원 선생은 역시 심산 선생의 친구로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중년 남자분이었다. 도자기 전시실에 들어서자
그 화려함에 눈 둘 곳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이곳에서도 심산 선생의 글씨와 그림으로 만들어진 도자기가 눈에 많이
띄었다.
도자기는 굽는 방법이 중요하다 하였는데 초벌구이 온도가 700∼ 800℃, 두벌구이 온도는 자그마치 1,300℃로 도자기에 따라 굽는 온도가 다르며 같은 도자기라도 시간에
따라 온도를 잘 조절해야 좋은 작품이 된다고 한다. 화실에
들러 "다섯의 숲" 문우들의 첫 나들이 기념으로 초벌 구이한 도자기에 심산 선생이 벼랑위에 핀 난초 그림을 그리고
휘호를 하였다. 그 정좌한 모습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서예가로서의 진면모를 느낄 수 있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청원 선생님의 도자기 예술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일어서려는데 "친구 심산과 함께 오신 분들이니 제가 그린 '달마도' 한 점씩을 선물 로 드리겠습니다" 하신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기념 도자기를 잘 구워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심산 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심산 선생의 고향은 합천군 가야면 매화리다. 매화산 자락이 안개속 병풍처럼 둘러쳐진 매화 1리 입구에는 내 키만큼의 자연석에 "매화 1구" 라는 마을표석이 작은 눈을 크게 만들었다. 大筆로 쓴 필체가 예사롭지 않아 누가 썼느냐고 여쭸더니 심산 선생이 빙긋이 웃는다. 마을입구에 다다르자 대여섯 아람은 좋게 될 성싶은 느티나무가 넓은 가슴으로 반갑게 우리들을 보듬어 안았다
심산 선생의 집은 옛날 상머슴 두엇은 부리고 농사를 지었을 가세에 집 뒤는 왕대밭이 감싸고 있어 아늑하였다. 유년시절을 이 대밭 속에서 보냈기에 竹을 신묘하게 그려낼
수 있음을 짐작케 하였다. 마당에서 본 전망은 탁 트여 속이 후련하고 대청 마루는 넓찍하여 여름 낮잠자기에 안성맞춤이다. 대문칸 옆에는 참나리, 원추리가 주인을 잃은채
흐드러 졌는데 수도꼭지에선 물이 졸졸 흐른다. 앞으로 본채만 남기고 사랑채와 문간채, 헛간을 헐어 서실과 글방,
차방을 내어서 심산 선생은 서실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소설을 쓰는 문헌 선생은 글방에서 문우들과 문학을 토론하며 나는 대나무숲과 어우러지는 야생화 정원을 꾸며 노후에 함께 지내보자고 매화산이 울리도록 큰 웃음 터뜨리며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심산 선생이 쓴 비석 몇 점을 보았는데 국한문 혼용의 다양한 서체로 물 흐르듯 써 내려간 글씨들이라 정말 눈을 떼기가 아쉬운 작품들이었다. 특히 매화2리 마을 앞의 愛鄕碑는 烏石으로 그 규모가 3m나 되었다. 하병우 선생이 지은 비문을 국한문을 혼용하여 예서체로 썼는데 총 글자수가 1,120자로 웅혼하고 평화로우며 생동하는 기운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였다. 이렇게 품격을 갖춘 분을 일상에서 쉽게 대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심산 선생은 지금도 4백여명의 제자를 가르치며 하루 2∼3시간의 수면으로 서예, 그림공부는 물론이고 문학공부에
새로 입문하여 詩作을 하고 있으니 예술에 대한 끝없는 집념과 열정은 가히 초인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심산 선생이 공직생활을 하다가 홀연히 옷을 갈아입고 붓을 잡았을 때 가족들의 반대도 컸다고 한다. 서예의 대가가
된 오늘에도 부인께서는 지난 시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니 예술가의 길은 역시 험난하고 외로운가 보다.
그러나 그 고독한 길을 누군가는 걸어 가야만이 도심의 콘크리트 속에 갇혀진 우리네 영혼이 가을 단풍잎 하나를 들고도 인생을 생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대구에 도착하여 칼국수 한 그릇을 나누며 우리는 하루
여정을 접었다.
2002년 8월 9일 토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