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우수작품상
노을꽃이 피는 놀이터
동화∣조희양
“우리 단풍이 철이 왔네. 이 산 저 산 불붙듯 단풍 든 것 좀 보래이.”
할아버지는 먼 산을 둘러보면서 말했어요. 네, 그래요. 내 이름은 홍단풍이에요. 할아버지와 동네 공원으로 놀러가는 중이에요.
“할아버지 계절이기도 하지용. 홍시감!”
내가 장난을 쳐도 할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하셔요. 할아버지 연세는 일흔넷이고 나는 열 살이에요.
할아버지는 작년에 큰 수술을 받았기에 지팡이를 짚고도 잘 못 걸어요. 그래서 학교 갔다 오면 공원으로 산책을 시켜 드려요. 멋지게 표현하자면 ‘할아버지의 보디가드’라고 할까요. 솔직히 처음엔 좀 귀찮았는데 매일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젠 친구처럼 느껴져요.
공원 이름이 ‘와와’랍니다. 마치 놀러오라고 부르는 것 같죠? 그래서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이 공원을 아주 좋아해요. 공원 가운데 놀이터가 있어요. 할아버진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새소리 같다고 해요.
공원 안에는 아담한 정자도 두 개나 있어요. 놀이터를 가운데 두고 연못가에는 할아버지들의 아지트인 정자가 있고, 반대편 풀밭에는 할머니들의 아지트인 정자가 있지요.
할아버지들의 정자는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에서 본 정자와 똑같이 생겼어요. 정자 아래 작은 연못이 있는데, 추운 겨울 빼고는 비단잉어들이 살아요. 대신 할머니들의 정자는 나지막하게 평상 같은 분위기예요.
그런데 이상해요. 두 정자 사이에 있는 놀이터엔 아이들이 노느라 왁자지껄한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울려 놀지 않아요. 언젠가 할아버지한테 물어 봤는데, 노인네들이 점잖지 못하게 어울려 희희낙락하는 건 흉이라고 했어요.
앞으로 두 정자를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헷갈릴 것 같아서 이름을 지었어요. 할아버지들이 노는 정자는 대감정자, 할머니들이 노는 정자는 마님정자. 어때요, 근사하죠?
상수리나무도 노랗게 물들고 있어요. 놀이터엔 여름 때보다 애들이 더 많아요. 시원한 바람이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 두 다리 사이로 통과하기도 해요.
나는 대감정자로 할아버지를 모셔다 드린 뒤에는 나무 의자에 앉아 살구 받기를 해요. 살구놀이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좋아요. 다섯 개 살구를 던져서는 하나 먹고 하나 먹고… 손바닥이 쏙쏙 잘도 받아먹어요.
“단풍아, 이리 온나.”
마님정자에서 할머니가 불러요. 할머니가 찐 고구마를 줬어요.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먹는데, 입안에 달콤함이 번져요. 할머니들은 공원에 올 때마다 맛있는 걸 갖고 와요.
할머니들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커다란 천으로 마님정자를 빙 둘러 바람을 막았어요. 아기가 타는 유모차가 자가용처럼 마님정자 옆에 서 있어요. 할머니들이 큰 벽돌을 태워서는 밀고 다니며 운동하는 거예요.
“너그는 그래도 아직 꽃송이 아이가. 내는 이제 시들 대로 시들었으니 슬슬 준비할란다.”
“성님요, 무신 소릴 그리 하능교?”
준비를 한다는 할머니를 쳐다봤어요. 모인 할머니 중에서 제일로 나이가 많아 보여요. 두 다리를 쭉 펴서는 손으로 쓰윽쓰윽 쓰다듬다 빙그레 웃었는데, 손등에 주름이 얼굴 주름만큼 검고 많았어요.
“느그는 젊으니까 재미나게 연애도 하고 오래오래 살다 온나.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이스께.”
할머니들이 서로 등을 치면서 막 웃어요. 나도 큭큭 웃었어요. 연애는 젊은 언니와 오빠들이 하는 건데.
“성님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조타 카는데 그런 맴 약한 소리 하지 마이소. 말이 씨가 되믄 우짤라꼬.”
꽃무늬 옷을 입은 할머니가 눈가를 닦으며 말했어요.
“씨가 되든 꽃이 되든 이만큼 살았으면 됐제. 자, 노래나 부르자. 노래 부르마 설움도 이자 뿌고 늙어가는 것도 이자 뿌제.”
할머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어요. 입안에는 금니가 쪼그만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어요.
“찌이레 꽃 피는 남쪽 나라 고향엔….”
준비 할머니가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자 둘러앉아 있던 할머니들도 손뼉을 치며 함께 불러요. 눈물을 닦는 할머니도 있고요. 할머니들의 합창이 울려 퍼졌어요. 놀이터에 놀던 아이들이 힐끔 쳐다보곤 다시 노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대감정자 쪽의 할아버지들은 오래오래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고구마는 다 먹었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마룻바닥만 문질러요. 할머니들이 슬픈 노래를 불러서 일어설 수가 없어요.
저쪽에서 할아버지가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는 게 들립니다. 집으로 빨리 가자는 신호예요. 이때다 싶어 둘러앉은 할머니들 쪽으로 절을 꾸벅 하고는 얼른 대감정자 쪽으로 달렸어요.
대감정자에는 할아버지들이 앉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장례식장에서 김씨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데 ‘이젠 내 차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데.”
“사람 가는 데 차례가 어디 있어. 그저 아침에 눈 뜨면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눈 안 뜨이면 그냥 가는 거제.”
할아버지들은 서쪽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어요.
어째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도 뭔가 찝찝해요. 오늘 마님정자랑 대감정자가 짠 것 아닐까요? 낙엽을 몰고 다니는 바람이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속에도 부나 봐요. 아이들은 바람을 잡아 보려고 손을 막 휘젓고 다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바람을 피하고 싶은가 봐요.
“아니, 저 할망구들은 해질녘에 뭔 노래를 저리 불러싸.”
할머니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듣기 좋구만.”
마님정자 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뚱뚱한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마님정자는 맛있는 것도 있고 바람막이를 해서 따뜻한데, 대감정자는 바람벽도 없고 먼지가 구석구석에 쌓였어요. 얼마나 먼지가 많이 쌓였나 하면요, 바람이 어지간히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아요. 먼지도 모이면 무게가 생기나 봐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랑 놀고 싶지요?”
“무,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들이 모두 나를 바라봤어요. 홍시감 할아버지가 그만하라든 듯 눈을 끔벅여요. 그러나 난 못 본 척 말했어요.
“이렇게 하면 어때요?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한테 가서 데이트 신청 하는 거예요.”
“허이구, 그랬다간 드센 할망구들이 우릴 잡아묵을라 할 낀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했잖아요!”
“허허. 홍시감, 이 친구가 야무진 손녀를 두었네.”
“우리 이쁜 단풍이 말대로 한 번 시도해 봐?”
어릴 적에 개구쟁이였을 것 같은 키 작은 할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마님정자로 쳐들어갈 것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부릅뜨자, 할아버지들은 킬킬킬 웃었어요.
그러고도 며칠 지났지만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마님정자를 쳐다만 볼 뿐이에요.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할머니들이 싫어하는데 괜히 말을 걸었다간 소동이 일어나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한테 창피 당할까 봐 망설인다 했어요.
“어른은 용감하지 않나요?”
중얼거리듯 내가 말하자 할아버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어요.
“그거야 젊을 때 말이지. 힘이 빠지고 나면 아이처럼 겁이 많아진단다.”
그런데 다음 날 집에 오니까 할아버지도 지팡이도 없었어요. 내가 집에 오기 전에는 좀체 밖에 안 나가는데 걱정이 되었어요. 숙제는 밤에 하기로 하고 놀이터로 얼른 달려갔어요. 그러고는 깜짝 놀랐어요.
할아버지들이 마님 정자 근처에 자리를 펴곤 장기를 두고 있지 뭐예요. 홍시감 우리 할아버지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장기판을 구경하고 있고요.
“할아버지! 나 학교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왜 먼저 나왔어요?”
“으으응? 단풍아, 이 친구들이 얼른 나오라고 전화를 해서…….”
할아버진 말을 얼버무렸어요. 피! 할머니들하고 놀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하시지.
“단풍아! 니 이리 좀 와 보래이.”
마님정자에서 할머니가 불러요.
“단풍아, 느그 할배한테 좀 물어 보거라. 저 넓은 정자 놔두고 와 우리 옆에 전을 펴 놓고 저러 샀는지.”
할머니들은 별일 다 있다는 듯이 투덜거려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발끝만 쳐다봤어요. 그때였어요. 공이 마님정자 마루에 툭 떨어졌어요. 그러자 고구마가 담긴 대접이 와장창 요란스럽게 엎질러졌어요.
“아이고, 저 영감이 미쳤나! 와 잘 노는 애들 공을 갖고 장난을 치노?”
“젊은 사람들 보마 뭐라 흉을 보겠노. 남사스러워서.”
할머니들은 단단히 별렀나 봐요. 모두들 할아버지들 쪽을 보면서 한마디씩 해요.
남자애가 찬 공이 할아버지들의 장기판으로 떨어지자 그 공을 장난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마님정자 쪽으로 차 버린 거예요. 파란색 운동복을 입은 남자애가 울상을 지은 채 공을 받아갔어요.
할아버지들은 마치 축구 골대에 공을 넣은 것처럼 와하하하 웃어요.
“단풍아, 이 고구마 영감탱이들이 엎었으니 당신네들 드시라 그래라.”
꽃무늬 옷을 입은 할머니가 흩어진 고구마를 주섬주섬 주워 담았어요.
“밉다 카면서 묵을 거는 와 챙기노? 하이고 얄궂제”
노래 잘 부르는 할머니가 입을 삐죽거리자 할머니들 모두 호호호 웃었어요.
할머니들은 참 변덕쟁이예요. 옆에 온 할아버지들이 싫다면서 고구마를 갖다 주라니. 고구마 그릇을 들고 오면서 고구마에 살짝 손을 올려 봤는데 아직 따뜻해요.
할아버지들은 고구마를 맛있게 먹어요. 장기 두는 할아버지는 장기 두랴 고구마 껍질 까랴 바빴어요.
“히야, 고구마가 억수로 다네.”
자꾸만 엷어지는 햇살이 공원을 지나 저 멀리 산 위로 올라가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바람은 더 차가워졌어요. 저쪽 대감정자가 텅 비었어요. 분명히 할아버지들은 내일도 이곳 마님정자 옆에 모여 장기를 두겠죠.
이제 와와공원에는 놀이터가 두 개예요. 바닥이 폭신폭신한 아이들 놀이터도 있고, 잔디가 누렇게 말라 가는 풀밭에 생긴 할머니 할아버지의 놀이터.
이름을 지어 줄까 해요. 뭐라 지을까요? 음…….
아, 저기 산 위로 발갛게 노을이 피고 있어요.
노을꽃이 피는 놀이터!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수상 소감
대단한 '이달의 우수상'
제 붉고 싱싱한 심장이 쿨렁쿨렁 펌프질을 실하게 하더니만 요즘은 신통찮아서 슬펐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한겨울 개구리 찾듯 작품 쓰기에 꾀를 부린 주인하고 함께 놀겠다는 심사인 거죠. 그래도 그렇지. 주먹만 한 것이 주인한테 어디 건방지게.
긴급 처방으로 알코올을 주유하기로 작정하고 소주 한 병과 환타 한 병을 샀습니다. 알코올의 그 지독함을 못 이겨서 소주 반, 환타 반. 거실에 술상을 차려 놓으니 아들 녀석이 술집 지배인처럼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술 마시는 동안 밖에 나가 있겠어!” 2초 정도 아이 눈 들여다보다가 계획 취소. 환타를 소주처럼 마시기.
딸이 소주잔에 환타를 따라 주었습니다. 분위기 돋우느라 개그콘서트 재방송도 틀어 주었습니다. 개그맨들의 발랄한 언어가 제 술상에 튀어 나와서는 제대로 깝쳤습니다. 똘똘똘 환타를 따를 때마다 위로 튀는 탄산처럼 맛 좋은 글을 써야 할 텐데. 저는 빈 보자기처럼 풀풀 웃었습니다.
가짜 술을 마시고도 전 다음 날 뻔뻔스럽게 해장으로 라면을 또 끓여 먹었습니다. 저의 심장이 제대로 위로가 되었나, 젓가락을 든 채로 가슴을 더듬어 보면서. 그때 의사의 왕진 가방처럼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호오, 제가 '이달의 우수상'에 선정되었다고 하네요. 삼만 리 걸어 엄마 찾은 그 녀석처럼 기뻐서 많이 울었습니다. 전날 마신 환타술이 그새 눈물로 만들어졌다니! 일단 제 작품의 부족함은 패스시키고 며칠 동안 기쁨만 누릴랍니다. 건방지게. 부디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훗날 이 상에 대한 감사를 또 말하고 싶습니다.
•약력
1965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2002년 <文學空間> 수필 부문 신인상, 2007년 제35회 창주아동문학상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 2010년 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