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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16.6.1.(수)
2티모 1,1-3.6-12; 마르 12,18-27
중앙 보훈 성당; 이기우 신부
성모성월을 통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돈독히 한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북돋워줄 때를 맞이합니다. 우리의 가톨릭 신앙을 북돋워줄 신심은 다름 아니라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입니다.
때마침 우리 교회가 기리는 성인은 유스티노 순교자입니다. 그는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불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이름 역시 ‘정의로운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죽 정의롭기를 원했으면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아마 그는 사는 동안에 이름 값을 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통해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난 5월 20일 서울 약현 성당에서 다소 특이한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요한 박사 내외의 혼인 백주년 기념미사였습니다. 이 날 미사의 주례는 장면 박사의 셋째 아들 장익 전 춘천교구장 주교께서 맡았고, 장면 박사의 자녀, 손자 등 가족을 포함해 프란치스코 재속회원과 지인 150여 명이 참례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혼인 백주년을 기념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일 듯 합니다. 이 미사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장면 요한과 김옥윤 마리아는 1916년 5월 20일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했습니다. 그게 꼭 백년 전의 일입니다. 장면은 혼인 50주년이 되던 1966년에 김옥윤 여사 몰래 금혼식을 준비했었는데 정작 본인의 병이 깊어져 금혼식을 치루지 못하고 그해 6월 4일 선종했습니다.
셋째 아드님이신 장익 주교는 이 미사를 주례하고나서 회고담을 털어놓기를, “부모님은 반세기 동안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우리 7남매를 참사랑과 삶의 모범으로 길러내셨다”면서 “성실한 신자, 원만한 인격체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부모님의 금혼식 50주년을 뒤늦게나마 기념하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모범적인 혼인생활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괴상한 혼인의 사례를 들어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진리와 세상 이치에 눈 멀었는지를 스스로 폭로하는 사례입니다. 즉,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고 또 죽어서 그 형수와 살고, 이런 식으로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살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괴상한 경우가 과연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오늘 복음에 실제로 나오는 사례입니다. 이들은 과연 그 이야기에 나오는 여인의 인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이나 해 보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바람직한 혼인의 지혜에 대해 물어도 시원찮을 판에 그들은 왜 이렇게 삐딱한 질문 나부랭이를 예수님께 드렸던 것일까요?
그 까닭은 그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셨고, 머지 않아 당신이 그들 사두가이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리라고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 더하기 하나를 겨우 배운 초등학생이 미적분이나 순열 조합, 또는 지수 로그 같은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 형국입니다. 산수의 논리 수준으로는 도저히, 아니 절대로 수학의 방정식을 풀어낼 수 없습니다.
장면 요한과 김윤옥 마리아의 혼인생활은 이미 부활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 백년 후에 자녀들에 의해서 혼인이 기념되면서 부활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자랑할만한, 그리고 후손들이 감사할만한 혼인생활을 그 부부는 해냈습니다. 성 유스티노에 필적할만한 진리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의의 차원에서도 장면 부부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920년대 그 엄한 시절에 가난한 고학생으로서 장면은 미국 대학의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제3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동성학교와 소신학교에서 일반 학생들과 신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3 1 운동 당시 그는 매우 흥분하여 소신학생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했습니다. 그 신학생 중에 노기남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동성학교 교장 시절, 한 고등학생이 백지 답안지를 냈습니다. 그리고 한 귀퉁이에다 이렇게 써버렸습니다.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대답할 것이 없음.” 그 답안지가 썼어야 했던 문제의 답안은 “황국 신민으로서의 각오에 대하여 써라.”였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김수환이었습니다. 장면은 이 사태가 불러올 파장을 염려하여 김수환 학생을 교장실로 불러서 따귀를 때렸습니다. 혼줄을 내야 일본인 교사가 상부에 보고할 때 그 학생을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장면은 노기남 서울대교구장의 강력한 권유로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유엔 대사와 미국 대사로서 동분서주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 초석을 닦았습니다. 사무실도 없고, 승용차도 물론 없었으며, 전화를 받아줄 사무원 하나 없이 맨몸으로, 매일 새벽미사를 거르지 않고, 성모님의 보호를 믿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제치고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받게 하는 데 기적적으로 성공했습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외교가의 불문율이 교황 대사가 상석에 앉고 발언권도 최우선으로 행사합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혁혁한 외교적 성과를 세운 장면은 6 25 전란이 발발했을 때 초대 주미 대사로서 또 한번 공을 세웁니다. 유엔군의 한국 참전을 초스피드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소련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 낸 외교적 기적이었습니다.
정부 수립과 전쟁 정국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장면은 초라한 정치 능력과 부정부패 그리고 6 25 전쟁 발발시 대전으로 도망하면서도 거짓말로 서울 사수, 북진통일을 외친 사기꾼 거짓말쟁이 리승만이 이끄는 세력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3 15 부정 선거로 촉발된 4 19 학생 의거 후 수립된 민주당 정권에서 국무총리로서 정부 수반이 됩니다. 이때 국방부 장관이 장도영이라는 자였습니다. 이 자는 리승만 정권 시절부터 군수 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 국무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첩보를 입수한 장면 국무총리가 확인을 두 세 차례나 했을 때에도 허위 보고를 하다가 5 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혁명 정부 수반을 맡았습니다. 군사반란의 형식상 수괴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5월 16일 아침, 장면이 군사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에 접하고는 미국 대사관에 바로 연락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국무총리 공관은 지금의 조선호텔에 자리잡고 있었고 평시에도 미국 대사관과는 수시로 연락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미국 대사관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장면은 미국 대사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수위조차 일국의 국무총리이며 정부 수반이 직접 문을 두드렸는데도 문을 열어주기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장면의 정의로운 인격이 빛을 발합니다. 아, 대세가 기울어졌구나! 아니, 미국이 군사반란을 지지하는구나! 사실 그 당시 박정희가 김재규, 박종철, 차지철 등과 함께 동원한 병력은 고작 2,700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면의 명령 한 마디면, 송요찬 장군을 비롯한 현역 부대들을 동원해서 간단히 진압할 수 있었고, 실제로 송 장군 등 박정희의 선배 장군들은 장면의 명령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의 전력을 선배들은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일본명으로 다카끼 마사오라고 불리웠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날 아침에도 새벽 3시경에 라이방 썬글라스를 끼고 부하들에게, 일본말로 명령했을 정도였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해방이 되고 일본이 쫓겨가고 미군이 진주했는데도 남로당 간부로서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후 동지들을 밀고한 대가로 풀려난 프락치였습니다. 당연히 박정희의 밀고로 체포된 동지들은 모조리 다 총살되었습니다. 그런 전력을 익히 알고 있던 선배 장군들은 장면의 명령만이 떨어지기만을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면은 기도했습니다. 6 25 전란이 끝난지 8년밖에 되지 않아서, 전쟁으로 비대해진 군병력을 감축해야 하고, 이러자면 군 수뇌부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던 장면은 적군도 아닌 아군끼리의 유혈사태를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사관의 태도를 본 후 차라리 군사반란을 용인하기로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끊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 군사반란 세력들은 장면을 모함했고,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중상하는 것도 모자라서, 장면 수하 부흥부 장관 서랍에 있던 경제개발 계획서를 베껴서 혁명정부의 업적으로 치장했습니다. 이 위장술은 지금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은 장면 연구회의 연구자들이 밝혀낸 진실입니다. 조광 장면 연구회 회장은 이 진실들을 여러 연구자들의 치밀한 연구 분석 결과로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장면 박사의 가족들은 이번 혼인 백주년 미사를 치르면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요 할아버지, 어머니요 할머니의 거룩한 혼인생활만을 기리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오히려 장면의 훈도로 일본 유학에 이어 독일 유학까지 갔다가 주교와 추기경까지 된 김수환이 장면의 시복시성 운동을 제창했을 따름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매도당한 장면의 명예가 아까워서 이렇게 발언할 따름입니다. 장면이 서거했을 때, 신자들은 연도를 바치면서, “장 요한 연령을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장 요한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김수환에 앞서 장면의 가르침을 받았던 노기남의 회고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은 관뚜껑이 닫힌 뒤에 밝혀지는 법, 장면의 진실은 이미 드러났고, 알려지는 일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성심 성월에 장면이 미국 유학 시절에 탐독했고 국내에 재번역하여 소개한 책 하나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이 책은 개신교파가 우세한 미국에서 끊임없이 분파작용을 빚고 있던 차에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과 거룩한 권위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사람들을 특히 개신교 골수 신자들을 가톨릭 교회에로 돌아오게 만든, 세계적인 名著입니다. 우리 본당 사무실에도 가져다 놓았습니다.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이 짓고 장면이 편역한, 가톨릭출판사 간, ‘교부들의 신앙’입니다.
장면의 호는 雲石입니다. 운석의 정치적 명예를 회복하는 데에 이 강론이 요긴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