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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고속버스
이경순
나는 고속버스야.
고속도로를 처음 달리던 날, 얼마나 설렜는지 아니? 바람을 마주하고 쌩쌩 달리던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해.
“어머, 새 차야!”
깨끗한 나를 보고 손님들도 좋아했어. 내가 고속버스란 게 참 뿌듯했어.
굵은 빗줄기가 유리를 후두두 때리던 날이었어. 눈앞이 금세 뿌예졌지. 갑자기 끼어든 승용차 때문에 깜짝 놀라 멈춰 섰어.
“끼익.”
손님들이 앞으로 와락 쏠렸어. 앞차를 박지는 않았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참이나 쓸어내렸어.
친구들에게 얘기하자 한마디씩 했어.
“난 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걸 봤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던데.”
“조심해, 여차하면 박아 버린다니까.”
그때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만 보고 달렸어. 비나 눈이 올 때는 더했어. 달리는 게 더는 신이 나지 않았어.
빨간 등을 켠 차가 ‘삐뽀삐뽀’ 앞질러가던 날이었어.
“사고가 났나 봐!”
사람들이 수런거렸어. 꼼짝 못하고 길에 갇히고 말았지. 따분해서 고속도로 아래로 눈길을 주었어. 노랗게 물든 들판 사이로 굽은 길이 있었어. 승용차 두 대가 마주 보고 달렸지.
마침, 멈춰 섰던 차들이 조금씩 움직여 나도 나아갔어. 조금 뒤에 다시 보니 차들이 보이지 않았어. 좁은 길을 어떻게 비켜났는지 궁금했어.
그날 본 모습이 내 가슴에 오랫동안 남았어. 차가 밀리는 날이면 들판으로 눈길을 주곤 했지. 들판은 볼 때마다 달랐어. 어떤 날은 벼 밑동만 남아 쓸쓸해 보이더니 어떤 땐 물을 잔뜩 담고 구름을 쉬게 했어. 들판을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편안해졌어. 가끔 농로를 달리는 꿈도 꾸었지.
“자, 얼른 타세요.”
아차, 벌써 출발할 시각이야. 그런데 운전석에 앉은 낯선 사람은 항상 나를 모는 최 기사가 아니야.
“최 기사가 급한 일이 생겼어. 오늘은 나하고 달리는 거야. 어때?”
최 기사도 먼지를 닦아주고 나를 아껴 주었지만, 말을 걸어준 적은 없어. 낯설지만, 이 아저씨가 마음에 들어.
한 소녀가 엄마와 함께 타. 검고 두툼한 통을 들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도 타고, 배가 산만한 아줌마도 올라와.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타.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출입문 쪽에 자리 잡아.
“어이, 기다려요.”
출발하려는데 한 아저씨가 허겁지겁 달려와. 아휴 술 냄새. 아저씨는 운전석 뒷자리에 풀썩 앉아.
고속도로 나들목에 들어서면 두 갈래 길이야.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어, 아저씨가 왼쪽으로 가.
“어이, 기사 양반,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누가 소리쳤어.
“아차, 다니던 길에 익숙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저씨는 얼른 회차로로 나를 몰아. 회차로는 고속도로를 잘 못 든 차들이 돌아 나오는 길이야.
“이러다 늦겠어.”
소녀와 나란히 앉은 아줌마가 시계를 자꾸 봐.
“이번엔 꼭 합격해야 하는데…….”
소녀가 엉덩이를 자꾸 들썩거려.
“기사 양반, 바쁜 손님이 있나 보오. 고속도로로 다시 올리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요. 농로로 갑시다. 농로를 빠져나오면 다른 나들목으로 가는 길이 있소.”
출입문 쪽에 앉은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말해.
“농로가 고속도로 나들목과 이어져 있다고요?”
“허허, 길은 길과 이어져 있소.”
아저씨 말에 기사 아저씨는 농로 쪽으로 나를 몰아.
“무슨 고속버스가 농로로 간다고 그래.”
술 냄새 풍기는 아저씨가 일어나 소리쳐.
“그러게. 고속버스가 농로로 가다니 별일이야!”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
“토요일이라 고속도로가 많이 막혀요.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가을 들판을 보고 가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나이 지긋한 아저씨 말에 사람들이 조용해져. 술 냄새 풍기는 아저씨도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앉아.
농로는 고속도로와 달라. 상쾌한 바람에 벼 잎이 사그락대면, 참새가 포르릉 날아올라. 농로 왼쪽 아래엔 논밭이고, 오른쪽 비탈진 언덕 위로는 고속도로야. 비탈엔 쑥부쟁이 꽃이 무리지어 피었어. 억새도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흔들며 서 있어.
저만치 맞은쪽에서 봉고차가 달려와. 이럴 땐 어떡하나 은근히 걱정돼.
봉고차에서 내린 남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다가와.
“이렇게 큰 차가 농로로 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요?”
“미안합니다만, 차를 조금만 뒤로 빼주시면 안 될까요?”
“왜 나더러 비키라는 거요?”
“그쪽 길섶이 넓으니 잠깐 비켜 주시면 빠져나가겠습니다.”
“버스가 들어온 게 잘못이지.”
봉고차 아저씨가 어림없다는 듯 버텨.
“그럼 그렇지. 농로로 간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
술 냄새 풍기는 아저씨가 또 빈정거려.
“아, 아, 배야, 배가 너무 아파요.”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 배가 산만큼 부른 아줌마야.
“봉고차 양반, 조금만 양보해 주시오. 아기 밴 손님이 배가 아프답니다.”
“흥, 그깟 말에 넘어갈 줄 알고?”
봉고차 아저씨는 봉고차에 기대 팔짱을 꼈어.
어쩌지 못해 기사 아저씨가 나를 뒤로 몰아. 길섶 풀밭이 저만치 보여. 나는 조심조심 뒷걸음질 치지만, 좁은 농로에서는 쉽지 않아.
“아이쿠!”
사람들이 왼쪽으로 와락 쏠려. 뒷바퀴가 오른쪽 도랑에 빠진 거야.
“아야야, 아이고 배야.”
새댁이 더 울먹여.
“얼른 119를 불러야겠어요.”
아줌마 옆에 앉았던 대학생이 손 전화를 꺼내.
“농로가 끝나는 큰길에서 기다리라고 하시오. 우리는 내려서 밀어봅시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윗도리를 벗어. 사람들이 조심조심 내려.
힘껏 밀어도 뒷바퀴는 밧줄에 묶인 듯 꿈쩍도 안 해.
“흥, 이럴 줄 알았어.”
술 냄새 풍기는 아저씨는 내리지도 않고 빈정거려.
“아야, 아야, 살려주세요.”
기사 아저씨 이마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해.
“돌멩이를 받치면 어떨까요?”
대학생이 돌멩이를 주워 내 뒷바퀴에 받쳐.
“바퀴야, 힘내라!”
남자아이가 응원해. 나도 바퀴에 끄응 힘을 줘.
“부르르, 부릉부릉…….”
드디어 바퀴가 빠져나와. 나는 조심스럽게 길섶으로 비켜나. 비탈에 핀 쑥부쟁이 꽃이 내 몸을 스쳐. 하얀 억새도.
“이야, 성공이다!”
사람들이 좋아라 뛰어. 봉고차는 기다렸다는 듯 내 곁을 지나가.
“예끼, 인정머리라곤 없는 사람.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러면 못 써.”
사람들 말에 봉고차 아저씨가 미안한지 얼른 지나가.
“햐, 이런 곳에서도 차 두 대가 지나가네!”
“그럼, 서로 양보하면 거뜬하게 지나가지.”
손님들은 웃으면서 땀을 닦아.
차들이 고속도로에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어. 아저씨는 가속 페달을 밟아.
비탈엔 누런 호박이 잎 뒤에 커다란 엉덩이를 숨기고 앉았어. 논두렁을 지나던 할아버지가 목청을 돋워 ‘훠어이, 훠이. 소리쳐. 따라나온 강아지는 오줌을 ‘쉬이’ 싸.
“귀여운 강아지야, 안녕!”
남자 아이가 손을 흔들어.
“새댁, 참을 만해?”
할머니 말에 새댁이 배를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여.
어디선가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소녀가 까만 통에서 꺼낸 물건이 내는 소리야. 벼 이삭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닮았어. 고요하게 흐르는 물소리 같기도 해.
수로에 부리를 박고 있던 백로 한 마리가 날아올라. 잘 익은 콩깍지가 새총 쏘듯 콩을 톡톡 튕겨. 바람이 길에 핀 살살이 꽃을 간질여. 살살이 꽃이 간들간들. 사람들 얼굴엔 어느새 환한 가을 햇살이 머물러.
“오늘 제가 바이올린 대회에 나가야 해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연주를 끝낸 소녀가 인사해. 사람들이 힘차게 손뼉을 쳐.
농로를 나오자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어.
“새댁, 예쁜 아기 낳아요.”
“아이란 쑥쑥 낳아서 호박처럼 뒹굴뒹굴 키워야 하는 거요.”
새댁을 태운 구급차를 보며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자, 이제부터 농로에서 보내버린 시간을 벌어야지.”
아저씨가 가속페달을 밟아. 나도 신이 나서 힘껏 달려.
터미널에 도착하자 술 냄새 풍기는 아저씨가 후다닥 내려.
“오늘 기사 양반 덕에 관광 잘했소.”
내리는 사람들이 인사를 한마디씩 건네.
“얘야, 넌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될 거야.”
소녀가 활짝 웃어.
마지막으로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일어서.
“어르신, 고맙습니다.”
기사 아저씨가 머리 숙여 인사해.
“아니오, 내가 더 고맙구려. 꼭 고향길을 달리는 기분이었다오. 허허.”
어디서 꽃냄새가 나. 길섶에서 스친 쑥부쟁이 꽃냄새가 아직도 내 몸에 향긋하게 남았나 봐. (*)
이경순 :
- 2009 불교신문 신춘문예 ‘특별한 장승’ 동화 당선
(2010년 경남아동문학회 연간집 <세계는 한 지붕>에 수록)